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화 사부와 제자 (2)
“또 당신이야?”
주석하의 안면이 일그러졌다.
유비연이었다.
그녀가 자하검존을 감싼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새삼 놀랄 일은 아니었으나, 어떻게 이렇게 때에 맞춰 딱 등장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유비연이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죽이면 안 된다는 뜻이다.
예전에 그녀의 도움을 받았었고, 그녀를 통해 정파와 사파를 더 확실하게 경험할 수 있었다.
화산에서 정파 연합이 마교의 습격을 받았다고 들었을 때, 그녀의 생사를 염려했었다. 그에게 유비연은 내칠 수도 가까이할 수도 없는 묘한 존재였다.
그녀와 대립하면서도 그 심정을 이해하기에 주석하는 그녀를 함부로 할 수 없었다.
“아직 살아있었군.”
“당신도요.”
유비연은 눈을 크게 뜨고 주석하를 빤히 쳐다봤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여인의 눈물이 영향을 미칠 정도는 아니지만, 주석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와 얽힌 여러 인연을 쉽게 내칠 수 없다. 흑검문에는 그녀를 기다리는 명아도 있으니까. 명아에게 그녀를 죽였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나.
“어디부터 봤는지 모르겠지만 오늘 당신 사부는 너무 나갔어. 내력 대결 중에 상대를 공격하면 십중팔구 죽거나 주화입마에 빠질 수밖에 없지. 그런 비겁한 짓을 한 사람이야.”
“알아요!”
“그런데도 그를 감싸나?”
“사부이니까요.”
유비연이 똑 부러지게 대답했다.
그는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당신의 사부는 절대 당신을 아끼고 위해주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다시 반복해봐야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기에 주석하는 입을 다물었다.
지금은 그런 충고만으로는 그녀의 마음을 되돌릴 수 없다.
“난 결정했다. 자하검존은 오늘 살아서 돌아갈 수 없다!”
“정말 안돼요!”
유비연도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물론 주석하는 그녀에게 끌려 다닐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당신은 나를 막지 못해. 당신을 제압하고 그를 죽여도 충분하다.”
“정말…… 그러지 마세요.”
유비연이 울음 섞인 목소리로 하소연했다.
그때 뒤에 주저앉아 있던 자하검존이 천천히 일어났다. 그의 행동은 유비연에게 가려 있어 주석하는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간신히 검으로 지탱하며 몸을 세운 자하검존이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검으로 유비연의 목을 겨눴다.
“주석하!”
갑자기 돌변한 상황에 주석하와 유비연 모두 놀랐다.
특히 유비연은 사부가 자신의 목에 검을 밀어 넣자 혼비백산했다. 무슨 일인지 짐작조차 못 한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자하검존을 돌아봤다.
주석하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자하검존! 무슨 일이지?”
“네놈이 움직이면 비연이를 죽여버리겠다!”
유비연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녀는 인질이었다. 자하검존이 목숨을 담보한 인질.
“끝까지 더럽게 노는구나. 그런다고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나?”
“흐흐, 네놈만 그대로 있으면 가능하지.”
자하검존이 태연한 목소리로 낄낄대며 웃었다.
자하검존에게 실망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지만 주석하는 오늘 진정으로 실망했다. 제자의 목숨을 걸고 살려고 발버둥 치는 처절한 행태에 쓴웃음이 났다.
유비연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자하검존과 그녀의 사이가 틀어지긴 했으나 이렇게까지 어긋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다시 강호가 안정되면 그녀는 사부의 총애를 받던 시절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그런데 제자의 목숨을 이토록 가볍게 여기는 사부라니. 본인을 구하기 위해 제자를 희생하는 사부라니. 자하검존이 정말 이런 소인배였던가.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믿고 따랐던 사부였기에 그 배신감은 유비연을 순식간에 무너트렸다. 그녀의 머릿속이 텅 비었다.
“자하검존! 졸렬한 짓은 그만두지? 무슨 짓을 해도 난 네놈을 죽일 거니까. 네놈이 과연 도망칠 수 있을까?”
유비연을 인질로 데려가 봐야 주석하를 따돌릴 수 없다.
주석하가 볼 때 자하검존은 이미 독 안에 든 쥐였다. 살려고 발버둥치지만 절대 벗어나지 못하는.
자하검존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감돌았다.
“과연 그럴까?”
그 순간 자하검존의 검이 유비연의 등에 박혔다.
푹!
뜻밖의 행동에 주석하도 유비연도 반응할 수 없었다.
“당장 치료하지 않으면 비연은 죽는다! 네놈이 나를 추격할 시간이 있을까?”
