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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검천하-195화 (195/273)

195화 감춰진 진실 (2)

울컥!

주석하는 입안에 감도는 비릿한 액체를 삼키며 앞을 바라봤다.

그의 앞에는 우설금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망연자실하게 서 있었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 그를 원망하는 표정이 얼굴에 가득했다.

“으윽!”

우설금도 경련을 일으키면서 선혈을 토해냈다. 하얀 얼굴에 붉은 피가 점점이 흘러내리는 광경은 매우 선명하여 미치도록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에는 평소의 활기차던 생기가 바래 있었다.

간신히 홍철산으로 몸을 지탱한 우설금이 안면을 찡그리며 혼란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우설금의 무사를 확인한 주석하는 뒤를 돌아보았다.

반야불존의 상태는 처참했다. 그의 남루한 가사는 자신이 쏟아낸 피로 붉게 변해 있었다. 끊임없이 경련을 일으키는 그의 몸은 사실상 내력이 완전히 소모되어 더는 무공을 펼치기 힘들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하지만 반야불존의 눈빛만은 여전히 빛났다. 그의 눈은 놀라움이 가득했다.

어찌 되었건 반야불존의 죽음을 막았기에 주석하는 개입한 목적을 달성했다.

“우 소저…….”

그가 방금 방해했던 행동을 설명하려고 한 발 앞으로 다가서는 순간이었다.

“비켜!”

우설금의 신형이 폭발적으로 도약하며 그를 공격해왔다. 미처 펴지 못한 홍철산에서 뿜어진 산강이 그에게 집중됐다.

우설금이 공격하리라고는 예상치 못한 주석하는 얼떨결에 흑검소로 공격을 막았다.

생각 없이 본능적으로 펼친 그의 초식은 흑검육식의 마지막 육 식이었다. 도수가 보완한 불완전한 초식을 최근에 수없이 연습하며 고민했던 터라 위기 순간 엉겁결에 이 초식이 튀어나왔다.

흑검육식은 오 식까지 완벽하게 보완되었으나 육 식은 그렇지 않다. 초식의 흐름이 뚝뚝 끊어지다 보니 제대로 위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퍼퍼퍽-

홍철산과 흑검소가 부딪치면서 만만찮은 충격이 전해졌다. 아무리 내상을 입었다고 해도 두 사람은 무림 최강의 고수다. 그 격렬한 싸움이 평범할 리 없었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내상을 입은 우설금은 정상이 아니었고 주석하 또한 초식이 불완전했다.

“진정해요!”

주석하는 그녀의 공격을 막으면서 강하게 소리쳤다.

공격이 막힌 우설금이 울부짖었다.

“왜! 왜! 내 복수를 방해해! 오직 이날만을 위해 살았던 것을 당신도 알잖아!”

그녀의 목소리에서 한 맺힌 울음이 터졌다.

“그래도 지금은 아닙니다!”

“지금이야! 으흐흑!”우설금의 뺨으로 눈물이 흘렀다.

기세 좋게 움직이던 홍철산이 축 처졌다. 그녀는 다시 홍철산으로 몸을 지탱하면서 주석하를 노려봤다. 그녀의 눈빛에 원망이 가득했다.

“진정해요. 잠시라도.”

주석하는 재차 그녀를 달래고는 뒤를 돌아봤다.

반야불존의 상태는 여전히 나빴다. 짧은 순간이었으나 그는 전혀 내상을 돌보지 않았다. 그의 눈빛은 경악에 물들어 있었다.

“불존…….”

그가 입을 여는 순간 반야불존이 울컥 선혈을 뱉으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따, 따라오게.”

선장을 지팡이 삼아 온몸을 질질 끌면서 반야불존이 모옥 안으로 들어갔다. 사실상 그의 다리는 제 역할을 하지 못해 몸을 주체할 수 없었다.

주석하는 재빨리 우설금을 부축하며 속삭였다.

“일단 들어가 봐요.”

“놔요!”

우설금의 원망에 찬 눈동자가 그를 향했다. 하지만 그녀는 저항하지 않았다.

주석하는 그녀를 끌고 모옥 안으로 들어갔다.

**

모옥 내부는 아담하고 정갈했다. 산에서 수도하는 스님과 딱 어울리는 실내였다.

피투성이가 된 반야불존은 간신히 숨을 내쉬며 탁자 앞의 작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주석하와 우설금은 모옥의 입구에서 주위를 둘러보며 어떻게 할지 고심했다. 방금 목숨을 걸고 싸웠기에 이런 행동은 어색했다.

“……안, 앉게.”

의자라고는 탁자 앞에 놓은 두 개가 전부였다.

