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검천하-184화 (184/273)

184화 피어나는 전운 (4)

예전에 자하검존을 앞세우고 화산파가 쳐들어왔을 때도 혼군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었다.

당시를 떠올리며 주석하는 혼군과 혼천교가 전쟁에 임하는 자세를 짐작할 수 있었다.

정파 연합에는 자하검존이 있고 그 외에 최정상급 고수로 각파의 장문인을 고려할 수 있다. 물론 그는 장문인들의 진정한 실력을 모른다. 다만 그들의 능력을 정파십존 아래로 예상하기에 혼군에 자신까지 가담하면 절대 밀리지 않으리란 자신감은 있었다.

“뇌군을 만난 일은 대충 들었다만…….”

“제 몸속에 있는 다섯 기운을 모두 운용할 수 있게 됐습니다.”

“오오! 축하하네! 성공했나 보군.”

이는 주석하가 흑도팔군 다섯 사람의 몫을 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물론 흑도팔군 이상의 강자가 존재한다면 그도 장담할 수 없다.

“혼천신공을 운용해 보게.”

난데없는 요구에 주석하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신공을 끌어올렸다. 그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났다. 그는 굳이 기운을 숨기지 않고 확실하게 외부로 드러냈다.

혼군이 심각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관찰했다.

신공의 숙련도를 확인하려는 의도라고 생각한 주석하는 혼군의 내력을 최대한 끌어올려 그 기운을 오른손가락 끝으로 밀어 넣었다.

푸슉-

절정에 이른 혼천십팔지가 펼쳐졌다.

콰앙!

일격을 맞은 석벽이 흔들리고 움푹 팬 지법의 흔적이 남았다. 그 흔적을 과거에 그가 남긴 흔적이나 혼군이 남긴 흔적과 비교했다. 매끈하고 깊게 팬 그 흔적은 과거의 흔적을 오히려 능가했다.

주석하의 혼천신공이 혼군에 밀리지 않는 수준임을 확실하게 드러내는 증거였다.

“핫핫! 대단하군. 예상대로야.”

“예상대로라뇨?”

“자네를 처음 봤을 때 대성할 줄 알았어. 혼천신공 만으로도 나와 비등하니 다른 네 사람의 내공과 무공을 쓸 수 있다면 자네는 이제 천하제일인이겠군.”과연 그럴까? 주석하는 내심 의문을 품었으나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

“그래서 자네는 나를 도와줄 건가? 아니 혼천교를 위해 싸워줄 건가?”

문득 혼군과 맺었던 약속이 떠올랐다. 혼군의 제자는 아니지만 혼천교를 모른 척하지 않겠다고.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당시 혼군은 그의 부탁을 들어준다고 해서 손해 볼 일이 없었다. 대신 그가 성공하면 혼천교의 안전을 보장받게 된다. 무공을 전수하는 일이 쉽지 않지만, 덕분에 혼천교는 든든한 후원자를 얻은 셈이니 절대 손해가 아니다.

과거에는 혼군의 결단이 무척 대단해 보였는데 막상 지금 생각해보니 오히려 자신이 순진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혼군은 그를 호구라 여긴 적이 없겠지만.

“당연히 저는 혼천교를 도울 겁니다. 다만…….”

“왜? 문제가 있나?”

“뇌군의 견해에 따르면…….”

뇌군을 꺼냈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의견을 슬그머니 풀었다. 지금 강호에는 정파와 사파가 곳곳에서 대립하고 있으며 이것은 만사지존 제갈휘의 의도라고. 화산파와 혼천교의 다툼 또한 다르지 않다고.

이러한 다툼은 현재 정사대전에 준하는 수준으로 확대되었고 결국 양 진영 모두 소생하기 힘든 타격을 입을 거라고.

“나는 겁나지 않네. 설사 내가 죽고 혼천교가 멸문하더라도 그 생각은 변함없을 걸세. 내가 약해서 패배한 것이니 누구를 원망하겠나?”

혼군은 혼천교를 일으키면서 계략과 음모에 휘둘리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왔다. 그렇지 않았다면 화산파의 노림수에 오래전에 걸려들었을 것이다.

주석하는 추가 정보를 꺼냈다.

“이것은 단순히 정사대전의 문제가 아닙니다. 정파와 사파가 쇠락하면…… 마교가 들어올 겁니다. 마교의 중원 입성이 시작될 겁니다.”

“마교?”

