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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검천하-214화 (214/273)

214화 이가장 (3)

일순간 대나무 발 너머로 악군의 그림자가 정지했다.

그녀가 주석하와 대면하지 않으려는 이유가 과거 우경천에게서 받았던 마음의 상처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주석하는 알 수 없었다.

사실 그는 그 이유가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예전에 이곳을 찾았을 때 그는 악군과 화존에게 매우 좋은 감정을 얻었고, 그 때문에 마교칠왕이 이곳을 노린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만사를 제쳐두고 찾아왔다.

그에게 악군과 화존은 훌륭한 스승이었다. 비록 그들은 그를 정식 제자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했으나 아무려면 어떤가. 단지 호칭 문제일 뿐.

그때 헤어지던 날, 악군의 얼굴을 보고 싶었으나 그녀는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주석하는 내심 발이 치워지기만을 기대하고 있었다.

“후우, 어쩔 수 없나…….”

“무게 좀 그만 잡을래?”

“십여 년을 이어오던 내 고집을 깨야 하잖아.”

“신비주의 그거 별로 좋은 거 아니다? 만사 그런 식이니 있던 남자도 다 달아나지. 나였으면 첫날에 멱살 잡고 만리장성 쌓았어. 안 그러냐? 화령아?”백화령이 화들짝 놀라 주석하의 눈치를 봤다.

“하아, 알았어.”

마침내 악군이 고집을 거뒀다.

놀랍게도 중간에 쳐진 발이 저절로 말려 올라갔다.

아래부터 서서히 드러나는 악군의 자태는 주석하의 예상과 다르지 않았다.

거문고를 앞에 두고 하얀 옷을 입은 채 정좌를 한 단아한 모습이었다. 마치 수도하는 고승처럼 그녀는 맑고 정제된 기품을 은은하게 풍기고 있었다.

마침내 발이 모두 올라갔을 때 주석하는 눈을 떼지 못했다.

화존에 버금가는 아름다운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화존이 밝고 귀엽다면 악군은 보다 엄숙하고 고귀한 분위기랄까. 평소 그가 그렸던 모습과 아주 닮았다.

악군은 그를 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머, 얘가 그래도 남자라고 눈을 못 떼네?”

화존의 질책에 백화령이 킥킥대며 웃었다.

“하긴 그럴 만도 해. 그 당시에는 나랑 악군이랑 천향일화 이가흔이 무림 최고의 미녀였거든? 요즘 천상삼화? 흥! 그건 아무것도 아니야. 우리 인기가 훨씬 많았지.”화존이 과거 이야기를 풀었다.

주석하는 그녀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변치 않은 미모를 지닌 화존이나 악군을 보면 젊었을 때 얼마나 인기 있었을지 충분히 짐작 가능했다.

나아가 우설금의 놀라운 외모를 고려해보면 그 어머니 이가흔 역시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자, 이제 얼굴도 봤겠다, 내일부터 내가 천리비행공을 전수할 테니까 고생 좀 해. 악군도 준비해둔 음공이 있어. 그러니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하고 오늘 밤에는 푹 자도록 해라.”화존이 자리를 마무리했다.

밤이 늦었으니 잘 시간이다.

방안을 둘러보던 주석하는 난감한 상황에 빠졌다. 이곳 모옥은 좁은 데다 곁방이 없어서 달리 잘 곳이 없었다.

“그런데 저는 어디에서 잡니까?”

“저기!”

화존이 창밖을 가리켰다.

주석하의 입이 떡 벌어졌다. 물론 겨울이 아니니 밖에서 노숙하지 못할 환경은 아니지만 여기까지 와서 이슬 맞으면서 자기엔…….

“왜? 엄연히 남녀 유별하잖아.”

“어쩔 수 없죠.”

“이 사부랑 결혼하고 싶으면 밤에 덮쳐도 돼.”

실없는 농담에 주석하는 투덜대며 물러섰다.

그가 막 일어나려 할 때 악군이 만류했다.

“괜찮다. 밖에서 잘 수는 없으니 방 안에서 자도록 해라. 어차피 예의 별로 안 따지는 무림인 아니냐?”

화존이 그를 보면서 낄낄대며 웃었다.

“킥킥, 나야, 좋지. 야밤에 마음 내키면 내가 확 덮쳐버릴지도 몰라.”

“화존! 네가 밖에서 잘래?”

악군의 질책에 화존이 바로 입을 다물었다.

