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검천하-197화 (197/273)

197화 감춰진 진실 (4)

소림오각주의 무공은 정파십존과 사실상 차이가 없었다. 개개인의 무공은 최강자인 반야불존에 미치지 못하고 간신히 말석에 이름을 올릴 수준이었으나 그들의 합공은 달랐다.

이들은 젊었을 때 소림십팔나한진을 훈련했었기에 서로를 잘 알고 합격진에 능했다. 실로 오랜만에 연합 공격에 나섰음에도 그 호흡이 남달랐다.

“감히 소림을 능멸하다니! 소림의 이름으로 그대를 단죄하겠다!”

대장격인 불심각주의 호통에 오각주는 분노를 불태웠다. 수십 년간 경내에만 처박혀 있다가 오늘에야 몸을 풀게 되었으니 피가 끓어올랐다.

소림의 핵심인 그들은 자존심을 걸고 나섰다.

우우우웅-

합격진이 형성되자 다섯 방향으로 포위한 오각주에게서 엄청난 압박감이 밀려들었다.

‘이건 단순한 내공 압박이 아니구나.’

주석하는 몸을 짓누르는 기운에 혀를 내둘렀다. 내공으로 찍어 누른다면 오히려 손쉽게 내공으로 맞대응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감각은 또 달랐다. 마치 호랑이 앞에 무방비로 서 있는 듯한 정신적인 피로가 몰려왔다.

이래서 소림인가.

주석하는 적의 공세에 대응하고자 악군의 내력을 끌어올렸다. 다른 이유는 없다. 혼군의 내력은 약간의 내상을 입어 완전하지 않았고 다섯을 한꺼번에 상대하려면 다른 무공보다 음공이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고즈넉한 사찰에서는 맑은 악군의 기운이 더 잘 어울릴 것이라는 쓸데없는 아집이 있긴 했다.

“내가 저들을 상대하는 동안 빠져나가요.”

주석하는 우설금에게 나직하게 속삭였다. 의외로 우설금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이상한데?

주석하는 부축했던 우설금의 팔을 풀고 화판답공을 시전했다. 그의 몸이 허공에 반 장가량 떠올랐다. 마치 허공을 자유롭게 부유하는 듯한 그의 보법에 오각주가 놀라는 순간 주석하는 흑검소를 입에 댔다.

삘리리리-

퉁소 소리가 적막을 깨트렸다.

천무태평악! 악군의 절정 음공이 소림에서 재현됐다.

천무태평악을 시작하는 순간 주석하는 음률을 형상화한 강기의 파편을 태풍처럼 휘몰아쳤다.

파파파파-

전신을 찢을 듯한 강편의 기습에 오각주는 다급하게 염불을 외며 합공을 강화했다. 그들은 주석하를 중심에 두고 빙글빙글 돌며 합격진을 가동했다.

“아미타불!”

호신강기로 음공을 방어하면서 오각주는 다섯 사람의 내력을 합친 사자후로 주석하의 음공에 대항했다.

사방으로 뿌려지던 음공의 파편이 합격진의 방어막에 차단되자 산산이 부서졌다. 음률 강편이 연합진을 강타하면서 파문이 일렁거렸다.

불심각주는 주석하의 무공에 경악했다.

‘……이자는 악군의 제자인가? 과연 무서운 음공이다!’

불심각주는 염불 소리를 올려 오각주에게 합격진을 강화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들이 내공을 강화하자 음공의 파편을 차단하고 서서히 주석하를 압박하는 상황으로 전세가 바뀌기 시작했다.

오각주의 사자후에 주석하는 가슴이 터질듯한 압력을 체험하고 있었다.

악군 혼자만의 내력으로는 오각주의 합력을 감당하기 쉽지 않았다. 사자후에 실린 날카로운 예기가 그의 음공을 뚫고 피부를 자극하자 단전에서 잠자던 다른 내력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이었다.

합격진의 압력에 함께 저항하던 우설금이 홍철산을 펼쳤다. 그녀는 곧장 주석하의 위로 날아올랐다.

- 오래도록 기다렸죠. 당신이 나를 바라볼 때까지.

- 단아한 기품, 숨길 수 없는 표정. 그리움만 쌓였죠.

천무태평악의 음률에 맞추어 우설금의 신형이 허공을 노닐기 시작했다. 홍철산이 회전하면서 산강을 뿌렸다. 그 산강은 천무태평악에서 일어나는 강기의 파편에 조화롭게 스며들어 그 위력을 배가시켰다.

“크으윽!”

순식간에 음공의 위력이 두 배로 증가하자 오각주는 신음을 토해냈다. 그들은 음공의 위력을 파훼하고자 합격진의 모양을 변형하고 염불 암송을 빨리했다. 그들의 염불 소리가 마치 천둥 치듯 주석하의 고막을 때렸다.