의외였을까? 혼군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지금 주석하가 이런 경고를 꺼낸 이유는 어떻게든 화산파와 혼천교가 전력을 다해 부딪히는 상황을 피하고자 함이었다. 사파가 이기든 정파가 이기든 마교의 침공을 막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

전생에서 마교를 경험했던 주석하는 정파와 사파가 세력을 보전하기를 원했다. 그래야 마교에 대항할 수 있다. 이런 시기에 화산파와 혼천교의 전쟁은 피해야 한다.

‘유 낭자 때문은 아니야.’

주석하는 내심 유비연을 강하게 부정했다. 물론 그녀에게 칼을 겨눌 수는 없지만 그녀 때문에 화산파나 자하검존에게 자비를 베풀 생각도 없다.

“자네 말대로라면 심각한 일이군. 하지만 나는 음모나 계략 따위를 믿지 않는다. 솔직히 그것 또한 전투의 일부분이기도 하고. 중원이 침탈당하면 슬프겠지만 그 또한 운명 아니겠나? 나는 정파든 마교든 당당하게 맞설 것이다. 잔머리 굴리는 것을 싫어해서 말이지.”혼군이라면 예상한 답이 그대로 나왔다. 혼군은 정파든 마교든 혼천교를 건드리면 그냥 두지 않겠다는 생각이다.

다소 내켜 하지 않는 주석하의 표정을 보고는 혼군이 껄껄 웃었다.

“그게 내 방식이거든.”

혼군은 지금까지 그렇게 이 세상을 살아왔다. 자신의 방식은 중요하다. 그게 바로 그 사람의 자아를 형성하고 자부심의 근간을 이룬다.

‘나는…… 나의 방식이란 뭔가…….’

지금까지 주석하는 자신의 방식이 없었다. 그가 무림을 대하는 태도는 끊임없이 변했고 좋은 말로는 성장했다. 전생부터 현생에 이르기까지.

결심과 달리 그는 주변의 간섭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뇌군이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유비연 또한 마찬가지다. 시간이 흐르면서 정파와 사파, 중원과 마교를 넘어 삶과 죽음을 대하는 생각이 바뀌고 있다.

그게 좋은 일인지 모르지만 한편으로는…….

어쩌면 이런 사상 문제는 영원히 해답을 얻지 못할지 모른다.

“알겠습니다.”

주석하는 꾸벅 인사했다.

혼군이 웃으며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너무 고민하지 말게. 운명이란 하늘이 정하는 것 아니던가. 우리는 우리 식대로 살면 되는 거지. 설사 중원이 폭삭 망한다 하더라도 아무도 자네에게 책임을 묻지 않을 걸세.”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

불과 사흘 뒤, 화산파에서 정식 선전포고가 전해졌다.

지난번처럼 혼천교 앞으로 몰려온 정파 연합군은 혼천교를 곧 무너트릴 것처럼 위협했다. 그들은 한차례 가벼운 교전을 벌인 후 교섭을 요구했다.

주석하는 혼군과 함께 정문에서 그들을 맞이했다.

“혼천교는 그간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죄하라. 십 년의 봉문을 받아들이면 혼천교를 건드리지 않겠다!”

수용할 수 없는 요구를 내놓은 사람은 화산파의 북청진인이었다.

주석하는 협상을 주도하는 네 인물의 면면을 확인했다. 화산파 장문인은 예전에 본 적이 있어 낯이 익었고 자하검존은 당연히 안다. 남은 두 인물은 누가 누구인지는 모르나 공동파와 종남파 장문인이라고 추측했다.

과연 그들의 기세는 대단했다.

다만 혼군은 눈도 꿈적하지 않았다.

“무슨 개소리냐?”

혼군의 한 방에 자하검존을 비롯한 모두의 안면이 일그러졌다.

“과연 오만하구나. 멸문을 재촉하는군!”

자하검존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렇게 의미 없는 말다툼이 한차례 휩쓸고 지나가고 문하 제자들은 지원하느라 함성을 연발했다.

주석하는 자신을 노려보는 자하검존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속으로 비웃음을 삼켰다. 지금 자하검존은 전쟁의 결과와 득실을 예측하느라 머리가 아플 것이다.

당연히 주석하가 말다툼에 나설 일은 없기에 그는 연합 진영을 둘러보며 아는 얼굴을 찾았다. 안타깝게도 그는 유비연을 찾을 수 없었다.

