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검천하-202화 (202/273)

202화 오대세가 (2)

보은사는 벽로천이 흐르는 산기슭에 세워진 평범한 절이다.

이곳은 한적한 시골이라 평소에는 인적이 드물었다. 하지만 연등절을 전후하여 화등 축제가 열리면 벽로천에는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벽로천을 구경하러 나갔던 주석하와 우설금은 때 아닌 사람 떼에 섞여들었다.

조용한 곳에서 요양하겠다는 목적이 틀어졌지만 인파 속에 섞여 있으니 우울했던 기분이 사라졌다.

“축제 구경한 적 있어요?”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구경하던 주석하는 노점상 앞에서 멈췄다.

우설금이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마교에서 밖으로 나온 적이 손에 꼽힐 정도였다. 중원에 나왔을 때도 임무 수행으로 바빴기에 축제를 구경할 일은 전혀 없었다.

“없군요. 솔직히 나도 없어요.”

물론 주석하는 덕양에서 소규모 마을 축제를 자주 구경했었다.

하지만 성도에서 벌어진 대규모 축제를 간 적이 없었다. 흑검문에 걸려 있었던 오십 년 규제 때문이다.

벽로천 화등 축제가 대규모 축제는 아니지만 덕양 축제 때보다 사람 수가 몇 배는 많았다. 그렇기에 주석하도 사실상 이런 규모의 축제는 처음이나 마찬가지였다.

축제 초보인 두 사람에게 지금 눈에 보이는 장면은 무척 흥겨웠다.

호수에는 꽤 많은 배가 유람하며 떠다니고, 호숫가를 따라 쭉 늘어선 노점이 축제 분위기를 한껏 끌어올리고 있었다.

축제를 맞이하여 거리를 쏘다니는 남녀의 모습도 싱그러웠다.

남에게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도 비슷하리란 생각에 주석하의 마음도 우쭐해졌다.

“머리띠 살래요?”

우설금은 항상 붉은 머리띠를 둘렀다. 평소 입던 붉은 옷과 같은 색이다.

지금은 연하늘색의 우아한 궁장을 입고 있으나, 머리띠만은 예전의 붉은색 그대로였다. 그녀의 옷을 준비했던 백귀가 머리띠를 잊어버린 탓이다.

머뭇거리는 우설금을 재촉해서 장신구를 파는 노점을 방문했다.

단색 천에 꽃이나 구름 문양을 수놓은 머리띠가 여러 개 걸려 있었다.

“하늘색 옷과 무엇이 어울리려나…….”

주석하는 녹색 바탕에 흰 구름을 수놓은 머리띠를 골랐다.

“이거 어때요?”

우설금이 홍조를 띠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주석하는 붉은 머리띠를 풀고 새로 산 머리띠를 묶어주었다.

익숙지 않은 일이라 이래저래 헤매고 있을 때, 바로 옆에서 귀걸이를 고르는 두 젊은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허리에 장검을 착용했으니 무림인인데 그럭저럭 예쁘장하게 생겼다.

우설금에게도 사줄까 하는 생각에 시선이 귀걸이로 가는 찰나 범상찮은 청년이 등장했다. 하얀 백의를 걸친 꽤 준수한 미남자였다.

청년은 주석하를 쓱 훑어보고는 두 여인에게 포권하며 인사했다.

“낭자, 어디에서 오셨습니까? 저는 산동악가 소가주인 악현강입니다.”

놀란 두 여인이 악현강을 한참 살폈다.

“산동악가요? 소가주요?”

“그렇습니다. 산동일협이라고도 불리지요. 낭자들은…….”

“아! 저희들은 낙양의 제검문에서 왔어요. 축제 구경하려고요.”

산동악가는 산동성에 터전을 잡은 무림세가였다.

비록 그 위세는 오대세가에 미치지 못했으나 나름 가전 무공이 탄탄하다고 알려져 있었다.

산동악가는 오대세가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자 최근에 활동 반경을 넓히는 상황이었다.

이름 있는 세가였기에 두 여인은 산동악가에 상당한 호감을 품었다.

악현강이 사람 좋은 미소를 띠며 계속 말을 걸었다.

“하하, 축제 구경 오셨군요. 저도 축제를 즐기러 왔습니다. 함께 하시는 건 어떨까요?”

두 여인의 안색이 환해졌다. 준수한 미남인 데다 배경마저 탄탄한 집안이니 그녀들도 꽤 기대하는 듯했다.

“좋아요.”

“제가 귀걸이를 선물하겠습니다. 골라보시죠.”

두 여인이 흥분해서 귀걸이를 고르기 시작했고, 옆에서 악현강이 열심히 말을 걸었다.

주석하는 내심 혀를 찼다.

작업 실력이 상당한데? 역시 잘생기고 배경 좋으면 여자들이 넘어오는 모양이다.

