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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검천하-213화 (213/273)

213화 이가장 (2)

천마에 대한 감사와 증오가 우설금의 마음속에서 어지럽게 뒤엉켰다. 그 마음에 두려움마저 혼재하자 그녀도 바로 결심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과 부모를 이렇게 만든 천마를 어떻게든 응징해야겠다는 다짐이 뚜렷해졌다.

우설금은 적당히 둘러댔다.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강호에 벌려놓은 일이 조금 있어서요.”

“그래, 바로 마음을 정하기는 어렵겠지. 이 할미는 항상 기다리고 있으마. 너를 보면 네 어미를 보는 것 같아서…….”

노부인이 다시 손수건으로 눈가를 찍으며 눈물을 훔쳤다.

이 넓은 중원 천하에 그녀를 부르는 곳이 생기다니.

이제는 마교도 돌아갈 곳이 아니어서 천하를 방랑해야 할 처지에 그녀를 이렇게 따뜻하게 맞아주는 곳이 있다니.

우설금은 새삼 핏줄과 가족의 정에 감격했다.

지금까지 오직 반야불존이라는 원수만을 바라보면서 무공을 닦았던 그녀의 감정 기반에 커다란 균열이 이는 순간이었다.

“그래, 꼭 돌아 오거라. 언제 떠날 생각이냐?”

“그, 그게…….”

애초에 이가장을 잠시 들를 생각이었다. 자신이 이곳 출신인지 확인만 하고 떠날 생각이었다.

그런데 본의 아니게 발이 묶였다. 물론 낯설었으나 기분 좋은 일이었다.

“네 외숙부 장례는 끝내고 가면 어떻겠니? 사흘 정도 말이다.”

우설금이 마음을 정하지 못하자 노부인이 거듭 권유했다.

우설금은 어쩔 수 없이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 오래 머물수록 그녀의 정체가 발각되어 곤란해질 가능성이 크다.

또 그녀가 이곳을 방문한 사실이 발각되면 이곳 사람들은 누구도 안전할 수 없다. 그렇기에 이곳에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된다.

알면서도 그녀는 거절하지 못했다. 사흘 동안 머물겠다고 확정하자 노부인을 비롯하여 모두가 반겼다.

그녀의 옆에서 함께 무릎을 꿇고 있던 이명이 입을 열었다.

“누나, 누나는 어디에서 무공을 배웠기에 그렇게 강해요?”

나이를 따지면 이설은은 그녀와 동갑이었고 이명은 한 살 아래였다. 그렇기에 그녀를 자연스럽게 누나라 불렀다.

누나란 호칭이 익숙지 않았던 우설금은 당황했다. 질문 또한 그녀를 곤란하게 하는 내용이었다.

“가, 강호를 떠돌다가 기인이사를 만났어. 운이 좋았지.”

“와아! 대단해!”

진실이라 받아들인 이명은 감탄사를 연발했다.

사실 이가장의 가전 무공도 나름 쓸만했다. 쟁쟁한 오대세가에 비하면 별것 아니었으나 하남에서는 그럭저럭 수준 있는 무가로 통했다.

이설은이나 이명의 무공은 중원사룡이나 천상삼화에 비해 한참 떨어지지만, 강호 유명인사를 제외하면 그럭저럭 버틸 수준은 됐다. 그러나 이런 수준으로 정사대전이 발발한 현실을 헤쳐 나가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나중에 제 무공 좀 봐주세요.”

“으응. 그럴게.”

우설금과 무공을 익힐 수 있게 되었다며 좋아하던 이명의 표정이 다시 굳어졌다.

“그런데 그 사람 누구예요? 제 아버지를 죽인 원수!”

“아!”

이곳에서 그녀와 도수가 대치하며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모두가 목격했었다. 도수가 그녀의 이름까지 알고 있었으니 서로 모르는 사이일 수는 없었다.

“암흑단의 누구예요?”

“암군의 제자. 암흑단에서는 도 공자라 불리는 사람이야.”

이름 전체를 말하나 하지 않으나 상관없으나 차마 이름을 말해줄 수는 없었다.

이명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암군의 제자라고…….”

일반 무림인의 눈에 흑도팔군은 신 같은 존재다.

그런 대단한 자의 제자라면 그 제자 또한 평범할 리 없다. 이명은 복수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고 절망했다.

“그래도 방법이 있을 거예요! 군자의 복수는 십 년이 지나도 늦지 않는 법! 다음에 만나면 반드시 원한을 갚을 겁니다!”

이명이 씩씩하게 다짐했다.

우설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누나도 나를 도와주셔야 해요. 내가 복수할 수 있게.”

“그, 그래.”

