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검천하-185화 (185/273)

185화 혼군과 우설금 (1)

기겁한 주석하는 재빨리 만리안석을 손으로 덮어 숨기고 방문을 쳐다봤다.

녹윤영이 흥분한 얼굴로 서 있었다.

“어? 안 잤어요?”

간신히 태연을 가장한 주석하는 그녀의 기분이 정상이 아님을 알아챘다.

심각한 표정으로 그를 쓱 훑어보던 녹윤영이 방안으로 들어왔다. 이 야심한 시각에 젊은 여인이 남자 홀로 있는 방에 쳐들어왔으니 대체 무슨 일일까.

“잠은…….”

말끝을 흐리면서 녹윤영이 주석하의 손을 노려봤다.

‘들켰나?’

주석하가 당황하는 사이 녹윤영이 손을 내밀었다.

“그거 뭐예요?”

만리안석을 봤나 보다. 주석하는 어쩔 수 없이 손을 폈다. 이제는 다소 옅어진 푸른색을 띠는 만리안석이 은은한 빛을 뿜고 있었다. 우설금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우와!”

녹윤영이 탄성을 발하며 만리안석을 빼앗았다. 하긴 평소의 만리안석은 여인이라면 누구나 혹할 만큼 아름다운 광채를 뿌리는 보석이다. 그 특수한 능력이 아니라도 가지고 싶을 만큼. 이런 보석에 무덤덤한 우설금이 오히려 이상한 여자다.

예쁜 장난감을 만난 듯 녹윤영이 요리조리 살피면서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으, 달라고 하면 큰일인데…….’

녹윤영이 뭐라고 말하기 전에 주석하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녹 소저, 무슨 일 있어요? 이 밤에 갑자기…….”

“아!”

그제야 생각난 듯 녹윤영이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하, 할아버지가 사라졌어요!”

“네?”

혼군이 사라지다니? 대체 무슨 일이지? 영문을 모른 주석하가 멀뚱거리고 있자니 녹윤영이 다시 설명했다.

“혼천교 주요 무력과 함께 사라졌어요!”

혼천교에는 장로를 비롯하여 핵심 고수가 대략 오십여 명이 있다. 이들이 혼천교를 지탱하는 주요 인물로 무림 어디에 내놓아도 절대 밀리지 않을 고수다. 이들이 사라졌다는 것은…….

“설마? 화산파를 기습하는 작전?”

“그런 것 같아요. 저한테도 비밀로 하고…….”

금방 주석하도 전후 사정을 파악했다.

혼천교 단독으로는 화산파, 공동파, 종남파 연합군을 상대할 방법이 없다. 내일 정오가 되어 전면전이 일어나면 특별한 이변이 발생하지 않는 한 혼천교는 전세를 역전하기 어렵다.

최강고수 집단에서도 밀리고 그 아래에서는 더욱 균형이 맞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혼군은 승리할 방법을 고민했을 것이다. 며칠 전 몰려온 연합군 면모를 본 후 더욱 절실해졌겠지. 주석하도 예상했듯이 이럴 때는 기습이 최고의 수단이다.

오늘 밤은 마지막 기회다. 적어도 그들이 쳐들어오는 것보다 이쪽에서 쳐들어가는 것이 훨씬 낫다. 공격이 최고의 방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무엇보다 혼천교의 무공이 낮은 하수들을 보호할 수 있다.

“언제 떠난 건가요?”

“모르겠어요. 지금쯤 화산파를 치고 있지 않을까요?”

동이 트기 전까지 화산파를 치고 빠져나오는 작전이다. 어느 정도 성과만 거둔다면 내일 적의 출병을 막을 수 있어 최상의 결과를 끌어낼 수 있다.

“자칫 계란으로 바위 치기가 될 수도…….”

“그러니까요! 저도 여기에서 편히 있을 수 없어요!”

녹윤영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 교의 명운이 걸려 있고 할아버지가 위험에 처해 있는데 이곳에서 홀로 편히 잠잘 수는 없다. 그녀도 화산파로 달려가서 손을 거들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주석하는 혼군이 녹윤영을 남긴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녹윤영은 혼천교의 미래다. 게다가 아직 무공이 강하지 않다. 설사 혼군이 죽더라도 녹윤영이 무사하면 혼천교는 명맥을 이어갈 수 있다.

녹윤영이 전쟁에 뛰어들어 무의미한 죽음을 택하는 것보다 이곳에 남아 혼천교 제자를 추스르고 기다리면서 훗날을 도모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그대가 이곳에 남기를 원했을 겁니다. 여기에서 할 일이 많아요.”

“알아요. 하지만…….”