우설금의 머리띠를 마무리하고 노점을 떠나려는 찰나 여인들의 대화가 다시 들려왔다.

“그런데 정말 놀러 오셨어요?”

“하하, 그럴 리가요. 제가 무척 바쁜 몸입니다. 실은…….”

악현강이 주위를 쓱 훑어보다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실은 오늘 밤에 무림세가 소공자 회합이 있습니다. 일월정이라는 주루에서 열리는데 혹시 관심 있으신가요? 그곳에 가면 오대세가의 유명 소공자를 모두 만날 수 있습니다.”

“와아! 진짜요?”

“당연하죠.”

“와아! 가고 싶다……. 그런데 소공자회가 자주 열려요?”

“그건 아니고요. 오늘 밤 이곳 벽로천에서 오대세가 가주 회합이 선상에서 열립니다. 가주님들이 강호 정의를 위해 회의하시는 동안 소가주들도 놀고만 있을 수는 없지요. 그래서 큰 뜻을 합치기로 했습니다.”오대세가 가주의 회합? 최근 정세 변화가 심하다 보니 주석하도 저절로 관심이 갔다.

가주와 소공자 모임이 동시에 열리면 이 모임에서 향후 무림에 영향을 미칠 중요한 논의를 할 가능성이 컸다.

이곳 벽로천은 하남에서도 매우 구석진 시골이라 그런 큰 모임이 열리기에 마땅치 않다.

다만 이곳은 소림이 있는 숭산과 그리 멀지 않기에 최근 정파인들이 다수 소림에 모이는 것과 관련 있어 보였다.

“그래서 모여서 뭐하는데요?”

두 여인이 한껏 관심을 보였다.

우쭐해진 악현강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가주님들은 암흑단을 칠 계획 때문에 모이는 겁니다. 우리 소가주들은 말 그대로 친목도모지요. 참석하시면 꽤 재미있을 겁니다. 이거 아무나 참가 못합니다. 적어도 소공자회에 소속된 사람이 허락해야 가능하죠. 두 분은…… 당연히 저와 함께하니 문제없습니다.”그 뒤의 이야기는 잘 들리지 않았다.

주석하는 암흑단 이야기가 나오면서 다른 생각에 잠겼다.

암흑단은 암군이 세운 살수 집단이다. 흑련에서도 상당히 큰 지분을 가진 흑도 핵심 방파다. 정파 문파가 힘을 합쳐 흑도 문파를 공격하더니 드디어 암흑단에까지 마수를 뻗는 듯했다.

만일 암흑단이 무너지면 흑련의 힘이 대폭 약화하여 균형추가 정파 쪽으로 확 쏠렸다. 오대세가가 모두 힘을 합하면 암흑단도 버티기 쉽지 않다. 정파의 계획이 손에 잡힐 듯 보였다.

주석하는 마음이 심란했다.

정사의 균형이 무너지는 것도 문제고, 암흑단이 그에게 무공을 전수한 암군이 세운 문파란 점도 부담이었다.

더구나 도수가 암흑단에 있으니 더 관심이 쏠린다. 암군의 은혜와 도수의 배려를 생각하니 흘려버릴 문제가 아니었다.

주석하는 우설금의 손을 잡고 다른 노점으로 이동했다.

오늘만 백리세가와 산동악가를 만났다.

오대세가 중에 사천당문이 멸문되고, 하북팽가도 사실상 괴멸 상태라 백리세가와 산동악가가 오대세가 자리를 노리는 모양이다.

이 작전을 주도하는 제갈휘 입장에서는 세를 모을수록 유리하니 오대세가 빈자리를 두고 여러 무림세가를 불렀을 것이다.

‘제갈휘의 꿍꿍이는 뭘까?’

걸음을 옮기면서 주석하가 계속 고민에 빠져 있자 우설금이 말을 걸어왔다.

“암흑단이 공격받는다니 걱정되나 봐요?”

“걱정이라기보단…….”

주석하는 말끝을 흐렸다.

“암군 때문에요? 아니면 도 공자 때문에?”

이어지는 질문에 주석하는 흠칫했다.

도수는 우설금의 아픈 상처다. 비록 도수가 그녀를 용서했다고 하나 그녀로서는 괴로울 수밖에 없다.

주석하는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우설금도 더는 묻지 않았다. 다만 그녀도 생각에 잠겨 조용해졌다.

벽로천 강가를 따라 걷고 있자니 해가 떨어지고 하늘에 노을이 붉게 깔렸다.

주석하와 우설금은 붉게 물든 하늘을 바라보며 간만의 평온함을 맛보았다. 노을이 비친 물색마저 붉게 물들어 장관을 연출했다.

아름다운 경치에 눈을 떼지 못하는 우설금을 힐끔거리면서 주석하도 내심 감탄사를 연발했다. 노을에 익은 그녀의 얼굴이 무척 고왔다.

