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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검천하-190화 (190/273)

190화 시시비비 (1)

하남 숭산이 가까워질수록 무림인 수가 많아졌다.

처음 떠날 때는 객잔에서 무림인을 가끔 한둘 볼 수 있었다면 이제는 객잔에 숙박하는 사람 가운데 절반이 무림인일 정도였다.

신기하게도 무림인 대다수는 정파인이었다. 평소라면 정파도 사파도 아닌 낭인 부류가 주를 이루었을 텐데 지금은 낭인이나 사파는 거의 없었다.

예전에 하북팽가가 사천 원정을 왔을 때 정파 무림인들이 떼거리로 몰려다녔기에 주석하는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기분이 그리 좋지 않았다.

지금도 그들 일행만 흑색 무복이었다.

사실 그와 도수는 무슨 옷을 입든 신경 쓰지 않았으나 녹윤영은 달랐다. 그녀는 별호가 흑접이었기에 흑색 경장을 양보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 덕분에 어디를 가든 그들 일행이 유달리 튀었다.

“와아! 사람 많네!”

도수가 객잔을 휙휙 둘러보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객잔 내부에 식사하는 사람들이 한가득했다.

마땅한 자리가 없어 주석하 일행은 객잔 밖에서 자리가 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배 채우기 정말 힘들어!”

“먹을 수 있는 걸 다행으로 생각해.”

녹윤영이 도수에게 핀잔을 줬다.

이곳은 숭산으로 향하는 주요 관도여서 오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많은 인원이 들러 밥을 먹을 곳이 이곳밖에 없고 마침 밥 시간이라 객잔이 북새통이었다.

주석하는 주막 입구에서 조용히 차례를 기다리며 오가는 사람의 면면을 구경했다. 대부분 평범한 무림인이었으나 일부는 꽤 고강한 무공을 지녔다. 주요 문파에서 대접받을 그런 수준의 무공이다.

의문을 참지 못한 주석하가 한 사람을 붙잡았다.

“잠시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마침 밥을 먹고 나가다가 붙잡힌 장한이 주석하에게 기분 나쁜 듯 눈을 부라리다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러슈. 뭐요?”

“무슨 일 있습니까? 사람들이 많아서요.”

“뭐, 일이라면 있다가도 없긴 한데…… 요즘 이곳으로 사람들이 몰리는 걸 묻는 거요?”

“그렇습니다.”

장한이 찜찜한 표정으로 주석하를 쓱 훑었다. 그의 흑의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이었다.

‘넌 더 시커먼데…….’

장한이 입은 백의는 흙먼지에 때가 묻어 주석하의 흑의와 별 차이 없었다. 장한의 몰골을 살피며 주석하는 실소를 머금었다.

고민하던 장한이 대답했다.

“최근에 정사대전으로 소규모 문파가 몰락하지 않았소?”

“그렇습니다만.”

“그들 일부가 소림에 몸을 의탁하러 온 거요.”

정사대전이 일어나면서 적지 않은 흑도 문파가 몰락했다. 그렇다고 정파도 멀쩡하진 않았다. 다만 상대적으로 흑도 문파에 비해 사정이 나을 뿐이다.

정사대전의 여파는 소규모 문파일수록 심각하게 피해를 줬고 몰락한 소규모 정파 문파는 소림사로 모여들었다. 문파를 유지하기 위한 궁여지책이었다. 소림사 또한 정파 문파의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래도 좀 많아 보이는데요?”

“최근 마교가 중원으로 입성하지 않았소?”

“아!”

“마교로 인해 멸문의 길을 걷게 된 문파도 예외가 아니오. 사천의 곤륜파와 청성파도 남은 자들이 소림으로 가는 중이라오.”

주석하가 화산을 들리는 동안 무림 정세가 급변했다.

마교의 주력 부대가 지나간 지역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마교를 가장 먼저 맞이했던 사천의 곤륜파와 청성파는 순식간에 무너졌다. 특히 흑검문을 치는 하북팽가를 지원하다가 주력 상당수를 잃은 청성파는 이제 멸문 직전이었다.

곤륜파와 청성파를 만나고 싶지 않은 주석하는 객잔을 피하고 싶었다.

“다른 곳으로 갈까?”

“뭐? 굶고 야산에서 노숙하자고?”

도수가 버럭 화를 냈고 녹윤영도 심각하게 안면을 찌푸렸다.

사실 지금까지 기다렸는데 밥도 먹지 않고 이동하자는 제안은 청천벽력이나 마찬가지였다.

“부근에 다른 객잔이 없어요. 좋으나 싫으나 여기밖에…….”

