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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검천하-194화 (194/273)

194화 감춰진 진실 (1)

우설금이 모옥으로 한걸음 내디뎠을 때 안에서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주는 뉘신가?”

나이를 추측하기 힘든 음성에 우설금은 일순간 몸이 굳었다. 방금 지나온 소림사의 고찰古刹)과 모옥의 숙연한 분위기 속에 잔잔하게 깔린 고승의 음성은 그녀에게 억겁의 시간을 느끼게 했다.

그 순간 우설금은 자신이 대자연에 속한 볼품없는 한 점이 된 기분을 느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기이한 감정이었다.

모옥 문이 삐걱 열리고 안에서 남루한 가사를 입은 노승이 나왔다.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하고 흰 수염이 배까지 늘어져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앙상한 몸은 곧 죽음을 맞이할 노인처럼 보였건만 그 눈빛만은 지극히 맑았다.

노인은 한 손에 든 선장을 지팡이 삼아 그녀를 향해 무심한 시선을 던졌다.

“반야불존?”

“아미타불, 그렇습니다만 여시주는 뉘시오?”

우설금은 대답할 수 없었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오로지 이 복수만을 위해 살았다. 복수를 위해 밥을 먹었고 복수를 위해 무공을 익혔다. 중원에 들어와서 강호를 전전하는 것도 복수 때문이었다.

그 원흉이 지금 눈앞에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스님의 눈빛이 무척 맑았다. 끔찍한 짓을 저지른 원수라고는 생각지 못할 그런 눈빛이었다.

물론 우설금은 외적인 부분에 연연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오늘 반야불존을 죽여 긴 인고의 세월에 마침표를 찍을 것이다.

우드득-

홍철산을 거머쥔 우설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반야불존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아미타불, 시주는…… 마공을 익혔군.”

“오늘 당신을 처단하러 왔다!”

“능력은 있으시오?”

“마교수호사령인 나에게 불가능은 없다!”

우설금은 자신의 정체를 숨기지 않았다.

우설금을 찬찬히 살핀 반야불존이 허허로운 웃음을 터트렸다.

“허허, 시주는 단천마령이구려. 전설의 고수가 직접 찾아오다니 영광이외다!”반야불존도 단천마령을 모르지 않았다. 만사지존에게 받은 정보 외에 그는 직접 마교를 경험해보기도 했으니까.

“원수! 각오하라!”

우설금이 홍철산을 폈다. 분홍빛 모란이 화려하게 피어났다.

“원수? 노납은 시주와 은원 관계가 없습니다.”

“나의 부친이 네놈 손에 돌아가셨다!”

우설금의 서릿발 어린 호통에 반야불존이 나지막이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시주의 부친이 누구시오? 불자는 살생을 하지 않습니다. 내 비록 무림인이라 살생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그리 많지 않습니다. 다만 당장 떠오르는 자가 없습니다.”그 대답이 우설금을 더욱 분통 터지게 했다.

그녀는 지금까지 하루도 원수를 잊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정작 상대는 기억조차 못 한다니. 반박하려던 우설금은 멈칫했다.

부친이 누구냐고? 아버지 이름이…….

그녀는 아버지 이름을 알지 못했다. 아버지 얼굴을 본 적도 없었다. 다만 천마에게 어려서부터 그녀의 아버지가 반야불존의 손에 죽었다고 들었을 뿐이다. 갑자기 허탈감이 몰려왔다.

어찌 이럴 수가!

“나의 아버지는 마교의 전사였다!”

그녀가 부친에 대해 들었던 기억 전부다.

“마교의 전사라…….”

반야불존이 기억을 더듬었다.

무려 오십 년 전이었던가.

당시 반야불존은 탄허라는 법명으로 강호를 주유했다. 불교에 귀의했으면서도 사마를 지극히 싫어했기에 그는 살수를 서슴지 않았다. 그 덕에 무림 최고의 기재이자 영웅으로 이름을 날렸다. 당시 그는 같은 뜻을 품은 청년 기협과 함께 움직였고 무림에서는 그들을 구주사은이라 칭했다.

그 무렵 우연히 배교의 신물 정보를 얻은 구주사은은 이 신물을 훔쳐 중원으로 들어왔다.

마교와 악연이 시작된 것은 그때부터였다. 그때 반야불존은 마교와 여러 차례 싸움을 치렀다. 중원의 미래를 건 사투였다.

그 후 우청엽이 마교 토벌을 외치면서 특수대를 조직했을 때 반야불존도 가담했었다. 하지만 마교의 습격을 받아 특수대는 붕괴하고 반야불존도 큰 부상을 얻었다.

그때가 언제였던가. 사십 년쯤 전이었다.

