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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검천하-183화 (183/273)

183화 피어나는 전운 (3)

꽉!

미친놈이라고 비웃던 하진건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셨다.

“어? 이거…… 뭐야?”

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하진건은 얼이 빠졌다. 검이 들어오면 피하거나 아니면 검으로 막아야 정상 아닌가? 검을 손으로 잡다니? 그렇다면 손이 남아나지 않아야 정상인데…….

어딜 봐도 손에서 시뻘건 핏물이 흐를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

주석하에게 검을 지른 녀석 또한 같은 표정이었다. 마치 비현실적인 장면을 접한 듯한.

“그만 꺼져라!”

주석하는 검을 밀치며 녀석들을 노려본 후 혼천교도에게 몸을 돌렸다.

흑의인 또한 방금 일어난 사태를 믿지 못하여 약간 혼란스러운 듯했다. 연신 그를 쳐다보며 무엇인가 말하려고 입만 뻐끔거렸다.

“마침 혼천교로 가는 길이었으니 함께 가시죠.”

주석하는 흑의인을 부축하며 등의 상처를 지혈했다.

그 순간이었다.

검으로 공격했던 녀석이 재차 그에게 달려들었다.

“이놈이!”

검에 찔려 죽지 않는 사람은 없다. 눈앞에 주석하의 등이 보이는 순간 공격했던 녀석은 생각나는 게 없었다. 오로지 방금 검이 잡혔던 수치를 만회할 생각만이 머리를 지배했다.

검이 등을 가격하는 순간 주석하의 신형이 빙글 돌았다. 그는 상체를 본능적으로 움직여 검을 피했다. 동시에 손을 뻗어 녀석의 팔을 꽉 잡았다.

“헉!”

공격했던 녀석의 입에서 경악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완전히 성공한 기습이 의외로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남의 목숨을 노리다가 실패하면 책임을 져야 한다. 주석하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 대가로 자신의 목숨도 내놓아야 하는 게 강호의 진리다.

주석하는 뒤로 물러나려는 녀석을 앞으로 끌어당겼다. 완맥을 잡았기에 녀석은 전혀 저항하지 못하고 그에게 중심이 쏠렸다. 녀석의 손에서 검이 떨어졌다.

주석하의 다른 쪽 손이 녀석의 어깨를 잡았다.

“안 돼!”

유비연의 비명이 들려왔으나 주석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의 눈에 어깨를 잡힌 녀석의 당황한 표정이 들어왔다.

으득-

손에 힘을 가하는 순간 녀석의 어깨가 바스러졌다.

“으아악!”

기분 나쁜 소음과 함께 붉은 선혈이 뚝뚝 떨어졌다. 부서진 팔이 축 늘어졌다.

물론 그 정도로 그칠 주석하가 아니었다.

으드득-

가벼운 손놀림에 녀석의 팔이 뽑혀나갔다.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녀석이 주저앉았다. 이미 녀석은 고통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주석하는 비웃음을 머금으며 녀석을 밀쳤다. 녀석이 바닥에 나뒹굴며 괴로움에 몸을 뒤틀었다.

순식간에 발생한 이 사태에 하진건을 비롯한 종남파 제자들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

“사…… 살인마!”

하진건의 입에서 신음이 튀어나오는 순간 주석하는 앞으로 성큼 나셨다. 겁에 질린 종남파의 포위망이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주석하의 입가에 음산한 미소가 드리워지는 순간 유비연이 급하게 앞으로 튀어나왔다.

“안돼요!”

“뭐가?”

“이들을 해치면 안 돼요!”“내가 그냥 당하고 있어야 했다는 거야?”

“그, 그게 아니라…….”

뭔가 말해야겠는데 유비연은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 어떻게 이 싸움을 말려야 할지, 어떻게 종남파 사람을 구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유비연은 말을 못 하고 고개만 저었다.

물론 주석하도 그녀의 마음을 안다. 여기에서 그가 종남파 제자를 해치는 순간 화산파와 혼천교의 싸움 발발의 도화선이 된다는 것을.

그가 한 발 더 앞으로 나아가자 유비연이 검을 빼고 그를 겨눴다. 그녀는 계속 고개만 저었다.

“나를 찌르려고?”

주석하는 무서운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봤다. 유비연이 재차 고개를 저었다.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하진건이 두 사람 사이에 벌어지는 갈등을 묘한 눈초리로 쳐다봤다. 지금 두 사람은 적인 듯 같은 편인 듯 피아 구분이 모호했고 서로 친구인 듯 아닌 듯했으며 심지어 연인 사이인 듯 아닌 듯 혼란스러웠다.

하진건의 안면에 질투의 감정이 피어났다.

보다 못한 도수가 끼어들었다.