녹윤영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파랗게 질린 다급한 얼굴에서 주석하는 그녀의 고통을 읽었다.

혼군은 오늘 기습의 판세를 어떻게 보았을까.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고 여겼을 가능성도 적잖게 존재한다. 혼군의 성격이라면…… 임전무퇴의 자세로 전쟁에 임했겠지.

혼군의 비장한 결의를 보는 것 같아 주석하는 가슴이 싸했다. 혼군을 떠올리니 그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무리 기습이라지만 혼군 혼자서는 적을 감당할 수 없다.

“제가 가보겠습니다.”

“저도 갈래요.”

“오늘은 참아요. 대신에 제가 가서 두 사람 몫을 할게요.”

주석하는 녹윤영을 달랬다. 백번 생각해도 그녀가 이곳에 있는 게 더 편하다.

어쩔 수 없이 녹윤영이 한발 물러났다.

“그럼 도 공자라도 데려가요!”

“어휴, 그 자식이 도움이 될까요?”

녹윤영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혼군의 안위는 제가 챙길게요.”

주석하를 믿기에 녹윤영은 한결 마음을 놓았다. 그녀는 혼군과 주석하의 조합이라면 자하검존과 각파 장문인의 합공을 충분히 깰 수 있다고 믿었다.

녹윤영이 만리안석을 돌려줬다.

“이건 나중에 다시 보여줘요.”

당연히 그녀는 만리안석인지 모른다. 단지 예쁘고 신기한 구슬이라 여겼다.

주석하는 품속에 갈무리한 후 밖으로 나왔다.

녹윤영이 손을 흔들며 그를 배웅했다.

달빛조차 없는 칠흑 같은 어둠이 그가 사라진 공간을 가득 채웠다.

**

화산파 입구는 예전에 와본 적이 있기에 길을 잃을 염려는 없었다.

경신법을 이용해서 전력으로 질주한 주석하는 오래지 않아 입구에 도착했다.

어둠 속에서 기암괴석이 삐죽삐죽 솟은 화산이 괴기스럽게 보였다.

“으음?”

주변이 의외로 고요해서 당황했다.

적어도 혼천교와 화산파가 싸웠다면 시신으로 산을 쌓고 피로 강을 만들어야 하지 않나? 그런데 정작 주위는 평소와 큰 차이가 없었다. 고요한 밤이었다.

“녹 소저가 잘못 알았나?”

입구에서는 확인이 어려웠기에 주석하는 산길을 올라갔다.

얼마 걸리지 않아 화산파의 여러 건물이 하나둘씩 보였다. 그제야 주석하는 이곳이 전쟁 중임을 알리는 흔적을 발견했다.

손님들이 머무르는 객방일 것이다. 쓰러져서 신음을 토하거나 이미 죽은 사람들이 곳곳에 널려 있었다. 온통 피투성이였고 객방 또한 일부 부서져 있었다.

평소 상상했던 전쟁의 참상이 눈앞을 채웠다. 지금 그의 앞에는 멀쩡한 사람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쓰러진 사람 대부분은 혼천교가 아닌 정파 연합 쪽이었다. 이 정도 전과라면 압도적이라 평가할 만했다.

멀리서 병장기 소리와 고함이 들려왔다. 산의 계곡을 타고 은은하게 전달되는 소리였다.

역시 녹윤영의 추측대로 혼군이 정예를 끌고 와서 화산파를 기습한 것이 확실했다.

“정말 제대로 엄선한 고수만 데려온 건가?”

아무리 기습이라지만 너무 일방적인 승리는 어딘지 모르게 이상하다. 한창 싸움이 벌어진 위쪽 상황이 궁금했다.

그가 막 몸을 날리려는 순간 붉은 인영이 가로막았다.

“멈춰요!”

“헉!”

주석하는 나타난 사람을 확인하고 경악해서 몸이 굳었다.

우설금이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제야 주석하는 만리안석으로 보았던 우설금을 다시 떠올렸다. 그녀의 뒤로 보였던 익숙한 배경은 야밤의 화산이었다. 화산의 풍경이 워낙 특이해서 그의 눈에 띈 것이다. 다만 낮이었다면 확실하게 알아보았을 텐데 밤이어서 금방 깨닫지 못했다.

우설금이 화산파에 무슨 일로 온 건가? 풀 수 없는 의문 속에 주석하는 우설금을 반겼다.

“여기 무슨 일이에요?”

“싸움에 개입하지 말아요.”

“네?”

우설금이 혼천교와 화산파의 싸움을 어떻게 안단 말인가. 우설금이 지금 있어야 할 곳은 멀고 먼 십만대산이다. 그녀가 이곳에 등장했다는 것은…….

