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검천하-207화 (207/273)

207화 선상의 지옥도 (3)

제갈휘는 아들 제갈우를 부축한 채 커다란 나무 조각에 의지하여 강 위에 떠 있었다.

그의 표정에서 주석하는 제갈휘가 자신을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읽을 수 있었다.

예전에 상춘원에서 만났을 때 제갈휘는 이런 표정이 아니었다. 그때는 주석하를 그저 잘 나가는 기재 정도로 여기고 깔보는 티가 역력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상상 이상의 괴물을 만나 주눅이 든 표정이다.

과거의 주석하는 정파십존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비록 단전 내부에 엄청난 내공이 숨어 있었지만 제갈휘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단지 주석하를 십존과 동일한 반열에 올리고 경계했다. 그때 제갈휘가 본 주석하는 딱 그 수준이었다.

그런데 오늘 다시 만난 주석하는 그때와 달랐다. 이제는 십존과 같은 수준이 아니라 압도했다. 풍기는 분위기부터 완전히 달랐다.

상상하지 못했던 엄청난 위압감이 주석하에게서 풍겨 나왔다. 주석하가 가주들을 처리하는 장면은 제갈휘의 오금을 저리게 했다.

“그새 또 무공이…… 늘었구나.”

제갈휘가 허탈한 신음을 내뱉었다.

지금 제갈휘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실제로 주석하는 그동안 계속 무공이 상승하고 있었다. 그 결정판이 내공으로 드러났을 뿐이다.

“반야불존을 해치웠다더니 과장이 아니었어.”

“후후, 이 기회에 하나만 정정하지. 반야불존은 내가 죽이지 않았다. 게다가 그분이 열반에 드실 때는 매우 좋은 분위기였어. 당신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아무리 그가 변명해봐야 제갈휘가 믿지 않으리란 정도는 안다. 그러거나 말거나 대충이라도 바로잡아 주고 싶었다.

“흐흐, 진실이 무엇인들 뭐가 중요하겠나? 소림이 너를 무림 공적으로 선포했는데.”

“흐음, 그래. 무림 공적이 뭐가 중요할까? 당신이 오늘 여기에서 살아 돌아갈 수 없다는 게 중요하지.”

주석하는 같은 말로 비웃어줬다.

제갈휘의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

그게 현실이다. 지금 제갈휘는 다친 아들을 부축하고 물 위에서 간신히 나무판자에 의지하고 있다. 누가 봐도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이다.

물론 주석하는 제갈휘에게 숨겨놓은 비책 하나쯤은 있으리라 짐작했다. 아무렴 그는 정파십존이 아닌가.

과연 천년 묵은 능구렁이처럼 제갈휘는 한바탕 웃음을 터트렸다.

“자신만만하구나. 하긴 네놈의 지금 기세를 보면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하겠지. 하지만 제갈가는 그렇게 무기력하지 않다.”

“아직 보여줄 게 남았나?”

“그렇다! 네놈을 지옥으로 인도해주마!”

제갈휘가 이를 갈면서 손에 쥔 나무 조각을 전면으로 뿌렸다.

나무 조각 하나가 주석하와 제갈휘의 중간지점에 떨어져 내렸다.

그 행위는 진법을 발동시키는 마지막 착수였다. 주석하가 오대세가 가주들을 죽이는 짧은 순간에 제갈휘는 파손된 배 조각을 이용해서 강물에 진법을 설치했다.

정말 놀랄만한 재능이었다.

주석하는 진법이 발동하도록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 그는 떨어지는 나뭇조각을 허공섭물을 사용해서 끌어당겼다.

그의 방해를 눈치 챈 제갈휘가 내력을 쏟아 나뭇조각을 빠트리려 했다. 하지만 주석하와 제갈휘의 내공 차이는 어마어마했다.

제갈휘가 전력을 다했건만 나뭇조각은 속절없이 주석하에게 끌려갔다.

“어떡하나? 진법을 노리나 본데, 어려울 것 같지?”

주석하가 빈정대는 순간 제갈휘의 손이 다시 홱 뒤집혔다.

이번에는 모두 세 개의 나뭇조각이 앞쪽으로 쏘아졌다.

주석하가 비웃음을 머금고 손을 흔들어 세 개의 나뭇조각을 끌어당기는 순간.

풍덩!

언제 던졌는지 나뭇조각 하나가 제갈휘의 앞쪽 강물 위로 떨어졌다. 허허실실 전략이었다.

제갈휘는 진법을 설치하면서 주석하의 방해를 피하려고 여러 개의 나뭇조각으로 눈을 속였다.

‘과연 능구렁이다!’

주석하는 제갈휘의 임기응변에 혀를 내둘렀다.

