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검천하-200화 (200/273)

200화 은원의 굴레 (3)

반나절이 지나서야 우설금은 운기조식에서 깨어났다.

그동안 주석하는 소모된 내력을 완벽히 회복했다. 그는 평소처럼 다섯 기운이 공존하는 상태였다.

우설금의 다 죽어가던 낯빛이 원상태로 회복됐다. 물론 이것이 그녀의 내상이 치유되었음을 의미하진 않는다. 이번 내상은 꽤 심각해서 본래대로 회복하려면 적어도 한 달이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어쨌든 죽음의 위험에서 벗어났기에 주석하는 안심했다. 설사 소림사에서 다시 몰려오더라도 이제는 그들을 어찌할 수 없다. 지금의 소림은 최강고수인 반야불존과 핵심인 오각주마저 죽었기에 그 힘이 매우 약화했다.

설사 소림에서 이곳 토지묘를 발견하더라도 공격해오기 어렵다.

우설금은 원상회복되자 흑귀와 백귀를 불렀다.

두 사람은 가부좌를 튼 우설금 앞에 무릎을 꿇고 감격했다.

“아가씨! 완쾌되셨군요.”

“너희들도 고생이 많았다.”

“아가씨를 위험에 처하게 했으니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주석하는 한쪽에서 그들의 대면을 흐뭇한 표정으로 구경했다.

애초에 주석하는 흑귀와 백귀가 우설금의 단순한 부하라고 간주했다. 우설금 지위에서 데리고 다니는 평범한 수하. 저들은 우설금보다 마교가 우선이니 극단적인 상황이라면 우설금을 버리고 마교 편으로 돌아설 것으로 예상했다.

그런데 화산에서 마교칠왕을 죽여 마교를 배신한 우설금을 보고서도 계속 그녀를 따르고 있으니 단순한 주종관계가 아닌 것 같았다.

“괜찮아. 나 때문에 너희들이 고생이네. 총단에 연락은 했나?”

“예, 반야불존의 죽음을 보고했습니다.”

“그래.”

우설금은 평온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백귀가 머뭇거리다가 말을 꺼냈다.

“총단에서는 소림사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돌아오시라고 권했습니다.”

“당연한 명령이긴 한데…… 분위기는?”

“특별한 조짐은 없었습니다.”

이번 소림사 습격은 우설금이 평생 벼르던 일이었기에 천마도 밀어주는 분위기였다. 오히려 안위를 걱정해서 지원군을 보내겠다는 것을 그녀가 거절했다.

문제는 화산에서 발생했던 마교칠왕 두 사람의 죽음이다. 자하검존을 비롯한 세 문파 장문인과 싸우다가 마교칠왕 두 사람이 죽은 사건은 상세히 뜯어보면 다소 터무니없었다.

천마도 그 의문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다만 그 사건에서 우설금의 개입을 상상할 수 있을까. 그 해답을 우설금 본인도 알지 못했다.

반야불존이 죽으면서 우설금에게 알린 진실을 천마가 짐작할 수 있을까.

우설금은 평소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라면…… 가야겠지.”

“위험하지 않을까요?”

“가지 않을 방법은 없잖아? 핑계도 하루 이틀이고…….”

우설금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사실 예전에 북해로 주석하를 따라간다고 몇 개월을 늦췄던 적이 있긴 했다. 이번에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 못 미룰 상황은 아니지만…….

우설금은 진실을 확인하고 싶었다. 자신의 할아버지가 우청엽이 맞는지.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죽인 원수가 천마인지. 어쩌면 어머니마저 천마가 죽였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떻게 확인해야 할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천마에게 직접 물어볼 수는 없지 않은가.

백귀가 뒤를 이어 보고를 계속했다.

“그리고 소림사에서 대대적으로 공표했습니다. 소림사에 흑검서생과 홍의 여인이 쳐들어와서 반야불존을 죽였다고요. 이 두 사람을 무림 공적으로 선포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조심해서 움직이셔야겠습니다.”소림사에서 그 난장을 부렸으니 충분히 예상했던 결과였다. 그래도 우설금에 관한 추가 정보가 밝혀지지 않아 다행이었다. 그녀가 마교인이라는 뜬 소문이 돌기도 했으나 아직은 믿지 않는 분위기였다.

“알겠다. 그럼 옷을 준비해줘. 내 것과 주 공자 것. 대충 무난한 색상으로.”

“알겠습니다.”

흑귀와 백귀가 토지묘를 나갔다.