주석하는 우설금을 끌고 한쪽 의자에 앉힌 다음 그 옆에 나란히 앉았다. 다행히 우설금도 더는 살기를 내뿜지 않았다.

굳이 상대에게 마지막 손을 쓰지 않더라도 목숨을 얼마 연명하지 못하리라고 추측했기 때문이다.

“먼저 운공부터 하시죠.”

주석하의 권유에 반야불존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네. 어차피 하늘이 정해준 수명 아니던가. 아미타불.”

본인이 괜찮다니 또 강요할 생각은 없다. 이곳에 데려온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 주석하는 조용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와 불존은 예전에 한 번 만났던 사이다. 지금은 뇌군이 만나보라고 해서 다시 찾았다. 뇌군이 반야불존에게 전갈을 넣었을까. 아마도 그랬으리란 예상이 들긴 하지만 굳이 물어볼 엄두는 나지 않았다.

“……잘 컸구나…….”

반야불존의 말은 다소 의외였다. 게다가 그는 주석하뿐만 아니라 우설금마저 살피고 있었다. 생기가 사라져가는 그 눈동자에는 원한이나 공포가 아닌 따스함이 깃들어 있었다.

뭔가 분위기가 이상했다.

“불존 어르신…….”

반야불존이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말하지 말라는 뜻이다.

“……방금 펼친 것이 흑검육식인가?”

어? 흑검육식을 어떻게 알지? 흑검문은 사천의 이름 없는 문파이니 흑검육식은 불존이라는 거물이 알만한 그런 무공 초식이 아니었다. 게다가 방금 펼친 육 식은 불완전하게 보완한 엉망진창인 초식이 아니던가.

“흐, 흑검육식을 아십니까?”

“……흑검육식은 그렇게 펼치는 게 아니야.”

“네?”

당연히 도수가 제멋대로 보완했으니 그 말이 맞긴 하는데 반야불존이 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초식이 틀렸습니까?”

“아니, 초식은 맞아. 예전에 본 것과 같군.”

예전에 봤다고? 순간 주석하는 조부 흑풍검신을 떠올렸다. 그 생각은 구주사은으로 이어졌고 구주사은의 한 인물이었던, 탄허라는 소림의 스님을 소환해냈다.

그랬다. 구주사은의 일인이었던 탄허가 바로 젊은 시절의 반야불존이었으니 젊었을 때 그는 흑풍검신이 펼치던 흑검육식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마지막 육 식은 검으로 펼치는 게 아니라네. 검으로는 검로가 이어지지 않아. 육 식은 진검이 아닌 무형의 검, 심검心劍)으로 펼치는 초식이라네.”

“아!”

깨달음이 왔다. 어쩐지 아무리 고민해도 해결책이 없더라니. 애초에 안 되는 초식이었다. 다만 주석하는 심검의 경지가 아니기에 어떻게 이 초식을 다뤄야 할지 전혀 감을 잡지 못했다.

그의 반응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반야불존이 다시 말을 이었다.

“……자네는 흑풍검신의 후손인가?”

“네, 그렇습니다. 제 조부께서 흑풍검신이십니다.”

“아아, 아미타불. 그랬구나.”

“불존께선 법명이 탄허이고 구주사은이셨습니까?”

“그렇네. 난 자네 조부와 함께 강호를 누비면서 구주사은이란 칭호를 얻었지.”

주석하는 예전에 남궁후에게서 들었던 구주사은의 행적을 떠올렸다. 강호에서 협의를 행하다가 배교에 잠입했고, 배교의 신물을 훔쳐 중원에 들어왔다가 마교에 빼앗긴 후, 그 책임을 통감하고 강호에서 은거했다는.

구주사은이 누구였더라……. 조부인 흑풍검신 주선풍, 제왕검 남궁비, 반야불존 탄허, 그리고…….

반야불존이 시선을 우설금에게 옮겼다.

“……여시주는 노납의 말을 기억하시오?”

우설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평소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반야불존을 노려보고 있을 뿐이다.

“……노납이 마교와 싸운 마지막 시기는 사십 년 전이오. 여시주가 태어나기 전일 테지. 그런데…….”

유심히 우설금의 얼굴을 살피며 반야불존이 장탄식을 터트렸다.

“……노납은 여시주가 누구인지 이제 알게 되었다오.”

우설금은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마치 자기 일이 아닌 듯 무관심해 보였다.

“……여시주가 바로 우설금이군요. 마교수호사령이라는 마교의 지고한 신분…….”

앞서 단천마령이라는 신분을 밝혔기에 반야불존이 이름을 안다고 해도 어쩌면 당연했다. 하지만 이어진 말은…….

“……여시주의 조부가 바로 극마서생 우청엽이오.”