‘자하검존에게 질책을 받았나?’

다소 염려되는 마음을 그는 애써 무시했다. 대신에 그를 비웃는 한 시선을 발견했다. 바로 종남파의 하진건이다.

마침 하진건도 그를 발견한 듯 그에게 주먹을 먹이면서 입으로 소리 없이 뭔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무슨 욕을 하는지 눈에 훤히 보였다.

그날은 겁에 질려 꼼짝 못 하더니 이제는 아군이 많다고 날뛰는 꼴이 우스웠다.

‘네놈은 걸리면 그날로 사망이다.’

주석하는 조용히 살생부에 이름을 적었다.

당연히 협상은 무용지물이었고 정파 연합군은 본래의 목적인 선전포고를 완료했다. 물론 그들의 다른 목적에는 연합군의 면면을 드러내 상대를 압박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그만큼 겉으로 드러난 숫자는 많았다.

물론 주석하나 혼군은 이런 겉보기에 전혀 위축되지 않지만 일반 교도들은 다를 것이다.

“으하하! 잘 생각해보시오. 만일 닷새 후까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당일 정오에 우리는 전쟁을 시작할 것이오!” 세 문파의 수장 격인 북청진인의 선언으로 협상은 결렬됐다. 사실상 협상이라 할 것도 없었다.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을 내걸고 일방적인 강요로 점철되었으니까.

연합군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혼천교도들은 분통을 터트리며 상대를 비난했다. 이래저래 어수선한 선전포고가 지나갔다.

정작 혼군은 정파의 의례적인 행위로 받아들여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

화산파, 공동파, 종남파의 침입이 예고된 바로 전날 밤, 주석하는 혼천교 객방에서 잠을 보채고 있었다. 내일 벌어질 일을 생각하니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계속 뒹굴다 보니 벌써 삼경이 훌쩍 넘었다. 숫자를 세고, 천자문에 사서삼경까지 외우기를 여러 번. 평소 불면증을 해소하던 만병통치약이 하나도 듣지 않았다.

아무리 눈을 감으려 해도 눈꺼풀이 천장에 붙은 듯 감기지 않았다.

“하아! 불면의 밤이구나. 도수는 뭐하나?”

그는 옆방을 잠시 노려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일도 아니고 혼천교 일인데 왜 긴장이 폭발하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예전에 하북팽가에서 흑검문을 공격한다고 했을 때도 이렇지는 않았었는데. 하긴 그때는 전날 밤에 상대를 습격했으니 불면이고 말고 할 일도 없었지만.

혼군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나?

만일 그가 혼군이라면 정파 연합의 공격을 앉아서 방어하지 않고 그때처럼 선제공격으로 타격할 텐데.

별별 생각이 머릿속을 어지럽혀 더욱 잠이 달아났다.

어쩔 수 없이 주석하는 벌떡 침상에서 일어나 앉았다. 잠을 잘 방법이 뭘까? 고민, 고민하던 그는 결국 호흡을 가다듬었다.

문득 좋은 생각이 났다. 이럴 때 그게 있다. 바로 만리안석이다.

우설금을 본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녀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마교로 돌아갔으니까 편하게 잠이 들었을 시간이다.

“자는 모습만 딱 봐야지.”

그녀의 모습을 보면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주석하는 만리안석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내력을 주입했다.

신비로운 파란색이 영롱하게 빛나고 점차 구슬 내부가 하얗게 변하더니 장면이 어리기 시작했다.

우설금의 모습이 점차 뚜렷해졌다.

그녀가 침상에 누워 잠이 들었으리라 생각했는데…… 어?

우설금이 눈을 부릅뜨고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이 밤에 대체 뭐 하는 거지?”

혼자인 듯하고 야산으로 보였다. 아무리 봐도 이 밤에 여인 혼자 돌아다닐 곳은 아닌 듯한데…….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보고 싶은 그녀를 보니 이제는 그녀가 걱정됐다.

얼핏 그녀의 뒤로 어둠 속에서 야산의 풍경이 지나갔다.

“어?”

뭔가 익숙한 게 지나갔다. 그도 가본 적이 있는 곳 같긴 한데 어디인지 금방 생각나지 않았다.

주석하는 손 위에 올려놓은 만리안석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지금 우설금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 걸까?

그는 우설금을 떠올리며 배경 풍경에 시선을 집중했다.

그때였다.

쾅!

방문이 벌컥 열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