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청산의 혈투 (1)
백화령은 칠현금을 들고 있었다. 반면 화존은 맨손이었다.
두 사람을 확인한 천라요희가 요사스러운 웃음을 터트렸다.
“오호호호! 백화령? 귀엽게 생긴 녀석이잖아? 칠현금을 들었으니…… 악군의 제자니?”
“악군과 화존 두 분을 사부로 모셨다!”
백화령이 호기롭게 외쳤다.
초혼천왕의 눈매가 가늘어지며 백화령을 유심히 살폈다.
“흐흐, 두 사람의 공동제자? 재기가 넘치나 보군. 외모를 보니…… 나도 제자로 삼고 싶어지잖아? 요희! 오늘 저 아이를 나에게 넘겨라. 어때?”
“너! 목이 두 개인가 보지?”
천라요희가 노골적으로 싫은 티를 냈다.
한동안 툭탁거리던 두 사람이 다시 백화령에게 시선을 돌렸다.
“악군은?”
“안에 계시다!”
“흐음, 그래? 악군의 얼굴을 본 자가 손에 꼽힐 만큼 드물다는 소문이 있던데 오늘도 얼굴값을 하는구나!”
화존과 백화령을 쓱 훑어본 초혼천왕이 봉담소 암반에서 가부좌를 틀었다. 그는 비파를 가볍게 튕기며 경고했다.
“암군! 중원 제일의 음공을 한 수 배우러 왔다. 모습을 보여라!”
당연히 모옥 내부에서는 응답이 없었다.
이번에는 천라요희가 암반에서 뛰어내리며 화존에게 접근했다.
“화존! 너의 상대는 나다!”
놀랍게도 천라요희의 마편이 허공에서 빳빳하게 멈췄다. 내력이 주입된 마편은 마치 강철봉처럼 일직선으로 뻗었다. 놀라운 내공이었다.
화존의 안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녀는 천라요희에게서 뿜어지는 강력한 마기를 정면으로 받고 있었다. 지금까지 중원을 누비면서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한 강력한 압박이었다.
화존 또한 내력을 끌어올려 저항했다.
“과연 마교는 대단해. 누구지?”
“오호호호! 난 천라요희. 마교칠왕이다.”
“마교칠왕이 유명하다는 소문이 있더니 과연 명불허전이야. 저자는?”
“초혼천왕. 음공의 대가다!”
봉담소 위에서 초혼천왕이 대답했다.
초혼천왕의 외모를 쓱 훑어본 화존이 미간을 찌푸렸다.
“기생오라비같이 생겼어.”
“실제로 기생오라비 맞아. 가끔 나를 즐겁게 해주니까. 오호호!”
천라요희의 반응에 화존이 안면을 왈칵 일그러트렸다.
“악군과 나는 요즈음 무림에 전혀 관여하지 않고 있어. 그런데 수고스럽게도 여기까지 찾아오다니. 돌아가는 건 어때?”
“물론 알고 있지. 하지만 잠재적인 위험물은 제거해야지. 그렇지 않아?”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싸우고 싶지 않지만 걸어오는 싸움을 피할 생각은 없으니까. 재주가 있으면 보여 봐. 얼마나 우스운 재주인지 품평해 줄게.”
“그놈의 걸걸한 입을 처발라주마.”
파앙-
천라요희가 번개처럼 신형을 날렸다. 그녀의 마편이 유려하게 휘어지며 화존을 향해 뻗었다.
화존은 특유의 보법을 발휘해 마편의 공격을 피했다.
허공을 후려친 마편이 호선을 그리면서 재차 화존을 향해 날아갔다.
절정의 화판답공이 재현됐다. 화존은 허공에서 자유자재로 방향을 바꾸면서 마편을 피했다.
화가 난 천라요희는 마편을 더 빠르고 어지럽게 휘둘렀다. 두 사람의 공방이 혼란스럽게 얽히면서 난기류가 일었다. 무시무시한 살기를 뿌리며 공격하는 천라요희와 이를 가볍게 피하는 화존의 전투 방식이 상극이라 쉽게 결판이 나지 않았다.
둘의 공방을 지켜보던 초혼천왕이 아쉬운 입맛을 다셨다.
“화존이 날뛰는 모습은 그야말로 선녀로구나. 내가 상대했어야 했는데……. 그럼 슬슬 악군을 노려볼까?”
초혼천왕이 품에 안은 비파를 다시 가볍게 튕겼다.
띠딩-
이번에는 훨씬 강력한 음이 발해졌다. 음의 흐름에 만족한 초혼천왕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시선을 모옥에 집중했다.
띠디딩- 띵-
그의 손이 비파의 줄을 흔들고 내력이 실린 음파가 모옥으로 뻗었다. 무질서하게 울리던 비파음이 갈수록 뚜렷한 곡조를 형성했다. 귀신을 부르는 초혼곡이었다.
