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오대세가 (4)
승자? 무슨 말이지?
우설금은 미간을 살짝 모으며 연회석을 빙 둘러앉은 자들을 살폈다.
“오호! 정말인데?”
“과연 백리 공자는 대단해! 저런 미녀를 데려왔다니!”
다른 청년들이 일제히 백리월을 칭찬했다.
우쭐해진 백리월이 어깨를 쫙 펴고 기세를 올렸다.
“모두 인정하나?”
“그래도 견주어봐야지.”
“해봤자……. 내가 이 내기를 이기려고 낮부터 얼마나 노심초사했었는데!”
청년들이 낄낄 웃었고 옆에 앉은 낭자들은 영문을 몰라 두리번거렸다.
제갈우가 좌중을 정리한 다음 정중하게 제안했다.
“자, 오늘 동석해 주신 낭자분들 자리에서 일어나 보세요.”
백리월의 재촉에 우설금도 어쩔 수 없이 일어났다.
소가주를 따라온 여자들은 모두 여섯으로 하나같이 젊고 예뻤다. 게다가 그녀들은 모두 무림인이었다.
우설금은 그녀들의 태도에서 그녀들 역시 이 모임의 의도를 전혀 모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자, 그럼 표결에 들어갑니다. 알다시피 자신이 데려온 여인에게는 손을 들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데려온 여인에게 한 번만 손을 들 수 있습니다. 당연히 가장 아름다운 여인에게 손을 들면 됩니다. 미리 공고했듯이 오늘의 승자에겐…….”
“일월정 특급 기녀와 하룻밤 보낼 수 있는 권한을 준다고 했었는데?”
“하하, 물론입니다. 거기에 더해 함께 온 여인과 하룻밤 보낼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밀어드립니다. 원한다면 오늘 밤 동시에…….”
소가주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오늘 이들은 오대세가 가주 회합을 맞아 소가주 모임을 열었다.
사실 오대세가 자제들이라 하여 일반 무림 한량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무공 좀 한다고 위세 부리는 게 전부인 한심한 녀석들이다.
그런 그들이 모여서 뭘 할까?
제갈우는 새롭게 오대세가에 들어온 소가주 셋과 친분을 쌓을 방법을 고민했다.
제갈신수라고 불린 그가 선택한 방법이 바로 이것이었다.
여인을 한 명씩 데려와서 미모를 겨룬다. 그리고 가장 예쁜 여자를 데려온 사람이 승자가 된다.
어차피 정혼 상대자도 아니니 무조건 예쁜 여자면 된다. 사실상 여자 외모 품평회다.
사실 영웅치고 술과 여자를 싫어하는 자가 누가 있는가. 그렇게 이 자리가 만들어졌다.
사실 여자의 외모는 기대하지 않았다.
예쁜 여자야 이곳 일월정에도 넘친다.
소가주들도 대충 적당히 보고 놀 만한 여자를 데려올 테니 그런 여자와 이곳에서 질펀하게 놀면 충분하다. 어차피 이런 연회에 따라오는 여자들의 수준이야 뻔한 것이니까.
천상삼화 수준의 여자를 데려올 것도 아니고……, 그랬는데…….
천상삼화, 아니 그보다 더 아름다운 여자가 등장했다.
제갈우를 비롯하여 모두가 눈을 비볐다. 백리월의 기고만장한 입술이 쭉 올라갔다.
“먼저 저와 함께 온 육가보의 육 낭자입니다.”
모두의 시선이 제갈우 옆에 선 여인에게 모였다. 여인은 곱상한 데다 귀엽게 생겼다. 여인이 쭈뼛거리며 모두에게 인사했다.
“자, 육 낭자가 가장 예쁘다고 생각하면 손을 드세요.”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민망해진 육 낭자가 신경질을 팍팍 냈다.
“그럼 이번에는 악 공자와 함께 오신 분입니다. 무려 두 분이 오셨네요.”
여전히 올라오는 손은 없었다.
악현강이 불평했다.
“그래도 둘이나 데려왔는데 인심 좀 쓰지?”
“푸흐흐, 너 같으면 손들고 싶겠냐?”
다음이 우설금의 차례였다.
“우 낭자가 가장 아름답다고…….”
모든 사람이 번쩍 손을 들었다. 심지어 자격이 없는 백리월까지.
“백리 공자는 손들면 반칙이잖아?”
“얼굴을 봐. 안 들고 버틸 수 있나.”
“큭큭큭.”
우설금을 제외한 다른 여인들의 안면이 확 문드러졌다.
그녀들도 나름 예쁘다는 소리를 듣고 자랐다. 그런데 오늘 이곳에서 생애 처음으로 호박이 되는 경험을 했다.
그녀들은 우설금을 훔쳐보면서 질투와 부러움을 연발했다.
