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화 구대문파 (4)
이미 죽음 직전에 이른 흑도팔군이었다.
그들 중 한 명이 무한회귀공을 익히고 회귀하면 어떻게 될까?
최소한 천마인 그가 회귀할 때와 비교해서 일갑자의 내공을 절약할 수 있다.
과거 언제로 회귀하더라도 무한회귀공을 익힌 천마 역시 미래의 지식을 그대로 기억하며 회귀할 테니까 손해 볼 일은 없다.
이번 생과 똑같이 진행하면 현재 상태 그대로 세월이 흘러갈 테니까. 그는 오히려 일갑자의 내공을 벌 수 있다.
반면 회귀한 흑도팔군 한 녀석은 일갑자의 내공을 잃었기에 사실상 무림에 과거처럼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다. 그 변화가 궁금하다. 녀석이 어떻게 헤쳐 갈지.
계획은 섰다. 그래서 천마는 무한회귀공을 무량뇌옥에 던져두었다.
그의 미끼를 예상대로 뇌군이 덥석 물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회귀가 일어났다.
그 회귀는 천마의 의도와는 판이했다.
천마는 뇌군이 직접 회귀하리라 예상했다. 뇌군이 대충 십 년 전으로 회귀해서 천마와 마교에 대항하리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회귀한 당사자는 뇌군이 아니었다. 흑검문 출신의 이름 없는 청년이었다. 주석하라고 했던가. 회귀 시점조차도 십 년이 아니었다. 불과 오 년이었다.
당연히 천마는 뇌군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뇌군을 비웃었다. 미래를 바꿀 유일한 기회를 그렇게 어이없이 사용하다니. 이것은 분명히 뇌군이 저지른 돌발적인 사고였다.
어쨌든 천마는 뇌군 덕분에 공력을 소모하지 않고 오 년 전으로 회귀했다. 최근 오 년은 중원을 침공했던 격동의 시기였기에 천마도 불평이 없었다.
이제 천마가 관심을 둔 바둑돌이 두 개로 늘었다.
하나는 그가 인생을 비틀어버린 우설금, 다른 하나는 뇌군이 비튼 회귀자인 주석하. 이 둘을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우설금은 마교수호사령이자 무공의 최강자다.
반면 주석하는 소문파 출신에 무공이 고작 이삼류 수준이다.
뇌군이 왜 이런 자를 선택했는지 하품이 날 지경이다. 주석하가 십만대산에서 죽었을 때 수준이 딱 그 정도였으니까. 오 년 전으로 회귀한다고 무엇이 달라질까.
이 변수로 인해 세상이 의도와 다르게 흘러간다면 다시 천마 본인이 회귀하면 된다.
과거를 지우고 세월을 뒤엎는 일은 간단하다. 내공 일갑자만 소모한다면. 그렇기에 걱정할 일이 없었다.
그런데 그 두 바둑돌이 신기하게도 접점을 만들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하지만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이전 생보다 더 빠르게 정파십존과 흑도팔군이 죽어 나갔다. 과거에는 천마인 그가 앞장서서 그들을 제거했었는데 이번 생에서는 놀랍게도 주석하란 놈이 손수 그들을 해치워주고 있었다.
그때쯤에야 천마는 주석하에게 일어난 일이 궁금했다.
주석하는 흑도팔군의 무공을 익히고 있었다. 무량뇌옥에서 무공을 전수했나? 그렇더라도 설명할 수 없는 일이 너무 많았다.
그래도 천마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바둑돌이 날뛰어 준다면 오히려 즐거운 일이다. 무료한 이 세월을 훨씬 흥미롭게 보낼 수 있으니까.
경고가 머리를 강타한 것은 마교의 강자인 마교칠왕의 죽음이었다.
이전 생에서는 마교칠왕은 희생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벌써 넷이나 죽어 나갔다. 그들의 죽음은 수상쩍기 짝이 없었다.
둘은 구대문파 장문인 연합에, 다른 둘은 흑도팔군에 의해. 묘하게도 그곳에 우설금과 주석하라는 두 바둑돌이 있었다.
마교칠왕이 죽든 말든 큰 타격은 아니라지만 계획에 없던 일의 발생은 신경 쓰였다.
특히 그 원인이 그가 놓은 바둑돌로 인한 것이었으니. 이제는 회귀를 서둘러야 할 때인가.
천마가 과거를 회상하면서 고민에 잠겨 있을 때였다.
“부르셨습니까?”
천마의 뒤에서 묵천마령이 허리를 깊이 숙이고 부복하고 있었다.
천마의 얼굴에서 고민이 사라지고 평소의 존엄한 표정이 드리워졌다.