“그만 싸우고 가자, 가! 내가 이럴 줄 알고 따라왔거든!“

도수의 너스레에 주석하는 실소를 흘리며 살기를 거두고 흑의인을 부축했다.

“갑시다.”

아무도 그를 막지 못했다. 주석하는 유비연을 쳐다보지 않고 종남파 제자들의 포위망으로 다가갔다.

쿵!

당황한 녀석들이 군말 없이 포위망을 열었다.

주석하는 유유히 흑의인을 부축해서 포위망을 빠져나갔다.

유비연은 멀어지는 주석하와 바닥을 뒹구는 종남파 제자를 번갈아 살피며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녀를 하진건이 쓴웃음을 머금고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저놈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혼천교에 사파인임이 분명했다. 게다가 유비연과 무척 가까운 사이라는 것도. 사파놈이 감히 천상삼화를 마음에 둬?

자신이 유비연 때문에 살았다는 의식은 조금도 없었다.

“네놈을 반드시 죽여주마!”

이 결심이 동료의 치명적인 부상 때문인지 아니면 유비연을 향한 질투 때문인지 그도 알지 못했다.

**

화산파에 도착한 유비연은 곧바로 자하검존의 처소인 정심각으로 갔다.

아쉽게도 정심각은 손님이 점령하고 있었다. 무려 그녀가 감히 우러러볼 수 없는 네 하늘이었다.

정파십존의 일인인 자하검존을 비롯해 화산파 장문인인 북청진인, 공동파 장문인인 태상노군太上老君), 종남파 장문인인 멸사쌍검滅邪雙劍) 네 사람이었다.

유비연은 네 사람의 면면을 보고는 감히 얼굴을 들 수 없었다. 어쩐지 사부가 알현을 허락하더라니.

정작 자하검존은 인자한 얼굴로 유비연을 반겼다.

“돌아왔느냐? 그래, 무슨 일이지?”

자하검존은 마치 운중산에서의 일을 모두 잊어버린 듯했다.

이런 반응이 당연히 외부 손님 때문이란 점을 알지만 유비연은 사부의 환대에 눈이 녹듯 마음이 풀어졌다.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어디까지 보고해야 할지 유비연은 머뭇거렸다.

“괜찮다. 말해 보거라.”

“흑검서생이…… 함께 왔습니다.”

“혼천교에?”

“네.”

유비연은 간략하게 주석하의 동정을 보고했다. 자하검존이 그녀에게 내린 임무가 주석하의 감시였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그렇구나. 알았다.”

자하검존은 인자한 표정을 거두지 않았다. 그는 흰 수염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했다. 돌아가서 푹 쉬어라. 조만간 큰 전쟁이 있을 것이니.”

“하오나…….”

“일단 돌아가거라.”

유비연은 정중하게 허리를 숙인 후 뒷걸음질 치며 밖으로 나왔다.

다시 네 사람만이 남자 정심각 내부에는 무거운 침묵이 드리워졌다.

“예상대로요.”

“상황이 어려워진 것입니까?”

태상노군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구했다.

자하검존이 고개를 저었다.

“꼭 그렇지만은 않소. 어쩌면 오히려 더 나아졌을 수도 있소.”

“그렇다면…….” “흑검서생이 혼군을 돕는다고 특별히 불리하진 않소. 이제 삼파전으로 변했으니…… 우리의 최종 목표는 저들끼리 싸우게 유도하는 것이오.”자하검존이 서탁에 서신 하나를 올렸다.

- 마교칠왕 중원 입성. 일부 화산으로 이동 중. 만사지존.

제갈휘가 보낸 서신에는 놀라운 정보가 적혀 있었다.

“이 기회에 우리는 흑검서생이 마교의 끄나풀인지 아닌지 확인해야 하오. 지금 상황에서 우리가 혼천교와 부딪치면 마교에만 좋은 기회를 제공하게 되는 거요. 그러니 무슨 수를 쓰더라도 혼천교와 마교가 싸우게 하고 우리는 그 틈을 노려야 하오. 이 방법이야말로 차도살인지계이자 이이제이以夷制夷)의 방법이오.”

“그렇습니다. 이번 기회에 혼천교의 씨를 말려야 하지요.”

멸사쌍검이 맞장구를 쳤다.

자하검존은 부드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다만 그의 내심은 태상노군과 멸사쌍검을 비웃고 있었다.

‘흑검서생의 위험성을 모르는구나. 공동파와 종남파를 먹잇감으로 던져 혼천교를 끌어들이고 흑검서생과 마교가 부딪히도록 유도해야 한다.’

자하검존은 운중산 사건을 겪은 후 주석하가 회귀자가 확실하다는 심증을 굳혔다. 계속 강해지는 그의 무공을 보면 확실히 비정상이었다. 다만 여전히 마교, 또는 천마가 주석하가 회귀자임을 알고 있는지, 또 주석하를 교묘하게 이용하고 있는지가 불분명했다.

