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검천하-198화 (198/273)

198화 은원의 굴레 (1)

‘음공을 시작했어. 상대가 다수인가?’

운중산에서의 참상을 떠올리며 도수는 주석하를 염려했다. 운중산에서는 고수가 자하검존 한 사람뿐이었지만 이곳 소림에는 셀 수 없이 많을 테니까.

일순간 퉁소 소리가 끊어졌다.

그것이 주석하의 승리를 뜻하는지 아니면 패배를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만일 주석하가 목적을 이뤘다면 소림을 빠져나와야 할 테니 그는 더욱 열심히 이들의 이목을 끌어야 했다.

도수가 힘을 내어 상대를 향해 검을 휘두르고 있을 때 이번에는 긴 장소성이 울렸다.

‘석하구나!’

조용히 빠져나오지 않고 왜 소리를 지르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지만 어쨌든 무사한 것 같아 힘을 냈다.

서걱-

그의 검에 가슴을 맞은 불자가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대충 한 달은 요양해야 할 부상이다. 이 정도면 무력화하기에 충분하다.

“크윽.”

옆에서 한 승려의 머리가 날아갔다.

하얀 옷을 입은 놈이 강한 기운을 내뿜으며 살수를 아끼지 않은 덕분이다.

‘이것들 옆에 있으니 나도 살인마가 된 기분이네.’

그 잔인함에 놀란 도수는 그들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지금 흰 옷과 검은 옷의 무공은 자신과 비교해도 절대 낮지 않았다. 게다가 검초 또한 빠르고 날카로웠다. 암흑단의 무공과 비교해서 절대 자비롭지 않다.

무엇보다 그들의 기운과 검초에서 어딘지 모르게 이질감이 느껴졌다.

‘이들이 누구지? 어디선가 본 듯한데?’

순간 도수의 뇌리를 강타하는 생각이 있었다.

마교다! 소림을 공격하는 두 사람은 당연히 정파가 아니고 사파라고 하기엔 왠지 낯설었다. 그렇다면 마교일 수밖에 없다. 최근에 마교가 중원에 입성했다더니 이들은 마교에서 온 건가?

마교가 왜 이곳에서 소림의 이목을 끌고 있는지 알 재간이 없었다. 하필 그와 같은 장소에서 같은 시각에.

“젠장! 나도 마교인 것 같네!”

주석하와 그처럼 이들도 같은 편이 소림에 잠입한 건가? 문득 드는 의문이 머리를 떠나기도 전, 어두운 밤하늘에 붉은 잔영이 길게 뻗었다. 마치 하늘에서 별이 떨어지는 듯한 장관이었다.

그 광경을 목격한 자들이 일순간 손을 멈췄다.

우우우-

다시 장소성이 적막을 갈랐다.

도수는 그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어둠 때문에 흐릿하게 보이는 흑의가 주석하임을 알려줬다.

주석하가 홍의 여인을 안고 소림사 경내를 가로질러 달려오고 있었다.

그들이 가까워졌을 때 도수는 여인의 정체마저 알아챘다.

‘우설금이 왜 여기에?’

알 수 없는 일투성이였다. 더 놀라운 사건은 다음에 발생했다.

우설금을 품에 안은 주석하가 소림을 빠져나오는 순간 지금까지 옆에서 살상을 자행하던 두 사람이 그 뒤를 쫓았다.

“어? 나만 버려두고?”

혼비백산한 도수도 급히 그들을 쫓았다.

도수와 다툼을 벌이던 소림사 승려들은 닭 쫓던 개처럼 그들이 사라진 허공만 쳐다봤다.

우설금을 안고 질주하는 주석하를 추적하면서 도수는 눈앞의 두 사람을 주목했다.

어디에서 봤을까. 그의 기억이 예전의 아득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다. 그리고 만진장을 찾아가던 때 가끔 눈에 띄었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 장면은 더욱 시간을 거슬러서 형이 죽었던 그 별장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그날 별장에서 보았던 한 여인이 생각났다. 붉은 옷을 입은 여인과 그 옆에서 호위하던 희고 검은 옷을 입은 두 남자.

지금까지 왜 몰랐을까. 우설금이 그때 그 여자라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 흑검문에서 우설금을 보면서도 의심하지 않았던 단순함이 원망스러웠다.

그녀는 주석하의 연인이니까…… 단지 그렇게만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우설금은 이미 오래전부터 그와도 엮여 있었다.

얼마 전 설란과 주석하에게서 들었던 원수 이야기가 떠올랐다.

아버지를 죽인 자가, 형을 죽인 자가 마교인이라면 설마 우설금이 관련된 건가? 그날 장원의 첫 만남이 무척 의심스러웠다.

불안감과 기대감에 도수의 발걸음이 더욱 빨라졌다.

