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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검천하-211화 (211/273)

211화 청산의 혈투 (3)

주석하는 마편을 향해 흑검소를 내밀며 몸을 피했다.

마편이 순식간에 흑검소를 휘감았다.

이 장면을 어디선가 겪은 듯한 기시감이 일었다. 파천혈옹도 조간에 붙은 은사로 흑검소를 감았다가 얼굴이 밤탱이가 됐었는데.

“넌 뭐야?”

난데없는 불청객에 천라요희가 경악해서 소리쳤다. 죽으려고 마편에 뛰어드는 경우도 처음이다.

“나? 화존 제자!”

“화존?”

주석하는 음산한 미소를 머금고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절정의 화판답공이 펼쳐졌다.

화존의 제자라는 대답을 증명하는 몸짓이었다.

주석하의 외침에 화존이 깔깔대며 웃었다.

“킥킥, 울 제자 왔어?”

백화령도 반갑게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울 사제 왔네!”

“어? 내가 왜 사제야? 사형 아냐?”

“뭔 소리! 내가 화존 사부께 먼저 입문했잖아!”

“악군 사부께는 내가 먼저야!”

주석하가 화존, 백화령과 장난치듯 주고받는 대화에 천라요희가 분노를 토했다.

“이것들이 뭔 짓거리야!”

“뭐긴, 널 갖고 노는 거지!”

“으아!”

천라요희는 평생 이런 수모를 당하긴 처음이었다. 그녀는 내력을 끌어올리며 흑검소에 휘감긴 마편을 잡아당겼다.

엄청난 내공에 마편이 강철처럼 빳빳하게 일직선으로 뻗었다.

순식간에 접근한 주석하는 흑검소에 걸린 마편을 붙잡았다. 동시에 그는 화판답공을 이용해서 허공으로 높이 솟구쳤다.

“으악! 뭐 하는 거냐?”

갑자기 마편이 주석하에게 붙잡혀 하늘로 올라가자 마편을 붙잡고 있는 천라요희 또한 허공으로 끌려갔다.

천라요희는 마편을 붙잡고 허둥댔다. 마편을 놓으면 간단하겠지만 목숨처럼 아끼는 무기를 이런 식으로 놓을 수 없었다.

“으, 우악! 내려라!”

“높은데 올라가면 무섭냐?”

“내, 내가 무섭긴 뭘 무, 무서워한다고!”

이제는 마편을 두 손으로 붙잡고 허공에서 버둥거리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높은 곳에 적응하지 못하는 듯했다.

화판답공으로 허공을 밟으면서 천라요희를 놀리던 주석하는 조금씩 마편을 잡아당기면서 천라요희에게 접근했다.

그를 향해 온갖 욕설을 퍼부으며 화를 내는 천라요희의 얼굴이 들어왔다. 어째 그녀의 분노 어린 얼굴 뒤로 공포가 어린 듯했다.

“허억!”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천라요희는 주석하와 얼굴을 맞댔다. 그녀는 기겁할 듯 놀라 눈이 동그래진 채 입만 뻐끔거렸다. 너무 기가 막혀 말을 못 하고 있었다.

주석하가 마편을 쥐지 않은 다른 손을 거머쥐며 중얼거렸다.

“그때 파천혈옹도 은사를 잡혔다가 나에게 한방 오지게 터졌거든?”

“헉! 파, 파천혈옹을?”

“이렇게 말이야!”

순간 주석하의 혼천십팔권이 펼쳐졌다. 그의 주먹이 천라요희의 안면을 강타했다.

빡!

“악!”

천라요희는 비명을 지르면서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자연스럽게 마편을 놓고 추락한 그녀가 봉담소 연못에 풍덩 빠졌다.

주석하는 허공을 밟으며 천천히 화존의 곁에 내려섰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오매불망 우리 제자 오기만을 기다렸어!”

화존이 활짝 웃음을 터트리며 장난스럽게 그를 맞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화존과의 대화는 잘 적응되지 않는다. 주석하는 옆에 있는 백화령에게도 다시 인사했다.

“고생 많았네요. 늦게 와서 힘들게 했습니다.”

“난 우리 사제가 올 줄 알았어요!”

백화령도 인사하며 미소를 지었다.

화존과 백화령이 나란히 서 있으니 두 사람의 얼굴과 성격이 어딘지 모르게 닮은 듯했다. 그를 환대해주는 방식도 정말 비슷하다. 누가 사제지간 아니랄까 봐.

인사를 마친 주석하는 다시 봉담소로 시선을 돌렸다.

“으아아!”

거친 울음소리가 들렸다.

봉담소에는 물에 흠뻑 젖은 채 허리까지 물에 잠긴 한 여인이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한쪽이 시퍼렇게 부었고 이빨마저 왕창 부러져 떡이 되어 있었다. 실로 처참한 광경이었다.