의기양양해진 백리월이 모두에게 감사를 표했다.
“핫핫, 내가 승자야! 응원해줘서 고마워.”
“잠깐!”
악현강이 벌떡 일어나 반박했다.
“백리 공자, 아직 끝나지 않았다. 중요한 한 가지가 남았어.”
“뭐가 남았다는 거지?”
백리월이 여유만만한 표정으로 받아쳤다.
악현강이 좌중을 쭉 둘러보고는 다시 우설금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규칙에 따르면…… 반드시 무공을 익힌 여인이어야 한다고 했다. 생각해봐. 저 미모라면 천상삼화와도 견줄 수준인데, 전혀 이름이 나지 않았으니 무림인일 리가 없잖아?”악현강의 이의는 타당했다. 반드시 무림인을 데려와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으니까.
그들이 생각해도 저 미모라면 명성을 타지 않을 리 없었다. 중원 전체를 뒤져도 쉽게 볼 수 없는 극강의 미모인데 전혀 알려진 바 없다니.
“흠, 타당한 반박입니다.”
제갈우도 동참했다. 그도 이 여인의 정체가 궁금했다.
백리월은 미간을 찌푸렸다. 우설금이 무림인인지 아닌지 그는 관심이 없었다. 오직 이 내기를 이기려고 우연히 절에서 발견한 미녀를 미행해서 데려온 것뿐이니까. 그가 관찰하는 동안 그녀에게 무림인이라는 조짐이 전혀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검이라도 쥐여 주는 건데.’
어차피 무공 실력은 조건에 없었으니 중요하지 않다. 어제부터 무공을 익히기 시작했다고 우겨도 할 말 없지 않나?
공격받은 백리월은 마지못해 받아들였다.
“좋아. 우 낭자가 무공을 익혔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까?”
악현강이 다짜고짜 우설금을 압박했다.
“낭자의 사문은 어디요?”
무림인이라면 사문이 없을 수 없다.
당연히 우설금은 대답하지 않았다. 마교라고 대답할 수는 없다. 어설프게 적당한 문파를 댈 수도 있었으나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녀가 대답하지 않자 모두 확신해서 그녀를 얕잡아봤다. 특히 함께 온 여인들은 그녀를 무시하는 티가 역력했다.
“확실하네. 규정 위반이야. 더 볼 것도 없어.”
보다 못한 백리월이 나섰다.
“사문을 밝히기 힘들 수도 있잖아? 다른 방법은 없어?”
“크크, 그렇다면 쓸만한 초식을 펼쳐보라고 해. 그 흔한 삼재검법을 모르진 않겠지.”
악현강이 비웃음을 터트리며 제안했다. 그는 우설금이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는 점에 목을 걸 수 있었다. 그녀에게서 무공을 익힌 어떤 흔적도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백리월은 찜찜한 표정으로 우설금에게 눈짓했다. 가능하냐는 질문이다.
정작 우설금은 잔뜩 미간을 찌푸린 채 싸늘한 한기만 풍기고 있었다. 실제로 그녀는 삼재검법을 몰랐다. 마교에서는 삼재검법을 가르치지 않는다.
“자, 우 낭자! 무공 알아요? 한번 해봐요.”
호기롭게 제안하는 악현강을 우설금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녀의 무시에 악현강이 확신해서 가슴을 탕탕 쳤다.
“이 낭자가 무공을 익혔으면 성을 간다. 성을!”
“오늘 악 씨 한 명 사라지겠네.”
백리월은 빈정대면서 우설금에게 재차 부탁했다.
“우 낭자, 이왕 이렇게 된 거 한번 보여줍시다. 뭐…… 정 모르면 색혼술 이런 것도 괜찮소. 낭자가 웃음을 흘리면 여기 사내들은 모두 혼이 나갈 거요.”
“뭐예요? 예쁘다고 봐주는 거예요? 난 이런 결과 승복 못 해요!”
악현강을 따라왔던 제검문의 두 낭자가 검을 잡고 우설금에게 다가왔다. 그러자 다른 여인들도 우르르 우설금을 포위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청년들과 달리 우설금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들을 쭉 훑어봤다.
모두 다섯 명의 여인들이 눈썹을 치켜세우고 노려보고 있었다.
제검문의 낭자가 앞장섰다.
“감히 우리를 능멸하다니! 무공이 없으면 오늘 네년을 팔아버릴 거야!”
미모에서 눌린 여인의 질투는 무서웠다. 우설금은 여인들이 갑자기 화를 내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자연스럽게 그녀는 고운 얼굴을 찌푸렸다.
“오! 그것 좋은 생각이야!”
악현강이 한바탕 비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우설금에게 끈적끈적한 시선을 보내면서 백리월에게 말했다.
