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감춰진 진실 (3)
우설금에게서 단천마공이 폭발적으로 뿜어졌다.
내상을 입은 상태임에도 그녀의 기운은 모옥을 날려버릴 듯 강렬했다. 그 기운이 반야불존을 죽일 듯 압박했다.
“커윽!”
이미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가던 반야불존은 탁자에 한 움큼 선혈을 토해냈다. 그의 몸이 곧 쓰러질 듯 휘청거렸다.
주석하는 황급히 그녀의 손을 힘껏 잡았다. 그녀가 내력으로 더욱 압박하면 반야불존은 바로 목숨이 끊어질 것이다. 게다가 그녀의 내상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그의 진심이 손을 통해 전달된 때문일까. 서서히 우설금의 기운이 사그라들었다.
간신히 숨을 쉬던 반야불존이 죽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노납은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네. 우 대협에게 졌던 마음의 빚을 이렇게라도 청산할 수 있다면 복 받은 거지. 다만…… 여시주가 마교를 돕는 것만은 용납할 수 없네. 마교는 여시주의 원수 아닌가…….”꾹!
주석하는 다시 우설금의 손을 움켜쥐었다.
떨림을 가라앉힌 우설금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당신의 말을 믿을 수 없어. 이 모든 건 당신의 간교한 술책이야!”
“……사십 년 전 이후로 마교와 중원의 전쟁이 있었는지 확인해보면 될 일 아닌가. 또 과거의 극마서생 우청엽을 기억하는 사람을 만나보게. 여시주가 우청엽과 얼마나 닮았는지. 아니면 이가장을 찾아가게. 천향일화 이가흔의 본가이니 자네에겐 외가일세. 화존도 한때 이가흔과 친했었지. 여시주 얼굴만 봐도 과거의 여협 이가흔을 떠올릴 거네.”
“아니야!”
우설금이 고개를 저었다.
주석하는 그녀의 혼란과 번민을 이해했다. 갑자기 하루아침에 바뀌어 버린 원수. 지금은 그 누구의 말도 믿을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그 증거가 단지 비슷하게 생긴 것이라니.
반야불존을 향한 우설금의 분노는 여전했다.
한동안 눈을 감고 불호를 외우던 반야불존이 다시 말을 이었다.
“……우 시주, 현재 우 시주의 무공은 정파십존도 넘보기 힘들 만큼 엄청나네. 아마 그 모든 것을 마공을 익혀 얻었을 테지만, 그 내력 속에서 다른 이질적인 기운을 느낀 적은 없나?”내공 이야기가 나오자 주석하도 관심이 쏠렸다. 우설금의 내공은 정말 심후했다. 어린 나이에 그만한 내력을 얻기란 쉽지 않다. 주석하 본인처럼 타인이 전수하지 않는다면. 그런데 천마가 그녀에게 내력을 나누어줄 리 없지 않은가.
“앞선 우 시주와의 싸움에서 노납은 눈치 챌 수 있었다네. 지금 우 시주의 단전에는 우청엽의 기운이 잠재해 있어. 청아한 성질을 띤 기운일세. 마교에서 쌓은 단천마공의 기운과는 다른 기운이네. 물론 그 기운은 단천마공 내력과 융합하여 흔적이 뚜렷하지 않으나 아직도 그 존재감이 있을 거네. 그런가?”우설금의 신형이 한차례 격동을 일으켰다.
주석하는 바로 눈치 챘다. 반야불존의 말이 진실이란 것을. 우설금이 우청엽의 내력을 품고 있다는 말은 그녀의 조부가 우청엽임을 입증해주는 명백한 증거였다.
“우청엽의 후예이기에 여시주는 현재의 무공 수준에 이를 수 있었네.”
우설금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뺨을 타고 한줄기 눈물이 뚝 떨어졌다.
반야불존의 시선이 주석하에게 옮겨졌다.
“……시주, 뒤쪽의 장을 살펴보게. 그곳에 작은 목합이 있을 거야.”
주석하는 몸을 일으켜 벽에 세워진 장식장을 살폈다. 대충 만든 낡은 목재 장식장이었다.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나뭇결이 바래 있었다.
주석하는 그곳에서 작은 목합을 발견했다. 목합 또한 오랜 세월을 증명하듯 먼지와 손때가 가득했다.
목합을 탁자에 올리자 반야불존이 목합을 개봉했다. 목합 내부에 선지로 싸인 물건이 보였다.
“아미타불, 이것이 바로 여의신단이네.”
여의신단如意神丹). 예전에 들어본 기억이 있는 것 같은데 무엇이었는지 잘 떠오르지 않았다.
주석하를 힐끗 본 불존이 천천히 선지 포장을 풀었다. 내부에서 옥색의 작은 알약이 한 개 나왔다.