우설금의 눈빛이 확 변했다. 하지만 그 변화는 나타날 때만큼이나 빠르게 잔잔해졌다.

“거짓말!”

“여시주의 조부도 바로 구주사은이었소. 구주사은이 누구인지는 주 시주가 잘 아는 듯하니 생략하고…… 노납은 그 뒷이야기를 해볼까 하오.”

주석하는 혼란을 감출 수 없었다. 갑자기 우설금이 구주사은의 후예라니? 성씨가 같다고 너무 나간 것 아닌가?

머릿속에서 극마서생 우청엽의 일생이 떠올랐다. 남궁후가 착잡한 음성으로 풀어놓았던 한 가문의 몰락사. 평생 마교를 치려다가 가문이 망했던 그 비극이 떠올랐다.

“다른 구주사은과 달리 우청엽은 마교에 빼앗긴 배교의 신물을 되찾기 위해 절치부심 노력했소. 첫 시도는 모든 구주사은이 힘을 합쳤던 오십 년 전이었고 그때는 작전 개시 하루 전에 마교의 기습으로 무참하게 실패했소. 이후 부상을 얻은 남궁비와 주선풍은 은거했고 노납은 그 후로도 약 십 년간 우 대협을 도왔소. 물론 마교의 선공으로 그때도 작전이 실패했소. 그 마지막이 사십 년 전이었소.”이 내용은 예전에 남궁후에게 들었던 대로였다. 남궁비가 일찍 은거했기에 반야불존이 훨씬 이후의 일까지 상세히 알고 있다는 점만 차이가 있을 뿐.

“……노납이 손을 뗀 이후에도 우청엽은 마교 잠입을 시도했고 나중에는 아들까지 함께했소. 우청엽의 아들은 우경천. 바로 여시주의 아버지요.”

드디어 우설금의 아버지 존함이 나왔다. 주석하는 우설금을 힐끔 살폈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으나 그녀의 몸이 떨리고 있음을 직감했다.

주석하는 조용히 그녀의 손을 잡았다. 우설금은 잡힌 손을 빼지 않았다. 점차 손의 떨림이 잠잠해졌다.

“대략 이십 년 전쯤이었던가…… 우청엽은 마교 잠입을 시도하기 전날 나를 찾아왔었소. 그때 아들과 며느리와 함께였지. 며느리는 당시 정파의 꽃이라 불렸던 천향일화(天香一花) 이가흔. 하남에서 검법으로 유명한 정파 가문인 이가장의 금지옥엽이었소. 바로 여시주의 어머니요.”다시 우설금이 미미한 경련을 일으켰다. 주석하는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당시 소림을 방문했던 우청엽, 우경천, 이가흔은 탄허가 거사에 동참해주기를 원했다. 하지만 탄허는 거절했다. 이는 탄허에게 평생 마음의 짐으로 남았다.

마교에 기습을 감행했던 세 사람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려진 바는 없다. 그날 이후로 소식이 끊겼으니까. 반야불존은 그들이 마교에서 장렬한 최후를 맞았으리라고 예상했다. 그때가 우청엽을 본 마지막이었다.

“……그런데 오늘 여시주를 보는 순간 알아봤다오. 여시주는 우경천과 이가흔을 쏙 빼닮았더군. 그리고 여시주가 나에게 했던 원수 이야기와 연결해보니…….”반야불존의 추측은 대략 이러했다.

마교로 갔던 그 세 사람은 최후를 맞이했다. 다만 무슨 연유였는지 모르지만 그곳에서 이가흔은 우경천의 아이를 낳았다. 그 아이가 바로 우설금이다. 우설금을 낳은 직후 부모 두 사람은 모두 죽었고.

우설금은 천마의 손에서 자랐다. 천마는 우설금에게 아버지가 마교의 전사이며 중원 무림인, 그것도 반야불존에게 살해당했다고 끊임없이 주입했다.

그 결과 어릴 때부터 우설금은 반야불존을 원수로 생각하게 됐다. 오직 반야불존을 죽이는 것만이 인생의 목표였다.

그렇다면 우설금은 지금까지 엉뚱한 사람을 원수로 알고 자랐던 건가. 진정한 원수는 그녀를 길러준 천마였던 건가. 지금까지 가장 가까운 사람이자 은인으로 알았던 천마가 반대로 할아버지와 아버지, 어머니를 죽인 원수였다니!

아아! 이렇게 간악한 사람이라니!

모든 진실이 혼란의 도가니였다.

“아냐! 그럴 리가 없어!”

우설금이 신음을 내뱉었다. 모옥에 들어온 후 처음 내뱉은 목소리였다.

그녀의 하늘이 무너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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