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마교칠왕 (3)
“아가씨!”
요란한 외침과 함께 백색 인영과 흑색 인영이 등장했다.
흑귀와 백귀 두 사람은 처참하게 죽은 천력마부와 파천혈옹을 발견하고 아연실색해서 우설금을 바라봤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우설금은 여전히 홍철산을 든 채 묵묵히 서 있었다.
“아, 아가씨…….”
뭔가 말하려는 두 사람에게 우설금이 손짓으로 말렸다.
흑귀와 백귀가 입을 다물고 우설금의 뒤로 가서 조용히 부복했다. 두 사람은 마교인이기에 앞서 우설금의 충복인 모양이다.
주석하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가라앉히고 우설금을 살폈다.
얼핏 보기에 그녀는 평소처럼 아무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안면에는 여전히 싸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달랐다.
수많은 감정을 내포한 까만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눈동자에는 주석하가 담겨 있었다.
비록 그녀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으나 그 뜻이 주석하에게 전달됐다.
주석하도 혼란 속에 입을 열 수 없었다.
그와 천력마부, 파천혈옹과의 싸움은 팽팽한 접전이었다. 그때까지 누가 승리할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주석하는 마교칠왕 한 사람과는 최소한 죽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었으나 둘은 장담할 수 없었다. 목숨을 건 승부라면 어떻게 할지 추측이 어려웠다.
처음 접한 마교칠왕이기에 싸움이 계속되었다면 승패를 떠나 꽤 많은 내력을 소모하며 위험한 시간을 견뎌야 했을 것이다.
우설금이 단칼에 끝내버렸다. 그를 위해서였다. 그래도 괜찮은 걸까. 그녀가 마교칠왕을 죽인 사실이 마교에 알려지면 어떻게 되는 걸까.
물어보고 싶었다. 왜 개입했는지. 저들을 죽여도 상관없는지. 하지만 물을 수 없었다. 물었을 때 돌아올 대답이 뻔했다.
- 괜찮아요.
이게 전부일 것이다. 우설금의 삶에서 마교가 얼마나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지, 그 얼마나 소중한지 그 또한 익히 안다. 오늘 그녀의 행동은 자칫 그녀의 기반을 송두리째 파괴해버릴지도 모른다. 그녀가 걱정됐다.
궁금증을 가슴에 묻고 대신에 다른 질문을 뱉어냈다.
“이제 어디로 갈 건가요?”
어찌 보면 불필요한 질문일지도 모르지만 그 대답에 따라 우설금의 현재 심리와 앞날을 조금은 예상해볼 수 있다.
우설금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숭산으로 갈 거예요.”
숭산은 소림사가 있는 중원 무림의 본산이다. 그곳은 하남성이고 무림맹 본부가 있는 중원의 중심에서 멀지 않다. 넓은 중원에 비한다면 이곳에서 가까운 편이다.
“반야불존을 만나러 가나요?”
예전에 우설금이 말한 가문의 원수를 떠올렸다. 마교가 입성하면 그녀는 복수를 위해 소림사로 가겠다고 했었다.
그녀의 행동과 목적이 예전과 같은 것으로 보아 오늘 사건이 그녀의 향후 일정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적어도 현재의 그녀는 마교를 배신하고자 마교칠왕을 죽이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오늘 그녀는 순전히 주석하 개인을 위해 움직였을까. 그와 마교 사이의 선택은 아닐지라도 그와 마교칠왕 가운데 그가 더 중요하다는 의미고 이 사건으로 인해 설사 천마에게 질책을 받더라도 감수하겠다는 결정일 것이다.
주석하는 그제야 우설금에게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 그녀는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기에 자신이 그녀에게 어떤 비중인지 전혀 알 방법이 없었다.
비록 그는 그녀가 좋았지만 그녀도 그를 좋아하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항상 싸늘한 한기를 풍기는 그녀에게 그런 달달한 감정이 남아 있는지조차 의문이었다.
그런데 오늘 사건이 증명했다. 분명히 기뻐야 하는데…… 기쁨보다 슬픔이, 슬픔보다 걱정이, 걱정보다 찢어지는 아픔이 더 크게 와 닿았다.
‘정말 무사한 걸까……. 천마가 보복하지 않을까.’
그의 걱정을 눈치 챈 듯 우설금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인생의 가장 큰 목표인 복수를 저버리지 않겠다는 뜻이다.
“몸조심하세요.”
주석하는 이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우설금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맴돌았다. 그것은 이제 막 성숙한 소녀의 미소였다.
“가자!”
우설금의 신형이 사라졌다. 흑귀와 백귀가 그를 노려보다가 그녀를 따라갔다.
홀로 남은 주석하도 계속 이곳에 머물 수는 없었다.
그는 혼천교로 달려가면서 우설금의 앞날을 가늠했다.