“……들어봤을지 모르지만 여의신단은 배교의 신물일세.”
그제야 주석하도 생각났다. 배교의 신물은 무한회귀공, 만리안석, 여의신단이었다. 그 마지막 여의신단이 지금 눈앞에서 존재감을 드러냈다.
“여의신단은 원래 여러 개였는데…… 일부를 마교에 빼앗기고 남은 것은 이것 하나뿐이라네. 여의신단의 효능은…….”
여의신단은 일반적인 영약과는 달랐다. 소림사 대환단이 내상을 치유하고 내공을 일 갑자 가까이 올려주는 영약이라면 여의신단은 효능이 다르다. 엄밀하게 따지면 여의신단에는 내공을 증진하는 효과가 없다. 다만 서로 이질적인 내력을 융합해주는 효능이 있을 뿐이다.
이 세상에서 내상을 치유하는 영약은 무수히 많고 크든 작든 내력을 향상하는 영약도 많다. 하지만 서로 이질적인 내공을 융합해주는 영약은 오직 여의신단밖에 없다.
“아마 여시주도 과거에 여의신단을 복용한 경험이 있을 거네. 그런가?”
우설금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주석하는 그 답을 짐작할 수 있었다.
태어나자마자 우설금은 우청엽의 내공을 이어받았을 것이다. 천마는 여의신단을 이용해서 우청엽의 기운과 마공의 기운을 서로 융합했다. 우설금이 마공을 익히려면 어쩔 수 없는 과정이었다.
반야불존이 여의신단을 다시 포장한 다음 목합에 넣었다.
“……주 소협, 이 여의신단을 자네에게 주겠네. 단 한 알 남은 것이네만 지금 자네에게 가장 필요한 영약일세.”
주석하는 가슴이 뛰었다.
지금 그의 체내에는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내공이 쌓여있다. 다만 그 다섯 기운은 이질적이라 서로 융합하지 않고 따로 놀고 있었다. 여의신단이 그 내공을 융합할 수 있다면 그는 전무후무한 내공 최강자가 될 것이다. 진정한 고금제일인으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그의 앞에 목합이 놓였다.
“자, 여기 있네. 물론 강요는 아니네만 자네가 그 보답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이미 알 거네. 예전에 말한 적 있으니까.”
과거에 반야불존은 그에게 중심을 잡으라고 했고 배교의 신물을 없애라고 했다.
배교의 신물 세 가지 가운데 남은 신물은 무한회귀공과 만리안석인가. 불존은 만리안석의 출현을 알지 못하니 무한회귀공을 없애란 뜻이다.
주석하는 배교의 신물과 운명적으로 엮인 자신을 느꼈다. 이게 바로 하늘이 내린 천명일까.
반야불존이 거칠어진 숨을 내쉬었다.
“……이, 이제 노, 노납이 이생에서 할 일이 모두 끝났네……. 길지 않은 인생이었으나 후회는 없다네. 끄, 끝이 좋으면 괜찮은 삶이…… 아니었겠나…….”염주를 돌리던 반야불존의 손이 멈췄다. 주름진 얼굴에 온화한 빛이 감돌고 어느 순간 눈이 감겼다.
모옥에 짙은 어둠과 침묵이 내려앉았다. 중원 무림을 지탱했던 거목의 죽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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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상으로 비틀거리는 우설금을 부축해서 주석하는 모옥 밖으로 빠져나왔다.
동이 트지 않은 새벽은 여전히 어두웠고 웅장한 소실봉은 어두운 그림자를 불망헌에 드리우고 있었다.
모옥을 나오면서 주석하는 왜 이곳의 이름이 불망헌인지 깨달았다. 반야불존은 우청엽을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그 마음의 짐을 잊을 수 없기에 불망이라 명명한 이 모옥에서 수행을 쌓고 있었다.
착잡해진 그의 상념을 난데없는 고함이 깼다.
“아미타불, 시주는 누군가?”
예리한 살기가 엄습했다.
주석하는 눈을 들어 앞을 바라봤다. 불망헌 앞뜰에는 아직도 쓰러진 십팔나한이 뒹굴고 있었다. 그와 우설금을 맞이한 자는 모두 다섯. 얼핏 보기에 불존과 비슷한 나이의 노인들이었다.
“당신들은 누굽니까?”
주석하는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곳에서 한바탕 난리를 벌였으니 당연히 누군가 찾아올 것이라고 예상했다.
노인들의 안면에 당혹과 분노가 드리워졌다가 사라지기를 수차례, 다시 평소의 인자한 얼굴로 돌아갔다. 과연 수행하는 고승다웠다.
“아미타불, 본승은 소림의 불심각주라네. 함께 온 이들은 장경각주, 세심각주, 법화각주, 천수각주이네.”