주석하는 그들과 멀찌감치 떨어진 구석에 이부자리를 폈다.

역시나 잠이 오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은 악군과 이가흔 그리고 우설금의 복잡한 인연 때문에 혼란스러웠다.

이가장을 방문한 우설금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그녀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했을까.

불존이 밝힌 우설금의 내력은 거짓이 아니니 이후는 그녀의 몫이다. 앞으로 우설금과 마교의 관계는 어떻게 변할까. 그녀는 과연 천마에게 복수할까.

주석하는 알지 못할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규칙적으로 들리는 화존과 악군의 숨소리에도 주석하는 잠이 들 수 없었다.

***

사흘 후, 우설금은 보은사로 돌아왔다.

축제가 끝난 사찰 경내는 적막이 감돌았다. 떠들썩했던 방문객과 객방을 차지하던 사람들이 썰물 빠지듯 사라지고 동자승만이 홀로 마당을 쓸고 있었다.

“오셨어요? 멀리 다녀오셨나 보네요.”

우설금을 발견한 동자승이 말을 걸어왔다.

우설금은 조용히 손을 모으고 합장해서 허리를 숙였다.

“부군 되시는 분은 어디 가셨어요? 함께 오지 않으셨어요?”

그녀와 주석하는 절에 머무는 동안 부부로 행세했었다. 동자승의 말에 아직 주석하가 돌아오지 않았음을 알았다.

우설금은 살짝 안면을 붉히고 방으로 들어갔다.

청산까지의 거리가 이가장보다 훨씬 멀지만 특별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돌아와야 정상이다. 그런데도 아직 오지 않았으니 예기치 않은 일이 생긴 걸까.

우설금은 주석하가 청산에서 마주쳤을 천라요희와 초혼천왕을 떠올렸다.

여의신단으로 내공이 급증한 주석하라면 그들을 처리하기 어렵지 않다. 그녀가 가늠하기에도 주석하의 무공은 최근 들어 어마어마하게 상승했으니까.

지금의 주석하는 그녀도 이길 수 없는 괴물이다.

그렇기에 주석하가 청산으로 간다고 했을 때 걱정하지 않았다. 예상대로라면 주석하는 절대 위험하지 않다.

“왜 늦을까…….”

우설금은 청산에서 주석하가 만났을 사람을 떠올렸다.

악군과 화존. 그 둘을 노리고 마교칠왕이 습격했으니, 악군과 화존을 만나야 한다. 물론 우설금은 악군과 화존을 본 적이 없다.

그들이 주석하에게 무공을 전수했고 꽤 가까운 사이란 정도만 안다.

“아……!”

문득 우설금은 한 여인을 떠올렸다. 화존의 제자라 했던가.

흑검문에서 만났던 천중화 백화령. 천상삼화의 일인이자 특별한 외모를 뽐냈던 그녀가 생각났다.

“백 소저도 청산에 있으려나?”

갑자기 마음이 불편해졌다. 어딘지 모르게 자신의 것을 빼앗긴 기분이다.

그런 느낌이 익숙지 않았기에 우설금은 급히 고개를 저어 백화령의 잔상을 떨쳐냈다.

어차피 자신은 마교인이기에 주석하와 어울리지 않는다. 이가장을 다녀오는 내내 미래를 고민했었다. 그리고 그 고민으로 마침내 결과를 얻었다.

그녀는 천마와 공존할 수 없다. 단지 그녀의 부모를 천마가 죽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천마가 속이는 바람에 그녀의 인생이 일그러졌다는 분노가 더해졌다. 사람을 그런 식으로 갖고 놀아서는 안 된다.

왜 그랬는지 천마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원수의 자식을 키워서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

결과적으로 그녀의 손으로 불존을 죽였으니 천마의 계획은 성공한 셈이었다.

앞으로도 천마의 바둑돌이 되어서 시키는 대로 움직일 수는 없었다. 천마의 꼭두각시가 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리라.

우설금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천마를…… 죽인다!”

그녀도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알면서도 해야 하는 일이 있다.

설사 실패하더라도, 오히려 그녀가 죽더라도 아쉽지 않다. 기껏해야 죽기밖에 더하겠는가. 지금 같은 삶이라면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다.

복수하다가 죽더라도 천마가 왜 그렇게 했는지, 왜 그녀의 인생에 개입했는지 그 해답 정도는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결심을 굳힌 우설금은 동자승에게 붓과 종이를 얻었다.