우청엽의 마교 토벌은 계속 이어졌다. 가장 최근은 대략 이십 년 전까지. 하지만 반야불존이 마교를 상대한 것은 사십 년 전이 마지막이었다.

“시주, 노납이 마교와 은원이 없다고 변명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노납이 마교와 마지막으로 싸웠던 때가 벌써 사십 년 전이오. 아미타불.”

일순간 우설금은 숨이 턱 막혔다. 무슨 말인지 혼란스러웠다.

“시주의 나이가 마흔이 넘었다면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채 스물이 안 되어 보이는데 어찌 시주의 아버지를 노납이 해쳤을 리 있겠소?”

“거짓말!”

우설금은 알지 못할 두려움에 목소리를 높였다.

“중원과 마교의 전쟁 역사는 어차피 뻔한 것 아니오? 노납이 속이려야 속일 수 없다오.”

우설금의 손에서 홍철산이 툭 떨어졌다. 그녀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그녀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그것도 반야불존의 손에. 그런데 그 시절에는 마교와 중원의 전쟁조차 없었다니.

“아, 아니야.”

우설금은 강하게 부정하면서 전의를 불태웠다. 절대 인정할 수 없었다. 부친의 복수는 그녀 삶의 목표이자 지주였으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천마에게 부친에 대해 더 자세히 물어봤어야 했다. 반야불존이 원수라고 생각한 이후로 그녀는 천마에게 더는 묻지 않았고 주변 사람과도 말을 끊었다. 그렇다 보니 이 사건에 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내면의 복잡한 심사를 눈치 챈 반야불존의 노안에 연민이 어렸다.

“그렇다고 당신이 빠져나갈 틈은 없어! 당신은 나의 원수니까!”

우설금은 전의를 불태우며 반야불존에게 한발 다가가려 했다.

“멈추시오!”한 무리의 스님들이 우르르 몰려와 그녀를 둘러쌌다.

모두 열여덟 명의 젊은 스님이었다. 그들을 본 순간 우설금의 표정이 싸늘하게 바뀌었다.

“소림십팔나한!”십팔나한이 순식간에 우설금을 둘러싸고 진을 형성했다. 진을 조율하는 스님이 반야불존에게 인사했다.

“불존이시여, 원각이옵니다.”

“저 시주는 마교에서 왔으니 조심해야 하느니라. 아미타불.”

반야불존이 당부를 마친 후 뒤로 물러났다.

불망헌 앞에서 소림이 자랑하는 소림십팔나한진少林十八羅漢陣)이 펼쳐졌다. 무림 역사상 깨트린 자가 손에 꼽을 정도였다고 알려진 천고의 절진이다. 현 무림에서는 설사 정파십존이나 흑도팔군이라 할지라도 이 절진을 깨트리기 쉽지 않을 것이다.

나한진의 위력은 이를 펼치는 나한 개개인의 무공 수준에 크게 좌우된다. 지금 나한진을 펼친 제자들은 원(元)자 항렬로 현 방장의 한 배분 아래 제자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나한진이 가동되고 나한들이 쉴새없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중심에 선 우설금에게 가공할 압박이 드리워졌다.

홍철산을 펴고 강기의 압박을 완화하면서 우설금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이런 상황을 예측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천년 소림에는 온갖 위험이 도사리고 있으니 당연히 그 위험을 깨트리고 불존을 죽이려고 이곳에 왔다.

십팔나한진이 아니라 백팔나한진이라 할지라도 그녀는 주저하지 않았을 것이다.

둥!

나한진이 가동되면서 우설금의 귀에 강력한 북소리가 울렸다. 십팔나한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기운이 우설금을 사방에서 압박하면서 육중한 압력으로 억누르기 시작했다.

그녀를 중심으로 회전하는 나한들의 강력한 권강이 그녀를 덮쳤다. 나한 한 사람 한 사람의 내력이 모두 합쳐져 그녀를 억눌렀다. 열여덟 명의 나한이 마치 한 사람처럼 그녀를 몰아붙여 공격 효과를 높였다.

우설금은 예전 상춘원에서 정파십존 둘을 동시에 상대할 때보다 더 큰 위험을 느꼈다. 그녀는 단천마공을 끌어올리며 홍철산을 빙글빙글 돌렸다.

“와라!”

우설금의 신형이 허공을 날았다. 수많은 모란꽃이 공간을 수 놓았다.

홍철산에서 뿌린 산강이 십팔나한진의 기운과 충돌했다. 우설금의 눈빛에 살기가 어리는 순간 십팔나한진 내부를 거대한 적색 광채가 가득 채웠다.

콰아아앙-

**

숭산 소실봉은 그리 큰 산은 아니다. 화산파가 자리한 화산에 비하면 무척 아담한 산이다.