자하검존이 유비연을 내팽개치고는 바로 몸을 틀어 달아났다. 얼마나 다급했던지 유비연의 등에 박힌 검조차 회수하지 않고 빈손으로 도망쳤다.
힘이 빠진 유비연은 고통으로 얼굴이 일그러진 채 그대로 엎어졌다. 그녀의 등에는 검이 꽂혔고 흘러나오는 핏물이 옷을 흠뻑 적셨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주석하는 곧장 자하검존을 추적할 수 없었다.
멀리 사라지는 자하검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도 경공을 사용해서 도망칠 여력을 남겨두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땅에 엎어진 채 유비연이 괴로운 신음을 터트리며 꿈틀거렸다.
검에 찔려 아프기 때문이 아니다. 사부의 배신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 유비연은 삶이 무너지는 고통을 겪고 있었다.
그 고통을 본 순간 주석하는 행동 방향을 정했다.
유비연을 구하기보다 자하검존을 먼저 죽일 것이다. 제자의 믿음을 저버린 자하검존의 행위를 용서할 수 없다.
“힘내요! 죽으면 안 돼!”
주석하는 유비연에게 고함치면서 신형을 날렸다. 이번에 화존에게서 배운 절정의 경공, 천리비행공이 펼쳐졌다.
자하검존이 빠르다고 하지만 주석하의 속도와 비교할 수는 없다.
이미 과다한 부상으로 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데다 천리비행공이 워낙 탁월한 경공이기 때문이다.
불과 일각이 채 되지 않아 주석하는 자하검존을 따라잡았다.
앞이 막힌 자하검존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도망을 포기했다.
“어헉! 천리비행공?”
“아직 눈은 살아있네?”
“화존 이년이 감히 사파인에게 절기를 전수하다니!”
무림을 정파와 사파로 이분하는 못된 버릇은 여전했다.
“내가 배우면 안 될 것 있어?”
“화존은 젊었을 때 당시 정파 최고로 촉망받던 후기지수를 거부해서 정파를 나락으로 빠트렸다. 이번에는 감히 사파에게 무공을 전수해? 그년은 정파가 아니야!”화존에게도 흥미로운 과거 애정사가 있는 모양이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화존에게…… 아니 악군에게 물어봐야겠다.
“흐흐, 네놈이 비연을 버리는구나! 비연은 네놈 때문에 곧 죽을 거다!”
“나 때문이 아니라 당신 때문이야. 당신처럼 못난 사부를 두는 바람에.”
“뭔 소리냐! 죽여라!”
자하검존이 눈을 감고 가슴을 내밀었다.
얼핏 보면 꽤 영웅적인 장면이긴 한데, 평소 자하검존의 행실을 익히 아는 그는 당연히 그 이면의 속셈을 눈치챘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목숨을 구할 수 없으니 오히려 반대로 치고 나온 것이다.
주석하는 피식 미소를 지으며 흑검소를 들었다.
“원한다면야!”
푹!
흑검소의 검강이 자하검존의 가슴에 박혔다.
“크윽! 이, 이게 아닌데…….”
자하검존이 고통으로 가슴을 움켜잡으며 그를 노려봤다. 보통 이럴 때는 기개가 대단하니 이번만은 살려주겠다는 식으로 흘러야 하는 법 아닌가?
주석하는 재차 흑검소를 아래로 쭉 그었다.
피가 폭포수처럼 뿜어졌다.
자하검존이 눈을 부릅뜬 채 천천히 주저앉았다. 그는 죽으면서도 눈을 감지 못했다.
어차피 이렇게 죽을 것을. 자하검존은 대체 삶에서 무엇을 추구했는지 알 수 없는 인물이다.
자하검존을 바라보며 잠시 감상에 젖었던 주석하는 유비연이 떠오르자 화들짝 놀랐다.
유비연을 살려야 한다. 그녀를 이런 식으로 잃고 싶진 않았다.
물론 사부에게 배신당한 그녀는 목숨을 부지하더라도 예전처럼 밝고 정의롭게 살아갈 수 없겠지만.
***
의식을 잃은 유비연을 안고 온 동네를 헤맨 끝에 간신히 의원을 찾았다.
이 일대에서는 꽤 이름 있는 의원이라는데 주석하는 그런 세세한 내용은 관심 밖이었다.
검을 뽑고 응급처치를 마친 유비연은 이틀이나 정신을 잃고 있다가, 사흘째 되는 날에야 간신히 눈을 떴다. 그동안 주석하는 그녀를 떠날 수 없었다.
“주 공자, 사부님은?”