순간 우설금의 움직임도 달라졌다. 허공을 부유하는 꽃잎을 밟고 날아다니는 듯 음률의 파편을 넘나들면서 순간순간 공세를 합격진의 한곳에 집중했다.

주석하의 음공과 우설금의 마공이 합쳐진 산강의 집중된 위력을 오각주 개인이 견딜 수 있을 리 만무했다.

“허억!”

그 압력이 강타한 천수각주의 움직임이 흐트러지는 순간 합격진은 한차례 위기를 맞았다.

- 이별은 피할 수 없고 사랑은 가슴을 가득 메워.

- 꽃비가 날리고 기다림이 길어져도 사랑은 돌아오지 않아요.

우설금이 허공에서 우아하게 춤췄다. 그녀의 흐드러진 동작마다 홍철산이 무시무시한 산강을 쏟아냈다.

“저들의 공세를 흘려라! 바로 맞서면 위험해!”

불심각주의 외침에 천수각주는 다급하게 신형을 바로잡았다. 재차 염불 암송이 이어지고 휘청이던 합격진이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 당신을 그린 하늘은 여전히 변함없네요. 마치 내 마음처럼.

- 미소 짓던 당신을 기억하기에 당신의 눈빛에 묶여버렸죠.

음공이 고조되는 만큼 우설금의 마공이 강화됐다. 그녀를 휘감은 붉은 기운이 홍철산에서 그려지는 모란꽃의 잔영과 뒤섞여 화려한 빛의 폭죽을 뿌렸다.

불망헌 주변은 강기의 태풍에 노출됐다. 아름드리 고목이 잘려나가고 나뭇잎이 비처럼 떨어졌다. 사방 수십 장을 쑥밭으로 만드는 가공할 위력이었다.

‘으으, 저들은 아수라의 현신이다! 이대로는 감당할 수 없다!’

불심각주는 결단을 내려야했다. 여유롭게 저 둘을 잡기는 불가능하니 목숨을 걸고 저들을 노려야 할 상황이다. 그래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다.

전세는 생사를 건 건곤일척의 승부로 치닫고 있었다.

“아미타불!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오각주의 불호 소리가 높아졌다. 음파와 사자후가 격렬한 충돌을 일으키고 흔들리던 합격진이 다시 안정화하기 시작했다.

불심각주를 비롯한 오각주는 전심전력으로 주석하를 공격했다. 반야불존을 죽인 살인마를 절대 살려둘 수 없었다. 소림의 명예를 위해 목숨을 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우설금의 춤도 절정에 접어들었다.

내상이 악화하고 있으나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지금 그녀는 무아지경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북해에서 주석하와 합을 맞춰보았기에 천무태평악에 단천마공을 실은 합공은 매우 자연스러우면서도 위력적이었다.

정신을 혼란하게 했던 출생의 비밀도 지금 이 순간만은 그녀를 괴롭히지 못했다. 그녀는 주석하의 천무태평악과 한 몸이 되어 춤을 추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 눈을 감아도 떠오르는 그대의 고운 눈매는.

- 세월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고 그리움만 쌓이네.

음공에 올라탄 산강이 그 위력을 더했다. 천지가 음률에 호응하듯 아름다운 음파가 소실봉 전체를 뒤덮었다. 이제는 멀리서도 퉁소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새벽의 적막을 가르는 곡조였다.

오각주의 합격진이 흔들린다.

주석하 혼자였다면 어려웠을 것이다. 우설금이 음공에 힘을 더하면서 그 위력이 놀랄 만큼 달라졌다. 지금 이 순간 천무태평악의 위력은 무엇이라도 깨트릴 것이다.

우설금의 상세가 걱정되었다. 지금은 빨리 합격진을 깨는 것만이 그녀를 돕는 길이다.

천무태평악의 마지막 곡조가 절정에 이르러 오각주를 공격했다. 상대의 호신강기를 깨트리고 주요 혈맥을 공격하는 강기의 편린과 피부를 바늘로 찌르듯 깔리는 음파공이 전투 지형을 바꾸고 있었다.

홍철산이 꼿꼿하게 서는 순간 맑고 붉은빛의 광채가 일순간 공간을 잠식했다.

고오오오-

- 그리워하고 사랑하리니. 쏟아지는 눈물은 그치지 않고.

- 긴 세월 막을 수 없고 흘러가는 그대의 사랑 잡을 수 없네.

음파를 타던 우설금의 단천마공이 폭발했다.

콰아아앙!

