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선상의 지옥도 (4)
숨이 막힌 제갈휘는 아들을 안고 발을 휘저으며 얼음판을 두드렸다.
내공이 실린 그의 주먹질에도 얼음이 깨지지 않았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현상에 머릿속이 하얗게 탈색됐다.
점점 숨이 막혀왔다. 하지만 출구는 머리 위의 얼음판을 깨는 것뿐이다.
그는 있는 힘을 다해 얼음판으로 장력을 쏟아냈다. 물속이라 위력이 약해진 장력은 얼음에 큰 충격을 가하지 못했다. 점점 얼음판이 두꺼워지는 기분이다.
‘하아! 이런 개죽음이…….’
태어나서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죽음이 밀려왔다.
당황하자 더 생각이 나지 않았다. 누구보다 머리가 좋다고 자부했던 그였건만 정작 이 판국에는 얼음을 깨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런데 얼음이 깨지지 않았다!
점점 숨이 막히고 몸놀림이 느려졌다.
죽음의 문턱에서 제갈휘는 떠올렸다.
무림맹의 군사가 되어 정파를 휘어잡던 지난날, 그가 무리하게 사파를 도모하지 않았더라면 중원은 온전한 힘을 비축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으로 마교의 침공을 막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적어도 지금처럼 무기력하게 중원이 무너지지는 않았을 텐데…….
삶의 회한이 밀려왔다.
죽음 앞에서 만사지존으로 불렸던 제갈휘도 여느 사람과 다르지 않았다.
***
보은사로 돌아온 주석하는 객방 앞에서 서성이는 우설금을 발견했다.
밤이 늦었건만 그녀는 잠들지 않고 객방 툇마루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에게서 따뜻한 인간미가 느껴지다니!
조금 전에 오대세가 가주에게 무자비한 살수를 펼친 후 그녀를 보니 마치 집에 돌아온 기분이다.
“늦었네요?”
그의 옷차림을 훑어보며 우설금이 조용히 말했다.
이제는 무표정한 그녀의 눈빛에서도 그 의미를 읽을 수 있다. 그녀의 마음이 전해졌다. 갔던 일은 잘 되었냐고.
아마 우설금은 그가 오대세가 가주 회합에서 그들을 제거했다고 추측할 것이다. 그를 쭉 살피는 눈빛에서 혹시 그가 다치지 않았는지 염려하는 마음이 보인다.
“해치웠어요. 모두.”
“제갈휘도?”
주석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갈휘와의 끈질긴 악연을 이렇게 간단하게 끊어낼 줄은 몰랐다. 사실상 그를 괴롭히던 최고의 악인을 처리했으니.
“제갈우가 다 죽어가며 왔더라고요.”
주석하는 슬쩍 운을 뗐다. 그러나 우설금은 조금도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마치 그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역시 우설금이 오대세가 소가주를 모두 처리한 게 분명했다.
이 밤에 정파의 한 축을 구성했던 무림세가가 완전히 붕괴했다. 남은 곳은 오직 하나 남궁세가뿐이다.
남궁세가는 선대의 인연으로 그와 친한 곳이다. 남궁세가가 사파로 돌아설 일은 없겠지만 흑검문을 적대시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 자야죠?”
주석하는 먼저 객방으로 들어갔다. 늦은 밤이라 씻고 어쩌고 하기도 귀찮다.
자리를 펴고 몸을 눕히려고 할 때 우설금이 품에서 양피지 조각을 전했다.
“백귀가 받은 정보예요.”
마교의 지시를 그에게 보여주는 의도는 뭘까.
주석하는 의아한 기분 속에 양피지를 펼쳤다.
- 초혼천왕과 천라요희가 청산으로 이동. 지원하기 바람.
청산이란 지명을 보는 순간 주석하는 가슴이 콱 막혔다. 그곳은 악군의 거처다. 마침내 악군에게도 마교의 암수가 뻗었다.
“마교칠왕이죠? 그런데 왜 둘이죠?”
마교는 정파십존과 흑도팔군을 우선으로 처리하려는 의도다.
화산에 파천혈옹과 천력마부가 자하검존과 혼군을 처리하려고 왔던 작전과 같은 맥락이었다.
다만 그때는 그곳에 두 기인 외에 각파 장문인까지 있었으니 마교칠왕 둘이 출동한 점이 이해된다. 그런데 청산은…….
“아마 화존이 함께 있나 봐요.”
우설금의 대답을 단번에 이해했다. 이쪽이 둘이니 마교칠왕도 둘이 찾아온다.
그들의 싸움은…… 이미 천력마부와 파천혈옹을 상대해본 그로서는 마교칠왕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
“가봐야죠?”
