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구대문파 (1)
한동안 멍한 상태로 서신을 움켜쥐고 있던 주석하는 점점 냉정을 찾았다.
그는 우설금의 마음을 추정했다.
태어난 후 지금까지 마교에서 마교의 교리를 주입 받으며 살았던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복수였다.
부모를 죽인 반야불존을 죽이는 것만이 유일한 삶의 목표였다.
불존을 죽이면서 그 목표가 뒤집혔다. 이제는 불존이 아닌 천마가 원수로 돌변했다.
예전에도 그녀는 불존을 죽이려다 자신이 죽더라도 전혀 개의치 않는다고 했었다.
복수를 제외한 다른 삶은 무의미했으니까. 그런 그녀가 천마를 두려워할까? 복수하다 죽는 삶을 무서워할까.
“죽을 각오를 했구나.”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죽을 생각이 아니었다면 그에게 말하지 않고 이런 식으로 떠나지 않았을 테니까.
우설금은 강하다. 비록 지금 약한 내상을 입었더라도 마교에 도착할 때쯤이면 충분히 원상회복될 것이다.
그렇다고 그녀가 천마와 대등해질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우설금은 마교수호사령 가운데 네 번째 서열이다. 마교수호사령 중에도 최강이 아니다. 그런 그녀가 어떻게 천마를 감당할 수 있을까.
“달걀로 바위를 쳐도 이보다 나으려나…….”
천마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 알려진 바는 없다.
다만 무시무시하리란 추측뿐이다. 평소 천마를 옆에서 봤을 우설금이기에 나름대로 생각이 있겠지만 승산 없는 싸움이다.
무엇보다 두려운 것은…….
우설금의 향후 행적을 그리면서 마교를 떠올리던 주석하는 경련을 일으켰다.
천마가 두렵지는 않다. 정말 두려운 것은 바로 무한회귀공이다.
배교의 신물이라는 무한회귀공. 그를 지금 이 시대로 보낸 역천의 무공. 천마는 무한회귀공을 익히고 있다.
천마가 죽지 않으면, 어떤 식으로든 시간을 되돌려서 현 상황을 되돌릴 수 있다. 우설금의 배신을 없던 것으로 만들 수 있고 심지어 주석하 자신의 존재조차 완벽하게 지워버릴 수 있다.
“불존의 뜻이…… 이것이었구나.”
일찍이 불존은 그에게 배교의 신물을 제거하라는 부탁을 했었다.
무한회귀공이 존재하는 한 세상 만물은 천마의 바둑돌일 뿐이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그가 정파십존, 흑도팔군, 마교칠왕을 살해한 사건도 천마에게만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우설금의 배신도 같은 맥락이다.
시간을 되돌려서 없던 일로 만들면 간단하니까. 천마가 시간을 되돌린 다음 생애에서 그와 우설금은 다른 삶을 살게 되고, 어쩌면 서로에게 검을 겨누는 최악의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른다.
으드득-
주석하는 이를 악물며 주먹을 꽉 쥐었다.
다른 모든 사람을 꼭두각시로 만드는 천마를 용서할 수 없다.
이번 생을 다시 살면서 그는 남에게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의지로 영위하는 삶을 갈망했다. 지금까지 그렇게 살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천마의 손바닥 안이었다. 천마의 의지는 아니었더라도 천마는 관객석에서 무대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무대 위에는 그와 우설금이…… 또 강호를 누비는 수많은 영웅과 마두가 공연하고 있었다.
“젠장! 무슨 수를 쓰더라도 천마를 죽이고 무한회귀공을 없애야 한다!”
천마를 죽이는 일은, 천마에게 복수하는 일은 애초에 뇌군이 그를 이 시대로 보낸 목적이었다. 이렇게 흘러온 현실에 주석하는 실소를 터트렸다.
“뇌군의 의도대로 흘러가나…….”
씁쓸한 기분에 보은사 뜰을 가로질러 산문을 나설 때였다.
“흑검서생!”
사방에서 묵직한 사자후가 메아리쳤다.
한 사람이 내공을 실어 지른 함성이다.
그것이 마치 사방에서 들리는 것처럼 위압감을 준다. 그것만으로도 사자후의 주인이 얼마나 심후한 내력을 지녔는지 짐작할 수 있다.
주석하는 안면을 찡그리며 고개를 들었다.
우설금과 마교와 천마의 굴레에 빠져 있던 상념을 깨트린 일성이 어딘지 모르게 거슬렸다.
예전에 본 적이 있는 노인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무극천존. 바로 현 무림맹주. 무당파 출신으로 당금 무림에서 반야불존과 함께 최강고수라고 알려진 인물. 그런 자가 등장했다.