녹윤영이 애써 주석하를 설득했다.

물주가 그렇게 하라니 주석하도 우길 여지가 사라졌다.

“그러죠, 어쩔 수 없죠.”

곤륜파나 청성파 사람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와 안면이 있을 가능성은 크지 않으니. 어쨌든 마교에 의해 곤륜파와 청성파가 멸문 직전이라는 소식을 주석하는 내심 반겼다. 그만큼 그 두 문파에 대한 기억이 나빴다.

한참 더 기다려서야 객잔 내부에 자리가 났고 세 사람은 안으로 이동했다.

넓은 실내에는 식사하는 사람들로 빽빽했다. 그들은 간신히 점소이가 안내하는 탁자에 자리를 잡았다.

“준비한 요리는 하나뿐입니다. 국밥입니다.”

“다른 건요?”

“보다시피…… 손님이 많아 요리는 힘들어요. 만두 추가 정도 가능합니다.”

어쩔 수 없이 국밥 세 그릇에 만두 한 접시를 주문했다.

다소 마음이 편해진 세 사람은 주위를 휙휙 둘러봤다. 과연 무림인이 많았다.

한참 둘러보던 녹윤영이 주석하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저기 아는 사람 아닌가요?”

녹윤영을 따라 시선을 옮기던 주석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이럴 때는 꼭 만나기 싫은 자가 눈에 들어온다.

그들에게서 탁자 하나를 건넌 곳에 곤륜파로 보이는 사람들이 밥을 먹고 있었다.

허윤과 설약이다. 두 사람과는 이미 몇 번이고 만난 악연이 있었고 녹윤영 또한 예전에 성도에서 사천당문 사람들과 사건이 발생했을 때 설약을 만난 적이 있었다.

허윤과 설약을 포함한 곤륜파 사람들은 탁자를 세 개나 차지하고 있었다. 대략 십여 명 되어 보였고 그들 가운데는 나이가 꽤 되는 장로급 인사도 다수였다.

주석하는 모른 척하라고 녹윤영에게 눈치를 줬다. 딱히 곤륜파가 두려울 일은 없지만 정파가 가득한 이곳에서 괜히 시비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녹윤영은 곧바로 시선을 거두며 투덜댔다.

“맞는 것 같은데…….”

지금까지 곤륜파를 만나서 좋게 끝난 적이 없었기에 주석하는 아는 척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밥을 절반 정도 먹었을까.

갑자기 입구 쪽에서 새로운 무리가 우르르 들어왔다. 빈자리를 찾던 그들은 자리가 없자 미간을 찌푸리며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무심코 고개를 들어 그들을 확인한 주석하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 들어온 녀석들도 안면이 있었다. 이 객잔 이름이 외나무다리가 아닌지 의심스럽다.

바로 화산에 갔을 때 만났던 종남파 사람들이었다.

“자리가 없나 보군. 그만 나가세.”

종남파 태상호법인 낙월검이 실망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당황한 종남일절 하진건이 호기롭게 말했다.

“이곳에는 여기 외에 다른 객잔이 없습니다. 제가 자리를 만들어보겠습니다.”

주변을 휙휙 둘러보던 하진건의 눈에 주석하가 들어왔다. 다른 사람들과 다른 특유의 검은 옷이 눈에 잘 띈 탓이다.

그는 금방 주석하를 알아봤다. 그때 화산에서 주석하가 유비연과 유독 가깝게 다녔던 기억이 떠오르자 당시의 굴욕이 가슴을 가득 메웠다.

성큼성큼 다가선 하진건이 주석하의 탁자를 검집으로 탁탁 쳤다.

“네 녀석은…… 주 소협…… 아니 소협이란 칭호는 어불성설이군. 그러니까 주가냐?”

주석하는 안면을 확 일그러트리며 고개를 들었다.

옆에 있던 도수도 하진건을 발견하고는 기분 나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개도 밥 먹을 때는 안 건드린다.”

“오호, 네놈은?”

당연히 시비를 멈출 하진건이 아니었다. 그때는 유비연 때문에 참았지만 지금은 그럴 이유가 없다. 이곳에는 종남파의 이인자라 할 태상호법도 있지 않은가. 게다가 주위에는 정파인들이 가득하다. 이놈이 아무리 고수라도 두려워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중구난방인 네놈 얼굴을 보니 그때 그놈 맞구나! 그러잖아도 그날 종남파 제자를 건드린 죄를 물으려고 벼르고 있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도수가 벌컥 소리 지르자 하진건이 피식 웃었다.

