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검천하-205화 (205/273)

205화 선상의 지옥도 (1)

“아악!“

남은 세 여인마저 무시무시한 강기의 폭풍에 휘말렸다.

그녀들은 속수무책으로 뒤로 날아갔다. 우설금을 중심으로 폭발하듯 퍼지는 압력파에 전혀 대응하지 못했다.

와장창-

창틀이 부서지고 세 여인이 건물 밖으로 떨어졌다. 이미 정신을 잃은 그녀들은 중상이거나 운 나쁘면 목숨을 잃을 것이다.

다시 찾아온 적막 속에 우설금은 자신을 둘러싼 다섯 남자를 쓱 훑었다. 그녀의 표정은 처음 이곳에 들어왔을 때와 똑같이 순진무구 그 자체였다.

“무공을 모르는 게 아니라 고, 고수였어!”

“너, 넌 누구냐?”

청년들이 혼비백산한 가운데 백리월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소리쳤다.

그는 방금 벌어진 일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그녀가 정파십존 수준의 고수가 아니라면 절대 일어날 수 없는 현상이었다.

무공을 익혔는지 아닌지도 의심스러운 여자가, 그것도 지금까지 조용히 말도 없이 묵묵히 있던 여자가 갑자기 돌변하다니?

너무 큰 충격에 사고가 마비되어 어떻게 할지 전전긍긍했다.

다섯 사내를 훑어보던 우설금이 가장 먼저 그녀를 적대시했던 악현강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겁에 질린 악현강은 얼른 자신의 검을 찾았다.

비록 그녀의 신위를 목격했지만 아직은 인정할 수 없었다. 자신도 지역에서는 내놓으라는 고수 아니던가.

“이, 이익!”

악현강은 신음인지 기합인지 모를 소리를 내지르며 우설금을 향해 검을 날렸다.

정작 우설금은 피할 생각도 없이 그를 노려보기만 했다.

검이 목에 닿기 직전까지 우설금이 꼼짝하지 않자 악현강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쨍!

이어서 눈앞에 하얀 섬섬옥수가 어른거린다 싶은 순간 검이 부러졌다.

“으헉!”

악현강은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제대로 보지 못했다. 다른 청년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이를 목격한 유일한 사람이 있었다. 제갈우였다.

그는 악현강의 검이 우설금을 치려는 순간 그녀가 손을 살짝 휘저어 검을 막는 것을 얼핏 봤다. 그녀의 손끝에는 적색의 흐릿한 강기가 어려 있었다.

‘수, 수강이다!’

수강으로 검을 부러트린 것이다.

사실 검강보다 수강이 훨씬 어려운 기술이다. 수강은 단순히 육신을 호신강기로 덮는 무공이 아니다.

그 호신강기를 검강만큼이나 예리하고 벼려야 하니 웬만한 고수가 아니라면 구현하기 어려운 최강의 무공이다.

그런 수강이 눈앞에서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대체 누구냐? 들어본 적이 없다…….’

제갈우는 우설금의 정체를 고민하며 다급한 마음을 진정시켰다.

저 여인은 희대의 살인마이고 지금 자신은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빨리 깨달았다.

여인의 정체를 고민하던 그는 재빨리 사고를 전환했다. 저 여인의 정체가 문제가 아니라 이곳을 무사히 빠져나가는 것이 문제였다.

애초에 무공으로 대적하겠다는 생각은 버렸다. 비록 자신이 중원사룡에 속할 만큼 강자였으나 정파십존 수준과는 차이가 컸다.

사실 이곳의 누구보다 무공이 강했기에 우설금과의 격차를 더 확실하게 꿰뚫어 봤다.

‘자칫하면 죽는다.’

게다가 이런 상황에서는 자신의 장기인 진법을 펼칠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연회를 주관하느라 가장 안쪽까지 들어와 있기에 통로 쪽으로 도망치는 건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우설금을 뚫고 도망친다는 생각은 아예 포기했다.

제갈우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방금 여인들이 튕겨 나가면서 뚫린 창문의 큰 구멍이 보였다. 마침 그 구멍은 자신의 자리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우설금이 다른 사람에게 신경 쓰는 틈을 이용하면 가능할 것 같았다.

그가 눈치 보는 사이 검이 부러진 악현강이 분노를 터트렸다.

“이년이! 하필 검이 부러져서 운이 좋구나!”

극도의 분노와 긴장이 사고를 마비시켰다.

악현강은 태어나서 이런 압박감을 경험한 적이 없었기에, 그 공포를 이기고자 더욱 분노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검을 던진 그는 다짜고짜 우설금의 완맥을 잡으려 했다.

