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화 오대세가 (1)
숭산 소림사에서 백 리가량 떨어진 곳에 보은사라는 작은 절이 있다.
평소라면 한가했을 이 절은 마침 연등절을 맞아 향화객으로 붐볐다. 사찰 곳곳에 화사한 연등이 걸려 고색창연한 오색단청과 어울린 모습은 장관이었다.
주석하와 우설금은 보은사에 머물렀다.
소림사가 그들을 무림 공적으로 지목하고 수배하는 상황에서 굳이 객잔에 투숙하여 위험을 무릅쓸 생각은 없었다.
우설금의 몸 상태가 극도로 좋지 않았기에, 조용한 사찰에 머물면서 당분간 몸조리하는 게 유리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렇게 결정한 곳이 보은사의 객방이었다.
가는 날이 장날인지 마침 연등절이 시작되어 이틀 만에 사찰 경내가 사람들로 북적였다. 하루만 늦었으면 객방 잡기도 힘들 뻔했다.
“오늘은 향화를 올릴까요?”
주석하는 조심스럽게 우설금의 의사를 물었다.
우설금은 이번 사건으로 새로운 부모를 알게 됐다. 바로 극마서생 우청엽의 아들이자 그녀의 아버지인 우경천과 어머니 이가흔이다.
지난 십여 년 동안 향화를 올리지 않았으니, 마침 절에 온 김에 향화를 올리자는 의견을 냈다.
우설금이 말없이 동의했다.
“그럼 같이 가요.”
이 변화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내포했다.
만일 우설금이 거부했다면 그녀가 바뀐 처지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의미가 된다.
다행히 우설금이 향화를 올리겠다고 했으니, 이는 원수가 반야불존이 아님을 믿겠다는 뜻이다. 물론 그 원수를 천마로 돌렸을지는 다른 문제다.
화사한 봄날의 경내는 아름다웠다.
곳곳에 핀 꽃과 처마에 걸린 화등이 눈길을 끌었다.
주석하와 우설금은 지금 연하늘색 옷을 입고 있었다.
평소 두 사람이 입던 검은 옷과 붉은 옷을 벗어 던졌기에 기분이 산뜻했다.
출중한 외모 덕분에 화사한 무복과 궁장으로 단장한 두 사람은 사찰 방문객의 주목을 받았다.
두 사람이 소림을 혼란에 빠트린 마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흔히 사람들은 순진하게도 대마두를 흉측하게 생겼다고 여긴다.
특히 소림에서 지적한 무림 공적이라 보기에 두 사람의 젊고 해맑은 외모는 그런 관념과 너무 동떨어져 있었다.
게다가 그들을 상징하는 흑검소와 홍철산도 객방에 놓아두었으니.
주석하와 우설금은 대웅전의 불존 앞에서 향을 피웠다. 조용한 경내의 목탁 소리가 심신을 상쾌하게 했다.
기분 때문일지 모르지만 소림과 달리 이곳의 목탁 소리는 맑고 경쾌하다.
우설금이 선향을 피우고 절을 하는 동안 주석하도 할아버지 흑풍검신 주선풍을 떠올렸다. 생각할수록 신기한 인연이다.
그녀와 구주사은의 후예로 연결되었으니 우설금과 그는 인연이 남달랐다.
선향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무표정하게 바라보는 우설금은 평범한 양갓집 규수처럼 보였다. 그녀의 남다른 외모만 아니라면 주목받지 않을 것이다.
“다했어요.”
한참 후 우설금이 그의 소매를 끌었다.
주석하는 우설금의 손을 잡고 불당을 벗어났다. 이제는 그녀의 손을 잡는 것이 낯설지 않았다. 그녀와 함께한 다양한 사건과 오랜 시간이 서로를 끈끈하게 만들었다.
불당을 나오자마자 사람들이 늘어선 긴 줄을 만났다.
“무슨 일입니까?”
“주지 스님께서 점을 봐주신데요. 무려…… 공짭니다! 공짜!”
연등절을 맞아 주지 광명선사가 참배객의 길흉화복을 봐준다고 했다. 어쩐지 줄이 길더라니. 공짜라면 절대 마다하지 않는 사람의 심리 때문에 대기자가 무척 많았다.
현재 줄을 선 사람은 대략 스무 명. 한 시진가량 기다리면 가능하다나.
“우리도 볼래요?”
그의 권유에 우설금이 고민하는 눈치가 보인다.
우설금은 지금까지 이런 미신과 동떨어져 살았다. 물론 주석하도 사주팔자를 보려는 의도는 아니다. 기분을 새롭게 할 겸 그는 우설금과 궁합을 알아보고 싶었다.
우설금이 그를 데리고 줄의 끝에 가서 섰다. 어차피 바쁠 일도 없고 사찰 구경이 오늘 일과니 이것도 훌륭한 시간 보내기다.