“내가 죽였습니다.”
주석하는 대답을 회피하지 않았다.
충격을 받은 듯 유비연은 한동안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녀의 뺨 위로 눈물이 조용히 흘러내렸다.
그녀도 혈혈단신이라 했던가.
부모를 잃고 화산파에 들어온 그녀를 가장 가까이에서 보살피며 이끌어주었던 자가 바로 자하검존이었다.
강호의 유명인이자 명성이 높은 자하검존을 사부로 모신다는 자부심을 품고 지금까지 십수 년을 살아왔을 것이다.
그런 삶이 오늘로 완전히 무너졌다.
“지금은 고민할 때가 아닙니다. 얼른 완쾌해야지요.”
“그래요. 당신을 탓할 생각은 없어요.”
주석하는 사부를 죽인 원수다. 관례대로라면 그녀는 주석하를 죽여 원수를 갚아야 한다. 하지만…….
유비연은 주석하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주석하는 그녀의 내면의 고통을 이해했다.
사부의 죽음에 본인도 일말의 책임을 느끼고 있으리라. 사부에게서 버림받았다는 생각보다 사부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생각이 더 강하려나.
과연 그녀는 대의를 앞세운 정파의 후기지수다.
겉으로만 대의를 앞세우는 사부와 달리 뼛속까지 정파인 사람은 자하검존이 아니라 그녀였다.
물론 주석하는 그런 그녀의 신념을 싫어하지 않았다.
“의원 말대로라면 최소 한 달 이상 제대로 움직이기 힘들 거예요.”
“어쩔 수 없죠. 제가 자초한 일이니.”
다행히 그녀의 목소리가 밝아졌다.
“현재 화산은 어떤가요?”
“아직…… 무너질 정도는 아니에요.”
최근에 화산파는 큰 기둥 둘을 잃었다.
자하검존과 장문인인 북청진인. 예전에 화산매화검수를 비롯하여 주력을 꽤 잃었기에 현재의 화산파는 과거에 비하면 절반의 전력이 채 되지 않는다.
사실상 망한 수준이다.
화산파의 존립은 중원 무림에 큰 영향을 미친다. 비록 자하검존은 싫지만 다른 화산파 사람을 싫어한 적은 없다.
“당신이 사문으로 돌아가야 화산파가 훨씬 빨리 정상화 됩니다.”
“다시 받아줄까요?”
“당연하죠. 아마 중책을 맡을 걸요?”
유비연은 화산파에서 꽤 입지를 다진 인물이다. 지금 같은 국면에서 화산파가 그녀를 마다할 리 없다.
유비연이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어쨌든 그녀가 돌아갈 유일한 곳은 화산파뿐이니까.
“강호 정세가 안정되면 명아도 화산으로 다시 보내줄게요.”
명아 이야기가 나오자 유비연의 안색이 한결 밝아졌다.
명아는 그녀와 주석하를 연결하는 유일한 끈이다. 방금 말은 주석하가 그녀와의 관계를 끊을 생각이 없다고 강조한 것이기도 했다.
“주 공자, 고마워요. 이제 어디로 갈 건가요?”
마음 같아선 몸이 완쾌될 때까지 주석하를 붙잡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갈 곳은…….”
주석하의 안색이 다급해졌다.
방금 다시 깨달았다. 지금 그에게 무엇이 급한지.
유비연을 신경 쓰다가 우설금을 놓쳤다. 어쩌면 그 이전부터 그는 실수를 저지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악군과 화존을 돕느라 우설금을 홀로 내버려 두지 말았어야 했다.
유비연이 화산파 외에 갈 곳이 없는 것처럼 우설금은 마교 이외에는 갈 곳이 없다. 그녀를 뒤쫓아야 하는데 벌써 며칠이나 늦어졌다.
우설금에게 특별한 일이 발생하지 않는 한 그가 그녀보다 십만대산에 먼저 도착할 가능성은 사라졌다.
우설금이 천마와 단독으로 맞서는 일만은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
“얼른 가야겠네요. 나중에 명아와 함께 화산으로 찾아가겠습니다.”
주석하는 유비연을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취하며 작별을 고했다.
주석하가 사라졌을 때 유비연은 그의 행선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누구를 만나러 가는지는 감을 잡았다.
역시 그의 마음에 유비연은 없었다. 예전부터 짐작했던 사실이었으나 오늘 확실하게 드러났다. 그의 마음을 차지한 우설금이 무척 부러웠다.
사부에게 찔렸던 등이 더욱 아팠다.
이제는 삶에서 주석하를 내려놓아야 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