우설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가 악군과 화존에게 받은 은혜를 고려하면 당연히 가야 한다. 다른 일을 제쳐두더라도 최우선으로 청산에 갈 것이다.
“그래야죠. 그런데…….”
함께 가겠느냐고 물으려다 주석하는 흠칫했다.
그는 악군을 돕기 위해 가지만 우설금은 마교칠왕을 도우러 가야 한다. 두 사람은 그곳에서 서로 대립해야 하는 이상한 관계다.
주석하는 말을 잇지 못하고 우설금을 조용히 응시했다.
그의 마음을 이해한 것일까. 우설금이 다소곳하게 고개를 저었다.
“난 가지 않을 거예요.”
“그래도 돼요?”
“적당히 핑계를 대야죠.”
차마 우설금에게 함께 가서 마교칠왕을 죽이자는 제안을 할 수는 없었다. 청산에 가지 않겠다는 그녀의 말이 반가웠다.
상황이 정리되자 주석하의 마음은 벌써 청산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마교칠왕의 손에 악군과 화존이 다치는 일을 좌시할 수 없으니까.
주석하는 자리에 누워 계획을 세웠다. 이곳에서 청산은 그리 멀지 않았다.
우설금이 그의 옆에 조용히 자리를 깔고 누웠다.
그동안 두 사람은 같은 방을 쓰더라도 멀찌감치 떨어져서 따로 잠을 잤다. 그런데 오늘은 그녀가 바짝 붙지는 않더라도 꽤 가까이 자리에 누웠다.
내일이면 헤어져야 한다는 심경 때문일까.
“그동안 여기에서 기다릴래요?”
“그럴게요.”
순순히 대답하는 그녀의 목소리에 주석하는 한결 마음이 놓였다.
지금 우설금의 감정과 위치는 상당히 불안하다. 그녀는 지금 심정적으로 중원 무림인을 돕기도, 원수인 천마 휘하의 마교를 돕기도 어색했다.
마음이 정리되려면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
그녀를 홀로 내버려 두고 가기에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는데, 이곳에서 기다리겠다니 그나마 안심이다.
“저도…… 한 곳에 들를까 해요.”
“어디요?”
“이가장…….”
“아!”
어쩌면 유일하게 우설금과 관련된 곳일지도 모른다.
불존이 말했던 그녀의 어머니 천향일화 이가흔의 가문이다. 우설금은 그곳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제대로 확인하고 싶은 것일지도.
이가장(李家莊)이라면 그녀의 외가이니 사고 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중원에서 그녀를 위협할 고수는 사실상 없고, 그녀의 정체 또한 거의 알려지지 않아 위험하지 않다. 그가 청산에 다녀오는 사이 그녀가 움직이기에 딱 좋다.
“좋은 결과 얻기를 바랄게요.”
주석하는 그녀를 응원한다는 의미로 슬그머니 손을 잡았다. 우설금은 손을 피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조용히 손을 잡고 숨을 골랐다.
문득 주석하는 예전에 덕양에서 같은 방을 썼던 대운방의 양승과 사운혜를 떠올렸다.
그때 두 사람이 서로 손을 잡거나 껴안고 자는 모습이 무척 이상했었는데 지금 자신이 우설금과 손을 잡고 자리에 누웠다.
떨리던 우설금의 손이 잠잠해졌다.
주석하는 흐뭇한 미소를 머금고 옆을 돌아봤다. 우설금도 누운 채 그에게 시선을 두고 있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어쩐지 괜히 쑥스러워진다.
“주무세요.”
나지막한 우설금의 속삭임에 주석하는 눈을 감았다. 피곤이 몰려왔다.
***
푸른 숲이 사방을 빽빽하게 뒤덮은 청산.
비가 온 후의 청산은 싱그러움을 자랑했다.
나지막한 봉우리를 넘어 계곡 깊숙이 들어가다 보면 자그마한 폭포수가 멋진 장관을 이루는 아름다운 풍경과 만난다.
바로 하늘의 선녀가 목욕하러 내려온다는 봉담소다.
그 봉담소를 내려다보며 미간을 찌푸리는 두 사람이 있었다.
진한 눈썹에 마른 체격의 중년인 초혼천왕이 주변을 휙휙 둘러보면서 중얼거렸다.
“흐흐, 여기에 악군과 화존이 숨어 있단 말이지?”
마교칠왕의 일인인 초혼천왕은 빼어난 미남자였다.
대략 불혹의 나이로 보이는 그는 뭇 여인의 방심을 흔들어놓을 만큼 얼굴과 몸이 빼어났다. 그는 비파를 가슴에 안고 여유만만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왜? 겁이 나나?”
