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이가장 (1)
노부인의 목소리는 벼락이나 마찬가지였다.
우설금은 따뜻한 시선이 낯설었다. 평생 그녀에게는 부모가 없었고 가까운 친지도 없었다. 그런 그녀에게 갑자기 피를 나눈 친척이 대거 생겼다.
여전히 가슴에 와닿지 않았다.
그들의 말대로라면 지금 말을 거는 노부인은 그녀의 외할머니이고 이설은과 옆의 남자는 그녀의 외사촌이며 지금 도수가 죽인 사람은 어머니의 오빠인 외숙부였다.
그녀가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자 노부인이 다시 물었다.
“네가…… 우경천의 딸이냐? 네 어머니가 이가흔이 맞느냐?”
우설금은 대답을 망설였다. 우경천은 구주사은이었던 극마서생 우청엽의 아들이라고 불존이 말했었다.
우경천이 이가장의 이가흔과 결혼해서 그녀를 낳았다고…….
“제가 우설금이 맞습니다.”
“아아! 정말 닮았구나!”
쓰러질 듯 비틀거리는 노부인을 이설은이 황급히 부축했다.
그 순간 더 놀란 사람은 도수였다.
그들의 말에서 도수는 우설금이 노부인의 외손녀임을 눈치챘다. 그의 시선이 발아래 쓰러진 장주 이산에게 멎었다.
그렇다면 지금 자신이 우설금의 외숙부를 죽인 것인가.
이렇게 공교로울 때가. 그녀는 그의 아버지를 죽였다. 그런데 그는 그녀의 외숙부를 죽였다. 복잡하게 얽힌 은원에 도수는 숨이 턱 막혔다.
당연히 포위한 암흑단 자객들은 이런 상황에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이가장 사람들과 우설금을 죽이려고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마침 우설금이 노부인과의 대화에 정신이 팔리자 그들은 일제히 우설금을 향해 덤벼들었다.
무려 수십 자루의 검이 일제히 우설금을 찔러 갔다.
이를 본 이설은과 노부인 등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아, 안 돼!”
순간 강력한 기파가 대청을 휘몰아쳤다.
푸아악-
“으악!”
우설금을 향해 덤벼들던 자들은 강력한 강기에 폭죽처럼 휘감기며 뒤로 나뒹굴었다.
쓰러져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흑의인들은 그제야 우설금이 어마어마한 고수임을 눈치챘다. 이 여자는 암흑단의 단주인 암군이 와도 쉽지 않은 절대고수였다.
도수는 여전히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만일 우설금과 아무런 사이가 아니었다면 그는 이런 상황에서 목숨을 걸고 암습을 시도했을 것이다.
그런데 우설금과 그는 그럴 수 있는 사이가 아니었다.
그녀는 암흑단의 움직임을 방해하는 적도 아니고, 아버지를 죽인 원수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방금 죽인 이산의 책임을 그가 지는 것도 이상했다.
두 사람의 갈등과 달리 이가장 사람들은 우설금의 절정 무공을 보고 반색했다.
“어, 어마어마한 고수다!”
“우린 이제 살았어!”
이가장 사람들의 환호 속에서 우설금은 멍하니 서 있었다. 친척이라면 그녀가 이들을 적극적으로 도와야 정상이다.
그런데 그는 차마 도수에게 칼을 겨눌 수 없었다. 어쨌든 그녀는 도수의 아버지를 죽인 빚을 졌다. 게다가 도수의 뒤에는 주석하가 있다.
복잡한 표정으로 우설금을 노려보던 도수가 검을 거두어들였다.
“돌아간다.”
도수가 먼저 대청을 나섰고 흑의인들이 우르르 빠져나갔다.
우설금은 그들을 저지하지 않았다. 그녀는 홍철산을 들고 무표정한 눈으로 도수의 뒤를 쫓았다.
순식간에 침입자들이 사라지자 대청 내부는 다시 활기를 띠었다.
이설은이 이산을 끌어안고 통곡했다.
“아버지!”
이가장 식구들이 모두 모여 울부짖는 장면을 우설금은 착잡한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그제야 그녀도 실감이 났다. 이설은과 그녀는 닮은 구석이 많았다. 그리고 이설은의 할머니인 노부인 역시 그녀와 많이 닮았다. 이곳은 그녀의 외갓집이 확실했다.
생애 처음으로 친척을 찾았건만 그녀의 마음은 복잡해서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
악군의 모옥 내부는 예전에 왔을 때와 똑같았다.
고즈넉한 분위기는 바뀌지 않았다. 한쪽 벽에 붙은 작은 관솔불이 일렁거리며 방 안을 흐릿하게 비췄다.
