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구대문파 (2)
우우우웅-
오행태극진의 위력이 몸으로 느껴진다.
과거에도 비슷한 경험을 했었다. 무적멸사대와 겨룰 때 이런 느낌을 받았다. 아마 우설금이 소림십팔나한진을 깨트릴 때도 비슷한 환경이었을 것이다.
무적멸사대는 독공으로 간단하게 끝냈었는데 오늘은 어떤 방법이 최적일까.
장문인의 명령을 받들어 불나방처럼 뛰어든 오행검수이지만, 동정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저들은 나름대로 사파를 멸한다는 사명을 품고 있을 것이기에, 거기에 걸맞은 죽음을 선사할 뿐이다.
“와라! 몇 초식만에 끝내줄까? 십 초식으로 내기할까?”
“헛소리! 수백 초로도 힘들 거다!”
터무니없는 주석하의 장담에 무열이 분노했다.
이놈은 대체 오행태극진을 물로 보는 걸까? 모두 십팔 명이니 아무리 녀석이 강하더라도 최소 열여덟 초식은 필요하지 않나?
그의 짜증을 간파한 듯 주석하가 빈정댔다.
“당연히 물로 보이지.”
“야! 이 미친놈아!”
상대를 자극한 주석하는 비릿한 미소를 머금으며 내력을 끌어올렸다.
과거와 달리 전신을 휘감는 내공의 감각이 시원하다. 온몸의 혈맥이 뚫리고 기운이 하늘을 찌르는 기분이다.
주석하에게 떠오르는 무공이 있었다.
흑검육식! 비록 마지막 초식은 깨달음이 부족하여 불가하다지만 도수가 보완한 나머지 다섯 초식은 충분히 쓸만하다. 당대를 누볐던 흑풍검신의 절기가 평범할 리 있을까.
오행태극진이 검진(劍陣)이기에 검공으로 상대해줄 생각이다.
우우웅-
내력을 주입받은 흑검소의 끝으로 한 자 길이의 검강이 투명하게 뻗었다.
과거에는 혼군의 내력을 운용하면 흑색 검강이 뻗었고, 염군의 내력을 운용하면 홍색의 검강이 뻗었었다.
내공이 융합된 지금은 투명해졌다. 그 이유를 알 수 없으나 주석하는 만족했다.
그를 둘러싸고 오행태극진을 형성한 오행검수의 안면에 공포가 드리워졌다.
그들도 검법을 익혔기에 검강의 위력을 안다. 검기를 넘어 검강의 경지는 아무나 쉽게 도달할 수 없다.
현 무림에서 자하검존이나 창궁무존을 비롯하여 극소수만이 도달한 검강의 경지다. 그런 무공을 주석하가 아무렇지도 않게 가볍게 펼치고 있으니 경외심과 질투심이 폭발했다.
무열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도 무리하면 검강을 선보일 수 있다. 다만 내력 소모가 극심해서 쉽게 펼칠 수 없을 뿐이다.
지금 오행태극진을 구성하는 열여덟 명은 모두 검기를 뻗을 수준이다. 검강을 뿌리는 자와 상대가 안 될 듯하지만, 그 차이는 검진의 정교함으로 충분히 메울 수 있다. 적어도 무열은 그렇다고 믿었다.
“진법을 가동하라! 최선을 다해 저놈을 해치운다!”
명령을 내린 무열이 가장 먼저 진식의 일부가 되어 보법을 밟았다.
주석하를 중심에 두고 검수들이 빙빙 돌았다. 그들의 움직임이 빨라질수록 압력이 가중했다.
구대문파 장문인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졌다. 듣던 대로 무당의 오행태극진은 위력이 대단했다. 그들은 오행태극진으로 주석하를 잡을 가능성을 계산했다.
다만 무극천존의 안색은 그리 밝지 않았다.
이곳에서 주석하와 겨뤄본 유일한 사람이 바로 그였다. 주석하를 오행태극진으로 제거할 수 있을까? 무적멸사대를 손쉽게 무너트렸던 주석하가 아니었던가.
‘쉽지는 않겠지.’
다만 무극천존은 다른 부분에 주목했다.
무적멸사대와 맞섰을 때 주석하는 동료 둘의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그때 주석하는 독공을 사용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독공을 사용하면 무림 공적임을 확실하게 증명하게 되니 오히려 나쁘지 않았다.
설사 자신의 판단이 틀렸더라도 십이 명의 오행검수는 주석하의 내력을 소모하고 희생될 것이다. 충분히 영예로운 죽음이자 주석하를 잡을 초석이다.
지친 주석하라면 구대문파 장문인이 어렵지 않게 처리할 것이다.
우우우웅-
검진이 용트림을 일으켰다. 검기가 조화를 이루면서 진법 내부에서 소용돌이가 발생했다.