당연히 무극천존의 한 발 뒤에는 좌우로 이대 호법이 포진하고 있었다. 불호와 도호라 했던가. 도호는 그때 잘린 팔을 의수로 보완하고 있었다.
“어? 무림맹주가 웬일이래?”
주석하는 피식 비웃음을 던지며 흡사 동네 불량배처럼 삐딱한 눈으로 상대를 훑었다.
“이놈이! 감히!”
뒤에서 불호가 버럭 소리치며 나무랐다.
“큭큭, 불자가 입이 거칠군. 수양이 덜 됐어.”
예전 운중산에서 돌아오던 그때라면 그는 무극천존을 어려워했을지도 모른다. 자신감은 있었으나 어쨌든 상대는 무림맹주이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운중산에서의 그와 지금의 그는 천지개벽이 생각날 만큼 완전히 달라졌다.
여의신단 전과 후, 내공을 융합하기 전과 후는 설명할 수 없을 만큼 큰 차이가 있다.
그렇기에 이제는 무림 제일이라는 무극천존마저 까마득히 아래로 보였다. 그들이 뭐라 하건 왜 신경을 써야 하지?
솔직히 귀찮았다. 빨리 우설금을 뒤쫓아 가고 싶은 마음뿐이다.
“흑검서생! 하나만 묻겠다. 대답하라.”
무극천존이 묵직한 일성을 다시 발했다.
빨리 보내준다면 손해가 아니기에 주석하는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뭔데?”
“만사지존을 죽인 자가 네놈이냐? 벽로천에서 연등제가 있던 날 배를 침몰시켜 세가 가주를 몰살한 자가?”
“나를 의심하는 이유는?”
“현재 이 동네에 그런 일을 저지를 고수는 네놈이 유일하니까.”
무림맹주이면서도 그의 앞에서 과거처럼 체면을 차리지 않았다. 그들의 분노가 어떠한지 짐작할 수 있었다.
주석하는 담담하게 꾸짖었다.
“반야불존도 내가 죽였다며? 만사지존의 죽음 하나쯤 더 덮어씌운다고 양심의 가책을 느낄 당신들이 아니지.”
“묻는 말에나 대답해라.”
“좋을 대로 생각해!”
증거도 없는 사건을 굳이 시인할 이유는 없다.
“네놈은 오늘 이곳을 빠져나갈 수 없다.”
무극천존이 한쪽 손을 들었다.
그러자 그림자가 일렁거리더니 십여 명의 검수들이 등장했다.
그들을 쓱 훑어본 주석하의 눈에 유일하게 낯이 익은 인물이 있었다.
“무열?”
무당파 제자로 무극천존에게서 직접 사사했다는 태상자 무열이 그곳에 있었다. 중원사룡에 속해 있으니 그 무공 수준은 대충 짐작이 간다.
“흐흐! 주석하! 이날만을 기다렸다!”
“이날? 네놈이 날 기다릴 이유가 뭐가 있어?”
“그날 상춘원에서 있었던 네놈의 모욕을 잊을 수 없다!”
상춘원에서 내공을 겨룬 것? 그걸 모욕이라 할 수 있나? 무열이 먼저 그를 건드리려다 반대로 당했던 사건 아닌가.
문득 그날 백화령을 쳐다보던 무열의 뜨거운 눈빛이 기억났다.
“천중화 때문이냐?”
정곡을 찔린 듯 무열의 안색이 살짝 붉어졌다.
“갑자기 천중화가 왜 나와?”
“오, 그러셔? 천중화 지금 청산에 있는데? 거기나 가보시든가.”
“이익! 오늘 무당오행검수의 이름으로 네놈을 처단해주마!”
분노한 무열이 손에 든 검을 부들부들 떨었다.
무당오행검수(武當五行劍秀). 화산파의 화산매화검수처럼 젊은 청년으로 조직된 행동대다.
소림에 십팔나한진이 있다면 무당에는 오행태극진이 있다고 한다. 그 오행태극진을 구성하는 핵심 인물이 바로 오행검수다.
“큭큭, 오늘 못 돌아갈 녀석들이 많겠네.”
주석하는 비웃음을 던지며 나타난 자들의 면면을 쓱 훑었다.
이것이 전부인가?
그날 운중산에서는 무림맹의 무적멸사대가 왔으니 그때와 지금의 전력이 비슷하다.
그 당시에도 제대로 승부를 내지 못했으니 지금 이 전력만으로는 설사 주석하가 당시와 같은 무공 수준이라 할지라도 승산이 절반임을 무극천존도 알 것이다.
‘숨은 전력이 더 있겠군.’
신중한 무극천존이 겨우 이 전력으로 그를 위협하지는 않을 것이다.