주석하는 그때처럼 모옥 내부에서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은 흡사 사부의 가르침을 받는 제자 같았다.
그의 옆에 백화령도 다소곳이 앉았다. 그녀는 연신 주석하를 힐끔거리며 지금 이 상황을 고민하는 듯했다.
지금 주석하의 앞에는 예전처럼 대나무 발이 처져 있고, 그 발 너머에는 흐릿한 그림자 둘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악군과 화존이다.
발 너머로 비친 악군의 분위기는 전과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하얀 옷을 입은 듯했고 예전처럼 거문고를 앞에 두고 허리를 세운 채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주석하도 악군도 말을 꺼내지 않아 방 안에는 적막이 내려앉았다.
“뭘 고민해? 그냥 발을 확 걷어버려.”
침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화존이 투덜댔다.
“너, 그러다 쫓겨난다.”
“그래? 그것도 나쁘지 않아. 내가 잘난 주 공자를 데리고 확 나가 버릴 거니까.”
“자꾸 나를 뒤집어 놓을래?”
“내가 뭘 뒤집어? 네가 이 낡은 대나무 발에 집착하니 그렇지.”
“대나무 발이 문제가 아니잖아?”
“내 말이 그 말이라니까.”
발 건너편에서 악군과 화존이 툭탁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화 내용을 듣고 있으면 흡사 아직 시집을 가지 않은 처녀 같다. 실제로 둘 다 시집을 가지 않았다.
주석하는 자신도 모르게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백화령이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주석하는 깜짝 놀라 다시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경건한 표정으로 위장하며 조용히 앞을 응시했다. 하지만 금방 다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웃음이 전염된 백화령도 킥킥대며 웃었다.
“자자, 그러지 말고 잘생긴 제자 얼굴 제대로 보라고.”
“넌 사부라면서 채신머리없이 그럴래?”
“없긴 뭐가 없어? 내가 얼마나 근엄한데.”
“그런 사부가 몸을 다 드러내고 뛰어 다니냐?”
“내가 언제?”
“아까 물에 젖어 앞뒤 다 보였어.”
“아악! 내 흑역사를!”
발 너머에서 펄펄 뛰며 야단법석인 화존의 모습이 들어왔다.
주석하는 백화령에게 나지막이 속삭였다.
“원래 이 두 분 만나면 이래요?”
“오늘따라 좀 심하네요. 가끔 이럴 때가 있긴 한데…… 보통은 근엄하시죠.”
근엄한 악군은 상상되지만 근엄한 화존은 대체 연상이 되지 않는다. 지금도 툭탁거리며 은근히 악군을 갈구는 게 화존이니까.
보다 못한 주석하가 나섰다.
“악군 사부님, 혹시 저랑 얼굴을 마주치면 안 될 이유라도 있으십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주변에서 그와 원수졌거나 만나서 얼굴 붉힐 여자는 기억나지 않았다.
우물쭈물하는 악군 대신 화존의 대답이 먼저 날아왔다.
“있긴 뭐가 있어? 네 사부가 예전에 남자에게 차여서 남자 얼굴만 보면 경기를 일으켜서 그렇지.”
“너! 정말 쫓아내 버릴 거다!”
“내가 틀린 말 했어? 차이고 질질 짜던 때가 엊그제인데. 그때 온 동네 남자를 다 죽여 버리겠다고 펄펄 날뛰더니! 그때부터 남자랑 대면을 안 했잖아?”
“으으.”
“내가 너였다면 그냥 확 사고부터 쳤다. 배가 부른데 어쩔 거야? 데리고 살아야지.”
“야!”
두 사람의 대화에서 대충 어떻게 된 일인지 유추했다. 단지 그런 이유로 오랜 세월 동안 남자를 멀리했다는 게 잘 이해되지 않았지만.
얼마나 사랑했던 사이였을까? 악군의 태도로 보아 아직도 그 남자를 잊지 못하고 있음이 확실했다.
문득 주석하는 자신을 돌이켜 봤다. 만일 그도 우설금과 헤어지면 저렇게 될까. 그날 이후 모든 여자와 인연을 끊고 여자를 멀리하며 살아갈까.
아직은 잘 모르겠다. 우설금과 헤어지는 상황이 실감 나지 않으니까.
그와 그녀의 처지로 보면 언제 헤어져도 이상할 것 없는 사이인데, 절대 헤어지지 않으리란 자신감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주석하는 싸움을 말리려고 끼어들었다.