주석하는 날카로운 눈으로 눈앞을 지나가는 오행검수에게 초점을 맞췄다.
그는 구주사은인 흑풍검신의 후예다. 오늘 그 위명을 다시 중원 천하에 날릴 것이다.
흑검소가 우아하게 선을 그리며 허공을 갈랐다. 단순하면서도 위력적인 검초가 펼쳐졌다. 바로 입문자를 위한 흑검육식의 첫 번째 초식이다.
따- 따- 땅-
흑검소의 검강이 오행검수의 검기와 부딪히며 파공음을 터트렸다. 첫 초식 교환은 무난했다.
검강에 위축되었던 오행검수들은 의외로 단조로운 주석하의 검초에 용기를 얻었다.
그들의 안도는 다음 초식이 시작된 순간 급변했다.
흑검육식의 두 번째 초식이 펼쳐졌다. 두 번째 초식부터는 실전에서 그 위력이 제대로 드러났다. 흑검소의 검강이 오행태극진의 압력을 찢었다.
푸아아악-
초식이 펼쳐지자마자 오행검수는 충격을 받았다. 그들의 합격진이 깨지면서 흑검소의 검강이 그들을 위협했다.
주석하는 흑검육식을 펼치면서 화존의 백변환영보를 가미했다. 현란한 보법이 뒷받침되자 흑검육식은 대단히 화려하고 강력한 검초로 탈바꿈했다.
“허억!”
첫 번째 초식에서 한층 발전한 두 번째 초식에 오행검수가 경악하는 순간 주석하는 물 흐르듯 다음 초식을 펼쳤다.
우우우웅-
검강이 격동을 일으키며 공간에 선을 그었다. 희대의 절초에 맞선 오행검수는 적의 공격에 휘말렸다.
살기가 물씬 풍기는 예리한 검강에 오행검수는 수비하기 급급했다. 그들의 진법은 이미 붕괴 직전이었다.
“자리를 지켜라!”
무열이 혼비백산한 동료를 다급하게 독려했으나 무너지기 시작한 오행태극진은 이미 수습 불가로 흐르고 있었다.
흑검육식은 네 번째 초식으로 이어졌다.
앞의 세 초식이 그나마 무난한 초식이었다면 뒤의 세 초식은 일대를 풍미한 최강의 검법이었다.
“으악!”
오행검수들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순식간에 서너 명이 검을 맞고 바닥을 나뒹굴었다.
검진이 깨진 상태에서 오행검수가 대응하기에는 흑검 육식의 절초는 너무 강력했다.
오행태극진이 제대로 힘도 써보지 못하고 와해되자 당황한 구대문파 장문인들의 의견이 분분했다.
“저, 저게 무슨 검법이오?”
“그, 글쎄요, 못 보던 검법입니다만.”
혼란과 경악 속에서 마침내 흑검육식의 다섯 번째 초식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 초식은 검강이 천하를 뒤덮을 듯 화려하고 육중했다. 허공에서 수십 개의 검강이 동시에 내리꽂히며 오행검수를 강타했다.
“으아악!”
오행검수는 무기력하게 쓰러졌다. 그들 대부분은 가슴과 팔다리에 자상을 입어 더는 공격이 불가능해졌다.
무열은 입을 쩍 벌린 채 얼이 빠져 있었다.
주석하가 선보인 강력한 검법이 대체 무엇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무당파의 최고 검법에 비견될 검법이 이 세상에 존재하다니!
이미 동료 대부분은 죽거나 상처를 입었고, 그나마 검을 든 자는 그를 포함해서 서넛에 불과했다. 단 일 초식에 무당파가 자랑하는 오행검수 십여 명이 몰살당한 셈이었다.
구파의 장문인들이 경악하는 가운데 무당파의 태을진인이 간신히 검법을 파악했다.
“저, 저것은 흑풍검신의 독문절기요! 오십여 년 전 불존과 함께 강호를 누볐던 희대의 검객말이오!”
이곳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태을진인만이 흑검육식을 알아봤다.
그는 젊었을 때 우연히 흑풍검신이 사파의 거마를 검으로 무력화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었다. 당시 검초가 워낙 인상적이었기에 수십 년이 흐른 지금도 뚜렷하게 기억에 남아 있었다.
그의 외침이 큰 반향을 불러왔다. 흑풍검신이 누구인지 기억하는 자는 없었으나 불존이라는 이름은 그들을 경동하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방금 본 흑검육식은 오행태극진을 깨트릴 만큼 위력적이었다.
“아아! 놈에게 절대 검법이 넘어가다니!”
구대문파 장문인 모두가 안타까워했다. 그들은 주석하와 흑풍검신이 어떤 관계인지에 대해선 관심이 없었다.
정작 주석하는 뜬금없이 신세를 한탄했다.
“젠장! 분하다! 십 초식으로 끝내려고 했는데 오 초식 만에 끝나다니!”
