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검천하-210화 (210/273)

210화 청산의 혈투 (2)

난데없이 싸움이 벌어지자 주막에서 차와 음식을 먹던 사람들이 놀라서 도망쳤다. 일부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구경했다.

주막의 바깥 탁자에서 싸움을 전혀 개의치 않고 차를 마시는 사람은 우설금이 유일했다. 그녀는 예전에도 이런 경우에 차나 밥을 포기한 적이 없었다.

흑의인들과 접전을 벌이던 하남일봉은 경황이 없어 우설금이 있는 탁자로 뛰어들었다.

“비, 비켜요!”

웬 여인이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자 하남일봉이 급히 소리쳤다.

사실 그녀도 이쪽으로 피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적에게 계속 밀리다 보니 이런 상황이 발생했을 뿐이다.

우설금은 안면을 찌푸린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여인이 날아오는 검을 피하는 순간 흑의인의 검이 우설금의 탁자를 내리쳤다.

쿵!

순간 탁자에 놓였던 찻잔이 떠올라 엎어졌다.

놀랍게도 찻물이 쏟아지지 않았다. 허공에 뜬 찻잔은 곧 제 위치를 잡더니 조용히 제자리에 내려앉았다.

물론 검을 휘두르고 피하느라 바빴던 여인과 흑의인들은 전혀 그 장면을 눈치채지 못했다.

우설금이 조용히 찻잔을 들어 입에 가져다 대는 순간 흑의인이 소리쳤다.

“이게! 비켜! 죽고 싶냐?”

순간 찻물 일부가 암기처럼 뿌려져 흑의인의 얼굴을 때렸다.

“으악!”

흑의인이 얼굴을 감싸 쥐고 고통스럽게 울부짖었다. 그의 얼굴은 큰 충격을 받은 듯 벌겋게 부어올랐다.

난데없는 비명에 싸움이 중지됐다. 영문을 몰라 두리번거리던 흑의인들의 눈에 우아하게 차를 홀짝이는 우설금이 들어왔다.

“이건 또 뭐야?”

흑의인들이 기세등등하게 우설금을 둘러싸고 검을 겨눴다.

하남일봉의 안색이 확 변했다.

“소, 소저! 위험해요!”

그녀는 우설금이 자신 때문에 싸움에 휘말렸다고 생각하여 발을 동동 굴렀다.

여섯 명의 흑의인들이 우설금과 하남일봉을 포위하고 거칠게 위협했다.

“네년도 한패였나?”

흑의인 한 녀석이 호기롭게 탁자 위에 발을 턱 걸쳐놓고 우설금을 흘끔거렸다. 실로 무례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으나 우설금은 신경 쓰지 않고 찻잔을 입에 가져갔다.

대꾸하지 않는 그녀의 태도를 겁을 먹은 때문이라고 판단한 흑의인이 낄낄대며 웃었다.

“겁이 나서 발이 떨어지지 않는가 본데…….”

그제야 차를 다 마신 우설금이 잔을 탁 내려놓았다. 그녀는 장한들을 쓱 훑어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하남일봉이 누구인지 모르고 별호도 처음 들었다.

게다가 몰려온 이 흑의인들이 누군지도 모른다.

남의 다툼에 신경 쓰지 않는 것이 지금까지 그녀의 행동 규칙이었다.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강호를 돌아다니면서 몸에 밴 습관이다.

우설금이 주막을 떠나려 하자 흑의인들이 그녀를 막아섰다.

“어딜 가는 거냐?”

“가고 싶다고 갈 수 있는 게 아니지. 방해했으면 그만큼 대가를 치러야 할 터!”

우설금의 싸늘한 눈빛이 흑의인을 향했다.

“헉!”

눈이 마주치는 순간 흑의인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꿀꺽! 마른 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리고 주위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절대 우설금의 미모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에게서 풍기는 알 수 없는 압박감에 흑의인은 오금이 저렸다.

한낱 여인 때문에 떤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흑의인은 용기를 내서 검을 휘둘렀다.

“이년이!”

순간 우설금의 눈썹이 쓱 올라갔다.

푸아악-

“우아악!”

우당탕-

우설금에게 달려들던 여섯 흑의인 모두가 주변의 나무에 처박혔다. 그중 한 녀석은 우설금이 앉았던 탁자에 깔려 축 늘어졌다.

“으으으.”

팔과 다리가 부러져 성한 곳이 없는 흑의인들은 일어나지 못했다. 그들은 우설금과 눈이 마주치자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찍소리도 못했다.

