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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검천하-191화 (191/273)

191화 시시비비 (2)

화산파, 종남파, 공동파의 정예가 진을 쳤던 화진계곡은 피바다가 됐다.

세 문파 모두 사실상 궤멸 상황. 간신히 살아남은 종남파 문도는 어쩔 수 없이 숭산 소림사로 이동하던 중이었다.

주석하 일행이 객잔 밖으로 나가자 종남파 사람들도 우르르 밖으로 나왔다.

그들은 주석하 일행을 포위하고 검을 겨눴다.

기세등등한 낙월검이 주석하 일행을 쓱 훑어봤다. 세 명 모두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젊은이다.

“마교가 맞느냐?”

“확인해보든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주석하는 하진건을 손가락질했다. 그가 마교인이 아님을 하진건은 안다.

객잔에 있던 사람들과 밖에서 대기하던 사람들이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몰려들었다. 원래 불구경 다음으로 재미있는 게 싸움 구경이다.

하진건이 음흉한 비웃음을 띠며 재차 주장했다.

“이자가 나타난 뒤 마교가 침공하지 않았습니까? 그때 혼천교는 무사했고요. 이건 분명히…….”

“증거 있어?”

주석하가 따지고 들려는 순간 뾰족한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저 사람 마교 맞아요!”

사람들의 시선이 소리친 여인을 향했다. 그녀는 곤륜파의 설란이었다.

사람들의 주목을 받자 설란이 재차 장담했다.

“난 곤륜파 설란이에요. 저 사람 마교 맞아요!”

설란까지 가담하자 순식간에 여론이 돌아섰다. 무려 구대문파인 종남파와 곤륜파의 제자들이 주석하를 마교라고 낙인찍었다. 당연히 사람들은 그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주석하가 일이 꼬인다고 생각하는 찰나 녹윤영이 앞으로 나섰다.

“설란! 헛소리 말아라! 감히 어디서 거짓말을 쳐?”

“오호, 흑접? 그때도 저 자식 옆에 붙어서 아양 떨더니 오늘도 똑같네? 어쩐지 혼천교가 마교 공습을 받지 않더라니!”

순식간에 설란이 혼천교를 마교의 앞잡이로 몰아갔다.

“이, 이게!”

녹윤영은 분이 차서 씩씩댔다. 혼천교까지 모욕하다니 선을 넘었다.

“우리가 지금 숭산으로 가면서 고생하는 이유가 뭔가요? 모두 마교 때문 아닌가요? 저자는 마교 끄나풀입니다.”

설란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녀는 그날 성도에서 사천당가 자제가 죽을 때 당했던 수모를 갚을 기회가 왔다고 여겼다. 아무리 주석하의 무공이 강해도 이곳에 있는 정파 사람들 모두를 감당할 수는 없다. 특히 이곳에는 곤륜파의 장로급 인사와 종남파 장로급 인사가 모여 있다.

“역시! 처음 봤을 때부터 수상쩍었어!”

하진량이 말을 보탰다.

하진량과 설란이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주석하 일행을 마교로 몰아갔다.

사실 군웅들은 화풀이할 대상이 필요했다. 곤륜파나 종남파도 마찬가지였다. 마교의 습격으로 문파가 괴멸되다시피 한 상황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울분을 달랠 제물을 찾고 있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마교 끄나풀을 처단하리라!”

낙월검이 진중한 목소리로 외치자 종남파와 곤륜파 제자들 모두가 호응했다. 그들은 구대문파이니 무슨 짓을 하든 강호 협의라고 우기면 그만이었다. 구경꾼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분위기를 띄웠다.

주석하가 쓴웃음을 짓는 사이 도수가 검을 빼 들었다.

“설란! 오늘 제대로 물어보마! 곤륜십이검수가 살검회를 공격한 게 맞느냐?”

“아! 살검회? 그렇지, 네 녀석이 그때 그 살검회 놈이었지?”

설란이 얕잡아보면서 도수를 놀렸다.

그러잖아도 험악한 도수의 인상이 더욱 나빠졌다.

“진상을 말해!”

“제대로 말해줄까? 그때 곤륜십이검수가 살검회에 교훈을 내린 것은 사실이야. 살검회는…… 쓰레기잖아?”

분노가 폭발한 도수가 설란에게 원한을 쏟아냈다.

“오늘 곤륜파에 책임을 묻겠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갔다.

도수와 설란이 대치하자 곤륜파 제자들 또한 주석하 일행을 에워쌌다.

주석하는 포위한 무리 가운데 고수로 파악되는 몇 사람을 확인했다. 종남파에서는 낙월검을 비롯하여 세 사람, 곤륜파에도 장로급으로 보이는 네 사람이 있었다.

