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검천하-206화 (206/273)

206화 선상의 지옥도 (2)

나룻배를 탄 제갈우의 모습이 다소 이상했다.

어두운 밤이라 불분명했으나 나룻배에 쪼그리고 앉은 모습이 어딘지 불안해 보였다. 예전 상춘원에서 보았을 때 당당했던 모습과는 달랐다.

‘부상인가?’

무려 중원사룡에 속하는 제갈우다.

그의 무공이야 잘 모르겠지만 진법 재능은 상당했던 것으로 기억했다.

그런 제갈우가 이런 작은 동네에서 다칠 일이 어디 있을까.

주석하는 접근하는 나룻배를 조용히 지켜봤다. 제갈우의 행동에 따라 자신도 움직일 생각이었다.

나룻배가 유람선에 닿자 제갈우가 비틀거리며 유람선에 올랐다.

‘젓가락?’

어둠 속에서 주석하는 제갈우의 등에 꽂힌 젓가락을 분명하게 확인했다. 제갈우의 등은 상처에서 흘린 피로 흥건했다. 흰옷이라 붉게 젖은 부분이 처절하게 보였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주석하는 섬뜩한 기시감이 왔다.

중원사룡이라는 제갈우를 젓가락 하나로 저렇게 만들 고수가 누가 있을까?

그것도 이런 시골에서? 정파는 아닐 테니 사파에서 찾아야 하고, 이 부근에 흑도팔군에 비견할 고수는 없다.

행적을 전혀 모르는 마교칠왕이 나타났을 가능성이 있긴 하지만…….

마교? 설마 우설금이?

주석하는 벼락을 맞은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우설금이라면 제갈우 정도 되는 고수에게 젓가락을 박을 능력이 차고 넘친다. 그녀는 마음의 짐을 덜고자 도수를 돕겠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게다가 정파인을 해치는 일은 사파인을 돕는 일이기도 하고 정파와 사파의 양쪽을 약화하려는 마교의 전략에 부합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그녀는 살인에 조금의 거리낌도 없다.

이 작은 동네에 이름 모를 경천동지할 고수가 등장했다는 의심보다 우설금이 손을 썼다고 보는 게 훨씬 타당했다.

‘더는 움직이지 말았으면…….’

주석하는 내심 우설금에게 안타까움을 느끼면서 그녀가 더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기를 바랐다.

그 사이 제갈우가 선실 내로 들어갔다.

갑자기 내부에서 왁자지껄 소란이 일었다.

주석하는 곧바로 신경을 선실 내로 집중했다.

이곳은 강 중앙이라 주위에서 동떨어진 곳이다. 그가 일을 벌이기에 완벽한 조건이다. 더구나 그는 화판답공 덕분에 물이나 평지나 별 차이 없이 돌아다닐 수 있다.

‘과연 화존의 무공이 쓸모가 크네.’

주석하는 화존에게 감사를 표하고 내력을 끌어 모았다.

드디어 그가 주도하는 시간이 도래했다!

고오오오-

단전에서 내력이 물밀 듯이 뿜어져 나왔다.

주석하의 양손이 붉게 달아올랐다. 극양염천신공이다.

예전에는 극양염천신공을 끌어올리려면 반드시 염군의 내력이 필요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제약이 사라졌다. 무려 다섯 기인의 내력이 합쳐진 고금 제일의 내공 전부를 극양염천신공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됐다. 바로 여의신단의 효능이다.

주석하의 양손에서 하얀빛을 뿜는 구가 생기더니 점점 커졌다. 작은 호롱불이 이제는 화등보다 훨씬 커지고 밝기는 눈을 뜨지 못할 만큼 강렬했다.

양손에 커다란 수박 크기의 빛 덩어리를 하나씩 들고 주석하는 선실을 노려봤다.

잠시 숨을 고른 그는 힘껏 양손을 선실 벽에 처박았다.

콰아아앙-

화약이 폭발하듯 커다란 배가 산산이 부서졌다. 마치 하늘에서 벼락이 내려친 듯했다. 충격을 받은 선실은 완전히 박살났고 아랫부분 배 전체가 반으로 쪼개졌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남은 배 조각에 불이 붙었다. 극양염천신공의 뜨거운 열기 때문이었다.

순식간에 배가 난파하고 화재가 발생하면서 선실과 갑판은 아비규환이 됐다.

배에서 인영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모두 다섯 줄기의 인영은 부근에 떠 있는 나무 조각에 간신히 착지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인 제갈휘는 아들 제갈우를 부축하고 함께 나무판을 밟았다.

