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검천하-192화 (192/273)

192화 시시비비 (3)

“다시 묻겠다. 살검회를 친 곳이 곤륜십이검수이더냐?”

군웅들의 시선이 도수를 향했다.

곤륜파 제자들이 바닥을 뒹굴고 도수의 검이 설란의 목에 닿아 있었다. 설란은 겁에 질린 채 도수의 자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주변에 곤륜파 사람들이 제법 있었으나 아무도 달려들지 못했다. 주석하와 도수의 무위에 눌린 데다 설란이 위협받고 있어서다.

이미 했던 말이 있기에 설란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살검회주를 죽이진 않았어.”

“그럼 살검회주는 누가 죽였지?”

“몰라.”

“소회주는?”

“소회주? 아하! 나를 노리다가 북성하가 별장에서 죽은? 그때 마교가 습격해서 죽였지. 그건 저놈이 더 잘 알걸?”

설란이 주석하를 가리켰다.

주석하는 순간 전율을 일으키며 멈칫했다. 살검회 소회주이자 도수의 형인 도건이 죽은 진상을 지금까지 도수에게 숨겨왔다. 이는 순전히 도수를 위해서였다. 도수가 진범인 우설금에게 복수하겠다고 할까 봐. 우설금이 도수를 살려둘 리 없지 않은가.

의아한 표정으로 잠시 시선을 주석하에게 돌렸던 도수가 목에 댄 검에 힘을 줬다.

“결론은…… 살검회주랑 소회주는 죽이지 않았지만, 나머진 죽였다는 거네?”

보다 못한 허윤이 두 손으로 만류하며 앞으로 나섰다.

“그, 그건 설란 사매의 잘못이 아니오.”

허윤도 성도에서 봤던 자이기에 도수는 아예 상대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난감해진 허윤이 주석하에게 구조 신호를 보냈다.

“주, 주 공자…….”

물론 주석하는 허윤에게 특별한 감정은 없다. 다른 사람에 비해 허윤은 한때 그를 위해준 측면이 있다. 하지만 사매인 설란을 전혀 제지하지 않았고 오늘도 마교라고 누명 쓴 그를 해명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굳이 나설 이유가 있을까.

주석하는 눈을 찌푸리며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충격을 받은 허윤이 한숨을 내쉬는 순간.

서걱-

“아악!”

도수의 검이 설란의 목을 갈랐다.

주석하라면 잡은 상대를 이렇게 무참하게 도륙하지 못할 것이다. 아직 그는 이처럼 잔인하지 않다.

하지만 도수는 달랐다. 그는 수없이 생사를 넘었고 살검회의 문화 자체가 그러했다. 자객이 암습을 시도할 때 머뭇거린다거나 적에게 자비를 베풀면 도리어 화를 당한다는 교육을 숱하게 받았다.

그렇기에 그는 군웅이 지켜보는 가운데에서도 손을 쓰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잡혀서 저항조차 하지 못하는 여자의 목을 단번에 벴다.

“으악!”

군웅들이 비명을 지르고 설란이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졌다. 그 피가 도수의 검을 타고 방울방울 흘렀다.

“살인마!”

분노한 곤륜파 제자들이 울부짖었다. 그들에게 설란은 곤륜의 꽃이었고 보호해야 할 아리따운 동생이었다. 그런 사매가 죽었으니 당연히 눈이 뒤집혔다.

“저놈을 잡아라!” 분노한 그들이 몰려드는 순간 도수가 일갈했다.

“와라! 살검회의 원수!”

그 순간 흥분했던 군웅들은 지금 이 싸움이 곤륜파와 살검회의 복수전임을 깨달았다. 단순한 정파와 마교, 또는 사파의 싸움이 아니었다. 남의 문파 은원관계에 관중이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었다. 게다가 상대는…… 무시무시하다.

물론 곤륜파 문하생들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허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누구보다도 설란과 많은 시간을 함께했던 사형이었다.

서걱-

허윤이 달려드는 순간 도수의 검이 무자비하게 도륙했다.

도수의 검이 춤을 췄다. 암군의 진전을 이은 도수는 놀라운 솜씨로 몰려드는 사람을 도륙했다.

사실상 곤륜파와 종남파 사람들이 거의 목숨을 잃고 나서야 도수와 주석하는 검을 멈췄다.

두 사람의 살기에 군웅들은 겁에 질려 뒤로 물러났다. 잔인한 살겁에 그들은 입을 열지 못했다.

허윤과 설란의 죽음을 주석하는 애도할 수 없었다.