그 누가 이런 위력을 보일 수 있을까. 천지각주와 법화각주는 가슴을 갈가리 찢는 산강의 위력에 속수무책이었다. 억누를 틈도 없이 비릿한 선혈이 목구멍을 넘어왔다. 수십 년을 쌓았던 내공이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몸 내부에서 역류했다. 심각한 내상의 징후였다.

세심각주와 장격각주의 상태도 다르지 않았다. 견디지 못한 그들은 울컥 선혈을 뿜어냈다. 그들이 걸친 가사는 완전히 넝마로 변했다. 가사만이 아니었다. 그들의 피부 또한 마치 도마에서 다져진 고기처럼 피투성이가 됐다.

불심각주의 안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미 내력의 흐름이 끊어져 혈맥이 엉망이었다. 끊어진 혈맥은 몸의 거동을 사실상 불가능하게 했다. 하지만 지금 그의 걱정은 자신의 몸이 아니었다.

‘마, 마교다!’

그는 우설금의 무공이 마교에 전래 된, 하늘을 거스르는 마공임을 알아챘다. 일평생 불도에 정진한 사람으로서 모를 수 없었다. 마공의 현신은, 그것도 이런 엄청난 위력의 마공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은 중원 무림의 암흑기를 의미했다.

“아미타불! 이것이 불존의 뜻인가……. 소승의 능력이 미치지 못하여 아수라를 세상에 풀어 놓는구나…….”

숨이 끊어졌으나 회한 가득한 눈은 감기지 않았다. 소림을 지탱하던 오각주의 죽음이었다.

오각주의 합격진이 깨지는 순간 우설금도 무사할 수 없었다. 이미 십팔나한진을 깨느라 무리했던 내력이 반야불존과의 대결에서 사실상 바닥을 드러냈다. 그리고 방금 그녀가 선보였던 천무태평악과의 연합 공격은 그녀의 상태를 최악으로 몰고 갔다.

실이 끊어진 연처럼 우설금이 허공에서 추락하는 순간 주석하는 천무태평악을 멈췄다.

절정의 화판답공으로 우설금을 낚아챈 그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그녀를 품에 안았다.

재차 그의 발이 허공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한 마리의 비조처럼 우설금을 품에 안고 주석하는 오각주의 포위망을 뛰어넘었다. 이미 죽음의 문턱을 넘어서 와해 된 포위망은 장벽이 될 수 없었다.

“우우우-”

주석하는 긴 장소성을 터트리며 어둠 속을 질주했다.

지금은 일단 소림을 벗어나야 했다. 시간이 늦어질수록 우설금의 생명이 위험해질지 모른다.

**

도수는 소림사 산문 부근에서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

주변에는 사찰의 승려가 몰려와 그를 잡으려고 난리였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렇게 난리를 피워도 진정한 소림의 고수는 아직 등장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소림오각의 각주나 소림오원의 원주 정도 되는 자가 나타나면 그도 이렇게 난리를 피지 못 할 것이다.

어쨌든 주석하의 잠입을 위해 이목을 끄는 작전은 얼추 성공한 듯했다.

다만 이상한 점이 있었다.

“저쪽은 누구지?”

그가 막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을 때 사찰 저쪽에서 다른 자가 그와 비슷한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물론 차이점은 있었다.

도수는 몰려든 소림사 승려를 상대하면서 손속에 사정을 뒀다. 소림과 철천지원수도 아니었고 말단 승려를 죽인다고 하여 득 볼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객으로 살아오면서 수많은 목숨을 빼앗았지만, 그는 무차별로 사람을 죽이는 살인마가 아니었다.

그런데 저쪽에서 난동을 부리는 자들은 달랐다. 흑색과 백색이라는 이상한 조합의 옷을 입은 두 사람은 무자비한 살수를 펼쳤다. 그들은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 그들의 앞에 시체가 산을 이뤘다. 아비규환의 지옥이었다.

“나보다 더 심한 놈들!”

절로 눈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이곳은 소림이다. 그들 셋이 아무리 날뛴다고 해도 그 많은 승려를 어쩔 수 없다. 격전이 벌어지고 자연스럽게 밀리면서 도수는 그 두 사람과 만나게 됐다.

도수는 두 사람에게 웃음으로 인사했다. 그런데 두 사람은 그에게 눈길을 주지 않고 오로지 적을 베는 일에만 열중했다.

‘대체 어떤 놈들이야?’

이렇게 무자비하게 고기 썰 듯 사람을 죽이는 문파가 어디인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가 속한 암흑단도 잔인하기로는 손에 꼽히는데 이들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한참 그들과 어울리며 승려와 쌈박질을 벌이던 도수는 은은하게 들려오는 퉁소 소리에 감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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