또 누가 있을까? 정파십존은 사실상 궤멸 상태였다.
반야불존과 만사지존이 죽었기에 남은 자는 무극천존, 자하검존, 창궁무존, 화존 뿐이다. 이 가운데 창궁무존과 화존은 그의 편이라 무림맹주를 지지할 리 없으니 그렇다면 추가될 무력은 자하검존인가?
“이게 전부야?”
주석하가 빈정거리는 썩은 웃음을 무극천존에게 날렸다.
“흐흐, 그럴 리가.”
무극천존이 그를 노려보며 다시 한 손을 올렸다.
선장을 든 나이 많은 스님을 앞세운 일단의 무리가 나타났다. 무시무시한 압박감이 흘러나오는 것으로 보아 평범한 자들이 아니었다.
“이들은?”
“아미타불, 구대문파 장문인이외다.”
맨 앞에서 대답한 노승은 현 소림사 방장인 구천신승(九天神僧)이었고, 그 뒤로 무당파 장문인인 태을진인(太乙眞人), 아미파 장문인인 금정사태(金丁師太), 곤륜파 장문인인 천뢰신검(天雷神劍), 점창파 장문인인 낙월우사가 진을 치고 있었다.
구파 장문인만 모두 다섯이나 몰려왔다.
비록 그들은 정파십존의 위명에 가려 있으나, 장문인이라는 것만으로도 무공 수준을 짐작할 수 있었다. 사실상 정파십존 다섯이 몰려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내 몸값이 제법 높나 보네.”
“만사지존을 건드렸을 때 각오했어야 했다!”
구대문파 장문인들이 합류하자 적의 위세가 한층 높아졌다. 이제는 주석하도 상대를 경시하는 마음을 버렸다.
“무림 공적은 목을 내밀어라!”
무극천존이 대표로 소리쳤다.
장문인들이 몰려온 이유는 그가 무림 공적이기 때문이다. 주석하는 무림맹이 그를 그렇게 지목하든 말든 신경 쓸 생각이 없다.
지금 상황에서 무극천존은 패배하리란 생각을 아예 하지 않았다.
주석하가 아무리 무공이 강하더라도 구대문파 장문인들을 한꺼번에 상대할 수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으니.
정작 주석하는 설명할 수 없는 자신감을 불태웠다.
현재 그는 흑도팔군 다섯 사람의 내공을 융합했다. 구대문파 장문인 다섯이 내공을 합치더라도 그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거기에 무극천존이 추가로 합류한다고 해서 뒤집힐 가능성은 거의 없다.
“흐음, 맹주! 방향을 잘못 잡은 거 아니야? 지금 시국이 어떤 때인데……. 구대문파가 마교 때문에 궤멸했으니 마교부터 때려잡아야 하잖아?”
“네놈은 마교보다 더한 놈이다!”
“호오, 그래? 중원 무림의 안녕보다 정파의 자존심과 위세가 더 중요한가 봐?”
“헛소리 말아라!”
무극천존의 분노가 장내를 쩌렁쩌렁 울렸다.
사실상 무림맹 무력의 핵심이 모였으니 저들의 자신감이 이해된다. 다만 이곳에서 서로 양패구상의 타격을 입으면 마교가 더욱 날뛰게 될 텐데…….
주석하는 마교의 우려를 지웠다.
마교의 주력부대가 중원에 입성해서 여러 문파가 멸문하는 상황은 중요하지 않다. 마교의 핵심은 천마니까. 천마만 없애면 마교는 결국 지리멸렬할 것이다.
사실 마교칠왕도 남은 자는 셋뿐 아닌가. 정파십존이 현재 넷 남았고, 흑도팔군이 다섯 남았으니 전세가 불리한 것만은 아니다.
쓴웃음을 흘리고 있자니 무열이 지휘하는 무당의 오행태극진이 펼쳐졌다.
“무림공적! 주석하를 처단하라!”
주석하를 노려보던 무극천존과 구대문파 장문인들이 한발 물러섰다.
오행태극진은 모두 십팔 명의 검수로 구성된다. 오늘 진법을 지휘하는 자는 무열이다.
진의 한중간에서 점차 거세지는 압력을 정면으로 받으며 주석하는 무극천존을 노려보았다.
무극천존은 과연 이 싸움에서 승산이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가 보기에 열여덟 명의 오행검수는 생명을 부지할 수 없다. 단지 그의 내력 소모를 위해 먹이로 던져준 게 아닐까.
“잔인한 놈들…….”
무극천존과 구대문파 장문인을 향한 분노가 치솟았다.
대의? 그들은 대의가 아닌 자신들의 욕망을 위해 어린 후배의 목숨을 파리처럼 날려버리는 더러운 족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