비파음이 칼날처럼 예리하게 모옥을 강타했다. 모옥의 지붕이 태풍을 맞은 듯 휘날리는 순간 모옥에서 울린 아름다운 거문고 소리가 방어막을 형성했다.
띵- 띠디디딩-
거문고 소리는 비파음과 어울리며 비파음의 파괴력을 확연하게 누그러트렸다. 하지만 비파음을 압도할 수는 없었다.
초혼천왕이 감탄사를 연발했다.
“오호, 나쁘지 않아! 제법인데?”
초혼곡의 음조가 변했다. 이제는 음파에 실린 강기가 눈에 보일 만큼 모옥을 향해 쭉쭉 뻗어갔다.
비파음의 강세에 호응하듯 악군의 거문고 소리도 폭증하면서 비파음과 조화롭게 휘말렸다.
비파음과 거문고 소리가 허공에서 뒤엉키고 충격파가 터졌다.
충격파가 휘젓는 거센 회오리에 백화령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녀가 볼 때 현 상황은 절대 유리하지 않았다.
마교칠왕은 정파십존이나 흑도팔군보다 우위였다. 지금은 화존과 악군이 버틸지 모르지만 전투가 길어질수록 힘겨운 싸움이 될 것이다.
어쩌면 지금은 두 사부의 생사가 걸린 위기일지도 모른다.
그런 싸움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녀가 이 싸움에 끼어들기엔 너무 부족했다.
백화령은 사부의 공동제자인 주석하를 떠올렸다. 그가 있다면…….
마교칠왕이 이곳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두 사부로부터 얼른 청산을 떠나라는 권유를 받았다.
이곳에 남아봐야 개죽음이라고, 그러니 얼른 도망치라고 두 사부는 그녀에게 명령했다.
하지만 끝까지 남겠다고, 사부를 돕겠다고 그녀는 사부의 명을 거부했다. 그리고 지금 위험을 무릅쓰고 이곳에 있다. 그런데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
파앙- 파앙-
화존을 겨냥한 천라요희의 마편이 무서운 소음을 내면서 휘몰아쳤다.
띠딩딩-
모옥을 파괴하려는 비파음이 거문고 소리와 엉켜 충격파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 어느 쪽도 그녀가 가담하기 어려웠다. 자칫하면 오히려 그녀가 다치거나 인질이 되어 방해가 될 뿐이다.
양쪽의 전투를 살피면서 한참 멍한 상태로 있던 그녀는 한쪽에 조용히 정좌하고 앉았다. 그녀는 앞에 칠현금을 놓은 다음 손가락으로 줄을 튕겼다.
띵-
비록 악군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녀의 음공 역시 만만치 않았다.
백화령의 손가락이 칠현금 위를 빠르게 움직였다.
띵딩띵-
칠현금 소리가 비파음과 거문고음의 격전에 끼어들었다. 그 소리는 조심스럽게 거문고음에 어울리면서 비파음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거문고와 칠현금의 합주는 잠시나마 균형을 깨고 비파음을 억눌렀다.
초혼천왕의 시선이 백화령을 향했다.
“흐흐, 좋은 칠현금이야. 점점 더 욕심이 나는군.”
한바탕 웃음을 터트리면서 초혼천왕은 더욱 힘껏 비파줄을 튕겼다.
무시무시한 전투가 이어지는 청산의 저녁이었다.
***
하남 이가장은 보은사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수 대에 걸쳐 무림세가로 나름 명성을 이어온 이가장이기에 우설금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이가장이 있는 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까지 왔을 때 우설금은 심장이 뛰었다.
어머니 이가흔의 고향이자 그녀의 외가다.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지 않았던 친척 집을 방문한다는 사실이 그녀를 흥분과 혼란에 휩싸이게 했다.
한편으로는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낯설었다.
그녀는 자신이 이 방문을 원하는 것인지 원치 않는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이 모든 감정은 그녀가 출신 내력을 아직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음을 뜻했다. 정확히는 출신 내력이 아니라 천마에게서 등을 돌리지 못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홍철산을 들고 터벅터벅 걷던 우설금은 길가에 차려진 작은 주막을 발견했다.
노점상보다 약간 큰 주막이었고 손님들이 주막 내부와 외부에 흩어져 드문드문 밥을 먹고 있었다.
목이 말랐던 우설금은 주막 외부에 놓인 빈 탁자에 자리 잡았다.
“무엇을 드릴까요?”
점소이가 냉큼 달려와서 물었다.
“좋은 차 있으면 줘요.”
“하남의 명차, 설화차가 있습니다만.”
“네. 그걸로 주세요.”
우설금은 주문을 마치고 시선을 그녀의 목적지로 돌렸다.
