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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검천하-203화 (203/273)

203화 오대세가 (3)

홀로 남은 우설금은 물에 뜬 화등을 감상하며 고민에 잠겼다.

주석하의 의도는 확실하게 이해했다. 그는 도수를 돕고 싶어 한다. 도수가 위험에 빠지도록 내버려 두고 싶지 않은 거다.

이것은 흑도를 돕는 일이니 뇌군에게도 큰 도움이 된다. 여러 방면으로 주석하에게는 타당한 명분이 있다.

그런데 자신은 왜 여기에서 번민에 잠겨 있는 걸까. 도수 때문에?

그녀의 시선이 수면을 향했다. 오색의 다양한 빛으로 은은하게 어둠을 밝히는 화등이 출렁이면서 시선을 끌었다.

“예쁘네…….”

저 화등은, 화등 속의 밀초는 자신을 태워 아름다움을 뽐낸다.

구경하는 사람에게 기쁨과 환희를 주고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 내일이 되면 저 화등은 떠내려가 흔적을 남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지금부터 무엇을 해야 할까?

보은사에 온 후로 몸을 추스르며 고민했었다. 하지만 답이 구해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자신의 정체성이 모호해졌기 때문이다.

그녀는 조부인 우청엽의 편에 서야 할지, 아니면 길러준 천마의 편에 서야 할지 아직 결정할 수 없었다. 양쪽 모두에 손을 내밀 수는 없다.

조금 더 확인해 봐야 할까? 확인할수록 불존의 말이 진실이고, 천마가 지금까지 속였었다는 진실이 드러나 더 괴로워질 것 같지만.

아버지 가문은 완전히 멸문해서 살아남은 사람이 없으나, 어머니 쪽은 아직 남아 있지 않나? 하남 이가장이라고 했던가? 별별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끝없는 고민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훌훌 마음을 털 수 있다면.

문득 도수에게 정말 용서받은 것인지 궁금했다.

자신이라면 부친을 죽인 사람을 그렇게 쉽게 용서할 수 있나? 정작 그녀는 어릴 때부터 부친의 원수를 증오하며 열심히 무공을 익히지 않았던가.

“그렇게 쉽게 끝나지 않겠지.”

언젠가 다시 도수를 만나면 정말 제대로 용서를 빌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기에 그녀는 지금 주석하를 따라가고 싶었다. 그런데 정작 그는 동행을 원치 않는 듯하다. 그녀도 도수에게 도움이 되고 싶은데…….

“소저?”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우설금은 고개를 돌려 확인했다. 그녀의 안면이 살짝 찌푸려졌다.

“한참 찾았습니다. 혼자서 화등 구경하시는지요?”

낮에 잠시 만났던 백리월이었다.

주지승이 점을 치는 곳에서 기세등등하게 소리 높이던. 지금도 그때처럼 얼굴에는 오만한 분위기가 가득했다.

우설금은 상대하고 싶지 않아 조용히 시선을 화등으로 돌렸다.

백리월이 그녀의 옆으로 바싹 다가왔다.

“장관이죠? 이 멋진 광경을 홀로 감상하시다니…… 이건 미인에 대한 예의가 아닙니다.”

백리월의 뒤에는 장한 넷이 호위하고 있었다. 실제 호위가 필요해서라기보다 위세를 과시하려는 욕구 때문일 것이다.

“저에게 잠시 시간을 내주시면 어떻겠습니까? 마침 좋은 연회가 있거든요.”

연회란 말이 우설금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했다. 머리띠를 사면서 들었던 청춘남녀 대화가 소환됐다. 남자가 산동악가라 했던가? 오늘 이곳에서 오대세가 소가주 모임이 있다고 했는데…….

주석하가 가주 모임을 염탐하러 갔으니 그녀는 소가주 모임을 염탐해볼까?

도수를 위해 뭔가를 할 기회였다. 아니 주석하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다.

주석하가 정말 정보만 얻고 염탐을 끝낼까? 분명히 그들에게 재기하기 힘든 타격을 줄 계획이 있을 것이다.

그 일에 그녀도 손을 거들고 싶었다. 결심이 섰다.

우설금은 무표정한 얼굴로 옆의 백리월을 돌아봤다.

그것을 호의로 짐작한 백리월의 안색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녀의 얼굴에 홀린 백리월의 표정이 마치 꿈을 꾸는 듯했다.

“소, 소저? 방명이 어떻게 되신다고…….”

“우가예요.”

“아, 우 소저? 오늘 제 친우들과 일월정에서 술자리가 있습니다. 모두 강호 오대세가에 속하는 쟁쟁한 녀석들이죠. 같이 가시겠습니까?”

우설금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선을 돌리지도 않았다.