**

소실봉에서 한참 벗어나서야 주석하는 경공을 멈췄다.

그의 품에는 우설금이 죽은 듯 눈을 감고 안겨 있었다. 나지막이 들리는 그녀의 숨소리가 아직 무사하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으나 불안감은 가지지 않았다.

이리저리 주변을 둘러보던 주석하는 산등성이에 세워진 낡은 토지묘를 발견했다. 그와 우설금이 안정을 취하려면 노출된 야외보다 토지묘가 훨씬 나았다.

토지묘 앞에 내려서는 순간 뒤따라온 흑귀와 백귀도 헉헉대며 멈췄다.

“아가씨는요?”

“아직 무사합니다.”

주석하의 대답에 두 사람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주석하는 우설금을 내려놓았다. 우설금이 휘청거리며 그를 붙잡고 간신히 몸을 지탱했다. 마지막에 무리해서 단천마공을 폭발시켰던 그녀는 몸 내부의 혈맥이 엉망이었다. 빠른 치료가 필요했다.

흑귀와 백귀의 우려 섞인 시선을 감지한 우설금이 작게 손을 저었다. 걱정하지 말고 물러나란 뜻이다.

한숨을 내쉬며 흑귀와 백귀가 몸을 돌렸을 때 새로운 두 인영이 장내에 나타났다. 도수와 녹윤영이었다.

“괜찮아?”

도수의 다급한 음성에 주석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별일 아냐. 우 소저의 상태가 나쁘긴 하지만.”

우설금을 확인한 도수의 안면에 갈등이 일었다.

안색이 하얗게 질렸으니 내공을 쥐어짜듯 모두 소모한 것이 확실했다. 빨리 운기하지 않으면 자칫 돌이킬 수 없는 위험에 빠질지도 모른다. 주석하가 토지묘를 찾은 이유도 빤히 보였다.

도수는 주석하와 우설금, 그리고 뒤에서 지켜보는 흑귀와 백귀를 의식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아버지와 형의 복수는 그의 인생 전부나 마찬가지였다. 따지고 보면 그가 흑검문에 몸을 의탁하고 암군에게서 무공을 사사한 것도 모두 복수 때문이 아닌가.

눈앞의 우설금이 그 원흉과 연관되어 있고 어쩌면 그 당사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를 몰아붙였다. 설마 아니겠지. 하지만 확인해봐야 한다.

“우 소저…….”

도수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우설금이 주석하에게 기댄 채 그를 쳐다봤다.

“당신은 마교인인가요?”

우설금이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주석하는 도수의 다음 질문을 알아챘다.

“수! 나중에…….”

“안 돼! 지금이야!”

소리를 버럭 지른 도수가 입술을 질끈 깨물고 우설금을 직시하며 말을 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하나만 묻죠. 살검회 알아요?”

우설금이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내 아버지를 죽였어요? 살검회주요.”

우설금의 눈빛이 변했다. 그녀의 안면에 은은한 경련이 일었다.

짧은 시간이었으나 도수에게는 억겁의 시간만큼 길었다. 듣지 않아도 이미 답을 들었다는 느낌이 왔다.

천천히 우설금이 고개를 끄덕였다.

쿵!

도수의 가슴에 커다란 돌이 내려앉았다. 우설금이 아버지를 죽인 범인이었던가? 아버지의 원수가 바로 눈앞에 있었던가.

한동안 도수는 세상에 홀로 버려진 것처럼 막막한 심정에 잠겼다. 오감이 마비되고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마치 죽은 사람 같았다.

몇 번이고 긴 숨을 내쉰 다음에야 도수는 다시 정신을 차렸다. 그는 주석하를 기대고 선 홍의 여인을 향해 타오르는 분노를 쏟아냈다.

아버지를 죽인 원수!

도수는 간신히 분노를 억누르고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 형도 당신이 죽였나요?”

우설금이 고개를 천천히 옆으로 저었다.

“그래도 마교가 죽였겠죠?”

우설금의 고개가 그렇다고 긍정을 표시했다.

진상이 밝혀졌다. 그의 형 도수는 마교인이 죽였고 살검회는 곤륜십이검수가 범인이었으며 아버지를 죽인 원수는 우설금이었다.

도수는 검을 꽉 쥐고 한동안 경련을 일으켰다. 아버지를 죽인 원수가 앞에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당연히 죽여야 하는데, 단죄해야 하는데…….

주석하가 어쩔 수 없이 끼어들었다.

“수! 미안하다.”

도수의 음울한 눈동자가 주석하를 향했다.

“너도 알고 있었지?”

“그래.”

그 말이 도수의 마음을 산산이 부숴놓았다. 함께 아버지를 죽인 원수를 찾아다녔는데, 그때 우설금도 있었는데 그 모두가 거짓이었다. 가장 가까운 친구는 진실을 알면서도 그에게 숨겼다. 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를 놓고 그를 조롱하고 있었다.