“하얀 선지에 먹물 세 개가 찍혀 있어서 심히 거슬린다. 얼른 자리를 비켜라!” 하진건이 대놓고 사파인은 비키라고 경고했다.

피식 비웃음을 머금은 주석하는 상대하지 않고 밥 먹기를 계속했다. 도수도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녹윤영도 상대를 무시했다.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가? 무려 반시진을 기다려서 간신히 얻은 자리 아닌가.

닭 쫓던 개꼴이 된 하진건의 안색이 점차 붉어졌다.

쾅!

검집으로 탁자가 부러질 듯 내려친 하진건이 그 충격으로 튀어 오른 그릇을 내력으로 뒤집어엎으려 했다.

아직 내력이 부족해서 절정의 허공섭물을 펼치기는 어렵지만 튀어 오른 그릇에 슬쩍 힘을 가하는 정도는 그의 실력으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헉!”

그릇을 엎으려고 진기로 밀었으나 그릇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릇은 조용히 탁자에 놓여 마치 딱 붙은 듯 미동도 없었다. 이것은 주석하의 밥그릇뿐이 아니라 도수의 밥그릇도 마찬가지였다.

“이럴 리가 없는데? 이익!”

하진건은 더욱 힘을 쏟았다.

그래도 꿈쩍도 하지 않자 하진건은 검집으로 주석하의 그릇을 쳤다. 내력으로 안 되면 직접 쳐서라도 엎어야 분이 풀렸다.

검집에 맞은 국밥 그릇이 탁자 위를 주르륵 미끄러지더니 주석하의 품으로 쏟아질 듯 떨어졌다.

하진건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머금어졌다. 잠시 후면 옷에 국밥을 쏟은 녀석이 분통이 터져 일어날 테고 그때부터 사형제들과 함께 이놈을 패주면 된다. 종남파 이인자인 태상호법도 있으니 저 녀석을 요리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꿈은 이루어지는가? 안타깝게도 현실은 달랐다.

국밥 그릇이 탁자 아래로 떨어졌으나 신기하게도 쏟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릇이 허공으로 둥실 떠올랐다. 그 아래에는 짜증이 난 표정으로 노려보는 주석하의 얼굴이 있었다.

국밥 그릇이 곧장 하진건에게 날아갔다.

하진건이 피할 틈도 없이 그릇에 담긴 국물이 머리 위에서 쏟아졌다.

주르륵-

“허어어억!”

순식간에 먹다 남은 밥그릇을 뒤집어쓴 하진건은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이 새끼가!”

하진건이 얼굴로 흘러내리는 국물을 손으로 훔치면서 검을 뺐다. 옆의 사형제들도 동료가 모욕당했다는 생각에 검을 들고 우르르 몰려들었다.

“잠깐!”

태상호법 낙월검이 제자들을 만류하며 앞으로 나섰다. 그는 방금 본 밥그릇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음을 눈치 챘다. 탁자에 앉은 녀석의 무공은 하진건이 감히 상대하기 어려운 고수였다.

“고인은 뉘신가?”

낙월검을 쓱 훑어본 주석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젠장! 밥 먹기 정말 힘들어!”

그가 일어나자 도수도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눈치를 보던 녹윤영도 입술을 삐죽이며 그들을 따랐다.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한 하진건이 주석하를 손가락질했다.

“저 자식이…… 그날 화산파로 가던 도중에 만났던 놈입니다. 우리 제자를 죽이고 혼천교 첩자를 구해간…….” 낙월검의 안색이 확 변했다. 저놈의 손에 문하 제자가 목숨을 잃었다면 복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세간에서는 종남파를 겁쟁이라 욕할 것이다.

낙월검이 진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네 녀석은 혼천교 소속이냐?”

“아닌데요?”

주석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주석하가 상대하기 싫다는 듯 객잔 밖으로 나가자 낙월검은 더욱 화가 치밀었다.

이런 분위기를 놓칠 하진건이 아니었다. 하진건이 주석하를 따라가면서 크게 소리쳤다.

“저놈! 지금 생각해보니 마교가 확실합니다!”

“마교?”

객잔 내의 사람들이 순식간에 동요했다. 최근에 마교에게 일격을 당해 숭산으로 피신하는 문파가 한둘이 아니었다. 사실 종남파도 같은 처지였다.

화진계곡에서 장문인 멸사쌍검이 죽고 사흘 후 갑작스럽게 마교가 계곡을 습격해서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마교에서는 천력마부와 파천혈옹 죽음의 책임을 물은 것이지만 당연히 종남파에서는 진상을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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