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마교칠왕 (1)
화산 남봉에서 남으로 이십여 리 떨어진 화진계곡.
그 중턱에서 자하검존의 시선은 화산파가 위치한 화산 남봉을 향해 있었다. 집을 버리고 객지에 나온 사람처럼, 문파의 본산을 버리고 인근에서 노숙하고 있으니 그는 착잡함을 금할 길이 없었다.
“이 전쟁이 어떻게 끝날까…… 하필이면 마교가 개입하다니.”
제갈휘의 계략으로 혼천교와 화산파의 전쟁을 구상할 때만 해도 완승할 자신이 있었다. 혼천교가 대단하다지만 화산파, 공동파, 종남파 연합군을 상대할 전력은 아니다.
게다가 그는 혼군을 제압할 충분한 자신감이 있었다. 모든 면에서 혼천교는 화산파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그랬던 전쟁이 시작부터 엉켰다.
제갈휘는 마교의 의도를 정확히 꿰뚫고 그에게 조언했다.
이번 싸움에서는 튀면 마교의 먹잇감이 된다. 마교의 주력이 아닌 마교칠왕 두 사람이 왔다. 정사 공멸을 원하는 그들은 더 강한 쪽을 노린다. 강한 쪽을 무너트려 중원의 갈등을 지속하고 세력균형을 도모하기 위해서다.
예정대로 화산파가 혼천교에 승리하면 마교칠왕은 그와 각파 장문인을 칠 것이다. 이런 상황은 피해야 한다.
그 방법은 먼저 혼천교에 승리를 안겨주는 것이다. 마교칠왕은 혼천교가 더 강하다고 착각하여 혼군을 칠 것이다. 설사 마교가 혼군을 치지 않아도 상관없다. 혼천교의 승리는 적에게 방심을 불러올 테니까.
그동안 정파가 입은 피해는 실질 전력 면에서 크지 않다. 다만…….
“무슨 생각 하시오?”
뒤에서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들렸다. 공동파 장문인인 태상노군이다.
“남은 제자들이 걱정되어서 말입니다.”
자하검존은 다소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혼천교가 쳐들어왔을까요?”
“그렇습니다. 전령이 혼천교의 야반기습을 알려왔습니다. 예상대로라면 우리 측 인명 피해가 제법 될 겁니다. 제자들의 희생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됩니다.”자하검존은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태상노군의 안면을 살폈다. 당연히 태상노군의 표정도 밝지 않다.
“제자를 아끼는 검존의 마음을 저도 잘 압니다.” 태상노군도 착잡한 마음을 아낌없이 표현했다.
지금 화산파에 남은 제자들은 각 문파의 가장 막내 제자들이다. 무공에 입문한 지 그리 오래지 않아 사실상 전력감이 될 수 없는 자들이다. 그런 막내를 혼천교를 유인하는 희생물로 던져두었다.
그들의 희생이 안타깝지만 대의를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다. 그들이 죽고 혼천교가 기세를 떨치면 마교가 개입할 것이다.
“지금 이곳의 사기는 어떻습니까?”
자하검존의 질문을 어둠 속에서 등장한 두 사람이 받았다. 화산파 장문인인 북청진인과 종남파 장문인인 멸사쌍검이었다.
“아직은 별다른 동태가 없지요. 지금 상황을 전혀 모르니까요. 단지 혼천교를 치기 위해 이곳에 잠복했다고 생각하니 말입니다. 내일 쑥대밭이 된 화산파를 알려주면 모두 적개심이 불타오를 겁니다.”멸사쌍검의 설명에 자하검존은 내심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정파가 장악한 중원 무림의 평화는 공짜로 얻어지지 않는다. 그 이면에는 무수한 사람의 희생이 필요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자하검존은 조금의 망설임 없이 작전을 실행할 수 있었다.
“그런데…… 마교의 동태는 어떻습니까?”
북청진인이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자하검존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마교칠왕 뒤에서 움직임을 파악하던 정보원에게서 소식이 끊어졌다. 정확히 어제부터. 무슨 일이 발생한 것 같은데 현재로서는 파악할 방법이 없다. 그렇다고 작전을 그만둘 수도 없고. 어차피 정보원이 어떻게 되었든 큰 변수는 아니다.
“지금 당장은 파악이 되지 않소.”
“그들이 제대로 미끼를 물어야 할 텐데요.”
“마교칠왕은 우리 아니면 혼천교 둘 중 하나를 노리고 있소. 당장은 우리가 약해 보일 테니…… 혼천교를 먼저 손대겠지요.”
자하검존은 나름 확신해서 말했다.
다시 그의 시선이 멀리 화산 남봉으로 향했다.