“으흐흑, 내 얼굴! 내 얼굴!”

천라요희는 나이가 초로에 접어들었지만, 미모를 유지하려는 욕망만은 젊은 사람 못지않았다.

얼굴이 망가지니 그녀는 마치 세상을 잃어버린 듯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 순간 화존이 허공을 가로지르며 봉담소로 뛰어들었다.

“네년이 감히 날 괴롭혀?”

화존의 손이 하얗게 변하고 수강이 비수처럼 뻗어 나와 천라요희의 가슴을 푹 찔렀다.

백옥수(白玉手)!

화존의 절대무쌍 절기다.

“크윽! 이년이!”

천라요희가 화존에게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그녀는 거의 실성 일보 직전인 데다 물에 빠진 터라 제대로 반격하지 못했다.

화존의 일방적인 구타가 시작됐다. 그것도 날카로운 수강을 동반한 공격이다.

푹- 푹-

서걱- 서걱-

마치 비수로 육신을 도려내듯 피가 튀었다.

“마교칠왕이면 다야? 뒤질 년이!”

조금 전 벌어졌던 두 사람의 대결에서 쌓인 게 많았던 모양이다.

백화령과 연합해서 천라요희를 공격했음에도 우위를 잡지 못하고 오히려 밀려 죽을 위기를 맞고 있었으니, 정파십존의 자존심에 제대로 금이 갔다.

화존의 분노를 목격한 백화령이 어이없는 듯 주석하를 쳐다봤다.

“마, 말려야 하는 거 아니에요?”

“늦었어요, 거의 죽었는데요, 뭘.”

주석하는 한숨을 내쉬면서 태연하게 화존의 만행을 지켜봤다.

한참 지난 후 화존이 천라요희를 손에서 내려놓았다.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난도질당한 천라요희가 물에 둥둥 떴다.

그녀의 얼굴은 공포와 고통으로 일그러진 채 눈을 감지 못한 상태였고, 몸에 걸친 옷도 갈가리 찢어져 흔적이 없었다. 그녀의 피부에는 수백 개의 칼자국이 바둑판처럼 그어져 있었다.

화존이 허탈한 표정으로 그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나, 잘했지?”

“잘하긴 하셨는데…….”

“원래 나 건드리는 놈들 그냥 내버려 두지 않거든.”

화존이 씩씩대며 봉담소에서 걸어 나왔다.

그녀를 본 주석하가 눈이 동그래져서 입을 쩍 벌렸다.

“허억!”

“응?”

“사부!”

백화령이 다급하게 두 손으로 주선하의 시선을 가렸다.

그제야 화존은 자신의 몰골을 내려다봤다.

“으악!”

전신에 천라요희가 흘린 피가 묻어 엉망이었다. 그것뿐이면 큰 문제가 아니다.

물에 빠졌다가 밖으로 나오는 바람에 옷이 피부에 착 달라붙어 요염한 굴곡을 그대로 드러냈다.

“헉!”

당황한 화존은 급히 봉담소로 되돌아갔다.

첨벙!

물에 몸을 담그고 주석하의 시선을 피하는 순간 화존은 봉담소 물을 보고 다시 기겁했다.

“으악!”

천라요희의 죽음 때문에 물 색깔이 온통 시뻘겋게 변해있었다.

놀란 화존은 다시 봉담소를 뛰쳐나와 이번에는 모옥으로 허겁지겁 달려갔다. 그녀의 난리통에 주석하의 시선도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따라갔다.

이번에는 옷이 착 들러붙은 그녀의 아름다운 뒤태가 아낌없이 보였다.

“흐으.”

흐뭇한 미소를 짓는 순간 갑자기 머리에 충격이 왔다.

딱!

“뭐예요?”

백화령이 그를 향해 도끼눈을 짓고 있었다.

***

어둠 속에서 이가장이 눈에 들어왔다.

우설금은 이설은과 함께 급히 이가장으로 달려왔다. 한적한 야산 초입에 세워진 넓은 장원이 수 대에 걸쳐 무림세가로 뿌리를 내린 이가장이었다.

그 이가장이 지금 풍운에 휩싸여 있었다. 곳곳에 화재가 일어 불길이 치솟았다. 고함과 신음으로 소란스러웠고 여기저기에서 싸우는 소리가 가득했다.

“흑흑, 적이 너무 강해서…….”

구원을 요청하러 떠날 때와 다시 돌아온 지금의 장원 모습이 너무 달라서 이설은은 망연자실한 심정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을지 쉽게 짐작됐다.

“아버지는 반드시 살아있을 거예요!”

이설은이 정신없이 장원 안으로 들어갔다.

우설금은 착잡한 기분으로 그녀를 뒤따랐다.

무너진 건물과 바닥을 적신 핏자국. 곳곳에 쓰러진 이가장 사람들이 보였다.