주석하는 우설금의 심리적 변화를 읽었다.

사실 아무것도 아닌 일이지만 옷 색상은 그녀의 정체성을 의미했다. 그녀는 항상 붉은 옷을 입었고 붉은 띠로 머리를 묶었다.

예전에 덕양에서 하북팽가를 상대할 때 연노랑 궁장을 입기도 했으나 이는 어쩔 수 없는 사정 때문이었다.

그랬던 그녀가 오늘은 자진해서 옷 색상을 바꾸겠다고 한다. 이것은 단천마령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에 금이 갔음을 의미했다.

주석하는 내심 환영하면서도 그녀의 심경 변화를 우려했다. 사실 옷 색상은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을.

두 사람만이 남자 우설금이 눈을 마주치며 옆자리를 가리켰다.

“주 공자, 여기 앉아 보세요.”

무엇 때문일까. 주석하는 머쓱한 표정으로 옆에 앉았다.

“여기 면포…… 누가 맸어요?”

우설금이 도수에게 찔린 자상을 가리켰다. 가슴 조금 위에 깊게 찔린 상처다. 지금 그곳은 깨끗하게 닦고 약을 바른 다음 하얀 면포로 싸맨 상태였다.

순간 주석하의 안면이 확 붉어졌다.

“내, 내가 맸습니다.”

남녀가 유별하니 함부로 보거나 건드릴 수 있는 부위는 아니다. 하지만 그때는 정신이 없었고 다급한 상황이었다. 목숨이 오가는 판에 예의를 따질 때인가.

솔직히 그리 많이 노출하지도 않았다. 가슴 위쪽이라 목과 어깨 부위를 드러낸 정도니까. 물론 그것도 양갓집 규수라면 치명적이긴 하지만.

“그, 그랬군요. 고마워요.”

우설금의 안면에 살짝 홍조가 일었다.

그녀에게도 부끄러워하는 감정이 있다는 사실에 주석하는 기분이 좋아졌다. 우설금도 여자였다.

“제가 잘못했나요?”

용기를 내서 물어봤다.

“아뇨.”

“흑귀나 백귀보다 제가 면포를 싼 게 더 낫지 않나요?”

따지듯 묻는 그를 보고는 우설금이 민망한 듯 미소를 지었다.

‘그것만은 절대 흑귀나 백귀에게 양보할 수 없지.’

주석하는 조금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지금 그때를 돌이켜봐도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때는 너무 급해서 우설금을 살리겠다는 생각만 했기에 이것저것 따질 겨를이 없었다.

그가 마음이 싱숭생숭해져서 머뭇거리고 있자니 우설금이 대화를 전환했다.

“여의신단 있죠?”

아! 그 중요한 것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주석하는 품에서 반야불존이 준 여의신단 목합을 꺼냈다.

그녀가 목합을 열고 여의신단을 손바닥에 올렸다. 선지 포장을 풀자 옥색의 작은 알약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의신단은 서로 다른 기질의 내력을 융합하는 특별한 효능이 있어요.”

주석하는 그날 여의신단을 넘겨준 반야불존의 모습을 떠올렸다.

“불존이 당신에게 이 알약을 준 것은 당신에게 이 알약이 필요하다는 뜻이겠죠.”

물론 우설금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평소 주석하는 싸울 때 여러 성질의 기운을 드러냈다. 그것도 뜨거운 기운과 차가운 기운이 공존하니 분명히 불가사의한 일이다.

“여의신단의 복용법은 조금 특이해요.”

우설금은 토지묘 한쪽에 놓인 작은 그릇에 물을 담았다.

“그냥 삼키면 안 되고…… 효력을 극대화하려면 물에 완전히 녹인 다음 그 물을 마셔야 해요.”

“그대도 여의신단을 먹었었나요?”

우설금이 고개를 끄덕였다.

“불존이 말했던…… 그 청아한 기운?”

다시 우설금이 같은 반응을 보였다. 안타깝게도 그녀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할아버지 우청엽이 전수한 것으로 보이는 그 기운은 불존의 말이 진실임을 뜻하는 증거이니까. 어쩌면 우설금이 가장 피하고 싶은 결과일지도 모른다.

모든 진실을 받아들이려면 그녀는 시간이 필요하다.

주석하가 보는 가운데 우설금이 물에 여의신단을 넣었다.

다소 시간이 걸렸다. 여의신단이 녹으면서 물색이 옥빛이 됐다.