무슨 상관일까. 지금 이곳에 있는 전력만으로도 혼천교를 도모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설사 마교가 예상과 달리 이쪽을 먼저 공격하면…… 친히 마교를 상대할 것이다. 마교의 주력도 아닌 마교칠왕 둘이라면 여기 네 사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자하검존은 정파십존다운 자신감을 드러내고 기세를 뿜어냈다.
최근에 다소 흔들리긴 했으나 정파는 아직 건재하다. 무림맹주인 무극천존과 만사지존, 그리고 검존인 자신이 있다면 사파든 마교든 충분히 해치울 수 있다.
“정파는…… 이 어려움을 헤쳐 갈 것이다!”
자하검존이 주먹을 불끈 쥐는 순간이었다.
“크흐흐흐, 과연 그럴까?”
음산한 비웃음이 사방을 메아리쳤다.
자하검존을 비롯하여 다른 세 장문인 모두 안색이 변해 두리번거렸다.
어둠 속에서 두 인물이 접근하고 있었다. 마치 암흑을 뚫고 나오는 사람처럼 두 사람의 존재감은 놀라웠다. 주변 모든 공간을 장악하며 타인을 짓누르고 있었다. 거기에서 피어오르는 사이한 기운은…….
“마교다!”
자하검존의 외침을 암흑 속의 두 인물이 되받았다.
“크흐흐흐. 정확하게는 마교칠왕이지. 더 정확하게는…….”
어둠 속의 두 인물이 모습을 드러내며 스스로 소개했다.
“천력마부와 파천혈옹이다.”
짙은 청의를 입은 중년인이 어깨에 무시무시한 도끼 두 자루를 엇갈리게 매고 있었다. 그 도끼는 실로 묵직하고 날카로워 보는 이를 섬뜩하게 했다. 도끼날에 비친 별빛이 괴이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 옆의 인물은 온 얼굴이 주름으로 덮인 늙은이였다. 짙은 적의를 걸치고 어깨에는 낭창낭창한 조간釣竿)을 맸다. 조간의 끝에는 얇고 투명한 은사가 치렁치렁 걸려 있고 그 끝에는 날카로운 바늘이 매달려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여느 강태공과 다르지 않았다.
자하검존은 천력마부를 눈에 담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예전에 제갈세가에서 손을 섞은 적이 있는 놈이다. 그때 창궁무존과 그가 합공했으나 유유히 빠져나갔었다. 물론 상춘원 음모에 신경 쓰느라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지만, 놈의 무공은 만만치 않았었다.
“천력마부? 파천혈옹?” “중원에 들어왔으니 정식으로 인사하지. 크흐흐흐.”
천력마부와 파천혈옹이 거리낌 없이 자하검존을 비롯한 장문인 네 사람의 사이로 들어왔다. 자연스럽게 포위망에 갇힌 꼴이었다.
‘자신 있다는 뜻인가…….’
자하검존은 동료의 반응을 살폈다. 당연히 북청진인 등은 마교칠왕을 상대한 적이 없기에 하룻강아지를 대하는 태도였다. 아무리 강해도 여기 네 사람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자부심이 엿보였다.
상식으로 판단하면 당연하다. 과거에 천력마부의 괴력을 경험했던 자하검존도 비슷한 시각이 남아 있으니까. 하지만 내심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마교칠왕이 왜 여기에?”
“혼군보다 네놈 넷이 더 강하니까.”
천력마부의 대답은 간결했다.
자하검존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지금 화산파가 혼천교에 의해 쑥밭이 되고 있고 우리는 이곳으로 피신했는데?”“흐흐, 그대의 간악한 간계를 모를 줄 알았더냐?”
천력마부가 비웃음을 터트렸다.
자하검존은 혼란을 유도하려던 작전이 무용지물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물론 타격이랄 것도 없었다.
“혼군보다 우리가 더 강하다고 평가해주니 고맙군.”
“크흐흐흐. 그 강함이 오늘 밤을 기점으로 사라질 것이다.”
“갈! 감히 누구 면전에서!”
멸사쌍검이 허리춤에서 쌍검을 꺼냈다. 그는 오른손과 왼손에 각각 장검을 들고 천력마부를 향해 폭주했다.
“호오! 네놈도 양손잡이냐?”
천력마부는 순식간에 어깨의 두 도끼를 양손에 잡고 찔러오는 두 장검을 동시에 막았다.
채챙!
양손에 무기를 쥐고 싸우는 무림인은 흔치 않다. 그만큼 한 손에 비해 효율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천력마부와 멸사쌍검은 두 손을 모두 사용했다. 그들은 서로에게 진한 호승심을 표출했다.
“흐흐, 우리도 슬슬 시작해볼까?”