사실 이런 싸움판은 우설금에게 일상이나 마찬가지였다. 최근 들어 그녀가 저지른 혈겁만 해도 이보다 훨씬 심각하고 잔인했다.

그렇기에 그녀의 눈에 이가장의 참상은 그리 색다를 게 없었다.

다만 이곳이 그녀의 외가라는 점 때문에 이상한 느낌이 들긴 했다. 외가라지만 처음 와본 곳이고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아직 그녀에게 낯선 인물이다.

이설은이 장원 안으로 들어가자 복면을 한 흑의인들이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이설은의 무공도 절대 약하지 않았기에 그녀는 달려드는 흑의인을 검으로 베고 거침없이 질주했다. 덕분에 우설금은 굳이 손을 쓰지 않고 그녀를 뒤따를 수 있었다.

무너진 몇몇 전각을 지나 중심부의 커다란 팔각 전각으로 이설은이 뛰어 들어갔다.

전각 내부에는 많은 사람이 몰려 있었다. 안타깝게도 그 대부분은 이가장을 습격한 흑의인들이었다.

우설금은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금방 전세를 파악했다.

이가장 사람으로 보이는 수 명이 대청 한쪽에 몰려 있고 그들을 침입자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포위한 흑의인들의 선두에 눈에 익은 한 인물이 검을 막 휘두르고 있었다.

우설금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 인물은 바로 도수였다.

도수의 검이 맞은 편 이가장의 중년 남자의 가슴을 가르고 검을 맞은 중년인이 그 자리에서 꼬꾸라졌다.

“으악! 아버지!”

이설은이 다급하게 몸을 날렸다. 그녀는 위험을 아랑곳하지 않고 도수의 앞에서 아버지를 품에 안았다.

“안 돼! 설은아! 위험해!”

뒤에서 이가장 사람들의 놀란 외침이 터졌으나 이설은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죽어가는 아버지의 얼굴만 바라보며 넋이 나갔다.

다음 순간 도수가 다시 검을 치켜들며 포효했다.

“이가장은 오늘로 멸문이다!”

도수의 검이 빛살처럼 이설은에게 내리꽂혔다.

쾅!

그 순간 우설금의 홍철산이 활짝 펼쳐져 도수의 검을 가로막았다. 도수의 일격은 홍철산을 내리찍은 후 튕겼다.

경악한 도수가 몸을 틀어 홍철산이 날아온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우설금과 도수의 시선이 서로 만났다. 두 사람 모두 표정이 굳었다. 의문, 당황, 경악, 혼란……. 두 사람의 감정이 요동쳤다.

펼쳐진 홍철산이 날아올라 우설금의 손에 들어갔다. 홍철산에 새겨진 화려한 모란꽃과 그녀가 펼친 절정의 허공섭물에 모두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포위했던 암흑단원들이 뒤로 몇 발자국씩 물러났다.

“네가 어떻게?”

도수는 우설금이 왜 이곳에 나타났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의 옆에는 주석하가 있어야 하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주석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우설금이 암흑단의 일을 왜 방해하지? 복수하러 왔나? 도수의 심경이 복잡해졌다.

어쨌든 도수와 우설금은 껄끄러운 사이였다.

여느 때처럼 우설금은 아무 말 없이 홍철산을 들고 조용히 도수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두 사람 사이에 피어오르는 긴장감에 주변 사람들은 차마 끼어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

“으흐흑! 살인마!”

이설은이 울부짖으며 일어서는 순간 비슷한 또래의 남자가 그녀를 붙잡았다.

“누나!”

“놔! 저놈을 죽여야 해!”

방금 도수의 검에 죽은 사람은 이가장의 장주인 이산이었고. 이설은을 붙잡은 남자는 장남이자 이설은의 동생인 이명이었다.

우설금은 그들을 처음 보았기에 아직 친척이란 감정이 낯설었다.

도수가 굳은 표정으로 우설금에게 경고했다.

“우 소저, 당신은 타인이니 내 일에 끼어들지 마! 나를 방해하면 당신과 생사결을 벌일 테니까.”

그때 나이가 지긋한 노부인이 앞으로 나왔다.

“소저는 누구시오? 누구인데 우리를 도와주는 게요?”

그제야 정신을 차린 이설은이 재빨리 설명했다.

“저 소저는 우설금이에요! 할머니 외손녀요!”

“우설금?”

노부인의 시선이 우설금을 향했다. 한참 그녀의 얼굴을 살피던 노부인이 믿어지지 않는 듯 안면에 경련을 일으키며 중얼거렸다.

“가흔이에게 딸이 있었다니…… 설금이란 이름은 내가 지어준 건데…… 딸에게서 손녀가 태어나면 설금, 아들에게서 손녀가 태어나면 설은……. 네가 정말 설금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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