매우 느린 속도로 대기자가 줄어들었다. 점을 보고 떠나는 사람만큼이나 사람들이 몰려 대기자 수는 변화가 없었다.
앞에 선 두 사람의 대화가 들려왔다.
“돈벼락이 언제 떨어지는지 물어봐야지.”
“이 화상아! 돈을 어디에 쓰게?”
“기루 가야지. 기루!”
백화루 손님으로 적극적으로 맞이하고 싶다.
주석하의 차례가 되었을 때는 대략 한 시진이 지나 있었다.
그들의 앞 순서였던 두 사람이 햇빛을 가린 천막 내부로 들어갔다가 주지를 만난 후 다시 나왔다. 두 사람이 걸음을 서두르며 투덜댔다.
“돈벼락을 물었는데 왜 날벼락을 말하냐고!”
“흥! 날벼락 안 떨어지기만 해봐!”
화를 내는 두 사람을 보고 주석하는 쓴웃음을 지었다.
천막 안으로 들어가자 코를 찌르는 선향 냄새 속에 나이 지긋한 노승이 정좌하고 있었다.
“시주들은 뉘신가?”
광명선사가 한 손으로 염주를 돌리면서 두 사람을 살폈다.
“저는 주석하이고 이쪽은 우설금입니다.”
“자, 이름을 써보게나.”
주석하는 두 이름을 선지에 적어 노승에게 내밀었다.
이름과 두 사람의 관상을 유심히 비교하던 광명선사가 산통을 내밀었다.
“자, 산통을 흔들어서 하나를 뽑아보게.”
수십 개의 산가지가 산통에 꽂혀 있었다. 주석하는 산통을 열심히 흔들어 산가지 하나를 뽑아냈다.
뽑힌 산가지와 이름을 풀이하면서 한동안 고심하던 광명선사의 안색이 살짝 변했다.
“아미타불, 산가지가 제대로 안 섞였나 보네. 다시 해보게.”
뽑힌 산가지를 다시 산통에 집어넣은 광명선사가 그에게 산통을 내밀었다.
주석하는 대수롭지 않게 산통을 흔들어 다시 산가지를 뽑았다.
광명선사가 심각한 표정으로 산가지를 붙잡고 불호를 외웠다.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흐음, 그게…….”
광명선사가 뭔가를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괜찮습니다. 말씀해 주세요.”
어차피 미신을 믿지 않았기에 주석하는 어떤 점괘가 나오더라도 신경 쓰지 않을 작정이었다.
광명선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점괘를 읊었다.
“그게 말일세, 점괘를 풀어보니 조금 이상하네. 죽은 자의 괘(卦)가 나왔거든.”
“하하, 전 이렇게 살아있는데요?”
“그러니까 말일세. 죽었으되 산 자의 괘일세. 이런 경우가 없는데…….”
광명선사가 산가지를 다시 산통에 집어넣었다.
문득 주석하는 전생을 떠올렸다. 그가 죽었다가 다시 회귀하여 이런 점괘가 나온 걸까. 어쨌든 기분 좋은 점괘는 아니었다.
“운명이 잘못 선택되었나 보네. 그럼 이번엔 여시주가 산통을 흔들어보게.”
우설금이 산통을 흔들고 산가지 하나를 뽑아냈다.
산가지를 받은 광명선사가 이번에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흐음, 여시주는…… 죽을 자의 괘가 나왔군. 거참 이상하기도 하지.”
“그게 뭡니까? 어차피 사람은 죽기 마련이잖아요?”
주석하의 질문에 광명선사가 우설금을 유심히 살피면서 대답했다.
“살았으되 죽을 자. 그런데 대흉이 덮친 것은 아니라서…… 이상하군.”
뭔가 알 듯하면서도 모를 듯했다. 우설금이 최근에야 신분을 알게 되었음을 뜻하는 걸까.
죽었으되 산 자, 살았으되 죽을 자. 뭔가 이상한 기분이 스며든다.
우설금도 당황한 듯 안색이 살짝 변했다.
한숨을 쉬던 주석하는 점괘를 무시하고 목적한 바를 위해 질문을 바꿨다.
“저희 둘의 혼인 궁합은 어떻습니까?”
“정혼한 사인가?”
“아직은 아닙니다.”
“아미타불, 자네들은…….”
느릿하게 나오는 궁합풀이에 주석하는 목이 바짝 말랐다.
“각자의 사주에서 봤듯이 두 사람의 미래는 아주 희미하네. 아무것도 정해져 있지 않아서 나로서도 점을 치기 어려워. 죽은 자와 죽을 자가 합쳤으니 더욱 오리무중일 터. 대길(大吉)이거나 대흉(大凶)일세.”아무리 생각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이 주지 스님은 돌팔이 점쟁이가 확실하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일어서자 광명선사가 마지막으로 당부했다.