이것을 승낙으로 알아들은 백리월이 작게 환호성을 지르며 그녀의 어깨를 덥석 잡았다.

우설금은 살짝 미간을 모으며 그의 손을 쳐냈다.

“하하! 우 소저, 그럼 지금 당장 가실까요? 멀지 않습니다.”

우설금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

백리월이 옆에 붙어 주절주절 이야기를 풀었다. 그들 앞에서 호위 장한 넷이 위압감을 풍기며 인파를 헤치고 길을 열었다.

“거참 신통하네요. 오늘 주지가 미인을 만날 대운이라고 했거든요. 이렇게 미인이 떡하니 나타났잖아요.”

“다른 말은 없었나요?”

“아! 있었어요. 금을 조심하래요. 그게 말이 돼요? 금이 얼마나 좋은 건데…….”

금이라…….

우설금은 오대세가 소가주 회합에 등장할 사람들의 면면을 그려보았다. 물론 그녀와 안면이 있는 사람은 없다.

남궁천만 없다면. 그러니 그녀가 정체를 들킬 일은 사실상 없다.

그들을 어떻게 처리할까. 그냥 싹 다 죽여버릴까. 그녀의 성정에 가장 잘 맞는 해결책이었다.

다만 그렇게 하면 중원을 약화하겠다는 천마의 의도를 적극적으로 따르는 것이 된다. 예전에는 절대 하지 않았을 고민이 갑자기 밀려왔다.

***

주석하는 작은 나룻배를 빌려 어렵지 않게 호화 유람선에 접근했다.

강은 어두웠고 유람선 불빛은 밝았다. 하지만 선실에 가려 적절하게 그늘진 그림자가 접근을 용이하게 했다.

그는 화판답공을 발휘하여 손쉽게 물 위를 걸었다. 엄밀하게는 표면에서 한 치가량 뜬 걸음이다. 불과 몇 걸음 후에 그는 유람선 갑판에 오를 수 있었다.

“모두…… 다섯?”

선실 내부에서 강한 기운을 가진 사람 다섯 명이 느껴졌다. 아마 오대세가 가주일 것이다. 그는 창을 통해 조심스럽게 내부를 살폈다.

비교적 넓은 선실 중앙에 커다란 원탁이 놓여있고 그 주변으로 다섯 사람이 앉아 있었다. 모두 중년에서 노년 초입의 남자들이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어찌 잊을까? 만사지존 제갈휘를.

제갈휘는 제갈세가의 가주 신분이니 이 자리에 참석하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제갈휘가 주도하는 모임이라면 어떤 주제가 논의될지 뻔히 보였다.

기감을 끌어올리자 그들의 대화가 나지막이 들려왔다.

“지금 무림은 혼란 상태요. 이럴 때일수록 정파는 결속을 다져야 하오. 구대문파 가운데 상당수가 피해를 보았소. 일부는 사파에, 일부는 마교에. 이제 우리 오대세가가 전면에 나서야 할 때요.”제갈휘의 목소리였다.

“그전에…… 앞으로 오대세가를 어떻게 구성할지부터 말씀해 주시지요.”

“크흠, 그게 급하시다면……. 알다시피 오대세가는 남궁세가, 제갈세가, 하북팽가, 사천당문, 황보세가였소. 물론 다른 세가도 출중하다는 점을 압니다만 세인들은 그렇게 꼽았소. 그런데…….”잠시 말을 끊고 장내를 둘러본 후 제갈휘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 사천당문이 멸문했소. 그리고 오늘도 남궁세가는 참가를 거부했소. 사실 남궁세가는 최근 들어 무림맹이 주도하는 일에 시비를 걸고 있소. 그들은 강호 정의를 저버리고 마치 사파가 된 것처럼 정파에 등을 돌리고 있소. 이런 남궁세가를 어떻게 오대세가에 그대로 남겨둔단 말이오?”남궁후가 오늘 참석하지 않았다는 말에 주석하는 안도했다. 이곳에 오는 동안 남궁후를 어떻게 설득할지가 가장 큰 난제였기 때문이다.

“하북팽가는 어떻습니까?”

“하북팽가는 전대 가주인 살존을 비롯해서 현 가주까지 모두 사망해서 사실상 문을 닫아야 할 처지요. 이제는 오대세가에 넣기 부끄러운 수준이오.”

“그렇습니다. 그럼 사천당문, 남궁세가, 하북팽가가 빠지는군요.”

“덕분에 오대세가에 세 자리가 비었소.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그 자리를 백리세가와 산동악가, 단리세가에서 맡아주었으면 합니다. 이제 세 가문도 무림을 위해 전면에 나설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 위세를 보여주셔야지요.”

