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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검천하-219화 (219/273)

219화 사부와 제자 (1)

승부가 되리란 예측은 오산이었다.

암천살검의 무시무시한 기세를 막을 재간이 없자 자하검존은 눈을 감고 말았다.

제갈휘가 벽로천에서 목숨을 잃었다더니 그도 따라갈 모양이다.

‘한평생 친구 아니랄까 봐…….’

공간을 지우며 날아오는 암천살검이었건만 죽음을 눈앞에 둔 자하검존의 눈에는 그 시간이 억겁과 같았다.

그 순간 눈앞에 검광이 번쩍였다.

챙-

암천살검이 빗나가며 자하검존의 가슴을 쭉 그었다. 애초의 목표 지점을 스쳐 지나갔어도 그 충격은 만만치 않았다. 급소를 피했으나 가슴팍에 뼈가 보일 만큼 깊은 자상을 입었다.

“오호?”

주석하는 흑검소를 쳐낸 상대에게 눈을 돌렸다.

무극천존. 무림맹주인 그가 자하검존의 위기를 두고 보지 못하고 전장에 뛰어든 것이다.

주석하는 쓴웃음을 머금고 무극천존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렇지, 맹주도 끼어들어야 흥이 나는 법! 그럴 줄 알았다!”

구대문파 장문인들과 내공 대결을 벌일 때 자하검존이 기습했다. 그가 구파 장문인과 내공 차이가 크지 않았다면 자하검존의 기습을 막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비열한 행위를 나무라기는커녕 오히려 두둔하듯 도운 무극천존의 행위가 가소로웠다.

그렇다. 정파가 정파한 것 아닌가. 저들은 아무리 비열한 행위라도 무림 정의나 대의란 명문으로 무마해왔으니까.

지금 자하검존이나 무극천존의 행위도 전혀 새로울 것이 아니다.

이미 구대문파 장문인들은 산송장이나 마찬가지고 자하검존도 죽을 정도는 아니어도 온전치 않다. 남은 자는 무극천존과 이대호법에 불과하니 오히려 홀가분했다.

“끼어들 때는 그만한 각오를 했겠지?”

탓-

주석하의 신형이 빛처럼 무극천존에게 접근했다.

그 순간 무극천존이 뒤로 물러나고 마치 수없이 연습한 것처럼 이대호법이 그를 가로막았다. 불호의 선장과 도호의 불진이 주석하의 시야를 채웠다.

과거라면 공격을 멈추고 상대의 공세를 가늠했겠지만 지금의 주석하는 주저함이 없었다. 이제 불호와 도호 수준으로는 그를 어찌할 수 없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응징뿐이다!

주석하는 번개처럼 이대호법을 따라붙으며 주먹을 내질렀다.

혼천십이권!

혼군의 무적 권법이 펼쳐졌다.

콰앙!

주석하의 일 권은 앞을 막은 선장을 뚫고 불호의 가슴을 직격했다.

콰지직-

선장이 부서졌다. 선장만이 아니었다. 그의 가공할 힘을 견디지 못한 불호의 가슴팍에 구멍이 뻥 뚫렸다.

불호가 누구인가? 무림맹주를 지키는 호법 아니던가. 그런 고수를 단 일격으로 무참하게 박살 내다니! 주석하의 무위가 얼마나 상승했는지 알려주는 증거였다.

불호는 비명을 지르지도 못하고 세상을 하직했다. 가슴이 뚫린 그는 실 끊어진 연처럼 날아가 절간 기둥에 처박혔다.

우지직-

기둥이 무너지며 절간이 쓰러졌다.

“으아아! 이놈이!”

동료의 죽음에 눈에 뵈는 것이 없어진 도호가 불진으로 주석하의 주먹을 휘감았다.

주석하의 손에서 투명한 수강(手罡)이 뻗었다. 이번에 새로 배운 화존의 절기 백옥수였다.

마치 손으로 암기를 뿌리는 것처럼 수강이 그의 손끝을 벗어나 불진을 잘랐다.

서걱-

도호는 경악해서 날아오는 수강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불진마저 망가진 상태에서 백옥수를 막을 재간이 없었다.

푸푹! 푹!

검강이 가슴을 뚫는 것처럼 수강이 가슴팍을 뚫었다.

일반 수강은 손끝에서 일정 거리 이상 뻗어 나갈 수 없다. 그런데 화존의 수강은 다르다. 마치 암기처럼 허공에 뿌릴 수 있기에 그 위력이 수 배나 증폭된다.

더구나 고금제일의 내공이 실린 수강의 파편이라면 이를 막을 자는 아무도 없다.

도호마저 일 초식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참사에 무극천존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 무공은…….”

