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검천하-193화 (193/273)

193화 시시비비 (4)

멀리 숭산이 보이는 어둠 속에서 도수가 굳은 표정으로 의지를 드러냈다.

“언젠가 진실은 밝혀지는 법이야. 아버지를 죽인 자는 분명히 그 죗값을 받을 거다. 내가 꼭 그렇게 할 거야! 곤륜파는 사실상 멸문했으니 이제 그 마교인만 찾으면 되지. 처음에 비하면…… 많이 좁혀졌어.”주석하는 차마 도수를 응원할 수 없었다. 그래도 마음의 짐을 일부 내려놓았으니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내일 숭산 주변을 둘러보고…… 내일 밤에 잠입할 거다.”

주석하는 계획을 말했다. 시간이 있다면 더 차분하게 작전을 세우겠지만 아쉽게도 시간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하루가 다르게 정파 무림인들이 몰려들고 있었고 언제 우설금이 선수를 치고 소림사에 들어갈지 모른다. 시간을 끌지 말고 서둘러야 한다는 판단을 내렸다.

“정말 내가 도와주지 않아도 돼?”

“혼자서 할게. 넌 변죽만 좀 울려줘.”

주석하가 소림사에 잠입하는 동안 도수는 시선을 분산시켜줘야 한다. 소림사 입구에서 소동을 일으키면 경계가 허물어진 틈을 타서 그는 쉽게 진입할 수 있을 것이다.

“알았다.”

도수는 별다른 반대 없이 순순히 수락했다.

주석하는 고마움을 표하고 다시 숭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이것으로 뇌군의 부탁은 끝이다. 이 일이 끝나면 흑검문으로 돌아가 당분간 은둔할 것이다. 정사대전과 정마대전이 끝나고 세상이 잠잠해지면 그때 다시 강호에 나올지 말지 결정하고.

백화루주의 주인이 되었으니 그 즐거움을 제대로 누려봐야 하지 않겠는가. 쓸데없이 무림에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문득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도수에게 물어보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백화루주로 취임하던 날 백화루 여인들을 모아놓고 인사하다가 유비연과 주소은 때문에 그가 먼저 나왔었는데…….

“수! 너 그날…… 언제 돌아왔었지?”

“그날이라니?”

도수가 무슨 말인지 몰라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날 백화루에서…….”

“아!”

도수가 미묘한 웃음을 안면에 떠올렸다.

“집에는 왔었어?”

“당연하지! 거기에서 잘 수는 없잖아?”

“기녀 끼고 밤샌 줄 알았는데…… 착실하네.”

“거기에서 두 시진쯤 있었나?”

예상보다 짧았다고 해야 하나, 길었다고 해야 하나? 대낮이었으니 별다른 일이야 있었으려고. 그런데 녀석의 미묘한 표정을 보니 궁금해졌다.

“그래서 그 시간 동안 뭐 했는데?”

“애들 특징을 잘 알아야 영업을 제대로 할 거 아냐? 그래서 행수어멈부터 일렬로 쭉 세워놓고…….”

“야! 이 자식아!”

그다음 말이 나오는 순간 주석하는 도수를 두들겨 패지 않을 수 없었다.

**

숭산 소실봉에 달마조사가 소림사를 창건한 후 이곳은 중원 무림의 태산북두로 군림해왔다.

달빛조차 없는 밤에 고색창연한 수많은 법당, 불전, 석탑, 법사가 어둠 속에서 은은하게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삼경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고 목탁 소리마저 사라진 소림사 경내는 침묵에 잠겨 있었다.

무려 천년을 내려온 소림의 오각(五閣), 오원(五院), 삼전(三殿), 팔당(八堂), 삼십육방(三十六房)에 별빛이 내려앉았다.

주석하는 어둠에 숨어 주위를 살폈다. 산문 쪽에서 경계를 선 두 스님을 제외하고는 전혀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기감을 끌어올려 보니 아직도 곳곳의 처소에서 불경을 외는 스님의 존재가 확인됐다.

‘잠이 없구나.’

그가 움직이면 저 스님들이 존재를 눈치 채고 몰려나올 것이다. 역시 잠입이 쉽지 않다.

그는 도수가 움직일 때까지 기다렸다. 수풀 속에서 벌레와 한 몸이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사찰 건너편 어느 곳에서 소란이 일었다. 침입자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고 밤을 밝히는 화섭자가 곳곳에서 눈에 띄기 시작했다.

“적이다!”

정적이 내려앉았던 경내가 순식간에 야단법석이 됐다. 잠에서 깬 스님들이 떼를 지어 저쪽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도수가 소림사의 경계망을 흩트리기 시작했다는 신호다. 그는 이 틈을 타서 내부로 잠입해야 한다. 오늘 도수의 도움은 여기까지. 그는 용담호혈인 소림에 도수가 들어와서 위험에 빠지기를 원치 않았다.