“그대가 단천마령과 가장 가깝다지?”
“그렇습니다.”
묵천마령이 고개를 들지 못하고 대답했다.
“최근에 단천마령에게서 특이한 점은 없었나?”
“별다른 점은 없었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천마의 한숨이 길어졌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아니, 없다. 지금 단천마령에게서 총단으로 돌아온다는 전갈이 날아왔다. 앞으로 그녀의 동정을 살펴서 이상한 점이 있으면 보고하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가보도록.”
묵천마령이 사라지고 난 후 천마의 시선은 다시 십년유심홍으로 향했다.
예상에서 이탈한 느낌이 드는 지금이 어쩌면 최적의 순간일지도 모른다. 지금 무한회귀공으로 십 년을 돌려버린다면 안전하게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저 십년유심홍만 아니라면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저 영초만 보면 일갑자의 내공이 엄청 아깝다. 딱 한 달만 더 버티다가 회귀하면 일갑자의 손해를 막을 수 있다.
“한 달 안에…… 문제가 생기지는 않겠지.”
천마는 마음을 다독였다. 무한회귀공의 비밀은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으니 혼자서 위로하며 감내하는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절대자의 고독일지도 모른다.
***
고오오오-
내부의 기혈이 압박받으면서 혈맥이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태을진인은 터질 것 같은 압박감을 간신히 억누르고 내력을 끝까지 끌어올렸다. 이제는 한계치에 다다랐다.
전면에서 그를 노려보는 주석하가 정말 사람인지 아니면 괴물인지 의심스러웠다.
지금 태을진인이 뿜어내는 내공은 무려 구대문파 장문인 다섯 사람의 내력이다.
넉넉잡아도 이 내력의 합은 십갑자에 육박할 것이다. 물론 내력을 전하는 과정에서 손실이 있고 장문인들 개인이 행주를 쥐어짜듯 내력을 끝까지 짜내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현 무림 최강고수 다섯 사람의 내공을 합쳐 상대를 압박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어이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오히려 밀린다. 고통에 일그러진 자신과 달리 상대는 한결 여유롭게 그를 다루고 있었다.
태을진인은 온몸이 압박당해 꼼짝하기 어려웠다. 지금은 단지 구파 장문인의 내력을 기계적으로 밀어낼 뿐이다.
팽팽하던 내공 대결이 서서히 패배로 귀결되고 있었다.
“마, 말이 안 되잖아…….”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결과였다. 도저히 현실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크크큭!”
주석하의 입에서 가소롭다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제 본인들의 한계를 알았나? 이 세상에는 구대문파가 함부로 압박할 수 없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이제 깨달았는지 모르겠군.”
묵직한 음성이 깔렸다.
“이, 이게 어떻게 된…….”
태을진인은 말을 잇지 못했다. 패배는 확정적이다. 지금부터는 이 난관을 어떻게 마무리할지가 문제다.
우우우웅-
이대로 무너지면 그를 비롯한 구파 장문인들은 모두 주화입마에 빠져 폐인이 된다. 지금은 상대가 서서히 내력을 줄여주는 자비를 기대할 수밖에 없다.
태을진인은 숨 막히는 대결을 눈도 깜짝하지 않고 지켜보는 무극천존을 곁눈질했다.
‘천존, 이게 한계요. 이제 패배를 받아들여야겠소.’
태을진인은 무극천존에게 눈빛으로 의사를 전달했다.
그의 뜻을 읽은 것일까. 무극천존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아주 작은 움직임이었으나 태을진인은 그 뜻을 알아챘다. 계속하라고. 대체 무슨 속셈인가? 이 상황에서 어떻게 계속하라는 거지?
시간이 지체될수록 자신을 비롯한 구파 장문인들은 치명적인 내상을 입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계속하라니?
‘천존…… 대체 무엇을 노리는 거요?’
태을진인은 굳은 표정으로 다시 주석하에게 집중했다.
주석하는 태을진인을 노려보고 있었다.
물론 그도 내력이 한계에 이르긴 했다. 하지만 아직은 여유가 있고 조금 더 버틸 수 있는 상황이다.
마음먹는다면 순간적으로 모든 내력을 집중해서 이들에게 내상을 입히고 단번에 쓸어버릴 수 있는 여분의 내력이 남아 있다.
그 역시 지금 내공 대결의 출구를 고민하고 있었다. 승부는 결정 났으니 저들을 어떻게 단죄할 것인가만 남았다.
죽여버릴까, 아니면 살려줄까.
무려 구대문파 장문인 다섯 명을 상대로 이런 행복할 고민을 할 정도니 그의 내공은 사실상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고금 제일이었다.