“하하, 이렇게 간곡하게 부탁하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세 가주의 화답이 이어졌다.

주석하는 이곳에 모인 다섯 사람의 면면을 짐작할 수 있었다. 바로 제갈세가, 황보세가, 백리세가, 산동악가, 단리세가 가주다. 대충 다섯 명이 맞춰진 듯했다. 물론 그들의 세력은 예전에 비한다면 한층 약화했다.

빈자리를 채워 다시 다섯을 만든다고 예전의 그 무력이 채워지나? 과거의 오대세가는 정파십존이었던 하북팽가의 살존과 남궁세가의 무존이 든든하게 지탱했다. 어쩌면 그때의 오대세가 위세는 그 두 사람의 무력 덕분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금은? 새롭게 들어온 세 세가를 포함해서 누가 있는가? 단지 만사지존인 제갈휘만 존재할 뿐이었다.

절대 과거처럼 위세를 떨칠 수 없다. 물론 다른 가주의 무공이 약하다는 뜻은 아니다. 단지 정파십존에 이르지 못했을 뿐 대단한 수준이긴 하다.

이런 사실을 제갈휘도 잘 안다. 그런데 왜? 왜 이들을 오대세가라는 미끼로 끌어들이는 걸까.

‘약았군. 약았어.’

다른 사람이라면 그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겠지만 그 주체가 제갈휘이기에 주석하는 그 내심을 훤히 볼 수 있었다.

오대세가 대우라는 미끼를 이용해서 정사대전의 돌파구를 열려는 술책이다.

최근에 구대문파가 마교에 잇따른 수난을 당하면서 정파의 전력을 보강하고 사기를 키울 필요가 생겼다.

당장 마교에 맞서기 어려우니 일단 흑도부터 상대하려는 음모다.

새로 가입한 세 세가의 무력은 흑도를 상대하기에 부족하진 않았다. 성공하면 좋고 설사 실패하더라도 제갈휘는 별다른 타격이 없다. 오히려 위기 상황에서 그의 입지는 더 강화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무엇을 해드리면 됩니까?”

“새롭게 결성된 오대세가가 한데 모여 무림 정의를 보여줍시다. 현재 흑도에서 가장 위협적인 단체라면 바로 암흑단 아닙니까? 암흑단을 이 기회에 요절냅시다. 우리가 합치면 어렵지 않습니다.”제갈휘의 당부에 주석하는 이를 갈았다. 역시 예상대로였다.

‘오늘 이 배에서 과연 몇이나 살아갈 수 있을지 두고 보겠다.’

어둠 속에서 주석하는 하얀 이빨을 드러냈다.

***

화려한 일월정에 들어서는 순간 우설금은 안면을 찡그렸다.

아무리 십만대산 산속에서 살았다지만 그녀도 주석하 때문에 백화루를 출입했었다. 그런데 이곳 일월정은 백화루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백화루가 사람들에게 술과 요리를 주로 파는 곳이라면 이곳 일월정은 여자를 파는 곳이라 할까.

일월정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곳곳에 몸을 반쯤 드러낸 여자들이 눈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그녀의 기분을 눈치 챈 듯 백리월이 조심스럽게 인도했다.

“하하, 영웅호색이잖습니까?”

우설금은 눈을 찌푸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백리월은 그녀를 일월정의 가장 높은 층으로 데려갔다. 그곳 귀빈실에서는 오대세가 소가주 회합이 벌어지고 있었다.

예상보다 많은 인원에 우설금은 내심 놀랐다. 백리월을 따라 그 옆에 앉고 나서야 분위기가 파악됐다.

남자는 모두 다섯. 다행히 남궁세가의 남궁천은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오대세가를 채웠는지 그녀는 관심이 없었다.

그 다섯 남자 옆에는 남자들이 데려온 것으로 보이는 여자들이 앉아 있었다. 유일하게 노점에서 보았던 산동악가 소가주 악현강 옆에만 여자가 둘이었다.

이들이 오늘 연회의 주빈이었고, 주변에는 요리를 나르거나 시중을 드는 기녀들이 또 그만큼 있었다. 한쪽 무대에는 여러 명의 무녀가 금을 뜯으며 춤을 추고 있었다.

덕분에 실내는 꽤 번잡하고 소란스러웠다.

“오! 백리 공자! 미녀를 데리고 납셨군! 어서 와!”

연회를 주최한 제갈세가 소가주 제갈우가 그들을 반겼다.

우설금은 그의 정체를 금방 알아챘다. 이 연회의 주최자다. 사실 다른 인물은 뜨내기이고.

우설금이 상황 파악을 끝냈을 때 옆에 앉은 백리월이 대소를 터트렸다.

“핫핫, 어때? 내가 오늘 승자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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