한 떼의 스님들이 몰려간 후 주석하는 담장의 그림자를 타고 사찰 내로 잠입했다.

그 순간 이번에는 반대편에서 소란이 일었다. 그쪽도 침입자가 있는 듯 스님들이 우르르 몰려갔다.

“응? 저건 뭐지?”

도수의 몸이 둘이 아니기에 교란 작전은 한 곳에서만 발생해야 한다. 그런데 다른 쪽에서도 소란이 일었다.

알 듯 모를 듯한 기시감이 일었다. 설마 우설금도 지금 잠입을 시도하는 걸까?

주석하는 몸을 날려 부근의 전각 지붕 위로 올라갔다.

숭산 산비탈을 타고 곳곳에 자리한 전각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 불빛이 어른거리며 사람들이 몰리는 곳은 두 곳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도수가 안배했다고 보기에는 다소 먼 거리다.

“급해졌군.”

적어도 우설금보다 먼저 반야불존을 찾아야 한다.

반야불존은 소실봉 중턱의 불망헌(不忘軒)에 거주하고 있다고 했었나? 문제는 그곳이 어디인지 알 도리가 없다. 아무래도 동자승이라도 잡아서 물어보아야 할 듯했다.

주석하는 지붕을 타고 경내 깊숙이 들어갔다.

수십 개의 전각을 뛰어넘어 소실봉의 울창한 숲이 펼쳐질 때 주석하는 불당 앞에서 서성거리는 두 불자를 발견했다.

대부분 스님이 침입자를 잡으러 산문으로 몰려간 후라 유일하게 눈에 띄는 두 사람이었다.

묻지 않고는 다른 방법이 없기에 주석하는 신형을 드러냈다.

“누, 누구요?”

깜짝 놀란 두 불자가 주석하를 경계했다.

도둑이라고 밝힐 수 없어 주석하는 용건부터 꺼냈다.

“불망헌이 어디입니까?”

“불망헌? 시주는 누구요?”

두 불자의 나이는 대략 이십 대 후반으로 매우 젊었다.

“반야불존을 뵈러 왔습니다. 소생은 주석하라 합니다.”

굳이 숨길 필요가 없었기에 주석하는 신분을 밝혔다.

두 불자는 처음 듣는 이름인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미타불, 소승은 장문 제자 원숙이오. 불망헌은 외부인이 출입할 수 없습니다.”

“소승은 원혜라 하오. 주 시주는 허락을 받은 빈객이오?”

당연히 허락받았을 리가 있나. 어차피 사정해봐야 이들이 알려줄 리 없으니 주석하는 무력을 써서 얻어내기로 했다.

“전 반야불존을 꼭 만나야 합니다. 불망헌까지 안내해주시지요!”

대답과 함께 주석하는 번개처럼 원숙의 완맥을 거머쥐려 했다.

원숙이 보법을 밟아 공격을 피하면서 곧바로 반격을 날렸다.

의외로 묵직한 일 권이 가슴으로 들어오자 주석하는 공격을 전환하여 상대의 공세를 피했다. 그 순간 원혜의 일장이 등을 엄습했다.

주석하는 혼천십이장으로 가볍게 응수하면서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꽈릉-

‘공력이 심후한데?’

주석하는 두 스님의 예상외로 강한 무공에 매우 놀랐다. 젊은 두 스님이 무려 중원사룡에 육박하는 무공을 지녔다니 아무리 소림이라 해도 뜻밖이었다. 대체 소림에는 얼마나 고수가 많은 건가.

단 일 초식의 공방만으로도 상대의 수준을 파악한 원혜가 재차 경고를 날렸다.

“단순한 무뢰배가 아니시군요! 지금이라도 돌아가면 죄를 묻지 않겠습니다.”

“여기서 물러날 것 같으면 들어오지도 않았다!”주석하는 재빨리 공격을 재개했다. 혼천십이권을 이용해서 두 스님과의 거리를 급격히 좁히고 상대의 완맥을 위협했다.

날카로워진 주석하의 공격에 원혜와 원숙의 대응도 달라졌다. 웅후한 장력을 손바닥에서 뿜어내고 날랜 보법으로 주석하의 앞뒤를 포위했다.

순식간에 초식 교환이 수차례 이루어졌다. 백변환영보와 혼천십이권이 조합되자 권영이 난무하며 충격파를 일으켰다.

놀랍게도 두 스님의 무공도 상당했다. 평범한 공방으로는 우위를 점할 수 없었다.

“역시 소림이군! 그래 봐야 결과가 바뀌지 않는다!”

원혜와 원숙의 장력을 혼천십이권으로 깨트리자 소음이 장내를 강타했다.