살기 어린 눈빛을 머금고 주석하는 주위를 노려봤다.

“흐악!”

기겁한 군중들이 후다닥 도망쳤다. 그 많던 사람이, 객잔 앞에서 대기하던 사람조차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텅 빈 장소에서 주석하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도수와 녹윤영을 돌아봤다.

“우리도 가야지?”

“난 아직 제대로 먹지 못했어요.”

녹윤영이 곧바로 반박했다.

생각해보니 주석하도 절반쯤 먹다가 나왔다. 적 때문에 중단했으니 굳이 그들이 피해를 감수할 문제가 아니다. 괜히 쫓기듯 떠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녹 소저, 계속 먹게요?”

“여기 아니면 마땅한 객잔이 부근에 없다니까요.”

사람들이 이 객잔에 몰려 기다리면서도 이곳에서 먹어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그 이유를 떠올린 주석하는 어쩔 수 없이 객잔 안으로 들어갔다.

객잔 내부도 밖과 마찬가지로 손님이 사라지고 없었다. 괜히 남아 있다가 화를 입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실내에, 딱 탁자 한곳에서 손님이 밥을 먹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손님은 주석하도 아는 사람이었다.

우설금! 부하인 흑귀, 백귀와 함께 식사하고 있었다.

주석하는 예전에 패존이 침입했던 객잔에서 전혀 동요 없이 밥을 먹던 우설금을 떠올렸다. 신기하게도 그때와 장면이 겹쳐 보였다.

‘언제 들어왔었지?’

오늘 이곳에서 우설금을 만난 기억이 없다. 우설금 또한 소림으로 간다고 했으니 길이 겹치는 것이야 당연하다지만.

반갑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걱정되기도 했다. 마교칠왕을 살해한 그녀이기에 정말 괜찮은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특히 방금 도수가 살검회 원수를 캐물었기에 더욱 찜찜했다.

재차 밥을 주문해 놓고 주석하는 우설금 쪽으로 시선을 두지 않으려 애썼다.

그를 흘낏 본 우설금 역시 신경 쓰지 않고 밥 먹기를 계속했다.

텅 빈 객잔에서 떨어져서 밥을 먹는 두 사람 사이에 짙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

“봤냐?”

어둠 속에서 도수가 검을 내려놓았다.

“웬만큼 눈에 익었어.”

주석하는 도수의 동작을 따라 하던 움직임을 멈췄다.

멀리 어둠 속에서 숭산이 보였다. 바로 소림사가 자리 잡은 명산이다. 저 숭산 깊은 곳, 소실봉에 소림사가 터를 잡고 있다. 무림인들이 성지로 일컫는 바로 그곳이다.

화산을 떠나 마침내 이곳까지 오고야 말았다.

오는 동안 간간이 도수에게 흑검육식을 배웠다. 물론 도수가 보완한 흑검육식이다. 이제는 주석하도 여섯 초식을 전부 실전에서 사용할 수 있을 만큼 익숙해졌다.

“그런데…… 마지막 초식이 좀 이상하지 않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도수도 알고 있다는 듯 대수롭지 않게 응답했다.

보완한 흑검육식의 마지막 육식은 어딘가 이상했다. 도수가 보완했음에도 여전히 어색했다. 초식 운용이 매끄럽지 않았다.

도수는 몇 번이고 다른 방식으로 보완해봤으나 본래의 초식을 재현할 수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불완전했던 것처럼.

“다섯 개는 확실한데…… 하나가 문제야.”

“내가 모두 복원하면 천재게?”

도수가 웃으면서 투덜댔다.

주석하도 미소 지으며 속으로 대답했다.

‘넌 천재 맞아.’

“흐음, 나중에 천천히 고민해봐. 어느 날 갑자기 발상이 떠올라 짠하고 풀릴지도 모르잖아.”

어차피 주석하는 스스로 해결할 능력이 없기에 도수를 의지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지금까지 복원한 다섯 초식만으로도 꽤 쓸 만한 검법이 탄생했다. 암천살검을 뒷받침할 충분한 위력이다.

그들은 멀리 어둠 속에 빛나는 숭산을 바라봤다. 이 밤에 그곳에서 불경 외는 소리와 목탁 때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의 심정을 알았을까. 도수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가게?”

“가야지.”

“위험할 텐데?”

“위험하진 않아. 너야말로 따라오지 마. 사지에 친구를 데려갈 수는 없지.”

“안 위험하다며?”