과거라면 이런 자들을 절대 살려두지 않았을 우설금이지만, 지금은 무력화하는 정도에서 처리를 끝냈다.

흑의인들에게는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순식간에 상황을 정리한 우설금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소저, 감사합니다!”

그녀의 앞을 막아선 하남일봉이 포권을 취하며 감사를 표했다.

우설금은 하남일봉의 얼굴이 왠지 모르게 익숙했으나 당연히 그녀가 알 인물이 아니기에 기분 탓이라 여기고 재차 걸음을 옮겼다.

다급해진 하남일봉이 다시 그녀의 앞을 막았다.

“저는 하남일봉이라 알려진 이설은입니다. 하남에서 정파 문파로 유명한 이가장 출신이지요.”

이가장이란 말에 우설금은 걸음을 멈췄다. 이설은이라…… 어딘지 모르게 이름도 낯이 익었다.

우설금은 이설은을 훑어보고는 잠시 고민에 잠겼다. 이런 만남, 사람 사이의 교류에 그녀는 익숙지 않았다.

잠시 후 우설금은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소저였군요. 마침 이가장을 방문하려던 참이었습니다.”

“방문요? 아, 안됩니다. 지금 이가장은…….”

이설은이 다급하게 만류했다. 이설은의 표정은 이가장에 심상찮은 일이 일어났다고 알려주고 있었다.

조금 전 손님들의 대화에 따르면 암흑단이 이가장을 친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이 흑의인들은 암흑단 소속이고 습격당한 이가장에서 이설은만이 빠져나온 건가?

“지금 이가장이 위험해서 저는 소림에 구원을 요청하러 가는 길입니다! 소저께선 지금 가시면 안 됩니다.”

이설은이 불안한 표정으로 경고했다.

우설금은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소림에 가봐야 도와줄 사람이 없다. 지금 소림은 불존과 오각주가 죽어서 제 한 몸 건사하기도 힘겨울 텐데.

“소저는 별호가 어떻게 되십니까?”

이설은이 은혜를 갚겠다며 그녀에게 이름을 물었다.

당연히 단천마령이라고 대답할 수 없어 우설금은 무심결에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저는 우설금이에요.”

“우? 우설금?”

이설은의 눈이 더 커질 수 없을 만큼 부릅떠졌다.

***

주석하가 청산에 도착한 때는 해가 넘어갈 무렵이었다.

높은 산이 아니더라도 평지에 비해서 해가 빨리 지기에 산길은 금방 어둑어둑해졌다.

시간이 늦어 내일 방문할지 고민하던 그는 걸음을 강행했다. 덕분에 해가 떨어진 직후에 봉담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봉담소에 가까이 갈수록 묘한 기의 흐름이 감지됐다.

게다가 은은한 거문고 소리마저 들려왔다. 내력이 실린 이 곡조는 악군의 거문고 연주였다.

“늦었나?”

본능적으로 그는 마교칠왕을 떠올렸다. 마교칠왕과의 접전이 아니라면 악군이 이런 식의 연주를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정신없이 걸음을 빨리하여 봉담소가 내려다보이는 지점까지 단숨에 치달렸다.

“아!”

그의 눈에 비친 봉담소는 예전과 달랐다.

그림처럼 아름다웠던 풍경은 완전히 박살이 나 있었다. 여기저기 나무가 부러지고 뽑혀 한바탕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풍경이었다. 처참하게 박살이 난 봉담소에 주석하는 아연실색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봉담소에 여전히 물이 떨어지는 폭포수가 존재한다는 것뿐. 다행히 모옥은 그때와 변함이 없었다.

악군을 찾아 눈을 돌리던 주석하는 익숙한 사람을 발견했다. 지금도 난리가 벌어지는 중이었다. 아직 그는 늦지 않았다.

상황을 파악하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우설금에게 전달된 쪽지를 본 덕분이다.

화존은 천라요희와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천라요희의 마편이 끊임없이 화존을 위협했고 화존은 피하기 바빴다. 근거리와 원거리 공격에 모두 능한 마편의 공격에 화존은 대처가 쉽지 않아 보였다.

전투를 벌인지 오래되어 화존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끊임없이 마편의 공격을 피했으니 내공의 소모가 극심했다.

더는 버티기 어려운 국면이었다.

그런 화존을 돕기 위해 백화령이 간간이 그 싸움에 끼어들고 있으나 사실상 그녀로는 역부족이었다. 간신히 위기의 화존을 구했다가 마편의 위협에 혼쭐이나 물러서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화존과 백화령 둘을 함께 상대하는 천라요희에게서 상대적인 여유가 엿보였다.