“미모로 따지면 일월정에서도 최고야. 인기가 폭발하겠어. 그래도 군자의 도리가 있으니 백리 공자에게 순서를 양보하지. 아마 한동안 손님이 넘쳐서 줄을 서야 할 것 같은데?”백리월은 우설금을 감싸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어차피 우설금과는 오늘 처음 만난 사이라 아쉬울 게 없다. 오히려 이 아름다운 여인을 품을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 작당할 수 있었다.
악현강의 부추김에 소가주들의 눈빛이 음탕하게 변했다. 여인들은 더욱 막무가내로 나왔다.
“얼른 무공을 할 줄 안다는 걸 보여라!”
“무릎 꿇고 용서를 빌어!”
“너 기녀지? 백리 공자가 기녀를 데려온 게 확실해. 반박도 못 하는 꼴 좀 봐.”
우설금은 이들의 만행을 무심하게 받아들였다. 슬슬 참을성이 한계에 다다랐다.
사실 참을 생각도 없긴 했다. 단지 그녀는 이들이 암흑단과의 전쟁을 어떻게 치를지 궁금해서 따라온 것뿐이다.
그런데 암흑단 전쟁은 쏙 빠지고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렀다. 주석하의 염려도 있어 웬만하면 손을 쓰지 않으려 했는데 아무래도 힘들어진다.
휴식 중인 호랑이 앞에서 쥐가 법석을 떨어도 귀찮으면 사냥하지 않고 내버려 둔다. 하지만 그 도를 넘으면 배가 불러도 잡아 죽일 수밖에 없다.
우설금의 표정이 점점 차가워졌다.
사실 그녀는 이런 모임 문화에 익숙지 않았다.
이보다 훨씬 살벌한 마교에서 홀로 섰기에 이런 식의 험담이나 조롱에 무감각했다. 그들이 아무리 말로 떠들어봐야 몸에 해가 되지 않으니까.
그런데…….
“자! 피해 봐! 무공을 익혔다면 이 정도는 하겠지?”
제검문의 여인이 교훈을 내린답시고 결국 검으로 그녀를 공격했다. 주변 공자들은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물론 제검문 여인은 무공을 모르는 가녀린 우 낭자를 죽일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미모로 자신을 모욕한 이 여인을 참교육 시키고 싶었다.
몸이 아닌 옷가지를 잘라서, 그것도 수치심을 느낄 부위를 잘라서 감히 기녀가 이런 자리에 신분을 속이고 끼어든 행위를 단죄하고 싶었다.
그래서 검으로 천천히 우설금의 상의를 그었다.
“어?”
놀랍게도 검이 들어가지 않았다. 우설금의 가슴을 겨냥한 검은 그녀의 옷 한 치 위에서 더는 접근하지 못했다.
상상치도 못한 기이한 상황에 제검문 여인은 숨이 턱 막혔다.
다른 사람들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대부분 옷이 잘리고 드러날 다음 장면을 음흉하게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기대와 다른 이상한 일이 발생했다.
아무도 차분하게 상황을 분석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특히 검을 지른 제검문 여인은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주변의 시선을 의식한 그녀는 이번에는 막무가내로 달려들었다.
“야! 검이 강한지 네년 몸뚱이가 강한지 확인해 봐야겠다!”
이번에는 정말로 우설금을 향해 검을 내리쳤다.
뚝!
놀랍게도 금속성이 일고 검이 토막 났다. 우설금은 여전히 표정 변화 없이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제검문 여인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게 무슨……. 모, 몸뚱이가 더 강했어…….”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자신의 검을 바라보던 여인이 시선을 우설금에게 돌렸다. 서서히 그녀의 얼굴에 공포가 어렸다.
이 여인은…… 순한 양이 아닌 호랑이였다.
그때부터 우설금의 무시무시한 기운이 좌중을 압박했다.
제검문 여인이 물러서는 순간 우설금이 가볍게 손을 저었다.
콰앙!
제검문 여인이 태풍에 휘말린 듯 뒤로 날아가며 벽에 몸을 처박았다. 그녀는 내외상을 입고 바로 정신을 잃었다.
“헉! 무, 무공을 알고 있었어?”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남은 제검문의 다른 여인이 검을 들고 달려들었다.
“네년이 감히!”
여인은 말을 제대로 끝내지 못했다. 그녀 또한 뒤로 튕기듯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쿵!
사람들은 얼이 빠져서 입을 쩍 벌렸다. 눈앞의 여인은 그들이 평생 만난 적이 없는 무시무시한 고수였다.
우설금의 싸늘한 시선이 자신을 둘러싼 여인들을 향했다.
여인들이 움찔하는 순간 우설금의 몸에서 강력한 기운이 폭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