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은원의 굴레 (2)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주석하는 검이 꽂힌 상태로 우설금을 토지묘 안으로 옮겼다.
흑귀와 백귀는 도수를 추격할 수도 토지묘 안으로 따라 들어갈 수도 없어 일순간 공황에 빠졌다. 그들은 토지묘 앞에서 경계에 들어갔다.
토지묘 내부는 꽤 오랜 기간 버려져 있었던 듯 온통 거미줄투성이였다. 정면에 빛바랜 토지공 신상이 세워져 있고 곳곳에 낡은 제사용품이 뒹굴고 있었다. 심지어 한쪽 구석에는 모닥불을 피운 흔적마저 남은 것을 보면 가끔 이곳에서 노숙하는 사람이 있는 듯했다.
주석하는 깊숙이 안으로 들어가 상의를 벗어 바닥에 깐 다음 우설금을 눕혔다.
“으으음.”
의식을 잃었음에도 고통스러운 듯 우설금이 안면을 찡그렸다. 어깨와 가슴 사이에 도수의 검이 꽂혀 있고 그곳에서 피가 스며 나오고 있었다.
일단 검부터 처리해야 한다.
그는 힘껏 검을 뽑았다. 피가 분수처럼 솟았다.
그는 재빨리 지혈한 후 그녀를 찬찬히 살폈다. 다행히 검에 베인 상처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능숙한 자객이자 고수인 도수가 이런 실수를 할 리 없다. 이것은 분명히 도수의 배려라고 봐야 했다. 그는 우설금을 죽일 수 있었음에도 죽이지 않았다. 도수가 우설금에게 연민을 느꼈을 리는 없을 테니 분명히 그를 배려한 처사였다.
“수, 고마워…….”
이 밤에 어딘가에서 분노를 삭이고 있을 도수를 떠올리자 죄책감이 들었으나 지금은 우설금이 급했다.
우설금의 목숨을 위협하는 부상은 자상이 아닌 내상이다. 소림십팔나한진과 반야불존, 소림오각주와 연달아 싸웠다. 그것도 목숨을 걸고. 아무리 심후한 내공을 지닌 그녀라 할지라도 한계에 다다랐다. 그 싸움 과정에서 전신 혈맥이 대거 손상됐다.
내력이 완전히 바닥났고 혈맥이 망가졌으며 이 상태에서 외상이 겹쳤다. 몸은 스스로 치유할 능력을 잃었다. 이대로 두면 목숨을 구하더라도 최소한 무공을 잃게 될 것이다.
“일단 혈맥부터 복구해야 한다…….”
혈맥을 회복하려면 운공 요법이 최상이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한 줌의 내력도 없고 내력을 운기할 정신도 없다. 온전히 그가 감당할 수밖에 없다.
주석하는 그녀를 뒤집어 눕힌 다음 그 옆에 정좌하고 앉았다.
제대로 효과를 보려면 우설금 또한 정좌하고 내력을 받아들여야 하지만 지금은 임시방편으로 이런 방식을 택할 수밖에 없다.
그는 조심스럽게 명문혈로 내력을 흘려 넣었다.
우설금의 내력이 바닥났기에 몸속에서는 별다른 저항이 없었다. 천천히 그의 기운이 우설금의 체내 혈맥을 타고 떠돌기 시작했다.
곳곳의 혈맥이 끊어져 일주천이 불가능했다. 예상보다 그녀의 상태가 심상찮았다.
‘이 지경이 되도록 버텼구나…….’
그녀는 소림오각주와 싸우면서 체내의 모든 내력을 불살랐다. 그것도 몰랐다니! 다시 그때로 돌아가면 절대 그녀에게 오각주를 공격하는 임무를 맡기지 않으리라.
주석하는 내력을 이용해서 그녀의 상한 혈맥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고통 때문일까. 우설금이 경련을 일으켰다. 좋지 않은 반응이다.
치료를 진행하며 주석하는 우설금의 체내를 관조하게 됐다. 그녀의 내부에는 단천마공이 형성한 어마어마한 내공과 이에 상반되는 청아한 내공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우설금의 심후한 내력의 비밀이 풀리는 순간이다.
주석하는 이 청아한 내공이 우설금의 조부인 극마서생 우청엽이 그녀에게 남긴 마지막 선물임을 알 수 있었다.
다섯 기운이 섞여 혼란스럽게 존재하는 그와 다르게 우설금의 두 기운은 서로 융합하여 하나의 내공처럼 존재한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천마가 배교의 신물인 여의신단을 그녀에게 복용시켰기 때문이다.