“……시주들, 무릇 세상 만물은 윤회하는 법이니 삶과 죽음에 너무 얽매이지 말게나. 바른 마음가짐으로 노력하면 좋은 일이 있을 걸세.”
덕담이라 생각한 주석하는 고맙다고 인사했다.
천막 밖으로 나오니 햇빛이 쏟아져 눈이 부셨다.
그런데 외부 풍경이 조금 전과 매우 달랐다. 그들 뒤에 줄을 서 있던 스무 명가량 되는 사람들이 한곳에 몰려 덜덜 떨고 있었다.
그 옆에는 그들에 앞서 점을 봤던 두 남자가 바닥에 누워 뒹굴면서 괴로워하는 모습이 보였다.
대충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내린 것 같은데……. 무슨 일이지? 그렇다면 방금 점을 친 주지승이 영험하다는 뜻인가?
사람들의 앞에서 흉흉한 기세를 내뿜은 무리가 있었다.
“또? 꼬운 놈 있어? 나리가 먼저 점을 본다는 데 불만 있냐고!”
네 명의 장한이 사람들을 노려보며 겁을 주고 있었다. 장한 옆에는 눈이 내릴 듯 하얀 옷을 걸친 청년이 호기로운 위세를 뿜으며 서 있었다.
금방 사태가 짐작됐다.
백의 청년과 그 수하들이 줄을 무시하고 먼저 점을 보려다가 충돌이 일어난 것이다. 장한들의 허리춤에 꽂힌 장검은 백의 청년이 무림 방파의 자제임을 대변했다.
항의하며 수군대던 사람들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닫았다. 한 방에 쓰러진 두 남자를 보니 오금이 저려 말이 나오지 않는다.
“머, 먼저 보시지요.”
사람들이 양보하자 백의 청년이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목을 빳빳하게 세웠다.
이런 곳에는 항상 갑질하는 녀석이 존재하는 법이다.
한 시진을 기다릴 인내심이 없는 자가 많다. 사실 백의 청년은 태어나서 기다려본 적이 없었다. 어딜 가나 특혜를 받는 삶이었다.
천막으로 들어가려던 백의 청년은 마침 밖으로 나오던 주석하와 우설금을 발견했다.
녀석의 시선이 우설금에게 멎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한참 빤히 살피던 백의 청년이 포권을 취하며 우설금에게 인사했다.
“소생은 백리세가의 장자인 백리월입니다. 소저는 방명이 어떻게 되십니까?”
옆에 주석하가 붙어 있음에도 뻔뻔하게 말을 거는 배짱이 놀라웠다.
백리세가는 최근 사천당문이 멸문된 후 새롭게 오대세가에 들어가고자 발버둥 치고 있는 신흥 강자였다.
나름 배경도 튼튼하고 무공 실력도 있어 보이니 안하무인인 성격이 이해되긴 하지만…….
당연히 무뚝뚝한 우설금이 대답할 리 없었다. 그녀는 미간을 살짝 모으고 무표정한 얼굴로 상대를 쳐다봤다.
그 모습을 거절이 아니라고 판단한 백리월이 다시 수작을 걸었다.
“소저, 요즘 이 동네에 화등 축제가 한창입니다. 오늘 소생과 함께 어울려보시겠습니까?”
어조는 정중하지만 이런 무례가 없다. 저러다가 우설금에게 맞아 한 방에 저승 간 녀석이 한둘이 아닌데.
괜히 말썽을 일으켜 좋을 게 없는 주석하는 얼른 끼어들었다.
“백리 소협이셨군요. 저희는 이미 선약이 있습니다만.”
백리월이 기분 나쁜 표정으로 주석하를 쓱 훑었다.
살짝 콧방귀를 끼면서 주먹을 움켜쥐던 백리월은 우설금의 인상이 살짝 찌푸려지는 것을 발견했다.
어쨌든 여인의 미움을 사서 좋을 일이 없기에 백리월은 한발 물러섰다.
“그렇군요. 언제든 생각 바뀌면 연락 주시지요. 며칠 동안 백리세가는 이 동네에 머물 겁니다.”
백리월은 정중하게 우설금을 향해 인사했다. 하지만 주석하에게는 기분 나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백리월이 천막 안으로 들어가고 주석하와 우설금이 걸음을 옮기자 백리세가의 장한으로 보이는 녀석이 뒤를 미행했다.
‘참 별짓 다 하는군.’
주석하는 신경 쓰지 않았다. 구대문파도 무섭지 않은 판에 오대세가에도 끼지 못하는 백리세가를 마음에 둘리 없었다.
“연등 축제가 한창이니 우리도 구경 갈까요?”
주석하는 보란 듯 우설금과 걸음을 나란히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