악현강이 손을 뻗자마자 갑자기 그의 신형이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헉!”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발이 바닥에서 떨어졌다고 느낀 순간 급격하게 몸이 아래로 추락했다.

쾅!

악현강의 육신이 바닥에 내리꽂혔다.

그의 몸은 절반가량이 바닥을 뚫고 들어가 아래층 천장으로 다리가 튀어나온 상황이었다.

마치 바닥에 몸이 낀 듯 그는 버둥거리며 몸을 움직이기 어려웠다.

강한 충격에 악현강은 제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로 우설금을 올려다봤다.

그는 그녀의 얼굴에 어린 싸늘한 미소를 감지하고는 입을 쩍 벌렸다.

순간 우설금의 손이 허공을 휘저었다. 탁자 위의 젓가락 몇 개가 그녀의 손으로 날아왔다.

절정의 허공섭물에 악현강이 입을 벌릴 틈도 없이 우설금의 손에서 젓가락이 빗살처럼 뿌려졌다.

콰직-

젓가락 세 개가 악현강의 양쪽 어깨와 정수리에 박혔다. 순식간에 피투성이가 된 악현강의 머리가 축 늘어졌다.

우설금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남은 자들을 돌아봤다.

“으으.”

백리월은 머릿속이 텅 비었다. 이 여인은 인간이 아니었다. 악마였다. 이렇게 무서운 여인을 겁도 없이 데려온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아니, 이곳에 와서도 저 여인 편을 들어주었다면 이런 상황까지 내몰리지 않았을 것이다.

미모에 홀려 육체를 탐하려 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이제는 되돌릴 수 없는 후회였다.

제갈우를 비롯하여 다른 소가주들이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해결하라는 거야? 내가 무슨 수로 해결해?’

그는 소가주들이 원망스러웠으나 어쨌든 자신이 데려왔으니 결자해지를 떠올렸다.

“우, 우 소저…….”

백리월은 가장 자신 있는 미소를 지으며 두 손을 들어 항복을 표시했다.

우설금의 무표정한 얼굴이 그를 향했다.

“미, 미안하오. 무, 무림인이 아닌 줄 알고…….”

무슨 말을 하는지 백리월 자신도 몰랐다. 지금까지 기세등등하던 건방진 태도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 순간 남은 세 청년이 급히 움직였다.

황보세가와 단리세가의 소가주들은 우설금을 지나쳐 밖으로 나가려 했다. 우설금이 백리월에게 신경이 쏠린 틈을 이용한 것이다.

순식간에 우설금을 지나쳐 문 앞에 도착한 두 사람은 탈출에 성공했다고 안도했다.

그때 우설금의 손을 떠난 젓가락이 빛살처럼 날았다.

콰직!

마치 화살처럼 젓가락이 두 사람의 등을 꿰뚫었다. 놀랍게도 젓가락은 그들을 관통해서 문에 꽂혔다. 문에 꽂힌 젓가락은 모두 네 개였다.

막 문을 열려던 황보세가 소가주는 눈앞에 꽂힌 젓가락에서 흐르는 피를 보고 입을 쩍 벌렸다. 뒤늦게 가슴에서 극심한 통증이 밀려왔다.

믿고 싶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가슴이 뻥 뚫려 피가 폭포수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런 구멍이 두 곳이다.

단리세가 소가주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흐르는 피를 지혈할 방법이 없으니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

소란이 끝나기도 전에 창틀이 부서지는 소리가 울렸다.

제갈우가 창문으로 몸을 던져 달아나고 있었다.

우설금은 싸늘한 미소를 머금은 채 손에 든 마지막 젓가락을 날렸다.

빛살처럼 젓가락이 창문을 뚫었다.

“크윽!”

창밖에서 비명이 일었다.

우설금의 입가에 쓴웃음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아마 제갈우는 목숨을 건질 것이다.

제갈우는 제갈휘에게 달려갈 것이고, 이것은 어떤 식으로든 변화를 불러와 주석하에게 도움을 줄 것이다.

생각을 끝낸 우설금은 마지막 남은 백리월에게 시선을 돌렸다.

순식간에 동료가 모두 죽고 장내가 정리되자 백리월은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그는 손을 저으며 뒤로 물러났다.

“나, 낭자 내가 잘못했소.”

우설금은 백리월이 무슨 말을 하든 듣지 않았다.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손을 뻗었다. 뒷걸음치던 백리월의 등이 벽에 닿았다.

백리월은 상대가 무슨 수를 쓰는지 알 수 없었다. 분명히 그녀는 일장이나 멀리 떨어져 있건만 마치 손으로 목을 조르는 것처럼 목이 짓눌리고 있었다.