갑자기 두려운 생각이 든 주석하는 우설금과 찬찬히 시선을 맞췄다. 그녀 역시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설마…….”

우설금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 마음이 통했다. 그는 우설금에게 마교가 개입했느냐고 물었고 우설금은 그렇다고 대답한 셈이다.

마교가 왜 개입하지?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건가.

주석하는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재빨리 정리했다.

결론은 하나였다. 드디어 천마는 정파와 사파 양쪽 모두 세력이 약화했다고 판단하고 중원 침공을 시작한 것이다.

그의 의문을 풀어주려는 듯 우설금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마교의 주력 부대가 중원으로 들어왔어요. 현재 사천의 곤륜파를 멸문하고 있을 거예요. 며칠 후면 부근의 아미파와 청성파 또한 같은 운명을 걷게 되겠죠.”

“아!”

전생의 참상이 떠올라 주석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전생에서도 비슷한 방식으로 흘러갔었다. 그때도 마교의 침공을 정파든 사파든 전혀 막지 못했다. 심지어 마교와 맞섰던 유명 고수들은 모두 죽거나 실종됐다.

그렇게 한차례 초토화된 후에야 중원에서는 정사 연합군을 결성하고 십만대산으로 쳐들어갔다. 주석하는 그때 칼받이가 되어 십만대산에서 장렬하게 전사했다.

이번에도 역사의 흐름은 바뀌지 않고 그때처럼 흘러가는가.

사천이 불바다가 되고 있다니 가장 먼저 흑검문의 가족이 염려됐다.

그의 내심을 뚫어본 듯 우설금이 조용히 속삭였다.

“흑검문은 영향 없을 거예요. 덕양은 작아서…… 마교가 신경 쓸 여력이 없어요.”

한편으로는 슬프면서도 한편으로는 다행이다.

주석하의 고민은 다시 현실의 이곳으로 넘어왔다.

“그런데 우 소저께선 왜 이곳에 왔어요?”

“지금 마교칠왕이 올 거예요. 모두 두 사람, 천력마부와 파천혈옹! 그들은 자하검존과 혼군을 노리고 있어요.”

마교의 노림수는 정파와 사파 모두를 무력화하는 것이다.

상황이 매우 나빴다. 마교칠왕의 무공 수준은 그도 모른다. 다만 적어도 정파십존이나 흑도팔군에 뒤지지 않으리란 예상을 한다. 그런 인물이 둘이나 등장해서 혼군을 합공한다면, 또는 자하검존을 친다면 버틸 재간이 없다.

혼군과 자하검존이 마교 앞이라고 서로 연합할 리 없으니 그 결과는 필연이다. 이번 전투에서 화산파가 승리하든 혼천교가 승리하든 모두 살아남을 수 없다.

“하아!”

한숨이 쏟아졌다.

“천력마부는 예전에 제갈세가에서 자하검존과 창궁무존의 합공을 깬 사람이에요.”

젠장! 마교칠왕의 능력이 정파십존보다 우위에 있다는 말이 아닌가. 그런 인물이 무려 둘이라면…… 그도 감당하기 쉽지 않다.

“그런데 나보고 개입하지 말라는 이유는요?”

“천력마부와 파천혈옹은 정파와 사파 가운데 우세를 점한 쪽을 먼저 칠 거예요. 즉 이 싸움에서 승리할수록 빨리 죽는다는 뜻이죠.”

그렇다면 오늘 죽거나 아니면 내일 죽거나의 문제가 아닌가. 전혀 도움 되는 말이 아니었다.

주석하는 화산 봉우리 정상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 저곳에서 혼군이 이끄는 선발대가 화산파, 공동파, 종남파를 맞아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전투가 끝나면 더 큰 적인 마교가 기다리고 있다.

우설금은 그에게 마교칠왕을 적대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그를 잘못 본 것이다. 그는 화산파와 혼천교 싸움의 결과에 관심이 없다. 그의 목적은 혼군의 안전이다. 혼천교는 그다음 문제다. 자하검존을 반드시 죽이겠다는 생각도 없다.

문득 유비연이 떠올랐다. 그녀는 지금 무사할까?

어쨌든 그는 지금 혼군을 확인해야만 한다.

“나는 그럴 수 없어요.”

주석하의 당당한 선언에 우설금이 움찔했다.

“그대의 염려는 고맙지만……. 나는 혼군을 홀로 내버려 둘 수 없어요.”

“혼군은 무사하지 못해요!”

“그러니까…….”

순간 저편에서 강력한 강기의 폭풍이 몰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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