그때 주석하는 태을진인과 무극천존의 눈빛 교환을 눈치챘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의도가 엿보였다.
그 순간!
주석하는 등 뒤에서 폭사하는 예리한 기운을 감지했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주석하는 순식간에 모든 내력을 쏟아부었다. 그의 장심에서 가공할 압력이 폭발했다.
콰아아앙!
그와 손을 마주했던 태을진인을 비롯하여 그 뒤로 네 명의 장문인들이 강한 충격에 휘말렸다.
“크으윽!”
거대한 충격파의 직격에 구파 장문인들은 태풍이 몰아치듯 뒤로 수십 장을 튕겨 나갔다.
이 단 한 번의 충격으로 그들은 혈맥이 수십 조각으로 끊어지고 일부는 파열되었으며 그동안 쌓았던 내공은 사실상 잿더미로 바뀌었다.
온몸 곳곳의 혈맥이 터지고 피부가 갈라져 핏물이 쏟아졌다. 생명의 위협은 없으나 사실상 무림인으로서의 생명은 끝이었다.
내공을 거의 잃은 치명적인 내상 때문에 평생을 고통 속에 지내야 할 것이다.
물론 지금 주석하의 관심은 구파 장문인이 아니었다.
등으로 엄습한 예기를 간파한 주석하는 구파 장문인들을 한 방에 날리고 몸을 틀었다.
그가 몸을 회전하는 순간 장검으로 일격을 가하는 자하검존이 보였다. 무시무시한 검강이 그의 정수리를 가격하고 있었다.
흑검소로 막을 시간이 없었다. 그가 의식하기도 전에 백변환영보와 화판답공이 시전됐다.
서걱-
아슬아슬하게 그의 머리카락이 뭉텅 잘려나갔다.
“이놈이!”
놀란 것은 그만이 아니라 자하검존도 마찬가지였다. 절대 피할 수 없는 일격이었건만 그 최후의 절초가 빗나갔다.
물론 자하검존은 이 일격이 실패했을 때를 대비하여 후속 초식을 당연히 계산에 넣고 있었다.
휘익-
허공을 선회한 검강이 빛살보다 빠르게 그의 목을 노리고 들어왔다.
연거푸 순순히 당하고만 있을 주석하가 아니었다.
흑검소가 자하검존의 검초를 마중했다. 흑검육식의 다섯 번째 초식이 화려하게 펼쳐졌다.
챙! 채챙!
흑검소와 자하검존의 검이 부딪혀 격렬한 불꽃을 일으켰다. 깨진 검강의 파편이 사방으로 비산하고 충격파가 주변을 뒤흔들었다.
자하검존의 놀라움은 극에 달했다.
원래의 계획은 내공 대결에 정신이 팔린 주석하를 기습하는 것이었다.
내공 대결 상황에서 타인의 간섭을 받으면 내력이 역류하여 주화입마에 빠진다. 물론 주석하뿐 아니라 상대방인 구파 장문인도 희생해야 하는 작전이다.
어차피 무극천존과 자하검존에게 구파 장문인은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보다 주석하를 끝장내는 것이 더욱 중요했다.
막상막하의 내공 대결이라면 주석하는 절대 이 기습을 피할 도리가 없다.
강호 도의상 문제가 있을지라도 무극천존과 자하검존의 계획은 완벽했다. 설사 무공의 신이라 해도 절대 빠져나올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주석하가 살아남았다! 아니 살아남은 정도가 아니라 구파 장문인을 대파하고 자하검존에게 역습을 취했다!
“이게 어찌!”
자하검존의 경악성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암천살검이 빛살처럼 그를 노리고 뿌려졌다.
“허억!”
자하검존은 재빨리 방어 자세를 취했다. 그를 한발 물러서게 한 주석하의 신형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자하검존!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네놈은 이 세상에서 하직할 것이다!”
주석하의 신형이 자하검존을 따라붙었다.
암천살검의 마지막 다섯 번째 초식이 펼쳐졌다.
검이 사라졌다가 눈앞에서 나타나는 가공할 속도! 상상초월의 쾌검이 펼쳐졌다.
전력을 다한 쾌속무비한 공격에 자하검존 또한 최고의 절초로 방어에 들어갔다.
콰직!
놀랍게도 주석하의 내력이 실린 흑검소가 자하검존의 검을 토막 냈다.
후우웅-
암천살검은 과연 빠르고 무서웠다. 검이 토막 난 자하검존은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손발이 뒤엉킨 자하검존은 피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절망에 사로잡혔다.
검법의 우위는 무의미했다. 무식하게 내공으로 밀고 들어와 검을 부러트린 저런 녀석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넌 끝이다!”
주석하의 사형선고가 내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