그녀는 도수의 철천지원수다. 그런데 도수는 그녀의 사촌인 이명의 철천지원수가 됐다.

세상은 정말 오묘하다. 신의 장난인지. 은원은 돌고 돈다.

그녀는 이명에게 원수를 갚으라고도 갚지 말라고도 할 수 없었다.

정작 그녀도 마찬가지 사정 아닌가. 그녀는 천마에게 원수를 갚아야 할까. 아니 갚을 수나 있을까.

그녀의 혼란한 내면을 눈치챈 듯 노부인이 우설금의 손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이제는 고생하지 말거라. 정말 곱게 자라줘서 고맙구나. 누구보다도 예쁘게 자랐으니 그것만으로도 다행 아니냐.”

정작 우설금은 자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체감하지 못했다.

마교는 미모보다 무공이 우선되는 곳이었고, 강호에 나와서는 계속 떠돌아다니면서 행적을 숨겼기에 그녀의 미모를 평가받을 일이 없었다.

천상삼화와 비견될 미모였으나 정작 그녀 본인은 무덤덤했다. 사실 그녀는 미모를 이용해서 뭔가 해보겠다는 생각 자체를 한 적이 없었다.

그런 그녀였으나 이가장 사람들의 눈에는 그 아름다움이 제대로 눈에 띄었다.

이가흔의 딸이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이가흔의 장점만 쏙 빼닮은 그녀는 천상의 선녀였다.

우설금은 따뜻한 노부인의 손길에 가족의 정을 만끽했다.

그녀의 마음속에 쌓여있는 커다란 벽이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마교인에서 평범한 사람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

“우경천과 이가흔이 마교를 침입했다가 죽었다고? 그것도 혼인하자마자? 그리고 그들 사이에 딸이 하나 있고…… 너랑 아는 사이라고?”

악군의 목소리는 격동을 감추지 못했다.

감정이 격랑을 일으키자 그녀의 주위로 기운이 뿜어져 중간에 쳐진 대나무 발이 일렁거렸다.

주석하에게 모든 사실을 들은 악군과 화존은 머릿속에서 재정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녀들은 우경천과 이가흔이 강호에서 은거하여 숨어 산다고 생각했었다. 단 한 번도 그들이 죽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었다.

“다행이네. 악군 네가 그 사람과 혼인했었다면 너도 지금쯤 구천을 헤매고 있을 거 아냐?”

“넌 그이가 잘 죽었다는 거야?”

“그 말이 아니잖아? 네가 살아서 다행이라고…….”

황급히 변명하던 화존은 바로 입을 닫았다. 지난 세월 악군이 어떻게 견뎌왔는지 알기 때문이다.

우경천과 이가흔의 혼인을 바라보고만 있어야 했던 그녀는 그날 이후 사실상 세상과 인연을 끊었다.

남자를 극도로 기피했고 만나지도 않았다. 남자를 대면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면사를 썼다.

그녀의 무공이 급증한 것도 그 무렵부터였다. 우경천을 잊으려고 무공에 더욱 매달렸고 마침내 흑도팔군에 올랐다.

덩달아 그녀의 심성도 점점 괴팍해졌다. 눈에 거슬리던 문파를 다짜고짜 멸문하면서 희대의 마두로 이름을 날렸다.

그러다가 대략 십 년 전, 이곳 청산에 은거했다.

그녀의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남자가 이미 오래전에 죽었다니. 그녀와 헤어지고 다른 여자와 혼인한 지 얼마 후에 마교에 잠입했다가 살해당했다니.

“하아.”

악군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녀는 인생무상을 느끼고 있었다. 이미 죽어버린 사람을 원망하며 지난 세월 동안 그녀는 심적 고행을 겪은 셈이었다.

“그렇다면 그 우 소저가…… 마교인이었어요?”

백화령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주석하에게 확인했다.

“네, 마교. 그것도 마교 최고 지위인 마교수호사령이죠. 별호는 단천마령이고요.”

“어쩐지 무공이 정말 강하더라니…….”

백화령은 첫날 흑검문에서 만났을 때 우설금이 주변으로 폭풍처럼 일으켰던 호신강기를 떠올렸다.

물론 그런 무공은 우설금에게는 가벼운 수준이지만 백화령에게는 까마득히 높은 절정 신공이었다.

“이가흔의 딸을 천마가 키웠다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화존의 어이없다는 목소리가 들렸다.

주석하의 대략적인 설명만으로도 그녀들은 우설금의 비참한 인생을 동정했다. 하지만 그녀는 마교인이고 그들과는 적대 관계에 있는 사람이다.