도수가 여전히 고집을 부렸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반야불존을 만나는 방법을 고심했다.

반야불존은 현 소림 방장보다 배분이 높다.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그는 소림사 뒤쪽 계곡 깊숙한 곳에 있는 모옥에 거주한다고 했다. 소림의 고승이 주로 폐관 수련이나 참선하는 장소다.

반야불존은 무섭지 않다. 다만 그를 만나려면 소림사를 뚫어야 한다는 게 문제다. 아무리 주석하라지만 소림사를 홀로 뚫고 들어가기는 쉽지 않다.

“나를 데려가! 잠입 방법 가르쳐준다!”

도수가 호언장담했으나 주석하는 애써 무시했다. 이 녀석이 자객 출신이니 분명히 어떤 방법이 있겠지만 주석하는 도수마저 위험에 처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나중에.”

“나중은 무슨. 얼어 죽을! 불존이 죽고 나서 들어갈 기세군.”

도수가 킥킥대며 웃었다.

주석하는 괜히 뜨끔했다. 사실 불존이 죽을까 봐 일찍 서두르는 게 맞다. 우설금 때문에 죽을까 봐.

“수! 부탁인데…… 내가 소림에 잠입하면 기다리지 말고 녹 소저 데리고 만진장으로 가라. 녹 소저를 만진장에 데려다주고 넌 암흑단으로 가.”

“응? 녹 소저와?”

어딘지 묘한 표정이다.

“싫어?”

“그, 그게 아니라 그래도 네놈을 잠입시켜 주고.”

당황한 도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수락했다.

갑자기 이 녀석이 왜 순순히 말을 듣는지 모르겠지만 주석하는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말할 게 있어.”

“뭔데?”

“살검회 말이야.”

어둠 속에서 도수의 눈동자가 빛났다.

종남파와 곤륜파랑 일을 벌였던 날, 도수는 그에게 다시 묻지 않았다. 그때 설란이 그가 알고 있다는 언질을 줬음에도 도수는 묻지 않았다. 그동안 계속 찜찜했던 마음을 다스리고 주석하는 이제야 도수에게 말을 꺼냈다.

“살검회주, 너희 부친을 살해한 자는 나도 몰라.”

“그렇겠지. 나랑 함께 다녔으니.”

“그런데…… 너희 형을 죽인 자는 알아.”

도수의 안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도건이 죽은 장소를 둘이 함께 다녀왔었다. 그 범인을 이제야 말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의도적으로 숨겨왔다는 것이니까.

도수가 묵묵히 그를 쳐다봤다.

“물론 나도 그 현장을 목격한 것은 아니야. 내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끝난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짐작은 해.”

“우리 아버지께 이미 다 말했던 거 아냐?”

“그렇긴 하지. 다만…….”

주석하는 망설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때 그 장원을 습격했던 자는 설란이 말했듯이 마교인이었어. 물론 증거는 없지만 거의 확실해. 너희 형은 그날 설란을 노리고 거기에 잠입했었는데…….”

“뭔데?”

“그날 내가 가진 북성하가의 밤색 장포를 도건이 빼앗아갔거든. 그 장포 때문에 마교인들이 너희 형을 호위무사로 오인하고……. 그 일 아니었으면 내가 죽었을 건데……. 미안하다.”도수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때만 해도 도건이 주석하를 괴롭혔다는 사실을 안다. 도건이 그 별장에서 설란을 노리고 있었다면 당연히 위장하려고 북성하가의 장포를 빼앗았을 것이다. 그 장포가 도건을 죽음으로 이끈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물론 주석하의 의도는 아니었고 강요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장포를 넘겼겠지만…….

당연히 이해해야 할 일인데 친형이 관련되었기에 도수는 금방 감정을 다스릴 수 없었다.

한참 분노와 슬픔을 삭인 후에야 도수가 물었다.

“그 마교인이 누군 줄 알아?”

“그때 장원에 죽어 있던 그 시체.”

“그럼 아버지를 죽인 자는?”

마침내 원치 않던 마지막 질문까지 왔다.

“너희 아버지는 범인을 조사하다가 마교의 꼬리를 찾았을 거야. 그리고 마교를 추적하다가 우연찮게도 곤륜파와 마주쳤겠지. 살검회 부하들의 도움으로 네 부친은 용케 빠져나갔던 것 같은데…… 운 나쁘게도 추적하던 마교인과 마주쳤을 거야.”

“그래서 죽인 자가 누군데?”

도수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나도 그건 몰라. 마교라는 것밖에.”

차마 우설금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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