그런데도 주석하는 불망헌을 찾기 쉽지 않았다. 달 없는 밤이어서 더 힘들었다면 핑계이려나.

“젠장!”

무계획을 탓하며 헤매기를 몇 차례, 주석하는 고막을 찢을 듯한 굉음에 노출됐다.

콰아아앙-

이 굉음은 초강고수의 전투에서 발생한 강기의 충격파가 확실했다.

“정말 우 소저가 침입한 건가?”

생각하고 싶지 않던 최악의 경우였다. 덕분에 불망헌 위치가 어렵지 않다. 충격파가 터진 곳으로 가면 그뿐이다. 게다가 그곳은 여기에서 멀지 않다.

주석하의 신형이 어둠을 가르며 높이 솟구쳤다.

불과 몇 번의 도약만에 주석하는 불망헌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의 눈에 드러난 장면은 놀라웠다.

손만 대면 쓰러질 듯한 작은 모옥도 경이로웠으나 그 앞에서 태산처럼 버티고 선 반야불존을 발견한 순간 주석하는 숨이 턱 막혔다.

예전에 만진장에서 돌아오다가 만났던 바로 그 고승이다. 지금은 그때와 위압감이 달랐다.

정체를 모르다가 지금은 알게 되어서일까. 이제는 그 고승이 범상치 않게 여겨졌다.

정작 그를 당황하게 한 것은 반야불존 앞에 펼쳐진 장면이었다.

모두 열여덟 명의 젊은 스님이 곳곳에 나뒹굴고 있었다. 그 한중간에서 붉은 옷의 여인이 숨을 헐떡이며 홍철산으로 땅을 짚고 버티고 있었다.

우설금! 바로 우설금이었다.

‘소림십팔나한진이 깨졌구나!’

예상치 못한 장면에 주석하는 흥분과 동시에 걱정이 앞섰다. 나한진이 박살나서 나한들이 생사를 오가는 모습도 뜻밖이었으나 우설금이 지친 기색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는 장면도 우려스러웠다. 우설금이 저렇게 힘들어하는 모습은 그의 기억에 없었다.

주석하는 한쪽 구석에 조용히 착지한 후 정황을 살폈다.

우설금은 그를 본체만체 반야불존을 노려보면서 고함을 질렀다.

“반야불존! 지금부터 네놈을 단죄하겠다!”그 누가 중원 무림 최강자인 반야불존에게 이런 선언을 외칠 수 있을까.

정작 반야불존은 평온한 표정으로 묵주를 돌리며 나직이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일순간 우설금의 몸에서 붉은 마기가 폭발했다. 그녀의 신형이 빛살처럼 반야불존을 향해 달려들었다.

반야불존이 사자후를 터트리며 선장을 이용해서 그녀의 공세를 차단했다.

콰앙-

홍철산과 선장의 충돌에서 터진 격렬한 충격파가 주위의 대나무 숲을 뒤흔들었다. 우설금의 공세는 단발로 그치지 않았다. 십팔나한진을 깨트리느라 공력 소모가 극심했건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덤벼들었다.

평생 와신상담하면서 오늘만을 기다렸던 그녀이기에 자신의 상세를 도외시하고 오로지 원수를 죽이려는 살수를 뿜어냈다.

우우우웅-

폭발한 붉은 마기가 반야불존을 직격하며 태풍 속으로 몰아넣었다.

죽음을 부르는 마기가 공간을 장악하고 홍철산이 팽이처럼 회전했다. 모란꽃의 환영이 우설금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산강을 폭사했다. 그 순간 천하를 뒤엎는 붉은 광채가 반야불존을 강타했다.

콰아아아-

일순간 눈을 뜰 수 없는 빛무리가 천지를 갈랐다.

누가 이 장면을 인간의 대결이라 할 것인가. 충격파에 휘말린 흙더미와 대나무 잎이 허공으로 떠오르고 하얀 광채를 꿰뚫은 붉은 빛이 벼락처럼 한곳에 꽂혔다.

주석하는 눈을 뗄 수 없었다.

지금까지 이런 싸움이 존재하리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우설금의 무공은 그의 상상을 훨씬 초월했다. 아울러 반야불존의 무공 또한 정파십존의 수준을 아득히 상회하고 있었다.

눈을 멀게 하는 붉은 빛이 공간을 지배하는 순간 번개처럼 주석하의 신형이 빛무리 속으로 뛰어들었다.

“안 돼!”

그의 호신강기가 반야불존을 휘감으면서 붉은 마기를 차단했다.

일순간 천지가 뒤집히는 충격과 함께 공간이 소멸하고 적막이 내려앉았다.

그 충격파가 세 사람을 강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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