지금 주석하에게 여의신단이 한 알 남아 있으니 훗날 그도 여의신단을 복용하면 우설금처럼 하나의 내공으로 다룰 수 있게 될 것이다.
주석하의 진기는 세심하게 우설금의 혈맥을 어루만졌다. 그녀를 본래의 상태로 되돌리려면 조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다. 만일 지금 외부의 간섭이 발생하면 우설금은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토지묘 밖은 백귀와 흑귀를 믿고 그는 우설금에게만 신경을 쏟았다.
고오오오-
주석하가 내력을 강화할수록 경련을 일으키던 우설금의 몸이 서서히 안정을 되찾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주석하의 몸에서 뻗어 나오는 맑은 기운과 우설금의 단천마공 기운이 서로 어울리기 시작했다.
**
어두운 산속을 정신없이 질주하던 도수는 어느 순간 걸음을 멈추었다.
이곳이 어디인지 전혀 자각이 없었다.
소림이 있는 숭산 소실봉에서 꽤 떨어졌다는 느낌은 있었다. 짙은 어둠이 점차 옅어지면서 동쪽에서 뿌연 여명이 다가오고 있었다. 참으로 험난하고 얄궂은 운명의 밤이었다.
“하아! 하아!”
도수는 거친 숨을 내뱉었다. 사실 그는 우설금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우설금이 죽든 살든 알 바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미련 없이 우설금을 찌를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그녀를 부축하고 있는 주석하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주석하는 현재 이 세상에 남은 그의 유일한 지인이었다.
주석하가 형에게 장포를 넘기는 바람에 형이 마교의 희생양이 되었음에도 차마 주석하를 질책할 수 없었다.
그런데 아버지를 죽인 원수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는 사실만은 차마 용서할 수 없었다.
“왜 숨겼냐고!”
그는 어둠이 깔린 숲을 향해 호랑이가 포효하듯 소리 질렀다.
그가 그렇게 열심히 원수를 찾고 있었는데도 숨겼으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그도 주석하의 속내를 짐작한다. 우설금이라고 미리 밝혔다면 그는 다짜고짜 우설금에게 대들었을 테고 이미 이 세상을 하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이 선택할 문제가 아닌가. 주석하가 해답을 골라줄 문제가 아니다.
지금 이 산속에서 주석하에게 분노를 터트리고 있지만, 도수는 자신이 주석하 앞에서 어떤 불평도 할 수 없음을 잘 안다. 그는 친구니까. 하지만…… 하지만 그렇기에 더 슬펐다.
“……아버지!”
도수는 그 자리에 주저앉으며 오열했다.
우설금을, 우설금을 죽였어야 했는데 결국 못 죽였다. 가슴을 찌른다는 것이 가슴이 아닌 그 위를 찔렀다.
“바보 같은 놈!”
아마 주석하라면 그녀를 살릴 것이다. 결과적으로 원수를 살려 줬다. 용서해준 것도 아닌데.
“……소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지금이라도 돌아간다면, 돌아가서 우설금을 찌른다면 그녀를 죽일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의 복수도 성공한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친구를 잃게 될 것이다.
어쩌면 단순한 선택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복수냐, 친구냐. 선택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 심지어 그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그마저 예측이 되지 않는다.
“으흐흐흑!”
도수는 땅에 손바닥을 짚고 주저앉았다. 떨어진 눈물이 흥건히 땅을 적셨다.
한바탕 오열하고 있자니 누군가의 손이 어깨를 토닥였다.
“도 공자, 마음껏 울어요.”
따뜻한 그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알아챈 도수는 몸을 떨었다. 그의 울음소리가 더욱 커지고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아버지도 당신의 마음을 아실 거예요. 자식의 행복만을 바라는 게 부모라잖아요? 이미 검으로 찔렀으니 복수는 끝난 거예요. 이제는 자신을 위해 몸을 추슬러요. 아버지도 당신이 다시 힘차게 일어나 강호를 누비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실 거예요.”
“으흐흐흑!”
바닥으로 엎어지는 그를 따스한 품이 감쌌다.
도수는 녹윤영의 품이 이처럼 아늑한 줄 처음 깨달았다. 그는 그녀의 품에 안겨 목 놓아 울었다.
녹윤영은 도수를 토닥이며 감정의 혼란에 휩싸였다.
처음 도수를 만났을 때부터 항상 툭탁거렸다. 그는 항상 장난스러웠고 자유로워 보였다. 그는 신체의 자유보다 정신적인 자유가 더 큰 사람이었다. 그와는 단 한 번도 진지하게 말을 나눠본 기억이 없었다. 말을 거는 순간 말다툼부터 시작했으니까.