“그 남자가 대체 누굽니까? 우리 악군 사부님의 마음을 그렇게 아프게 하다니요. 말씀해 주시면 제가 그 남자 다리를 부러트려서 데려오겠습니다.”“주 공자, 그 남자가 다치면 악군이 슬퍼해. 헤어진 지 거의 이십 년인데 소식마저 듣지 못했어. 잘 살고 있는지는 몰라. 나는 못 살라고 막 저주를 퍼붓는데 이년은 마음이 고와서 잘 살라고 기도하더라.”악군의 애틋한 심정이 이해될 듯 말 듯 했다.
“설마 천무태평악이?”
“잘 아네. 그거 악군 본인 이야기야.”
주석하는 천무태평악의 가사를 떠올렸다. 남자를 그리는 애절한 여인의 마음을 그린 곡조였던가. 그 당사자가 악군이었다니 가슴이 아렸다.
그에게 악군은 근엄하면서도 단정하고 바른 사부였다. 언제나 하얀 옷을 입고 거문고를 타며 우아한 기품을 품고 있는 그녀에게 가슴 아픈 사연이 있었다니.
“그래서 그 남자가 누굽니까? 제가 멱살 잡아 데려온다니까요.”
“그 남자 이름은…….”
“화존!”
악군이 다급하게 말렸다. 하지만 그만둘 화존이 아니었다.
“그 남자 이름은 우경천이야. 아마 못 들어봤을 거야. 별로 유명한 사람은 아니거든.”
우경천? 얼핏 들어본 것 같은데 누구였더라?
주석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고심하고 있자니 화존이 기회를 잡았다면서 악군의 비밀을 마구 쏟아냈다.
“그 우 소협이 악군을 버리고 이가흔이라는 여자랑 결혼했거든. 그날 이후로 악군이 남자 얼굴도 안 봐. 쯧쯧 충격이 얼마나 극심했으면.”
“이가흔…….”
주석하는 입을 쩍 벌린 후 다물지를 못했다.
화존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누군지 알아? 유명한 사람 아니어서 모를 텐데?”
주석하가 말을 못 하고 있자니 백화령이 다시 옆구리를 쿡 찔렀다.
“누군지 알아요?”
얼이 빠진 표정으로 주석하가 중얼거렸다.
“우설금 어머니요…….”
“네?”
백화령 또한 입을 다물지 못했다.
***
우설금은 이설은, 이명 남매와 함께 노부인과 마주 앉았다.
장원의 시신을 빠른 속도로 치우고 이산 장주가 죽은 슬픔에서 헤어난 후, 그녀는 그나마 멀쩡한 노부인의 처소에 머물렀다.
“그래, 아버지, 어머니는 잘 계시냐?”
“제가 태어나자마자 돌아가셨습니다.”
그녀의 대답에 노부인의 안면에 경련이 일었다. 딸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것이다.
“어떻게 돌아가셨니? 넌 어디에서 살았고?”
“저도 모릅니다. 저는 부모님 얼굴을 한 번도 뵌 적이 없습니다. 부모님 성함도 최근에야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확인차 오다가 이 소저를 만나게 되어…….”우설금은 간략히 대답했다. 사실 그녀는 부모님에 대해서 아는 게 없었다.
“아아, 어린 애가 가엽게도…….”
노부인이 눈물을 적셨다.
오늘 노부인은 아들과 딸을 잃었고 대신에 외손녀를 새로 얻었다. 그녀는 그 슬픔을 삼키고 우설금을 다독였다.
“정말 많이 닮았구나. 넌 가흔이의 딸이 확실해.”
우설금도 노부인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보면 볼수록 자신과 닮은 구석이 많았다. 옆에 앉은 이설은도 마찬가지. 누가 보면 자매라고 할 정도였다.
그녀는 이제야 반야불존의 말이 진실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가 말한 모든 내력은 진실이었다.
그의 부모는 천마의 손에 죽었으며 그녀는 원수의 손에서 길러졌다.
“그동안 고생 많이 했겠구나. 지금은 어디에서 사느냐?”
“강호를 떠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아직 정착할 곳을 찾지 못했어요.”
“아아, 어린 것이…… 고생을…….”
노부인이 우설금의 고생을 알겠다는 듯 다시 눈물을 흘렸다.
노부인이 그녀의 손을 잡고 어루만졌다.
“얘야,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와 함께 살자구나. 이곳이 그럭저럭 살만하단다. 떠돌아다니는 것보다 훨씬 나을게야.”
우설금은 대답할 수 없었다. 그녀의 머릿속에 없던 제안이었다.
지금까지 그녀는 마교를 떠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중원에 나왔다가도 임무를 마치면 당연히 마교로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하나? 다시 마교로 돌아갈 수 있을까? 마교에서 천마와 얼굴을 마주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