“누구냐!”

제갈휘가 사방을 둘러보며 외쳤다.

과연 늙은 생강의 경험은 매웠다. 제갈휘는 갑작스러운 배의 붕괴가 인위적으로 발생했다고 확신했다.

아들이 다친 직후라서 그런 의심은 더욱 컸다.

다른 세가 가주도 심정은 비슷했다. 무림을 종횡한 지 이미 수십 년, 이런 위기에 당황할 그들이 아니었다.

밤이 깊어 강은 고요했다.

멀리 화등 축제 불빛이 선명했고 강물은 흐르는 듯 마는 듯 매우 잔잔했다. 주변은 어둠이 짙었다.

타오르는 배의 불길을 바라보면서 그들은 착잡한 기분을 금치 못했다.

감히 오대세가 가주를 노리고 습격하다니! 평범한 적일 리 없었다. 적어도 흑도팔군의 일인이거나 아니면 마교칠왕일 거라고 그들은 추정했다.

그들이 사방을 살피면서 극도의 긴장감에 싸여 있을 때였다.

“으흐흐흐.”

기괴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불꽃이 넘실거리는 배의 뒤편에서 연청색 무복을 입은 젊은이가 비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누구냐?”

제갈휘가 재차 소리쳤다.

다가오는 젊은이의 얼굴이 불빛을 받아 선명해졌다.

어찌 모를 수 있을까. 안색이 하얗게 질린 제갈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주…… 석하…….”

주석하는 강물 위에 우뚝 선 채 다섯 가주를 노려봤다.

예전과 달리 측량 불가에 이른 그의 내공은 화판답공을 새로운 경지로 끌어올렸다.

이제는 별다른 동작 없이도 자유자재로 허공에 떠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제갈휘를 노려보는 주석하의 눈빛이 섬뜩했다. 불타는 배의 불빛에 반사된 주석하의 얼굴은 악마와 비슷했다.

“으음, 이놈이!”

제갈휘는 득보다 실이 많은 날임을 깨달았다. 그 누구보다 주석하의 무공 성취를 많이 아는 사람이 바로 그다.

그날 상춘원에서 정파십존 셋을 맞이하여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며칠 전 소림 불망헌에서 반야불존과 오각주를 도살한 자가 누구인지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의 추측에 따르면 현재의 주석하는 반야불존이나 무극천존 이상이다. 사실상 중원 무림에서 그를 상대할 자는 없다.

제갈휘는 주위의 세가 가주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흐흐, 주석하라고? 하룻강아지 같은 놈!”

“여기가 어디라고 불을 질러?”

“세가의 힘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마!”

세가 가주들이 분노를 터트리며 포위망을 형성했다.

제갈휘는 그런 그들의 행동에 쓴웃음을 지었다.

저들은 아직 주석하가 누구인지 얼마나 무서운 인물인지 전혀 모른다.

소림의 오각주가 합공해도 주석하를 어쩌지 못했는데, 이곳에서 가주들만으로 그를 해치울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제갈휘가 볼 때 이 싸움의 결말은 이미 결정 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빠져나갈 수 있을까.

그는 품 안에서 반쯤 의식을 잃은 아들을 쳐다봤다. 아들을 공격한 자가 누구인지 모른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같은 시각에 일이 터진 것으로 보아 주석하와 한패가 분명했다.

‘어떻게 해야 저놈을 죽일 수 있지? 아니,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지? 설사 나는 죽더라도 아들만은 살려야 한다. 가문의 대가 끊어져서는 안 돼.’

제갈휘는 진심으로 머리를 굴렸다. 그가 아는 어떤 지략도 지금 이 위기에서는 마땅한 수단이 아니었다.

주석하는 제갈휘의 내심을 훤히 읽었다. 제갈휘의 얼굴에서 막다른 골목까지 몰린 긴장이 엿보였다.

“만사지존! 상춘원을 기억하는가?”

상춘원이 언급되자 제갈휘는 움찔했다.

“그날 나를 함정에 빠트렸더군. 오늘 그 앙갚음을 해주지!”

호랑이의 무서움을 모르는 가주들이 비웃음을 터트렸다.

“으하하,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구나!”

주석하는 가주들의 외침을 신경 쓰지 않았다. 이들의 무공은 소림 오각주보다 확실히 떨어지니까. 그의 관심은 오직 제갈휘였다.

지금까지 그에게 벌어졌던 많은 위험이 제갈휘로 인해 발생했다. 정파를 위한답시고 다짜고짜 그를 해치려 한 행위를 용서할 수 없었다.