숨을 쉴 수 없게 된 그는 허덕이며 쉰 목소리를 냈다.

“나, 낭자! 자, 자비를…… 크윽!”

고통이 밀려왔다. 상상치 못한 공포와 두려움이 그의 몸과 머리를 잠식했다.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을 파리처럼 죽이면서도 오만하게 굴었던 백리월은 죽음의 고통을 처음으로 맛봤다.

평소처럼 예쁜 여자가 있었고 단지 수작을 조금 부렸을 뿐이다.

그때처럼 그녀들과 강제로 하룻밤을 보내지도 않았는데, 왜 이런 고통이 밀려오는지 그는 이해하지 못했다.

처음 맞은 죽음은 너무 고통스럽고 처참했다. 그의 정신이 하얗게 변했다.

무슨 잘못을 했는지조차 생각나지 않았다. 단지 눈앞에 무표정한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만 보일 뿐.

뚝-

백리월의 목이 부러졌다.

우설금은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

주석하는 선실 밖에서 내부를 훔쳐보고 있었다.

그는 기감을 높여 오대세가 가주 회의를 어려움 없이 들었다.

모임 내용은 예상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오대세가의 힘을 모아 암흑단을 칠 계획을 모의하고 있었다.

그들이 주장하는 명분은 무림 정의 구현.

하지만 더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각자의 생각이 달랐다.

제갈휘는 다른 세가를 끌어들여 제갈세가의 기반을 다지고 정파의 인심을 얻으려 했고, 산동악가 등은 이참에 오대세가 자리를 확보해서 가문의 위상을 높이려 했다.

“모두 힘을 합치면 암흑단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하, 당연하지요.”

그들은 웃음을 머금고 평화롭게 회의를 진행했다.

누가 평가해도 세가 연합에 비해 암흑단이 열세였다. 다만 걸리는 점이라면…….

“……암군은 어떻게 처리할 겁니까?”

천권무적 황보율이 마지막 핵심을 짚었다.

암군은 흑도팔군의 일인으로 정파십존이 아니면 상대하기 곤란하다. 그런데 세가 연합에서 그런 고수는 만사지존 제갈휘가 유일하다. 다만 제갈휘는 무공보다 기관진식 전문이라 즉각적으로 암군에 맞설 전력이 아니다.

그들이 아무리 숫자에서 우위를 점하더라도 암군을 막지 못하면 확실한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정파십존 한 분을 초빙해야 하지 않을까요?”

가주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치며 제갈휘를 압박했다.

제갈휘도 눈치가 빨랐다. 친분을 이용해서 자하검존을 데려오라는 요구다.

이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끌어내려면 어쩔 수 없다고 판단한 제갈휘가 미소로 대답했다.

“그렇게 하지요. 제가 검존께 연락드리겠습니다.”

사실 이미 준비해뒀다. 자하검존만이 아니라 더 엄청난 거물들을.

가로막혔던 큰 산이 해결됐다.

가주들이 호탕한 웃음으로 환대했다.

“저는 아들 백리월을 전면에 세우겠습니다.”

“우리 산동악가는 산동일협으로 명성을 날리는 악현강이 앞장설 겁니다.”

저마다 소가주를 앞에 내세웠다.

이들의 속셈은 단순했다. 소가주인 백리월이나 악현강은 중원사룡에 비하면 지명도가 한참 떨어졌다.

그들은 그 이유가 무공이 부족해서라기보다 이들이 활약할 전장이 없어서라고 여겼다.

그런데 전장이 마련됐다. 백번 계산해도 패배할 가능성은 조금도 없다. 참전만 하면 명성을 올릴 기회는 그리 흔치 않다.

이 기회를 잡지 않을 바보는 없다.

제갈휘는 그들의 속셈을 알면서도 이해했다.

주석하는 내심 피식 웃었다. 속셈을 모두 들었으니 이제는 단죄해야 할 때다. 지금 이 자리에서 타격을 입히지 못하면 암흑단에 피해가 돌아갈 것이다.

어찌 보면 마지막 기회다.

그가 방법을 고민할 때였다.

갑자기 소형 나룻배가 유람선으로 다가왔다.

이곳은 화등 축제가 열리는 곳과 떨어져 있어서 유람하는 배가 접근할 일은 없다. 그런데도 배가 곧바로 직진해서 유람선으로 다가왔으니 목표가 유람선이 분명했다.

어둠 속에 나룻배를 젓는 사공과 그 건너편에 홀로 앉은 인영이 보였다.

무심코 나룻배로 시선을 고정하던 주석하의 안색이 확 바뀌었다.

제갈세가의 소가주인 제갈신수 제갈우가 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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