길 저편으로 야산을 통과하는 사잇길이 뚫려있고 그 너머에 이가장이 있다고 들었다. 불과 한 시진이면 충분히 도착할 거리다.
주저하면서도 결국 여기까지 오고 말았다는 생각에 우설금은 깊은숨을 내쉬었다. 마음의 안정이 필요했다.
이가장에 들렀다가 돌아올 때면 마음이 편해질 테니까.
어떤 식으로든 정해질 테니까.
점소이가 가져온 차를 마시면서 산들바람에 몸을 맡기고 있자니 옆 탁자의 대화가 들려왔다.
“또 문파 간 전쟁이 터졌더군.”
“이번에는 어딘데?”
“그동안 하남은 정파가 훨씬 우위에 있지 않았었나?”
“그랬었지. 귀조궁, 풍우방, 살귀촌…… 이름 있던 사파 방파가 줄줄이 무너졌지.”
우설금은 대수롭지 않게 편한 기분으로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정파와 사파가 싸움을 벌이며 생사를 다투는 중원의 정세는 그녀가 신경 쓸 바 아니었다.
“드디어 사파의 종주인 암흑단이 칼을 빼 들었어.”
“암흑단? 사파의 반격이 시작된 거네?”
“그렇지.”
“암흑단이 어디를 노릴까?”
암흑단. 도수가 그곳으로 간다고 했던가?
사실 암흑단이 어떻게 움직이든 그녀는 무관심이었고 도수와의 문제도 대충이지만 일단락 지어졌다.
“원래 풍우방과 암흑단이 가까웠잖아? 풍우방 멸문에 참여했던 소규모 정파를 암흑단이 보복하기 시작했네.”
“암흑단이라면 구대문파랑 붙어야 격에 맞잖아?”
“그러게 말일세. 그 자식들 전략인데 어쩌겠나. 그래서 얼마 전에 암흑단이 무성보를 습격했고…….”
“무성보가 박살이 났겠군.”
무성보? 우설금은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그만큼 정파의 군소방파란 의미였다.
“지금은 이가장을 치고 있다네.”
“이가장?”
“그동안 이가장이 정파 연합에 적극적이지 않았나?”
갑자기 우설금은 머리가 핑 돌았다. 이들이 말하는 이가장이 그녀가 지금 방문하려는 그 이가장일까? 공교롭게도 이가장이 등장했다.
장한들이 차려진 국수에 몰두하면서 더는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우설금은 여전히 그 대화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이가장이 위험하다는 걸까…….
이렇게 한가하게 여유 부릴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자 그녀는 차를 후루룩 마셨다. 빨리 움직여야 한다.
그때 저 멀리서 정신없이 달려오는 한 필의 말이 보였다.
그 말에는 젊은 여인이 타고 있었고 그 뒤로 수필의 말이 쫓아오고 있었다.
예전에 어디에선가 경험했던 장면이라 우설금은 눈매를 찌푸렸다. 그때 북해로 가다가 비슷한 상황을 접한 것 같은데…….
여인이 탄 말이 주막 부근을 지나칠 때쯤 뒤에서 추격하던 인물이 손에서 암기를 뿌렸다. 암기는 여인이 탄 말 엉덩이에 후두둑 박혔다.
히이이잉-
말이 울부짖으며 곧바로 꼬꾸라졌다.
여인의 솜씨는 놀라웠다.
다급한 상황에서도 그녀는 손쉽게 허공으로 날아올라 몸을 비틀고 날아오는 암기를 손에 든 검집으로 쳐냈다.
문제없다는 듯 가볍게 착지한 젊은 여인이 쫓아온 자들을 노려보았다.
모두 여섯에 달하는 추격자들이 말에 탄 채 여인을 에워쌌다. 그들은 모두 검은 옷에 복면을 두르고 있었다.
국수를 먹던 손님들은 깜짝 놀라 도망쳤고, 우설금은 손에 찻잔을 든 채 계속 그들의 행동을 주시했다.
“흐흐, 도망쳐봐야 부처님 손바닥 안이다!”
“네놈들에게 당할 내가 아니다!”
여인이 앙칼진 목소리로 기세를 높였다. 그녀는 검을 뽑아 상대를 겨눴다.
“흐흐, 하남일봉! 네년의 무공이 높다 하나 우리 전부를 상대할 수는 없다! 항복하면 목숨만은 건질지도 모르지.”
말에서 내린 흑의인들이 그녀를 포위했다.
하남일봉은 위기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굳건히 검을 잡았다.
순식간에 주막 앞에 칼바람이 휘몰아쳤다. 하남일봉의 검법은 놀라웠으나 흑의인 전부를 상대할 수준은 아니었다.
이를 구경하던 우설금의 표정이 한층 서늘하게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