“미친놈…….”
“오행검수? 에이, 약해 빠졌어.”
빈정거리는 주석하의 태도에 모두가 얼이 빠졌다. 말도 안 되는 결과가 현실로 드러났다.
모두 열여덟 명이 구성했던 절진은 깨지고 그들 가운데 멀쩡한 자는 단 셋뿐이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만족스러운 성과에 주석하의 비웃음이 더욱 커졌다. 반면 오행검수의 자부심은 땅을 뚫고 들어갔다.
주석하의 눈에 멍한 표정의 무열이 들어왔다. 무열은 마치 귀신에 홀린 것처럼 정신이 없어 보였다.
“태상자! 너 때문에 일 초식이 더 필요해졌어.”
“으으으.”
무열은 자신의 손에 잡힌 검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무공을 익힌 이후 오늘처럼 막막한 적은 처음이었다.
주석하가 자신보다 강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차이가 조금이라고 여겼다. 오행태극진이라면 어렵지 않게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예상을 벗어났다. 상대는 그가 닿을 수 없는 아득한 곳에 있었다.
그제야 무열은 자신의 눈이 형편없음을 깨달았다. 주석하를 가까이하는 백화령을 질투하는 바람에 상대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무열은 천천히 무극천존을 바라봤다. 무극천존은 운중산에서도 주석하를 만났다고 했었는데……. 그런 사부가 주석하의 능력을 알지 못했을까.
‘설마…….’
갑자기 드는 의문. 오행검수는 적에게 던져진 미끼일 뿐이었나? 이 결과를 사부도 예상했을까.
무림맹주인 사부가 주석하의 정보를 제대로 몰랐을 리 없다.
갑자기 회의가 치밀었다. 그리고 그는 자포자기 상태로 검을 들었다.
“으아아아!”
무열은 최근에 익혔던 무당파의 최고 초식을 꺼냈다. 현재 상태에서 그나마 가장 가능성이 큰 수법! 최근에 무극천존에게서 사사한 태극무상검법이었다.
무열의 검이 들어오는 순간 주석하도 보고만 있지 않았다. 그의 손에서 빛보다 빠른 암천살검이 펼쳐졌다.
서걱-
흑검소의 검강이 무열의 가슴을 사선으로 그었다. 이미 심적으로 동요했던 무열은 주석하의 검초를 막을 수 없었다.
그가 펼친 태극무상검법도 중간에서 뚝 끊어졌다.
무열은 주석하를 노려보면서 가슴을 움켜잡았다. 가슴에서는 피가 분수처럼 치솟고 입에서는 선혈이 울컥 튀어나왔다.
“흐, 흑검서생…….”
뭔가를 말하려던 무열이 말을 채 잇지 못하고 쓰러졌다.
주석하는 실실 웃으며 건너편에서 구경 중인 구대문파 장문인에게 관심을 돌렸다.
“이제 당신들인가? 늙은 생강이 맵다고 보여줘야지?”
그의 도발에 장문인들의 노기가 폭발했다.
“이놈이! 그것도 뚫린 입이라고!”
다섯 장문인이 우르르 몰려나와 주석하를 포위했다.
그들을 훑어보던 주석하는 그날 소림에서의 일전을 떠올렸다. 소림의 오각주에게 포위되었을 때도 비슷한 느낌이었는데.
물론 그때는 우설금도 함께였다. 하지만 오늘은 혼자여도 질 것 같지 않다.
무당의 오행태극진은 그를 조금도 지치게 하지 못했다. 지금 그를 포위한 장문인들의 내력을 전부 합쳐도 그가 우월하다.
“무림공적 흑검서생은 듣거라! 오늘 그대를 정의의 이름으로 처단할 것이다!”
무당파 장문인 태을진인의 선전포고에 주석하를 포위했던 다른 장문인들이 포위망을 좁혀왔다.
이것들이 할 짓은 다 하고 덤비는데?
주석하는 그들의 움직임을 간파했다.
내력으로 압박하면서 포위망을 좁히는 것은 정상적인 무공 대결이 아니다. 게다가 그들은 무기도 소지하지 않았다. 이것은 무공 초식 대결이 아니라 내공 대결을 하겠다는 심산이다.
방금 주석하가 보인 화려한 보법과 검법 때문에 장문인들은 정상적인 대결로는 쉽지 않다고 결론을 내렸다.
구대문파 장문인들은 오랜 기간 무공을 수련해왔기에 누구보다 자신 있는 분야가 바로 내공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모두 다섯, 내공 대결이야말로 승리할 가능성이 가장 크다.
‘마다할 내가 아니지.’
내공이라면 주석하의 전문 아닌가. 내공이 너무 강해서 그도 시험해보고 싶었다. 과연 흑도팔군 다섯 기운이 융합된 내력이 얼마나 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