정파십존의 최강이라는 반야불존과 우설금이 대결하면 누가 이길까. 그게 문제가 아니다! 우설금은 소림사의 철통같은 방어벽을 뚫고 들어가야 한다. 그게 가능할지 의문이다.
우설금이 아무리 고수라 해도 쉬운 일은 아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우설금을 응원하기도 소림을 응원하기도 쉽지 않다.
우설금의 승리는 중원 무림의 패배를 의미하고 우설금의 패배는 그녀의 죽음을 의미한다.
“아아!”
주석하는 해결할 수 없는 고민에 머리가 찌근거렸다.
우설금이 복수를 포기하고 마교에서 벗어나면 문제는 모두 해결된다. 하지만 그게 가능한 일일까.
그녀에게 복수는 그녀의 정체성일 테니까.
주석하는 그녀를 구하기 위해 자신도 소림으로 가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마침 뇌군이 부탁한, 반야불존을 만나야 할 약속도 있지 않은가. 우설금이 반야불존을 죽인 후에는 만날 수조차 없으니 빨리 가야 할 이유가 성립한다.
혼군에게 통보하고 빨리 우설금의 뒤를 따라가야 한다.
그가 길을 서두르는 동안 날이 점점 밝아오고 있었다.
“젠장! 길을 잘못 들었어. 오늘 왜 이러냐?”
우설금 때문에 너무 머리가 어지러운가 보다.
**
“흐음, 그렇단 말이지?”
내상을 치료하다가 주석하의 이야기를 들은 혼군이 생각에 잠겼다.
물론 주석하는 우설금의 정체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화진계곡에서 자하검존, 북청진인, 태상노군, 멸사쌍검, 네 사람과 마교칠왕인 천력마부, 파천혈옹 두 사람이 싸웠다고 전했다.
이들의 대결은 마교칠왕의 승리였고 자하검존만이 유일하게 부상을 얻은 채 도망쳤다고 설명했다. 마교칠왕 또한 상처가 위중해서 자하검존을 뒤쫓을 수 없었고 그때 자신이 개입해서 두 마교칠왕의 목숨을 취했다고.
결과적으로 자하검존만이 살아남았으니 현실과 다르지 않았다.
“마교칠왕의 무공은?”
“이미 부상이 커서 어렵지 않았습니다.”
지금 주석하는 멀쩡한 상태이기에 이 또한 의심받지 않았다.
혼군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선전포고대로라면 정오에 정파 연합군이 혼천교로 쳐들어와야 한다. 이미 정오가 넘었건만 그럴 기미가 전혀 없었다.
간밤에 화산파가 쑥밭이 되었으니 당연히 그 보복 때문에라도 쳐들어와야 정상이다. 그런데 이토록 조용하다는 것은…… 각 문파 장문인의 죽음이 예상 밖으로 큰 타격이었다는 뜻이다.
자하검존의 부상이 꽤 심각하다면 저들은 당분간 혼천교를 넘볼 수 없다. 특히 저들은 혼군이 우설금에게 부상을 입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니까.
“다시 정파 연합군이 쳐들어오기는 쉽지 않겠지요?”
“간밤에 상황이 그렇게 변했다면 저들은 당분간 자숙할 것이다.”
“다행이네요.”
어쨌든 혼천교가 무사하게 되어 주석하는 안심했다.
“그런데 그 홍의 여인은 누군가? 보통 인물이 아니더군.”
“마교 인물입니다. 어쩌다 알게 됐습니다.”
은근슬쩍 회피하는 그에게 혼군이 이마 주름살을 세우고도 상세히 묻지 않았다.
“자네는 어디로 갈 건가?”
무림은 혼돈으로 접어드는 시기다. 이제는 사파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올라선 주석하이기에 그의 행보가 무림 정세에 미치는 영향이 실로 지대했다.
“소림으로 갈 겁니다.”
“소림은 왜?”
“저도 모르겠습니다. 뇌군이 부탁했거든요.”
뇌군의 약속을 굳이 숨길 필요는 없다. 지금 같은 시국에서 뇌군이 개인적인 욕심을 채우려고 무리하지 않으리란 정도의 믿음은 혼군도 갖고 있을 테니까.
“알았다. 부디 몸조심하거라.”
혼군도 다른 부탁을 하지 않았다. 주석하라면 요동치는 정세에 휩쓸리지 않고 꿋꿋하게 중심을 지키리란 믿음이 있어서다. 정파 앞에서도 마교 앞에서도 본인의 가치와 목표를 지켜나갈 것이라고.
주석하를 계속 붙잡아둘 수 없기에 혼군은 부모 마음으로 떠나보냈다. 처음 혼천교를 찾아왔을 때의 주석하를 떠올려보면 정말 많이 컸다. 예상보다 훨씬 강하고 바람직하게 성장한 주석하를 보며 혼군은 미소를 지었다.