오늘도 마교칠왕이 그들을 죽이려고 찾아오지 않았던가. 그 동정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 우설금이란 아이는 자신의 처지를 알고 있느냐?”

감정을 수습한 악군이 물었다.

“불존이 모든 사실을 알려주었기에 지금은 알고 있습니다.”

“그 아이는 계속 마교에 남겠다더냐?”

“아직은 혼란스러운가 봅니다. 결정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그렇겠지. 그런 큰일을 단번에 받아들일 수는 없을 테니.”

중원의 관점에서 우설금이 마교를 이탈하면 큰 도움이 된다. 비록 그 개인에게는 안타까운 일일지라도.

옆에 있던 백화령이 그의 옆구리를 쿡 쑤셨다.

“그럼 사제는 우 소저가 마교인이란 것을 알면서도 가까이했다는 거네요?”

우설금이 마교인이란 사실이 충격이었나보다. 그만큼 중원인에게 마교는 이질적이면서 두려운 존재였다.

주석하가 고개를 끄덕이자 백화령이 안면을 살짝 찡그렸다.

“우 소저의 미모에 홀렸었죠? 그렇죠?”

주석하는 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그녀의 미모 때문이었나? 아니라고 장담할 수는 없으나 꼭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솔직히 그와 그녀의 만남은 시작부터 끝까지 평범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살얼음판이었고 지금도 그런 분위기는 바뀌지 않았다.

머뭇거리는 주석하의 모습을 본 화존이 재빨리 물었다.

“어? 우리 제자 화령이보다 더 예뻐? 그럴 리가 없잖아? 천중화보다 더 예쁘다고? 하늘의 꽃이라고 칭송받는 얘보다?”

화존은 본인이 예뻤기에 아름다움에 특히 민감했다.

백화령을 제자로 들인 것도 그녀의 아름다움이 중요한 이유였다.

어쩌면 주석하에게 무공을 전수한 이유도 주석하의 외모가 남달랐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 소저도 무척 예뻐요.”

한숨을 내쉬며 대답한 백화령이 주석하를 흘겼다.

“설마…….”

“가흔이 딸인데 당연하겠지. 가흔이도 아주 예뻤잖아?”

“그래도 그렇지. 엄마가 예쁘다고 딸도…….”

악군의 말을 반박하던 화존이 바로 입을 다물었다.

이가흔과 가까운 사이였던 화존은 이가흔이 얼마나 예뻤는지 잘 기억한다.

우경천이 악군이 아닌 이가흔을 최종적으로 선택한 이유도 어쩌면 이가흔의 우월한 외모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넌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냐?”

“전 어떻게든 우 소저를 마교에서 빼낼 겁니다.”

악군과 화존은 주석하의 장담이 중원 무림 때문인지, 아니면 우설금과의 개인적인 친분 때문인지 혼란스러웠다.

백화령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래, 알았다. 언제 떠날 생각이냐?”

악군이 상황을 정리했다.

“여기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아직 네가 지키지 않은 일이 있다. 기억하느냐?”

예전에 주석하는 악군과 화존의 무공을 배우면서 화존의 제자와 비무하기로 약속했었다.

“기억합니다. 하지만…….”

주석하는 백화령을 돌아봤다. 현 시점에서 그와 백화령의 비무는 무의미하다.

모두가 이 점만은 공감한다. 물론 비무를 통해 백화령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긴 하지만…….

화존이 끼어들었다.

“주 공자, 내가 예전에 백변환영보와 화판답공을 가르쳐줬잖아?”

“네, 그렇습니다.”

“뭔가 하나 빠진 것 같지 않아?”

화존의 질문 의도를 알 수 없어 주석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백변환영보는 근접전에서 위력을 발휘하고 화판답공은 허공을 자유롭게 비상할 때 좋지. 하지만 둘 다 멀리 빨리 가고 싶을 때 활용하기는 어렵잖아?”화존은 보법이 아닌 경공을 지적하고 있었다. 당연히 주석하는 그런 용도에 적합한 경공을 알지 못했다.

“급하지 않으면 내가 쓸만한 경공을 알려줄게. 아마…… 악군도 네게 전수할 게 더 남았을걸? 그때는 급해서 제대로 못 배웠다며?”

갑자기 화존과 악군이 왜 그에게 무공을 전수하려는지 주석하는 알지 못했다. 어쨌든 무공을 전수해준다니 더없이 고마웠다. 그는 머리를 조아리며 감사를 표했다.

“며칠 더 머무르겠습니다.”

백화령의 안색이 확 밝아졌다.

다시 화존의 상대가 악군으로 넘어갔다.

“악군, 너도 이제 발 걷어치우지? 죽었다는데 뭘 아직도 청승을 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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