“백옥수!”

“화, 화존의 절기를…….”

무극천존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백옥수! 화판답공과 쌍벽을 이루는 화존의 절기!

주석하가 흑도팔군의 절기를 이어받은 것까지는 어떻게든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그마저도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지만.

그런데 정파인인 화존의 절기라니. 화판답공을 펼친다고 들었을 때 귀를 의심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백옥수까지!

“네놈은 대체 화존과 무슨 관계냐? 설마 화존을 위협해서 절기를 빼앗은 거냐?”

무극천존의 어이없는 질문에 주석하는 한바탕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 생각하는 게 고작 그런 거야? 내가 화존을 사부로 삼은 게 언제인데. 화존 사부는 너처럼 정파, 사파라는 사문에 얽매일 만큼 고리타분하지 않아.”무극천존은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그가 살아왔던 세상의 논리로는 설명되지 않는 현상이었으니까.

주석하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힘껏 발을 굴렀다.

쿵!

강한 진각에 땅이 흔들리며 바닥에 깔린 돌판이 쩍쩍 갈라졌다.

“지금 그런 고민할 때가 아닐 텐데? 이제 또 누가 있지?”

무극천존은 다급하게 주변을 돌아봤다. 놀랍게도 아무도 없었다.

제갈휘의 복수를 위해 이곳으로 급히 오면서 이런 결과를 상상조차 한 적이 없었다.

무림맹주인 자신과, 구대문파 장문인 다섯, 이대호법에 무당오행검수, 거기에 자하검존까지 동원했다. 그런데 그들 모두 제대로 힘을 써보지 못하고 당했다.

예전에 운중산에서 만났을 때는 이렇게까지 괴물이 아니었다. 그때와 비교해서 지금은 가늠하기 불가능할 만큼 강해졌다.

“어떻게 된 놈이…….”

“당신이 나를 제대로 모르고 있는 것뿐이야.”

주석하는 음산한 미소를 머금으며 다시 한발 앞으로 내디뎠다.

쿵!

땅이 울리고 죽음의 사자가 다가온다. 한걸음, 한걸음에 목을 죄는 공포가 치솟는다.

무극천존은 인생의 마지막이 눈앞에 도래했음을 깨달았다.

“후우우!”

무극천존은 깊은숨을 내뱉었다.

지금은 기가 눌려 제대로 서 있기조차 버거운 상황이었다. 무림맹주가 이런 꼴이라니!

무림맹주가 된 후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그동안 천하를 오시하며 상대를 억눌렀던 삶이 하루아침에 뒤집혔다.

그는 검을 쥔 손을 떨면서 최강의 한 수를 떠올렸다. 어차피 상대는 괴물이고 평범한 공격은 무의미했다.

마지막 공격조차 시도하지 못하고 수치스러운 죽음을 맞을 것인가.

무극천존은 태극무상검법을 떠올렸다.

제자인 무열이 이 검법을 꺼냈지만 전혀 효과를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무열이 아니다.

이 검법의 깊이에서 무열은 그의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 그가 펼치는 초식은 무열의 것과 다르다. 아니 달라야만 한다.

“무림맹의 이름으로 공적을 처단하겠다!”

무극천존의 검이 주석하에게 뿌려졌다. 심후한 내력이 실린 검은 무려 한 자 길이의 검강을 뿜어냈다.

그 중후함은 지금까지 주석하가 경험한 어떤 검법보다 우위에 있었다.

“과연 무림맹주답다!”

주석하도 찬사를 금치 못했다. 과거의 그였다면 상대하기 정말 까다로웠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주석하는 날아오는 검을 피하지 않고 쌍장을 앞으로 쭉 뻗었다.

고오오오-

극한빙백신공이 전면으로 뿌려졌다. 천지를 하얗게 탈색하는 극한의 신공이 무극천존을 감쌌다.

콰아아앙-

검강과 만난 극한빙백신공이 산산이 깨지며 충격파가 터져나갔다.

당연히 여기까지는 주석하도 예상했던 결과였다. 이 여파로 그의 장력만 깨진 게 아니라 무극천존의 검강 또한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장력은 깨졌으나 그 여진은 남았다. 주변의 대기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갑작스럽게 침습하는 한기에 무극천존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전력을 다한 일격과 그 충격에 내공이 일순간 흐트러졌고, 그 틈을 극한빙백신공은 놓치지 않았다. 빙군이 흑도팔군의 일인이었던 이유가 당연히 존재했다.

“으으으.”

무극천존은 신음을 터트렸다. 살을 에는 추위와 이에 반응해서 수축하는 혈맥. 내력의 움직임이 일순간 막혔다.