우설금의 친절한 안내와 다정한 행동에 주석하는 흡사 결혼한 것 같은 행복을 느꼈다. 이런 우설금이라면…… 정말 마다할 이유가 없다.

완전히 녹았을 때 우설금이 주석하에게 정좌를 요청했다.

긴장감이 일었다. 무려 흑도팔군 다섯 사람의 진기를 융합하는 일이다. 이 융합에 성공한다면 그는 무림 역사상 전무후무한 내공 최강자가 될 것이다. 역사상 모든 사람이 꿈꿨던, 만년설삼과 공청석유 등을 구해 내공을 올리려고 발악했던, 역대 모든 고수가 바랐던 그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다.

아무도 가지 않았던 그 길에 주석하가 처음으로 발을 내디뎠다.

지금까지는 그의 내공이 다른 정파십존이나 마교칠왕과 큰 차이가 없었다면 이 융합이 성공하는 순간부터는 차원이 다른 경지에 오르게 된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수준이다.

설사 그들이 연합해서 합공하더라도 이제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 내력 면에서도 초식 면에서도. 어떤 분야에서도 절대 밀리지 않는다.

‘천마는…… 어떤 경지에 있을까?’

도저히 짐작조차 할 수 없다. 평범한 자라면, 단지 마교에서 마공을 수련한 자라면 천마는 절대 내공에서 그를 능가할 수 없다.

천마는 무한회귀공을 익힌 회귀자다. 그는 과거로 회귀를 반복하면서 다른 사람에 비해 훨씬 긴 시간을 살았다. 그 기간을 모두 내공 수련에 힘썼다고 해도 그를 넘기 쉽지 않다. 정말 수십 번 계속 회귀하지 않았다면.

만일 만년설삼을 발견해서 회귀할 때마다 반복적으로 그 영약을 복용했다고 하더라도 영약의 내성을 고려하면 그 효과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만년설삼 두 뿌리를 먹었다고 내력이 한 뿌리 대비 두 배가 되지는 않으니까.

이런 관점에서 파악한다면 천마가 주석하의 내공을 능가할 가능성은 사실상 없다.

‘뇌군의 노림수가 성공한 것일까.’

주석하는 마음속으로 뇌군에게 축하를 보내면서 그릇에 담긴 옥색 물을 마셨다.

“제가 호법을 설 테니 내력을 운용해봐요.”

우설금의 목소리가 들뜬 그를 차분하게 했다.

그 어느 때보다 주석하는 편안하게 운기를 시작했다.

극양염천신공을 이용해서 가장 심후한 염군의 내력부터 끌어올렸다.

고오오오-

뜨거운 기운이 단전을 빠져나와 온몸을 나른하게 만든다. 일주천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평소와 다른 점이 없었다. 하지만 두 번째 일주천을 시작했을 때 복용한 여의신단의 효과가 나타났다.

염군의 내력에 흡수된 여의신단이 혈맥을 돌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놀라운 현상이 발생했다. 단전에서 나머지 네 기운이 꿈틀댔다. 위기 상황이 아닌데도 모든 기운이 잠을 깨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단전에서 일어난 혼군, 악군, 빙군, 독군의 기운이 기지개를 켜면서 염군의 내력과 섞이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온몸에 경련이 일었으나 통증은 없었다. 다만 엄청난 양의 내력이 혈맥을 이동하면서 평소와 다른 세계로 안내했다.

무공이 새로운 경지에 오르는 기분이라면 다소 과장일까.

함께 혈맥을 흘러가면서 처음에는 이질적으로 나뉘었던 기운들이 일주천을 거듭하면서 혼합하기 시작했다. 몇 차례 일주천이 거듭되자 이제는 각각의 기운을 구분하는 것이 무의미해졌다.

주석하의 내력은 새로운 경지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의 기운은 이제 음험하지도 않고, 맑지도 않고,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고 끈적끈적하지도 않았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음험하고, 맑고, 차고, 뜨겁고, 끈적끈적했다. 그 기운은 실로 오묘했다.

새로운 절대지존(絶代至尊)이 탄생했다.

천하제일인이자 고금제일인. 역사상 그 누구도 밟지 못한 새로운 경지에 주석하는 발을 디뎠다.

바로 뇌군이 전생에서, 십만대산 아래에서 절치부심하면서 계획했던 고금 최강의 경지였다.

흑검서생의 능력이 활짝 개화하는 순간이었다.

그 역사적인 시간을 우설금이 진지한 태도로 지켜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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