차분하게 먹을 갈고 우설금은 붓에 먹물을 찍어 종이에 글을 썼다.

주석하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태어나서 처음 써보는 편지이건만 글이 잘 나왔다.

절반쯤 썼을 때 눈물이 뚝 떨어져 종이를 적셨다. 그녀는 소매로 눈물을 닦은 후 계속 서신을 써나갔다.

쏟아지는 눈물을 훔치면서 간신히 서신을 끝낸 그녀는 봉투에 넣어 밀봉했다.

봉투 표면에 ‘주석하 친전’이라고 쓴 다음 마당을 쓰는 동자승을 불렀다.

“제 부군이 오면 이 서신을 전해주세요.”

“아미타불, 알겠습니다.”

동자승은 묻지 않고 서신을 받았다.

다시 방안에 홀로 남자 우설금은 한쪽에 개어둔 옷을 꺼냈다. 그녀가 항상 입던 붉은 궁장이다. 거기에 붉은 머리띠까지.

다시 단천마령으로 변신했다. 마교로 돌아가려면 단천마령으로 바뀌어야 하니까.

그녀는 지금까지 입었던 연푸른 궁장을 벗고 적색 궁장으로 갈아입었다. 번민에 싸였던 우설금은 사라지고 얼음장 같은 단천마령이 나타나 있었다.

“가자! 미련을 날리고.”

홍철산을 챙긴 우설금은 객방 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섰다.

흑귀와 백귀가 순식간에 나타나 그녀의 앞에 부복했다.

“십만대산으로 돌아간다.”

그녀의 지시를 두 사람이 반겼다.

우설금을 선두로 흑귀와 백귀의 모습이 사라졌다.

***

주석하가 보은사에 돌아왔을 때는 그로부터 이틀 뒤였다.

그동안 그는 악군과 화존에게서 새로운 무공을 배웠다.

물론 백화령과 함께였다. 백화령과의 비무는 실전 경험을 늘리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그도 백화령도 만족한 결과를 얻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새로 배운 경공을 시험했다. 화존의 천리비행공은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이 무공이 아니었다면 그는 이틀 정도 시간이 더 걸렸을 것이다.

벌컥-

주석하는 방문을 열었다.

방안에는 그가 남겨둔 짐 외에 우설금의 연하늘색 궁장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어디로 갔지?”

홍철산은 사라지고 연하늘 궁장이 이곳에 있으니 이가장을 다녀온 그녀가 잠시 자리를 비운 것처럼 보였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가슴을 메웠다.

불존을 죽인 이후 그녀는 적색 궁장을 입지 않았다. 그런데 다시 예전의 옷으로 돌아간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설마…… 홀로 마교로 간 건 아니겠지.”

다른 것은 그녀의 뜻대로 양보하더라도 그녀 홀로 천마를 찾아가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

불안해진 그는 객방 밖으로 나왔다.

마당을 쓸던 동자승이 급히 뛰어 왔다.

“시주,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동자승이 냉큼 달려가더니 서신 봉투를 하나 들고 왔다.

“여시주가 서신을 남겼습니다.”

서신을 받는 주석하의 손이 떨렸다. 평범한 일이라면 그녀가 서신을 남겼을 리가 없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장탄식 속에 주석하는 급히 서신을 뜯었다.

처음 보는 우설금의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 따뜻한 햇볕이 비치던 그 날

당신은 나를 사로잡았죠.

싱그러운 바람, 떠다니는 구름

나도 그들처럼 자유로워지고 싶었어.

- 눈을 뜨면 사라진 그대 모습에

하염없이 눈물만 흐르네.

밤하늘을 밝히는 달 속에는

언제부터인가 그대 모습이 담겼죠.

- 다른 세계에 떨어져 사는 우리는

이제 만날 수 없고

미래를 기약할 수도 없지만

마음은 언제나 함께하리니.

- 눈을 감아도

당신의 얼굴은 떠나지 않고

귀를 닫아도

당신의 목소리가 가슴에 들어와.

- 이번 생의 인연은 여기까지이고

다음 생에도 만날 가능성이 없지만

다시 만날 때까지 윤회를 거듭하며

당신을 기다리며 살아가리니.

서명도 없는 편지였다. 하지만 이 편지의 주인은 우설금이 확실했다.

가슴 가득 회한과 그리움이 밀려왔다.

“마교로 갔구나……, 생사를 걸고…….”

주석하의 손에서 서신이 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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