“조심해요.”

주석하는 일행에게 속삭였다.

도수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암군의 진전을 이은 도수는 어떤 상황일지라도 제 한 목숨을 건사할 능력이 있다. 하지만 녹윤영은 아직 그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

“놈을 잡아라!”곤륜파의 장로가 공격개시를 알렸다.

그 순간 도수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역시 도수는 천부적인 살수다.

도수의 검이 우아하게 허공을 갈랐다. 평소의 살검과는 그 궤적이 다르다.

흑검육식! 도수가 그동안 절치부심 연구했던 흑검육식이 펼쳐졌다.

검법을 알아본 주석하는 눈을 부릅떴다.

지금까지 수도 없이 봤던 흑검육식이다. 흑검문도가 실전에서 사용하는 흑검육식 또한 자주 봤었다. 하지만 도수가 보완한 흑검육식이 실전에 등장한 것은 처음이었다.

도수의 손에서 강호에 명성이 자자한 유명 검법과 비견할만한 엄청난 검법이 펼쳐지고 있었다.

놀라웠다! 과연 흑풍검신이었다!

주석하도 본능적으로 흑검소를 이용해서 흑검육식을 펼쳤다. 물론 그가 도수에게 배운 것은 초반 삼식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 삼식 만으로도 이런 녀석을 상대하기 충분했다.

서걱!

흑검소의 검기가 포위망을 뚫었다.

낙월검이 주석하의 공세를 보고 멈칫했다.

검이 아닌 검을 사용하는 자! 퉁소를 검처럼 사용하는 자! 정파십존을 죽인 사파의 강자! 최근에 강호를 떠도는 놀라운 소문!

“흐…… 흑검서생?”

그제야 낙월검은 상대의 정체를 깨달았다. 순간 잘못 건드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상대는 흑도의 최강자다. 지금 이곳에 아무리 많은 무림인이 있어도 상대할 수 없는 녀석이다.

당황한 낙월검은 주변을 확인했다.

상대가 누구이건 같은 편이 워낙 많으면 겁을 상실하는 법이다. 포위한 종남파와 곤륜파 제자들은 이성을 상실했다.

무너진 사문의 분풀이가 필요한 데다 두 문파의 연합에 주변 정파인의 응원까지 받고 있으니. 이미 그들의 머리에는 마교 끄나풀을 제거해야 한다는 사명감 외에 다른 것이 없었다.

한쪽으로 쏠린, 신념에 찬 녀석들의 광기를 돌리기는 어렵다.

앞으로 벌어질 대참사가 그려지자 낙월검은 아연실색해서 처음 사건을 발생시킨 하진건을 찾았다.

정작 하진건은 포위망의 일선이 아닌 한발 뒤로 물러나서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이놈이! 사적인 복수에 모두를 끌어들였구나!’

낙월검은 이 싸움을 중지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선뜻 나설 수 없었다.

이 싸움을 먼저 건 쪽은 자신들이 아닌가. 마교 끄나풀을 단죄하겠다고 군중을 선동하며 무리하게 싸움을 걸지 않았던가. 그런 상황에서 상대의 몇 초식 무공에 놀라 바로 꼬리를 내리면서 사람을 잘못 봤다고 사과하고 물러난다고?

종남파 체면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절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 부분은 곤륜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다면 곤륜파도 절대 물러날 수 없다.

낙월검은 검을 꽉 쥐었다. 이미 배는 떠났으니 옳든 그르든 상대를 제거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종남파의 명예가 실추된다.

“마교 끄나풀을 처단하라!”

낙월검은 명령을 내리면서 최강의 절초를 펼쳤다. 상대가 최근에 무시무시한 위명을 날리는 흑검서생이라면 초반에 제압하지 않으면 승산이 없다.

허공을 날아 포위망을 뛰어넘은 낙월검이 주석하의 머리에 회심의 일격을 내리쳤다.

흑검육식을 연습하면서 그 위력에 심취해있던 주석하는 약간 당황하고 있었다. 그들을 포위하고 달려드는 정파인들이 너무 많았다.

물론 숫자가 많다고 하여 걱정할 수준은 아니다. 다만 이들을 죽이거나 다치게 하면 나중에 무자비한 살인마라는 오명을 덮어쓰게 된다. 이미 그는 운중산에서 화산파와 청성파 제자를 도륙한 적이 있어서 악명이 자자한 상황이었다.

그게 어때서? 입장을 바꾸면 이들이 살인마인 것을.

그 와중에 머리 쪽에서 강력한 검기가 엄습했다.