스르르-

주석하의 신형이 물 위를 미끄러지며 오가주에게 다가갔다.

땅에서처럼 진각 소리도 발소리도 없었으나 그 압박감이 대단했다.

그의 움직임에 오가주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들은 주석하가 물 위에 뜬 나무판을 밟고 서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어둠 속이라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그런데 주석하가 이동하는 모습은 그렇게 설명할 수 없었다.

순간 그들의 머릿속으로 소림의 창시자인 달마조사가 갈댓잎으로 장강을 건넜다는 일위도강(一葦渡江) 경신법이 떠올랐다.

물론 화판답공은 일위도강과는 다른 경신법이다. 그보다 훨씬 발전된 보법이다.

“고, 고수구나!”

오가주는 나타난 인물의 무공이 보통이 아님을 이제야 깨달았다.

그 순간 빛의 속도로 주석하가 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주석하의 무시무시한 혼천십이권이 백리세가 가주를 가격했다.

쿵!

단 일격이었으나 백리세가 가주는 숨을 쉴 수 없었다.

목구멍으로 비릿한 선혈이 올라오고 가슴에 구멍이 난 듯 답답해졌다. 실제로 그의 가슴 내부는 완전히 으스러졌다.

“크으으윽!”

고통에 안면을 일그러트리던 백리세가 가주가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키다 쓰러졌다.

그는 작은 나무판에 간신히 지탱하고 있었기에 곧바로 물에 빠졌다.

정신을 잃은 상태인데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진기의 흐름이 멈춘 채로 물에 빠졌으니 사실상 사망한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의 몸이 서서히 강 아래로 침몰했다.

단 일격에 백리세가 가주가 사라지자 다른 가주들은 공포에 짓눌렸다.

“으으, 역시 들리는 소문대로…….”

가주들은 그제야 호랑이를 만났음을 깨달았다. 소문을 믿지 않았는데 직접 만나보니 흑도팔군을 능가하는 자였다.

주석하는 빙글 몸을 돌려 다음 희생물을 노려봤다.

단리세가 가주였다.

물론 주석하는 이들이 누구인지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다만 가장 가까이 있기에 다음 순서로 정했을 뿐이다.

“으으으.”

그와 눈이 마주친 단리세가 가주가 부들부들 떨었다.

이미 전의를 상실한 자를 몰아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마치 지면 위를 도약하듯 주석하는 물을 박차고 허공을 날았다.

콰앙!

극한빙백신공!

순식간에 단리세가 가주의 얼굴이 하얗게 탈색했다. 얼굴만이 아니었다. 온몸의 피부가 백짓장처럼 하얗게 변해 서리가 끼었다.

단리세가 가주는 신형을 일으키려고 힘을 썼다. 하지만 혈맥이 얼어붙은 듯 기의 순환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어헉!”

쩌저정-

마치 얼음이 깨지듯 피부가 조각조각 갈라졌다. 이미 뇌는 마비되고 몸의 기관이 정지했다. 그는 비명마저 지를 수 없었다.

푸스스스-

한 사람의 육신이 얼음이 되어 바람에 흩날렸다. 사람인지 고기인지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운 육편이 물에 빠졌다.

“으아악!”

황보세가 가주와 산동악가 가주가 기겁해서 비명을 질렀다.

그 순간 주석하의 혼천십팔지가 불을 뿜었다.

슈슈슉-

전력을 다해 막아도 쉽지 않을 위력인데 겁에 질린 채 피하기 바쁜 황보세가 가주가 막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푹- 푹- 푹-

순식간에 모두 열 개의 구멍이 가슴에 새겨지고 피가 솟구쳤다.

주석하는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 이들은 살려두면 제갈휘의 개가 될 자들이니까.

어차피 상관없나? 제갈휘는 오늘 여기에서 도망치지 못할 테니.

황보세가의 가주가 정신을 잃고 물에 빠지는 순간 산동악가 가주는 도주를 택했다.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물에 뛰어들었다.

강이 아니었다면 그는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곳은 강이었고 그는 주석하처럼 강 위를 뛰어다닐 무공이 없었다.

산동악가 가주는 허우적거리면서 어둠이 보호해주기를 원했다.

그가 숨을 쉬려고 고개를 물 밖으로 내밀었을 때였다. 끈적끈적한 기운이 코로 들어왔다.

순식간에 독에 중독됐다. 내공이 사라지고 온몸의 힘이 빠져 더는 헤엄칠 수 없었다.

다른 가주들을 가볍게 해치운 후 주석하는 시선을 돌렸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 제갈휘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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