“원수!”도수가 검을 우설금에게 겨눴다. 검 끝이 우설금의 목에 닿을 듯 말 듯 접근했다.

“아가씨!”

놀란 흑귀와 백귀가 뒤에서 도수의 목을 겨눴다. 도수는 그들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목에 칼이 들어왔는지조차 관심이 없었다.

“원수는 목숨으로 갚아야 한다! 할 말 있어?”

도수의 분노가 격동을 일으켰다.

그의 뒤에서 흑귀와 백귀가 맞받아쳤다.

“네놈도 같이 죽는다! 검을 놓아라!”

우설금은 머릿속이 텅 빈 기분이었다.

당연히 죽음의 문턱에 들어선 우설금은 피할 기운이 없었다. 그녀는 평소처럼 표정 없는 얼굴로 도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에게 오늘 하루는 너무 잔인했다.

일평생 원수로 알았던 자를 죽이고 봤더니 원수가 아니었다. 자신이 그토록 따랐던 천마가 원수로 바뀌었다. 삶의 의욕이 사라졌다. 천마에게 복수해야 하는지 하지 말아야 하는지 아직 선택조차 하지 못했다.

그런데 눈앞에 자신과 비슷한 사람이 있었다. 부모를 죽인 원수를 찾아 강호를 떠돌고 무공을 연마하던. 놀랍게도 자신은 그의 원수였다. 그녀가 중원에 들어와서 죽였던 많은 사람 가운데 그의 부친이 있었다.

삶과 죽음은 종이 한 장 차이고 평소에도 삶에 집착하지 않은 그녀였기에 이런 상황은 대수롭지 않았다. 하지만 그 상대가 주석하의 친구라는 게 걸렸다. 자신의 연인을 이렇게 발목 잡고 싶지 않았는데……. 그에게 마음의 고통을 주고 싶지 않았는데……. 그에게 이런 식의 선택을 강요하고 싶지 않았는데…….

“미, 미안해요.”

우설금은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녀의 입에서 울컥 선혈이 뿜어졌다.

“그, 그게 미안하다고 해결될 문제냐고!”

도수가 울부짖었다. 손에 쥔 검 끝이 부들부들 떨렸다.

우설금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짧은 인생을 이쯤에서 끝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자신의 본 모습을 찾은 지 하루도 채 안 되었지만 이게 운명이라면 어쩔 수 없겠지. 복수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죽음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주석하 친구의 검에 찔려 인생을 마무리하는 것도. 그래도 이곳은 주석하의 품 안이니 나름 따뜻하지 않은가. 시신이 산짐승 먹이가 되지 않게 챙겨주겠지.

그녀의 눈앞에 주석하와 보냈던 짧은 시간이 명멸했다. 함께 미로에 갇혀 사지를 헤매고 시원한 북해에서 천무태평악을 들으며 허공을 지치던 즐거운 시간까지.

그 무렵이 그녀에게는 가장 인간답게 살았던, 가장 감정에 충실했던 시간이었다. 그 장면 하나하나를 가슴에 새겼다.

삶을 포기하자 그녀는 마음이 평온해졌다. 눈을 감은 채 세상을 향해 가슴을 열었다. 많은 사람을 죽였고 그 죄를 용서받을 수 없으니 이쯤에서 마무리해야겠지.

주석하는 도수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우설금을 죽이면 안 된다고, 그녀를 용서하라고 말하고 싶지만 차마 입을 열 수 없었다. 자신이라면 부친을 죽인 원수를 살려둘 수 있을까.

“으아아!”

도수의 울부짖음이 밤공기를 가르는 순간.

푹-

도수의 검이 우설금의 가슴팍을 찔렀다.

우설금은 비명도 없고 표정 변화도 없었다. 마치 죽음을 달관한 사람 같았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흑귀와 백귀는 일순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 아가씨!”

도수는 검을 놓았다. 그의 검이 우설금의 가슴 위쪽에 꽂혀 있었다. 그녀의 붉은 옷이 피로 얼룩지는 모습이 선명했다.

“으으으!”도수가 주먹을 쥐고 울분을 삼켰다. 그는 원망스러운 눈으로 주석하와 우설금을 노려보고는 몸을 돌렸다.

흑귀와 백귀가 저지하기도 전에 도수는 순식간에 그 둘을 제치고 산길을 달려갔다.

멀리서 상황을 지켜보던 녹윤영이 눈치를 보다가 도수를 따라갔다.

순식간에 토지묘 앞에는 주석하와 피를 흘리는 우설금, 흑귀와 백귀만이 남았다.

주석하는 재빨리 우설금을 부축했다.

우설금의 상태는 최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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