더 급한 쪽은 악군이었다.

악군은 모옥 내부에서 거문고를 연주하고 있었다. 그녀의 연주는 초혼천왕의 비파와 맞섰다. 천무태평악과 초혼곡이 엉켜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주석하는 봉담소의 한쪽 암반에 정좌한 채 비파를 켜는 초혼천왕을 발견했다.

초혼천왕의 내공과 음공 능력은 실로 무시무시했다. 이미 오랜 시간 동안 양자의 대결이 진행된 듯했고, 지금은 초혼천왕의 초혼곡이 여유롭게 천무태평악을 압박하고 있었다.

그의 판단으로는 화존도 악군도 사실상 한계에 이른 듯했다.

어찌 이런 꼴을 볼 수 있을까. 주석하는 다급하게 흑검소를 입에 댔다.

삘리리리-

흑검소에서 천무태평악이 흘러나왔다.

흑검소의 음률은 악군의 거문고 소리와 화합하며 서서히 초혼곡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악군을 누르려고 모든 힘을 쏟아 부었던 초혼천왕으로선 주석하의 음공을 견디기 쉽지 않았다.

난데없는 불청객의 난입에 초혼천왕이 눈을 부릅떴다.

그는 무리해서 비파음에 내력을 보강했다. 육중해지고 날카로워진 초혼곡이 재차 용트림했다.

당연히 반격을 내버려 둘 주석하가 아니었다.

주석하 또한 내력을 더했다.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는 압도적인 내력이 천무태평악에 실렸다.

당황한 초혼천왕의 기색이 느껴진다. 이를 악물고 저항하는 비파음이 높아졌다.

초혼천왕의 반격은 주석하에게 간지러운 저항에 불과했다.

그가 판단한 초혼천왕의 내공은 정파십존을 조금 능가하는 수준. 무극천존이나 반야불존과 비등한 정도였다.

과거라면 주석하가 음공으로 초혼천왕을 제압하려면 상당히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솔직히 우스웠다. 이것은 어른이 어린아이의 팔을 비트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주석하는 조금씩 내력을 추가로 실었다. 단번에 박살 낼 수도 있었으나 그러면 재미가 떨어지지 않는가.

악군의 거문고 소리가 달라졌다.

마치 주석하의 방문을 환영하는 듯했다. 퉁소음이 거문고음을 받쳐주자 악군이 힘을 냈다.

둘의 합주로 견고해진 천무태평악이 거센 파도처럼 초혼천왕을 밀어붙였다.

“크윽!”

초혼천왕이 울컥 선혈을 뱉어냈다. 그의 손은 여전히 비파를 튕기고 있었으나 비파의 위력은 한풀 꺾였다.

무리해서 음공을 지속하던 초혼천왕은 결국 더는 버티지 못하고 다시 선혈을 뱉었다.

“으으윽! 누, 누구냐?”

초혼천왕의 시선이 주석하를 향했다.

그 순간 악군과 주석하의 천무태평악도 끊어졌다.

주석하는 흑검소를 장난삼아 돌리며 소리쳤다.

“흑검서생이다!”

초혼천왕도 흑검서생을 들어본 바가 있었다.

천마와 단천마령이 관심을 둔 자라고 했던가. 그가 왜 이곳에 나타났는지 도무지 알 수 없지만.

“네, 네놈이 왜…….”

초혼천왕이 목구멍을 넘어 밀려오는 선혈을 간신히 억누르면서 다시 질문을 던질 때였다.

띵- 띠디딩-

격렬한 거문고 음이 모옥에서 터져 나와 형상화한 음강이 초혼천왕을 덮쳤다.

무지갯빛 음파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헐떡이는 초혼천왕을 갈랐다.

“끄아아악-”

긴 비명과 함께 음파에 노출된 초혼천왕의 육신이 조각조각 육편처럼 썰려 나갔다. 가공할 음공의 위력이었다.

마교칠왕의 일인으로 공포의 대명사였던 초혼천왕이 순식간에 저승으로 갔다.

물론 주석하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다음 차례는 천라요희였다.

천라요희는 지금도 화존과 백화령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번개처럼 신형을 날린 주석하는 화판답공을 이용해서 허공을 밟았다. 봉담소 암반에서 단숨에 뛰어내리는 그의 모습은 한 마리 비조 같았다.

“제가 왔습니다!”

주석하는 웅후한 목소리로 사자후를 발했다.

화존과 백화령의 시선이 그를 반겼다.

동시에 천라요희의 마편이 주석하를 휘감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