**
“나도 같이 갈 거예요.”
도수와 함께 혼천교를 벗어나는 순간부터 졸졸 따라오는 녹윤영 때문에 주석하는 수시로 걸음을 멈춰야 했다.
“위험해요. 내가 지금 가는 곳은.”
“알아요. 소림이 어디보다 위험하다는 정도는 나도 알죠.”
“그런데 왜 같이 가요? 여기에 있어요.”
“저는 만진장에서 뇌군을 만나야 하니까요.”
예상치 못한 녹윤영의 기습이 들어왔다.
홀가분하게 떠나리라 생각했더니 그렇지 않았다. 마침 녹윤영이 만진장으로 가게 되어 동행하게 됐다.
뇌군이 흑련을 소집했다. 전 무림의 주요 흑도 방파 인물들이 모여 정사대전을 시작한 무림맹에 대항할 방안을 논의한다고 했다. 원래대로라면 혼군이 참석해야 한다.
다만 지금 당장 혼군은 혼천교를 비울 수 없다. 화산파와 전쟁 중이기도 했고 부상도 있어 먼 거리 여행이 쉽지 않다. 덕분에 소교주인 녹윤영이 가게 됐다.
“그래도 소림과 만진장은 좀…… 떨어져 있잖아요?”
주석하의 만류에 녹윤영이 도수를 끌어들였다.
“도 공자, 요즘이 어떤 시대인가요?”
“혼란한 시대지!”
“그래서 하는 말이에요. 이 위험한 시기에 여자 혼자 먼 길을 가야겠어요?”
“너 여자였냐?”
“이게 죽을래?”
“끙!” 도수와 녹윤영의 말다툼에 주석하는 신음을 토해냈다.
녹윤영의 말에 틀린 점은 없다. 지금처럼 정파와 사파가 서로 노리는 시기라면 녹윤영은 정파의 매우 좋은 먹잇감이 될 수 있다.
그도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 소림사로 가야 하기에 거기까지 녹윤영을 데리고 갈 수는 없지만 부근까지는…… 만진장으로 가는 길과 겹치는 지점까지는 동행해야 마음이 편하다.
“정 싫으면 나 혼자 갈게요. 혼자 가다가 위험에 빠지면 당신 탓을 팍팍 할 테니까.”
“하아!”
도수가 냉큼 말을 받았다.
“넌 위험에 빠질 리 없어.”
“뭔 소리야?”
“넌 얼굴이 무기잖아?”
“야!”
도수가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이런 억지가! 어쩔 수 없나. 주석하가 한숨을 내뱉는 사이 도수가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석하야! 여비는 충분해?”
“난 충분해!”
녹윤영의 밝은 대답과 달리 주석하는 대답을 얼버무렸다.
“아, 그게…….”
갑자기 현실로 돌아온 주석하의 얼굴에 급격하게 구름이 끼었다.
도수의 핀잔이 시작됐다.
“또 빈털터리? 이젠 돈 많은 설매검화도 없는데?”
“하아, 망했다…….”
“난 돈 많거든요.”
녹윤영이야 혼천교 소교주니 당연히 금수저 중의 금수저고 돈도 많을 게 확실하다. 하지만 이제는 주석하도 무려 백화루 주인이니 어디에 가서 꿀릴 재력은 아닌데…….
“나도 돈은 많은데…….”
도수의 매서운 일침이 날아들었다.
“꺼내봐.”
주석하는 감히 행낭을 열어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행낭 속에 은자라고는 단 두 냥 남았던가.
“집에 가면 많아!”
“집에 금송아지가 있으면 뭐하냐? 여기선 굶는데!”
도수의 반박이 날카롭다.
젠장! 조물주보다 더 높은 백화루주면 뭐 하나? 지금 막상 쓸 돈이 없는데. 아무래도 이번 여정 동안 돈을 빌려 써야 할 운명이니 녹윤영을 데려가는 수밖에 없다.
어떻게 전생에서도 그렇고 이번 생에서도 그렇고 돈 걱정은 해결되지 않는다. 천하의 백화루주가 돈 한 푼이 없어서 여자에게 빌붙어야 한다니. 인생이 참 오묘하다.
녹윤영이 가슴을 탕탕 치며 호기를 부렸다.
“내가 빌려줄 테니까 나중에 이자 팍팍 쳐서 갚아요!”“끙!”
반박할 용기마저 잃은 주석하와 달리 도수는 무척 좋아하는 듯했다. 저 녀석은 돈이 좋은 건지 여자가 좋은 건지 잘 구분되지 않지만.
신이 난 녹윤영이 마지막 방점을 찍었다.
“예전에 내 연검 부러트린 거…… 그것도 아직 안 갚았죠? 이번에 꼭 사줘야 해요. 알았죠?”
주석하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