파천혈옹이 조간을 손에 쥐고 은사를 길게 드리웠다.
특이한 무기다. 하지만 자하검존이나 다른 장문인들이 두려워할 리가 없다.
“감히 허락 없이 중원에 입성한 네놈들을 처리해주마!”
자하검존도 분노를 터트리며 검을 뽑았다.
어둠 속에서 경천동지할 일대 격전이 시작됐다. 중원과 마교의 운명을 결정할 중요한 한판이었다.
콰쾅!
**
밤길을 헤치고 목적지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거대한 화산의 덩치를 간과한 대가는 컸다. 화산이 익숙하다고 착각해서 방향만 잡고 화진계곡을 찾아 나섰다가 밤길을 헤매기를 몇 시진째.
“젠장!”
역시 사람은 건방지게 굴면 호되게 당하는 법이다.
후회를 몇 번이나 한 다음에야 주석하는 화진계곡에 도착했다.
동트기 전이 가장 어둡다고 했던가. 계곡은 잠에 빠져있었고 어둠은 아직 물러가지 않았다.
계곡 입구로 들어서던 주석하는 오감을 압박하는 기이한 자극에 걸음을 멈췄다.
뭔가가 있다. 그것도 엄청난 무엇이.
상대의 존재감을 조심스럽게 받아들이자 대략 백 장 밖에서 강렬한 마기가 느껴졌다.
“마교인가…….”
새삼 우설금의 경고가 다시 떠올랐다. 마교칠왕 둘이 중원에 들어왔다고. 어둠 속에 있어야 할 자들이 이렇게 먼 곳까지 그 존재감을 숨기지 않고 뿜어내는 것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상치 못한 사태에 주석하는 내력을 끌어올렸다. 한발씩 어둠 속을 전진할 때마다 긴장감이 배가됐다.
점점 드러나는 주변 환경에 주석하는 입을 쩍 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울창한 고목이 마치 벌목장처럼 넘어져 있고 곳곳이 처참한 전투 흔적으로 난장판이었다.
마침내 탁 트인 공간에 진입했을 때 주석하는 폐허 속 그루터기에 앉아 명상에 잠긴 두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새벽을 맞이하는 고요한 정적에 잠긴 평화로운 세상이다. 다만 주변의 참혹한 참상만 아니라면.
주석하의 눈에 여기저기 뒹굴고 있는 세 시신이 보였다.
“북청진인……, 태상노군, 멸사쌍검…….”
한번 본 적이 있기에 주석하는 어렵지 않게 시신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무려 화산파, 공동파, 종남파의 장문인이라는 그들이 싸늘한 시신이 되어 뒹굴고 있다니.
그런데 이 공간에서 태연하게 휴식 중인 저 두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그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닿았을 때 그들이 눈을 번쩍 떴다.
“왔느냐?”
마치 그가 올 줄 알고 있었다는 듯한 반응이다. 주석하는 본능적으로 이들이 마교칠왕 두 사람임을 알아챘다. 우설금이 천력마부와 파천혈옹이라고 일러주었던가. 누가 누구인지 구분은 어렵지 않았다. 그들이 손에 쥔 무기 덕분이다.
“자하검존은?”
“쥐새끼처럼 내뺐지.”
태연한 대답이 돌아왔다. 주석하도 대수롭지 않게 질문을 이었다.
“끝까지 죽일 줄 알았는데?”
“꼬리 말고 도망치는 자를 굳이 쫓을 필요 있나? 귀찮게. 혼군이 부상 중이라 내버려 두는 것처럼.”
역시 이들은 부상 중인 혼군 대신에 자하검존을 선택한 것이다.
“목표가 정파십존과 흑도팔군의 무력화인가 보군.”
“잘 아는구나.”
대충 이해가 된다. 마교칠왕이 정사파의 중요 인물을 처리하면 그 뒤를 마교의 주력 부대가 밀고 들어와 초토화하는 작전인가. 이런 식이라면 마교는 거의 전력 손실이 발생하지 않을 테니.
어쨌든 지금 이들과 대립하면 좋지 않다. 우설금의 염려도 바로 그 점 아닌가.
주석하는 피식 웃으며 이번에는 반대로 한발 물러났다.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보려 했더니 한발 늦어버렸네.”
그가 막 몸을 돌리려 할 때였다.
천력마부와 파천혈옹이 옷을 털며 일어났다.
“흑검서생?”
주석하는 그들이 자신의 정체를 꿰뚫어 보자 몸이 굳었다.
어둠 속에서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천력마부가 양손에 도끼를 잡았다.
“오늘 네놈의 실력을 보겠다!”
“미친놈! 여기가 마교인 줄 아나 보지?”마다할 주석하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