마지막 패가 물에 빠지는 순간 사방에서 안개가 일었다. 새벽에 이는 물안개처럼 순식간에 피어올라 앞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마치 강 중간에서 고립된 느낌이었다.

“하하! 주석하! 팔상옥쇄진과 잘 놀아 보아라!”

제갈휘의 비웃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석하가 목소리로 제갈휘의 위치를 파악하려 할 때 안개가 회전하기 시작했다. 돌변하는 절진에 당황했으나 주석하는 침착하게 뇌군이 준 진법서를 떠올렸다.

제갈세가 진법을 낱낱이 분석하여 그 파훼법을 적어 두었던 그 비급서다. 거기에도 팔상옥쇄진(八相玉碎陣)이 적혀 있긴 했다.

팔상옥쇄진은 맹수를 절진에 가두기 위해 고안한 진법이다. 특이하게도 물에서도 설치 가능했다.

별다른 진법 재료가 없는 강에서 제갈휘의 선택은 한정되어 있었다. 그런 난관에서 이 절진을 생각해내고 눈에 띄지 않게 순식간에 설치한 능력이 놀라웠다.

하지만 제갈휘는 뇌군을 너무 얕잡아봤다. 뇌군이 주석하에게 제갈세가 기관진식 파훼법을 알려주었고, 이를 주석하가 이해했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았다.

물론 이 절진을 완벽하게 파훼하려면 꽤 시간이 걸린다. 제갈휘의 목표는 주석하를 가두어 도망칠 시간을 버는 것이었다.

제갈휘는 주석하에게 무지막지한 내공이 있으리라고 생각지 못했다.

주석하의 능력은 제갈휘의 예상을 훨씬 벗어나 있었다.

만진장에서처럼 주석하는 일일이 공을 들여 절진을 파훼하지 않고 압도적인 내공으로 진법을 깨버릴 생각이었다.

주석하가 화판답공을 이용해서 제갈휘가 있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순간 휘몰아치는 안개가 그의 이동을 방해했다. 마치 철벽이 드리워진 것처럼 그를 뒤로 밀어냈다. 내부에 가둔 자를 외부와 격리하는 팔상옥쇄진의 특성이다.

주석하는 진의 견고성을 확인하고자 재차 외부로 벗어나려 했다.

쿵!

이번에는 조금 더 큰 충격이 왔다. 진은 끄떡도 하지 않고 그의 몸이 튕겼다. 방금 그는 정파십존 급의 내력을 사용했다. 예전의 주석하라면 이 절진에 갇혀 시간을 대폭 소모했을 것이다.

주석하는 안개가 휘몰아치며 빠르게 변화하는 진법의 생문과 사문을 조용히 관찰했다. 뇌군의 조언을 바탕으로 진법의 원리를 꿰뚫었다. 그는 이 진법의 약점을 이해했다.

“내 능력을 제대로 몰라본 것이 결정적인 실수다.”

주석하는 진법의 중앙에 서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진법의 미세한 움직임이 피부로 느껴진다. 진법은 야생의 맹수 같아서 그가 움직이면 물어뜯을 것처럼 사방에서 노리고 있었다.

오직 한 방!

그는 진법이 변하면서 약점을 드러내기를 기다렸다. 끊임없이 생문과 사문을 바꾸는 이런 절진은 그 약점 또한 분명하다.

“지금이다!”

주석하는 눈을 번쩍 떴다. 동시에 그는 양손을 앞으로 뻗어 웅후한 일장을 쏟아냈다.

콰아앙-

팔상옥새진이 붕괴하면서 너덜너덜해지는 순간 주석하는 번개처럼 신형을 앞으로 쏘아나갔다.

***

이곳은 큰 강의 한중간이다. 비록 유속이 매우 느리지만 그렇다고 쉽게 건널 환경은 아니다.

혼자였다면 제갈휘는 손쉽게 강가로 도망쳤을 것이다.

문제는 지금 그의 품에서 의식을 잃은 아들이 신음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의식이 없는 사람을 끌고 헤엄쳐서 강을 건너기는 쉽지 않다.

특히 수영에 그리 능숙하지 않은 제갈휘라면.

그렇기에 제갈휘는 다른 방법을 택했다.

그는 배에서 떨어져 나온 넓은 나무판 위에서 제갈우를 안고 앉아 있었다. 덕분에 물에 빠질 위험은 현저하게 줄었다.

다만 이 나무판을 저을 노가 없었다. 그는 양손으로 장력을 뿜어 나무판을 강가로 옮길 추진력을 생성했다.

빠르지 않았으나 그럭저럭 괜찮은 속도로 나무판이 물 위를 이동했다.

제갈휘는 강 저편에 뿌옇게 뭉친 안개를 바라보며 씁쓸한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장강 물이 밀린다기로서니…… 이건 너무 하잖아? 천하를 호령하던 십존이 이게 무슨 꼴인지…….”