소림에는 오각이 존재한다. 바로 불심각佛心閣), 장경각藏經閣), 세심각洗心閣), 법화각法華閣), 천수각千手閣)이다. 소림을 지탱하는 오각의 각주는 선대 장로급의 고승이 관장했다. 당연히 그 무공은 현 소림 방장에 뒤지지 않았다.
소림사가 무림에서 위세를 유지하는 이유도 오랜 전통과 함께 불심과 무공을 겸비한 고승들이 즐비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정파십존에 버금가는 다섯 인물이 몰려온 셈이었다.
주석하는 상황이 꼬였음을 깨달았다. 지금 모옥 내부에는 반야불존이 죽어 있다. 그들이 죽였다고 오해받기 딱 좋은 상황이다. 물론 반야불존의 죽음에 그들이 관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저는 주석하이고 이쪽은 우설금입니다.”
주석하는 간략하게 소개했다. 어차피 이름을 들어도 절에 틀어박혀 있던 저들은 제대로 모를 테니.
“아미타불, 사문이 어딘가?”
역시 다시 질문이 돌아왔다.
뭐라고 해야 할까? 흑검문에 마교? 아니면 흑검서생에 단천마령? 그것도 아니라면 구주사은이었던 흑풍검신과 극마서생의 후예? 그 어느 것도 적합하지 않았다.
이들을 뚫을 수 있나? 지금 우설금의 상태는 그리 좋지 않다. 그 또한 우설금과 반야불존의 싸움에 끼어드는 바람에 온전하지 못하다. 물론 우설금에 비하면 부상이라 할 수도 없지만.
“저는 흑검서생이고 제 옆은 단천마령입니다.”
“마교!”
소림 오각주는 흑검서생을 몰랐으나 단천마령을 알아들은 듯했다. 순간 다섯 고승이 그들을 포위했다.
불심각주가 침통한 어조로 질문을 이었다.
“아미타불, 감히 소림에 잠입하다니! 반야불존께선 어디 계신가?”
그들이 모옥에서 나오는 장면을 본 모양이었다. 하긴 이곳이 불망헌 앞뜰이니 당연한 물음일지도.
“불존께선 열반에 드셨습니다.”
“뭣이라?”
경악한 신음이 터지는 가운데 천수각주가 모옥 안으로 들어갔다가 비명을 지르며 밖으로 튀어나왔다.
“부, 불존께서 입적하셨습니다! 저들의 짓입니다!”
그러잖아도 나쁜 분위기가 급변했다.
다섯 고승이 뿜어내는 막강한 기운이 장내를 휩쓸었다.
주석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승려가 살생을 멀리한다는 말은 이들을 보면 모두 엉터리였다. 또 고승이 진중하고 사려 깊다는 말도 틀렸음이 확실했다.
그래도 일단 설득해봐야겠지?
“저희들은 방금 불존께서 남기신 마지막 유언을 들었습니다. 불존께선 저희 사문과 인연을 강조하시며 당부하셨습니다. 선물도 주셨고요.”
불심각주가 미간을 찌푸리자 천수각주가 바로 거들었다.
“거짓말! 십팔나한진을 깬 자가 너희가 아니란 말이냐?”
“그건…… 오해에서 비롯된 일입니다.”
“역시 살인범이 확실하구나!”오각주가 이를 부드득 갈았다. 이미 내공을 끌어올려 단죄하겠다는 의사를 비친 자도 있었다.
“우리는 소림과 싸울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니 물러나시죠.”
불쾌한 표정으로 불심각주가 염불을 외웠다.
“아미타불, 십팔나한을 건드린 순간 이미 타협의 여지가 없음을 모르는가? 더구나 너희는 불존을 해친 용의자다. 절대 놓아줄 수 없으니 순순히 항복하라!”“항복은 무슨 항복입니까? 목숨으로 대가를 치르게 해야지요.”천수각주가 다시 전의를 부추겼다.
주석하는 이곳에서 이런 식으로 일이 흘러가리라고는 헤아리지 못했다. 불존과의 만남이 쉽게 끝나리라고 생각지 않았지만 소림 전체를 상대로 무력을 행사할 일이 발생하리라고는 짐작치 못했다.
오늘 밤, 그의 조부와 또 우설금의 조부와 큰 인연을 맺었던 불존은 세상을 떠나면서 그에게 여의신단이라는 배교의 신물을 넘겨주었다.
게다가 그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주었기에 그 은혜를 절대 저버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불존을 향한 그런 존경이 소림사 고승에게까지 미칠 수 없었다.
무림맹주 앞에서도 굽히지 않았는데 소림이라고 다를까.
그는 우설금을 돌아봤다. 비록 파리한 얼굴이었으나 그녀 또한 마음이 다르지 않았다.
좋다! 뚫는다! 천년 소림이라 한들 그의 앞을 막을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