그랬는데…… 항상 유쾌하고 활달했던 그가 지금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이 사람도…… 힘든 세월을 살고 있었구나.’
새삼 그를 새롭게 보게 됐다.
그의 내면을 자세히 알고 나니 지금까지 그와 보냈던 시간이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갑자기 그가 남자로 보였다.
그는 살검회의 소회주였고, 흑도팔군의 일인인 암군의 제자였으며 사파의 떠오르는 신성이었다. 몇 년의 세월이 흐르면 그는 사파에서 손꼽히는 고수가 될 것이다.
그의 배경이, 그의 의지가, 그의 천재성이 그녀의 예측이 옳다고 알리고 있었다. 이곳까지 함께 오는 동안 흑검육식을 재창조하다시피 한 천재성을 목격하지 않았던가.
녹윤영은 자신도 모르게 도수의 얼굴을 품에 꽉 묻었다. 앞으로 그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상처 입은 그에게는 달래줄 사람이 필요할 테니까.
**
우설금이 정신을 차린 것은 이틀이 지난 후였다.
그동안 주석하는 우설금 옆에서 노심초사하며 시간을 보냈다.
아쉽게도 도수는 돌아오지 않았다. 녹윤영도 마찬가지였다. 도수와 녹윤영은 그 길로 만진장으로 갔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그들을 기다리면서도 한편으로는 돌아오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정신을 차린 우설금의 안색은 핏기가 없었고 목소리에도 힘이라곤 없었다.
“도 공자는요?”
잠을 깬 우설금이 처음 입 밖에 낸 말이었다.
“만진장으로 갔어요.”
주석하는 대충 둘러댔다.
우설금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정신을 잃기 전 상황을 기억하는 듯했다.
“몸은 어때요?”
우설금은 안면을 찡그리며 대답하지 않았다. 당연히 좋을 리 없으니 매우 나쁘다는 것으로 알아들었다.
주석하는 상체를 일으키는 그녀를 잡아주며 운기를 유도했다.
“일단 운기조식부터 하세요.”
“여기는 어디예요?”
“소림에서는 꽤 멀어졌어요.”
안심하는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던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흑귀, 백귀는…….”
“밖에서 망보고 있어요.”
“네.”
그제야 우설금은 힘겹게 정좌해서 앉았다.
“불존이 죽었으니 복수는…… 끝난 건가요?”
우설금의 안색이 다시 어두워졌다. 괜한 것을 물었나.
“모르겠어요. 지금은 아무 생각도 안 나요.”
평생 원수로 생각했던 사람이 죽었다. 그런데 새로운 원수가 나타났다. 하지만 그 사람을 원수로 낙인찍고 복수의 칼을 갈기엔…….
그녀에게 그 일은 지난 생을 모두 부정하는 최악의 고통을 가져올 것이다. 게다가 상대는 감히 그녀가 어찌해볼 수 없을 만큼 강하다. 그렇다고 그 모두를 무시하기엔…….
“그래요. 지금은 몸을 추스르는 게 우선이죠. 복잡한 문제는 나중에 생각해요.”
“네. 불존이 꼭 진실을 말한 거라는 보장은 없으니까…….”
우설금은 간밤에 벌어진 사건을 믿고 싶지 않은 듯했다.
실제로 반야불존이 진실을 알려주지 않았을 수도 있다. 마교를 분열하기 위한 고도의 술책일지도. 하지만 주석하는 진실이라고 생각했다.
그도 구주사은의 후예였기에. 오십 년 전 사건부터 지금까지 그 모든 일을 조작하여 두 사람을 획책했다고 여기기엔 정황이 너무 방대했다.
우설금은 자기방어 본능에서 진실이 아니라고 거부하고 싶은 모양이지만 그럴수록 그 충격은 더 커질 것이다.
주석하는 그녀가 안쓰러웠다. 이 세상에서 가족도 친지도 없이 오직 혼자인 그녀는 홀로 이 모든 짐을 짊어져야 한다.
다만 위안이 되는 점도 있긴 했다.
그녀가 그와 같은 구주사은의 후예이기에, 선대부터 깊은 인연을 맺었던 가문이기에 그들 두 사람은 훨씬 잘 어울릴 것 같다.
흑풍검신 주선풍과 극마서생 우청엽의 후예. 그 둘이 맺어진다면 정말 잘 어울리는 조합 아닐까.
앞으로는 그녀가 마교이기에 느꼈던 이질감이 한층 줄어들 것이다.
운기조식을 시도하던 우설금이 선혈을 울컥 뱉어냈다. 염려하는 주석하의 도움을 거절하고 우설금은 재차 운기를 시도했다.
주석하는 그녀의 옆에서 조용히 상황을 주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