한 세대를 풍미한 십존의 몰락이 아쉬웠다.

정파십존은 흑도팔군에 비해 우위를 지키며 적절하게 무림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오늘의 수모를 절대 잊지 않겠다며 이를 갈고 있을 때였다.

콰아앙-

천지를 울리는 굉음과 함께 엄청난 충격파가 강을 흔들었다. 일순간 안개가 사라지고 한 인영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괴물 같은 놈!”

제갈휘는 주석하의 신위에 혀를 내둘렀다. 이놈은 어떤 것을 상상해도 그 이상이었다.

놀라기도 잠시 주석하의 신형이 강 위를 제비처럼 날아 그를 향해 질주했다.

“허억!”

감탄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제갈휘는 힘껏 쌍장을 뿜어 나무판의 이동 속도를 높이려 했다.

“뭐하나?”

젠장! 주석하의 움직임은 너무 빨랐다. 물 위에서도 땅 위처럼 전혀 지장 받지 않고 달렸다. 주석하의 목소리에 제갈휘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앞을 바라봤다.

이때만큼 화존이 원망스러운 적이 없었다. 화존이 사파인인 주석하에게 보법을 가르치지만 않았어도 오늘 이런 곤욕을 치르지 않았을 것이다.

물 위에 우뚝 선 주석하가 빈정거리듯 말을 걸었다.

“제갈휘! 겨우 여기까지냐?”

“괴, 괴물이군!”

신음을 토해내며 제갈휘는 어떻게든 살 궁리를 찾았다. 겨뤄 보지 않아도 안다. 자신은 주석하의 일초지적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가 찾아낸 유일한 방법은…….

“흐, 흑검서생! 오늘 자네가 얼마나 위험한 일을 저질렀는지 아나?”

“무슨 소리지?”

주석하는 비웃음을 지으며 조용히 제갈휘의 앞에 내려섰다. 그의 발이 강물에 닿을 듯 말 듯 했다.

“오늘 그대는 오대세가의 씨를 말려버렸다! 이것이 중원 무림에 얼마나 큰 타격인지 아느냐?”

“모르겠는데?”

빈정거리는 말투에 제갈휘는 안면을 찌푸렸다.

하지만 인내심을 다지며 말을 이었다.

“지금 마교의 중원 침공이 시작됐다. 정파가 약해지면 중원 무림이 위험해지네.”

“그래서?”

“중원을 위해 정사가 합심해서 마교에 대항해야 하네.”

조금 전까지 마교보다 암흑단을 칠 음모를 꾸미던 자가 이런 말을 하니 주석하는 기가 막혔다.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설득이 먹혀들고 있다고 생각한 제갈휘가 목소리에 진한 호소력을 담았다.

“정사 연합이 제대로 결성되려면 각 진영의 군사인 뇌군과 내가 큰 역할을 해야 하네. 오직 나만이 정파를 규합하여 마교에 대항할 수 있네.”

이 정도면 먹혔으려나?

머리가 있다면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으리라 생각한 제갈휘는 초조하게 장황한 설명을 이었다.

정작 주석하는 길게 하품했다.

“뭔 말인지 모르겠어. 제갈세가가 언제 마교에 대항했다고.”

“아, 앞으로 하겠다니까…….”

“제갈세가 말고도 할 사람은 많아.”

“그, 그럴 리가 없잖나?”

“뭐…… 없으면 말고.”

주석하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가볍게 손을 저었다.

“허억!”

제갈휘는 갑자기 나무판자에 불이 붙자 화들짝 놀랐다. 물 위에 뜬 판자에 불이 붙다니? 강물을 뿌려도 불이 꺼지지 않았다.

급기야 그가 앉은 자리까지 불이 타오르자 어쩔 수 없이 제갈휘는 물에 뛰어들었다.

나무판자는 순식간에 모두 타서 재가 됐다.

물에 빠지지 않으려고 허우적거리면서 제갈휘는 읍소했다.

“소, 소협! 나, 나를 살려주게!”

눈썹 하나 까딱할 주석하가 아니었다. 그는 가볍게 손을 홱 저었다.

“허어어억!”

이번에는 주변의 강물이 얼어붙고 있었다. 순식간에 강 표면에 얼음판이 형성됐다. 놀란 제갈휘는 몇 차례 물을 들이켜며 풍덩거리다가 제갈우를 놓쳤다.

제갈우가 가라앉자 그는 급히 아들을 붙잡으려고 물 밑으로 잠수했다.

쩌저적-

그 순간 강 표면을 얼음이 뒤덮었다. 사방 십여 장이나 되는 거대한 얼음판이 만들어졌다. 그 두께가 장난이 아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