***

어둑어둑해지자 벽로천에 화등이 깔렸다.

연꽃 모양의 둥근 등에 밀초를 꽂아 불을 밝히고 줄을 지어 물에 띄운 화등이 어둠을 밝혔다. 수십 개의 화등이 물에 뜬 모습은 장관이었다.

구경꾼들이 물가로 몰려들어 왁자지껄 떠들었다.

“우리도 화등을 띄울까요?”

주석하는 우설금과 함께 분홍색 화등을 하나 사서 물에 띄웠다. 각자 양피지에 소원을 쓰고 화등에 집어넣었다.

주석하는 우설금의 평안을 기원했다. 우설금은…… 무엇을 썼는지 그에게 보여주지 않았다.

그들의 화등도 물 위에 떠서 다른 화등과 함께 어두운 강에 박힌 불빛이 됐다. 반짝이는 그 모습이 그림처럼 예뻤다.

한참 보고 있자니 화등이 서서히 밀려 강 중심으로 흘러갔다.

인상적인 밤이었다. 당연히 두 사람이 함께했기에 더욱 뜻 깊은 밤이었다.

우설금이 화등에 넋이 나가 있는 동안 주석하는 물 위에 뜬 배를 살폈다.

십여 척의 배가 강 중간에서 유유자적 뱃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남녀 두 사람만 탄 작은 배부터 시작해서 수십 명이 타고 있을 큰 배도 다수였다.

특히 주석하의 눈을 끈 것은 다른 배를 압도하는, 대단히 화려하고 큰 유람선이었다.

선실이 갖추어져 몇 명이 타고 있는지 확인되지 않으나 갑판을 분주히 오가며 잔치를 준비하는 머슴을 보니 고관대작이 탄 배가 확실했다.

“저 배구나.”

주석하는 금방 그 배의 정체를 짐작했다. 오늘 선상에서 오대세가 가주 회합이 있다고 했으니 저 배가 아니면 마땅한 배도 없었다.

한참 물에 뜬 화등 주변을 머물던 그 배가 어느 순간 강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화등 구경을 끝내고 회의를 위해 강 중간 조용한 곳을 찾는 것으로 보였다.

주석하는 배의 움직임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눈으로 추적했다.

그의 내심을 눈치 챈 것일까. 우설금이 옆구리를 쿡 찔러 그를 깨웠다.

“저 배가 오대세가 가주들이 탄 배인가요?”

“아!”

배를 보며 눈으로 추격하는 사이 우설금도 눈치챘나 보다.

“암흑단을 공격한다니까 신경 쓰이는 거죠?”

“네. 저들의 작전 계획을 확인해야 할 것 같아요.”

설사 오대세가가 공격하더라도 암군과 도수라면 쉽게 당하진 않겠지만,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도와주고 싶었다.

도수를 위험에 빠지도록 내버려 두긴 싫으니까. 우설금을 살려준 도수에게 신세를 갚아야 한다.

“나도 갈래요.”

우설금의 단호한 주장에 주석하는 바로 거절했다.

“안 돼요.”

“다 나았어요. 이젠 거의 정상이에요.”

물론 우설금의 상태는 평소와 큰 차이가 없다. 내상을 완벽하게 치유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겠지만, 지금 당장의 능력만으로도 정파십존 중 일인 정도는 가볍게 처리할 만큼 충분하다.

“그래도 무리하지 말아요.”

주석하는 그녀를 달랬다.

솔직히 우설금이 염려되어서가 아니라 그녀가 자칫 살겁을 일으킬까 우려해서다.

도수에게 진 빚을 갚는다고 그녀가 마음먹는 순간 오대세가 그 누구도 살아서 돌아갈 수 없을 테니까.

과거 그녀가 일을 처리해온 방식을 보면 괜한 우려가 아니다. 그녀가 손에 피를 묻히지 않기를 바랐다.

우설금이 불만스러운 듯 입술을 삐죽였다.

“나 혼자 잠시 염탐하고 올 테니까요. 그대는 화등을 보면서 축제를 즐기고 있어요.”

그의 제안이 먹힌 것일까. 우설금이 마지못해 수긍했다.

“네. 다녀오세요. 늦으면 절에 가 있을 게요”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은 주석하는 멀어지는 유람선을 보면서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암흑단을 칠 계획을 세우고 있다면 그냥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암군과 도수가 안전할 수 있도록 오대세가 가주들을 모두 이곳에 수장시켜 버릴 생각이다.

문득 오대세가에 제갈세가와 남궁세가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이곳에 제갈휘와 남궁후도 와 있는 걸까?

어쩌면 이 회합이 그리 단순하게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석하는 우설금에게 눈으로 인사한 후 유람선이 사라진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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