피식 비웃는 사람은 요사스러운 기운을 풍기는 젊은 여인이었다.
마교에서는 그녀를 천라요희라 불렀다. 얼핏 보면 이십대 젊은 소녀처럼 보였으나 그녀는 실상 초로에 접어든 노파였다.
초혼천왕이 노골적으로 싫은 티를 냈다.
“내가 겁내는 사람이 있을 리 없잖아?”
“없다고? 호호, 내 앞에서 그런 소리가 나오나 보지?”
천라요희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쏘아봤다.
그러자 초혼천왕이 몸을 움츠리며 급히 입을 다물었다.
“너 빼고.”
“오호호호!”
천라요희가 요사스러운 웃음을 터트렸다.
두 사람은 마교칠왕 중에서도 유달리 친했다.
마교에서도 중원에 나올 때도 두 사람은 함께 다녔다. 그들은 연인 아닌 연인 관계를 유지했다.
어떨 때는 다정하게 함께 생활하기도 했으나 어떨 때는 목숨을 걸고 싸우기도 했다. 어떤 모습이 진짜인지는 두 사람 외에는 아무도 몰랐다.
“오늘 악군과 화존은 죽는다. 우리 둘이 왔으니 당연한 것 아닌가.”
초혼천왕이 목을 돌리고 어깨를 펴면서 전의를 다졌다.
“그래서 누구를 상대할 거야?”
“더 예쁜 여자.”
천라요희의 눈매가 쓱 올라갔다.
그러자 초혼천왕이 재빨리 정정했다.
“쳇! 알았다. 미모는 화존이 더 유명하니까…… 넘겨주지. 내가 악군을 상대하겠다.”
초혼천왕도 음공의 달인이었다. 비파를 이용한 그의 음공은 마교 최강이다. 물론 그는 음공 외에도 장법이나 지법 등 여러 무공에 능통했다.
“화존? 좋아. 내가 화존을 혼내줄게. 물론 내 기분이 좋으면 화존을 네게 넘겨줄 수도 있어.”
천라요희는 허리띠를 풀었다.
그녀의 허리띠는 백 년 묵은 교룡의 가죽으로 만든 마편(魔鞭)이었다.
허공에서 자유자재로 휘어지며 상대를 가격하는 그녀의 편술(鞭術)은 실로 놀라워서 초혼천왕도 상대하기를 꺼렸다.
“기대하면 내가 바보지.”
퉁명스럽게 대답한 초혼천왕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들의 눈앞에 봉담소를 건너 작은 모옥이 아담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바로 악군의 거처였다.
전의를 불태우며 초혼천왕은 천둥 같은 목소리로 소리 질렀다.
“악군! 화존! 나와라!”
내력이 실린 그의 사자후가 일순간 봉담소의 적막을 깼다.
“반응이 없는데?”
초혼천왕이 머리를 긁적이며 천라요희를 돌아봤다.
천라요희가 한심하다는 듯 초혼천왕의 머리를 마편으로 툭툭 두들겼다.
“당연하지 않겠어? 너라면 손들고 나오겠니?”
“그런가?”
“내가 하는 걸 보라고.”
천라요희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면서 마편을 허공에서 휘휘 저었다. 마치 살아있는 뱀처럼 마편이 자유롭게 허공을 요동쳤다.
일순간 천라요희의 손이 앞으로 쭉 뻗었다. 마편은 마치 그녀의 분신이라도 된 듯했다.
파아아앙-
마편의 끝에서 강력한 편강(鞭罡)이 폭발적으로 뻗었다. 마치 빛이 내리쬐는 듯 자색의 빛줄기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모옥으로 날아갔다.
진흙과 짚으로 만들어진 모옥이 편강의 습격을 버텨낼 리 없었다.
띵디딩-
편강이 모옥을 휩쓸려는 순간 모옥 내부에서 맑은 거문고음이 쏟아져 나왔다.
거문고 소리는 순식간에 형상화한 음강(音罡)으로 바뀌어 급습하는 편강에 그대로 충돌했다.
콰아앙-
엄청난 충격파가 계곡 전체를 뒤흔들었다. 부서진 강기의 파편이 사방으로 퍼지면서 주변을 휩쓸었다.
“오호? 제법인데?”
천라요희가 호승심을 끌어올리며 마편을 꽉 움켜쥐었다. 역시 만만하게 볼 수 없는 악군의 음공이었다.
그녀가 재차 공격을 시도하려는 찰나 모옥이 열리고 두 여인이 나타났다. 두 사람 모두 짝을 찾기 힘든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악군과 화존이냐?”
천라요희의 질문에 한 여인이 대답했다.
“아니, 화존과 천중화 백화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