이번 사태가 마무리되면 이 의문을 풀 수 있을 것이다. 또 계책이 성공한다면 주석하와 마교칠왕을 동시에 제거할 수 있을 것이다. 남은 혼군은…… 변수가 되지 않는다.

이미 자하검존은 주석하의 능력을 혼군보다 위로 평가하고 있었다.

“그래서 말이오, 두 분께서 하셔야 할 일은…….”

자하검존은 고심했던 작전을 내놓았다. 화산파 장문인인 북청진인이 옆에서 거들자 태상노군과 멸사쌍검은 동조할 수밖에 없었다.

**

혼천교의 분위기는 긴장 상태였다.

무려 화산파와 공동파, 종남파의 연합군이 쳐들어온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그러나 겁에 질린 혼천교도는 없었다. 그만큼 그들은 교주인 혼군을 믿었다.

주석하와 도수는 혼천교 내부로 들어가자마자 혼군을 찾았다. 그를 맞이한 사람은 혼군이 아니라 녹윤영이었다.

“주 공자! 도 공자!”

녹윤영의 표정은 천군만마를 맞은 것처럼 밝아졌다.

“와아! 찾아올 줄 몰랐어요!”

“혼천교가 위기라는데 당연히 와야죠.”

주석하의 너스레에 녹윤영이 한껏 웃으며 반응했다.

“난 녹 소저 보러왔지.”

도수가 그녀를 품에 안을 듯 두 팔을 벌리자 녹윤영이 새침하게 콧방귀를 꼈다.

“흥! 장난은! 설마…… 유…… 소협도?”

“네. 유 낭자가 화산파로 간다기에 난 여기로 왔죠.”

“어? 여자인 걸 알았어요?”

녹윤영이 눈이 동그래져서 주석하를 쳐다봤다.

정작 주석하는 그녀가 유비연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에 더 놀랐다. 따지고 보면 화산파가 코앞이니 그녀가 모른다는 게 더 이상하긴 하다.

주석하는 자신을 빼놓고 다른 사람들은 대부분 알고 있었다는 사실에 배신감을 느꼈다. 이거 완전 놀림감이었잖아.

그가 헛웃음을 짓고 있을 때 녹윤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설매검화는 화산파로 돌아갔나요?”

주석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리와 싸우겠데요?”

그 대답은 주석하가 할 수 없었다. 유비연은 결국 그에게 검을 들이댈까. 지금은 운중산 상황과는 또 다르다. 어쩌면 사문의 존망이 걸린 일이기에. 아무리 그녀가 서로 가까운 사이라 해도 평생의 터전인 사문에 비교할 바는 아니다.

서로 검을 겨눠야 하는 곤란한 처지에 주석하는 씁쓸해졌다. 정파, 사파가 뭐라고.

“혼군께선 어디 계시죠?”

“연무실에 계세요. 들어가셔도 돼요.”

일단 혼군을 만나는 일이 급했기에 주석하는 곧바로 연무실을 향했다.

그를 보낸 녹윤영은 도수를 객방으로 안내했다.

오랜만에 찾은 혼천교 연무실은 예전과 다르지 않았다.

석벽으로 둘러싸인 중앙에는 혼군이 가부좌를 틀고 운기조식에 몰두해 있었다.

절정에 이른 혼천신공!

혼군의 주위로 검은 기운이 넘실거렸다. 그 기운을 접하는 순간 주석하의 단전에서도 내력이 깨어나려는 듯 꿈틀거렸다. 주석하는 조용히 내력을 억누르며 미소를 지었다. 이 기운은 원래의 주인이 누구인지 아는 것일까.

마침내 혼군이 눈을 뜨고 주석하를 맞이했다.

“왔느냐?”

“어인 일로 수련을 다 하십니까?”

“무림인에게 무공 연마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을까?”

최정상에 이른 초강고수이면서도 수련을 소홀히 하지 않는 혼군이 존경스러웠다. 그에 비하면 그는 얼떨결에 내공을 얻어 고수가 된 셈이라 조금은 민망했다.

“외부 상황 아십니까?”

“알고 있다.”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혼군의 안면이 차갑게 굳어졌다.

“내 평생 걸어오는 싸움을 거부한 적은 없다. 화산파든, 공동파든 종남파든 무슨 상관인가?”

주석하는 혼군의 당당한 태도에 존경심이 일었다. 그런 자세가 아니었더라면 화산파의 코앞에서 혼천교를 열지 않았을 것이다.

“특히 이 싸움은 정사의 판도에 매우 중요하다. 혼천교가 마다할 수는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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