조용히 끝내려 했더니! 시간이 없었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도수의 활약으로 아직 이곳에 원군이 몰려오지 않았다.

주석하의 무공이라면 이들을 죽이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은원 관계가 없는 스님을 살상하기도 마음에 걸리고 이들에게서 불망헌의 위치를 알아내야 하기에 죽일 수도 없었다.

위험을 감지한 두 스님이 결사적으로 달려들었다.

원숙의 권법과 원혜의 장법이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 주석하의 공격을 막아냈다. 중후함과 속도가 잘 어울린 공세에 주석하는 혀를 내둘렀다.

그들의 공세가 너무 거칠었기에 주석하도 어쩔 수 없었다.

원혜의 장력을 화판답공으로 피한 후 허공에서 순식간에 방향을 바꿨다. 허점을 발견하고 달려드는 원숙을 옆으로 흘리면서 손을 뻗었다. 주석하의 속임수에 맥없이 당한 원숙이 뒤늦게 일 권을 후려치려 했으나 완맥을 조이자 힘없이 무너졌다.

주석하는 원숙의 완맥을 제압한 후 다른 손으로 목을 죄었다.

“마지막 기회다! 불망헌은 어디에 있나?”

“시주! 불망헌은 출입할 수 없소!”

“시주! 살기를 누그러트리시오!”

주석하는 원숙의 목을 죈 손에 내력을 불어넣었다. 내력에 압도당한 원숙의 안색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말하라!”

“안 되오!”

“죽을 텐데?”

“불자에게 해탈은 축복이자 구원이오.”

말이 통하지 않았다. 재차 내력을 주입하여 고통을 가했으나 원숙은 입을 열지 않았다.

보다 못한 원혜가 결사적으로 공격해왔다.

“사악한 마두!”

원혜의 장력이 코앞에 이른 순간 주석하는 혼천십팔지를 뿌렸다.

푸슉-

지법의 위력에 원혜의 장력이 깨졌다. 주석하가 당황하는 원혜의 수혈을 짚었다.

풀썩-

원혜가 쓰러지자 주석하는 다시 원숙을 위협했다.

“말하라!”

“크윽!”

주석하의 내력에 저항하던 원숙이 입에서 선혈을 뿜어냈다. 적지 않은 내상을 입은 원숙의 몸이 덜덜 떨렸다.

대답을 듣기 어렵다고 생각한 주석하는 재빨리 포기했다. 계속 이런 식으로 시간을 소비할 수는 없었다.

주석하는 원숙마저 수혈을 짚어 처리했다. 단지 사문을 수호하려고 노력했을 뿐인 이들을 죽일 생각은 없었다.

쓰러진 두 사람을 한쪽 구석으로 치워놓고 주석하는 사찰 뒤쪽의 숲을 뒤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오늘 밤 내내 숭산을 헤매면서 불망헌을 찾아야 할 듯하다.

**

소실봉 중턱에 나지막한 절벽이 쭉 이어져 있었다.

절벽 중간중간에 참선을 위한 동굴이 뚫려 있는 모습은 이곳이 무공이 아닌 불교의 성지임을 드러냈다.

그 절벽이 끝나는 좁은 장소에 울창한 대나무 숲이 장관을 이뤘다. 짙은 어둠 속에서 대나무 숲 사이로 자연에 동화된 작은 모옥이 존재감을 지우고 있었다.

바로 현 정파 무림의 최강자인 반야불존의 거처였다. 반야불존은 이곳에서 면벽 수련을 하거나 참선하며 불심을 정진했다.

이 작은 모옥으로 한 인영이 날아들었다. 어둠 속에서도 섬뜩함을 풍기는 붉은 인영이었다.

모옥 앞 대나무 숲에 도착한 우설금은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소림사라는 무게감이 그녀의 어깨를 짓눌렀다.

“여기가 불망헌인가…….”

이곳에 잠입하기 위해 백귀와 흑귀가 소림사 입구에서 적의 이목을 끌었다. 그 사이 그녀는 소림사 경내를 뚫고 불망헌으로 내달렸다. 어릴 때부터 오로지 복수를 위해 소실봉 지형과 소림사의 가옥 배치를 외우다시피 했기에 그녀는 직선으로 이곳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우설금의 눈에 모옥 입구에 걸린 작은 현판이 들어왔다. 작은 나무판 위에 웅후한 글씨로 불망헌이라 새겨져 있었다.

“심후한 공력이군…….”

그녀는 지력을 이용하여 손가락으로 새긴 글씨임을 알아챘다. 아마도 저 글을 새긴 사람은 반야불존일 것이다.

불망(不忘)이라……. 무엇을 잊지 못한다는 걸까.

어쩐지 그 이름이 우설금의 가슴을 답답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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