‘죽음을 자초하는구나!’

자비는 없다!

주석하는 백변환영보를 펼쳐 앞으로 질주했다.

일격을 내리치던 낙월검이 당황하고 포위망을 구성했던 제자들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흑검소의 검강이 불을 뿜었다.

암천살검 제 사식!

일인 암습이 아닌 다수의 적을 암살하는 필살의 초식!

전면을 향해 검강을 횡으로 길게 그었다.

푸아아악-

거죽이 터지는 소음과 함께 달려들던 종남파 제자들이 마치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멈췄다.

비명이 터질 순간임에도 누구도 비명을 지르지 못했다.

다음 순간, 검강이 지나간 그 자리에 있던 놈들의 육신에 하나씩 사선으로 금이 그어지면서 핏물이 배어 나왔다. 마치 얼음판이 미끄러지듯 놈들의 상체가 사선을 타고 아래로 흘러내렸다.

십여 명의 육신이 단 일 검에 반 토막 났다.

주석하의 신형이 다시 원위치로 돌아온 다음에야 구경하던 군웅의 비명이 터졌다.

“으아악!” 주석하의 전면 포위망은 완전히 허물어져 있었다.

순식간에 펼쳐진 지옥도에 사람들은 혀를 내둘렀다.

낙월검은 입을 쩍 벌렸다. 말로만 들었던 흑검서생의 신위를 직접 목격하자 말문이 막혔다. 지금 토막 난 저들이 누군가. 종남파에서 무공을 수십 년간 갈고 닦은 정예가 아닌가. 강호 어디에 내놓아도 절대 밀리지 않을 그런 제자들이었다. 이번에도 상대가 마교만 아니었다면 종남파를 충분히 지탱했을 최고의 전력이었다.

“으아아아!”

낙월검은 울분을 터트리며 정신없이 주석하를 향해 일검을 날렸다. 지금 그는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분노로 몸을 가누지 못한 채 평소 수련했던 검초를 생각 없이 뿌렸다.

서걱-

흑검소가 눈앞에서 번쩍이는 순간 낙월검은 아래가 허전했다. 놀랍게도 그의 목이 잘려 머리가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눈을 감지 못했고 상대가 무슨 수를 썼는지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그의 눈에 겁에 질린 하진건이 들어왔다.

‘저놈이 죽일 놈이었다…….’

그리고 머리가 땅에 처박혔다. 머리가 분리된 몸통이 잠시 흔들리는가 싶더니 피 분수를 뿜으며 주저앉았다. 사실상 종남파의 멸문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덤벼라!”

낙월검을 벤 주석하는 신형을 허공에 띄운 채 군웅을 향해 사자후를 터트렸다.

내공을 실은 외침에 군웅들이 귀를 막으며 괴로워했다. 모두 전의를 상실하고 살길을 모색했다. 군웅의 응원을 등에 업고 기세등등했던 종남파 제자들은 사색이 된 채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살아남은 자도 그리 많지 않았다.

둘러쌌던 군웅들이 겁에 질려 뒤로 물러났다.

도수의 전황도 다르지 않았다. 도수의 무공이 워낙 강해서 곤륜파 제자들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데다 주석하의 신위에 질려 감히 도발을 계속할 수 없었다.

한숨 돌린 주석하가 흑검소로 하진건을 가리켰다.

“네놈! 나와라!”

“으으으!”

이미 하진건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는 주변의 동료에게 눈짓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안타깝게도 주변에는 살아있는 동료가 없었다.

“내가 마교의 끄나풀이라고 했지?”

주석하의 살기 어린 눈빛에 하진건은 목소리를 삼켰다. 낙월검이 죽고 나서야 그는 주석하의 실체를 제대로 인지할 수 있었다. 건드리면 안 될 맹수였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 늦었다.

벙어리가 된 놈을 비웃으며 주석하는 음산한 미소를 머금었다.

“하긴 무슨 상관이랴.”

주석하의 왼손이 불을 뿜었다.

“으악!”

극양염천신공이 하진건을 강타하면서 온몸에 불이 붙었다. 놀랍게도 그 불은 꺼지지도 않았다.

순식간에 장내에 살이 타는 냄새가 진동하고 하진건이 부들부들 떨었다. 놀랍게도 빨리 타지도 않았다. 한 줌의 재로 화할 때까지 무려 이 각의 시간이 소요됐다. 그동안 하진건은 고통에 몸을 뒤틀었다.

주석하가 내린 단죄였다.

군웅들이 놀란 가슴을 달랠 틈도 없이 이번에는 반대편에서 고함이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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