점차 온몸이 굳었다. 이제는 팔다리를 움직이기도 쉽지 않다. 아니 호흡조차 버거웠다.

찬 기운이 폐를 가득 채우고 급기야 온몸이 얼음장처럼 변했다.

당황한 무극천존 앞에서 주석하가 비릿한 표정을 지으며 놀렸다.

“추워? 그러면 이번에는 극양염천신공으로 데워줄까?”

“으으으.”

입이 움직이지 않으니 말이 나오지 않는다. 무극천존의 긴 수염에는 하얀 서리가 대롱대롱

매달렸다.

사실상 무공을 쓰기 힘들어진 무극천존은 저항을 포기했다.

“웬만하면 무림맹주는 살려둘 생각이었어. 그래도 중원이 마교와 싸우려면 무림맹이 필요하니까. 그런데 네놈들 하는 짓거리를 보니 차라리 없는 게 더 바람직하겠더라고.”

“으으으.”

무극천존은 할 말이 많은 듯했으나 얼어붙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너희들의 가장 큰 실책은 자꾸 나를 건드렸다는 거야. 나는 애초에 너희를 신경 쓸 생각이 없었거든. 나는 백화루주가 되어 기녀 백 명을 쭉 세우고…… 아, 이건 아니고, 하여튼 그런 삶을 살려고 했었는데 네놈들이 자꾸 나를 건드리지 뭐야. 인과응보라 생각해. 남을 건드리면 자기도 그만큼 당하는 게 삶의 기본 아닌가.”주석하는 손을 앞으로 뻗어 무극천존의 코에 맺힌 고드름을 뚝 떼어냈다.

“춥나 보네? 따뜻하게 데워줄게. 나의 마지막 배려니까 사양하지 말라고.”

주석하의 오른손이 빨갛게 물들었다.

무극천존의 눈동자가 공포에 질렸다. 극양염천신공을 알아본 것이다. 하지만 그는 어떤 반격도 할 수 없었다.

주석하는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붉은 기운이 무극천존에게 확 번졌다.

화르르-

순식간에 시뻘건 불꽃이 타올라 육신을 태웠다.

“으아악!”

무극천존은 잿더미로 변했다. 일대를 풍미한 무림맹주의 비참한 최후였다.

정파가 완전히 무너졌다. 그 핵심이었던 무림맹주와 만사지존이 죽음을 맞이했으니 앞으로 정파를 이끌 인물이 없다.

정파십존 가운데 살아남은 자는 화존과 무존이 전부다. 그들은 주석하와 친하고 정파라는 고리타분한 이념에 얽매이지 않으니 앞으로 정파는 달라질 것이다.

자하검존은? 사실상 무력화된 자하검존은?

주석하는 무극천존의 최후를 지켜본 후 천천히 몸을 돌렸다.

가슴에 깊은 자상을 입은 자하검존이 뜰 한쪽 구석에 주저앉아 있었다. 입이 쩍 벌어진 표정이 어지간히 충격을 받은 듯했다. 가슴팍이 흥건하게 피로 물들었으니 지금 당장은 힘을 쓰기 어려워 보였다.

주석하는 음산한 미소를 떠올리며 목표물을 바꿨다.

“자하검존! 의리가 있다면 당신도 무극천존을 따라가야겠지?”

자하검존은 안색이 창백해진 채 주석하를 노려보았다.

“자네…… 볼 때마다 끝없이 무공이 성장하다니!”

“과찬이야. 넌 세상에 안녕을 고할 때가 됐다.”

“네놈 하나 때문에 정파가 무너지다니! 그렇게 대단한 놈일 줄은……. 그런데 설마…… 설마 네놈이 회귀자였나?”

죽음을 문턱에 두고 자하검존은 오래전 가적성이 알렸던 마교의 비밀을 떠올렸다. 설마 했었는데 지금 이 순간 주석하의 비밀을 캤다는 느낌이 확 들었다.

주석하는 음산한 미소를 띠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알았나? 예전에 눈치챈 줄 알았더니.”

“그, 그랬었군.”

그가 회귀자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의 강함을 단순하게 회귀자란 사실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그렇다면 미래를 알고 있겠군. 앞으로 중원은 어떻게 되지?”

“중원이 궁금한가 아니면 정파가 궁금한가?”

자하검존은 그를 노려보면서 다시 묻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는 후회가 가득했다. 회귀자인줄 알았더라면 진작 죽여 버려야 했다고 후회해봐야 돌이킬 수 없다.

미래는 주석하도 모른다. 그의 전생은 지금과 달랐으니까.

그는 흑검소를 들어 자하검존을 겨눴다.

“안 돼!”

그때 다급하게 그와 자하검존 사이를 뛰어드는 한 인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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