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화 우설금의 계획 (1)
십만대산의 마교 총단에 들어선 우설금은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그녀의 뒤에는 평소처럼 흑귀와 백귀가 따르고 있었다.
예전과 기분이 다르다. 과거에는 마교로 돌아오면 고향에 온 것처럼 푸근한 안정감을 맛보았다.
그런데 지금은 모든 게 낯설고 이질적이다. 이곳에서 보낸 과거가 마치 자신의 삶이 아니었던 것만 같았다.
“침착하자…….”
예전과 지금은 돌아온 목적 자체가 다르다. 십만대산은 과거와 달리 지금은 원수가 있는 곳일 뿐이다.
과거에는 임무를 완수하고 뿌듯한 기분으로 왔다면 지금은 원수를 갚겠다는 목적 하나만을 위해 돌아왔다.
주변에 삐죽삐죽 솟은 험준한 산봉우리가 그녀의 투지를 일깨웠다.
십만대산이란 이름이 알려주듯이 이곳은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오지였다. 곳곳에 천 길 낭떠러지와 기암괴석이 깔린 위험지대다.
그 십만대산 중심 봉우리에 마교 총단이 우뚝 세워져 있다.
총단에 접근하는 통로는 가시밭길이다. 도처에 기관과 진식이 설치되어 있고 매복 또한 매우 많다.
이 모든 안배는 지난 수백 년간 중원으로부터 마교를 지키는 기본적인 수단이었다.
역사에서는 마교의 중원 침공이 혈사를 불렀다고 하지만, 그것은 단지 중원의 시각일 뿐이다.
엄밀히 따져보면 중원 무림인들이 마교를 공격한 적이 훨씬 많았다. 이곳의 기상천외한 방어벽이 없었다면 마교는 이미 문을 닫았을 것이다.
애초에 마교는 중원 무림의 일부인데 이를 배척한 자는 중원 무림 아니었던가.
“오셨습니까?”
총단으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경계 임무에 매진하던 호위무사가 그녀를 발견하고 허리를 숙였다.
마교에서 그녀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마교 내에서 한 손에 꼽히는 지고한 신분인 데다 그 미모 또한 남달랐기 때문이다. 그녀는 마교의 꽃이었고 자부심이었다.
천마를 제외하면 일반 마교인들의 지지와 총애를 가장 많이 받는 사람이 그녀가 아닐까.
우설금은 허리를 숙인 마교인을 지나치며 형식적으로 답례했다.
“수고 많군.”
“천마의 은총입니다.”
마교인이 다시 허리를 숙였다.
그들을 지나친 그녀에게 앞으로 닥칠 운명이 가슴을 죄었다.
다시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까. 아무리 후하게 평가해도 그 가능성은 전혀 없다. 지금 이 걸음이 그녀의 마지막이 될 것이다.
우설금은 양쪽으로 우뚝 선 암벽 사이의 길을 지나 커다란 석문 앞에 도착했다.
천주문(天柱門).
마교와 중원을 구분하는 실질적인 경계이자 마교의 상징이다.
이곳에서도 경계 무사가 허리를 숙였다.
우설금은 허리춤에서 옥패를 꺼내 석문의 한 문양에 맞췄다.
스르릉-
거대한 석문이 열리고 우설금은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이곳부터 진정한 총단이라 할 수 있었다. 여전히 천마가 거주하는 천마각은 아주 멀지만 벌써 스산한 마기가 그녀의 몸을 잠식해 들어왔다.
예전이라면 가슴을 활짝 열고 그 마기에 몸을 맡겼겠지만 지금은 오히려 가슴이 움츠러들었다.
‘침착하자.’
이곳까지 오는 동안 벌써 수십 차례나 속으로 다짐했다.
흑귀와 백귀를 제 위치로 보낸 후 우설금은 황궁을 방불케 하는 거대한 전각 앞에 도착했다.
높은 전각 현판에 적힌 글자가 그녀를 거만하게 내려다봤다.
천마각(天魔閣).
마교의 모든 힘이 집중된 곳이다. 천마가 거주하는 이곳에는 주요 간부들과 정세를 논하는 대전이 있다.
일필휘지의 저 글씨는 초대 천마가 지력으로 썼다고 했던가.
천마각이라 적힌 저 현판을 볼 때마다 웅지를 불태웠던 과거의 자신을 떠올리며 우설금은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뛰는 가슴을 진정하면서 우설금은 침착하게 천마각 내부로 들어갔다.
오늘은 상황만 파악한다. 원수인 천마를 제거하려면 기회를 잡아야 하니까. 절대 평소와 다른 기색을 노출하면 안 된다.
그렇기에 어떤 날보다도 침착해야 한다.
우설금은 내심을 다지며 문 앞을 빠른 걸음으로 전진했다.
“단천마령?”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굳이 시선을 돌리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다. 은천마령이다.
우설금은 걸음을 멈추고 예를 표했다.
“돌아왔습니다.”
“천마를 뵈러 오셨소?”
“계신가요?”
“물론이오. 다만…….”
은천마령의 노안이 그녀를 훑었다.
은천마령의 나이는 우설금도 알지 못했다. 천마의 옆을 떠나지 않는 금천마령과 은천마령은 천마보다도 나이가 더 많은 노인이었다.
그들 두 사람은 전대 천마 시절부터 마교수호사령이라는 중책을 맡았었다. 일신의 무공 또한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그에 비하면 묵천마령은 천마보다 나이가 적은 중년인이었고, 단천마령인 우설금은 천마보다 한참 어린 소녀였다.
우설금이 은천마령을 주시하자 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천마의 심기가 불편하시오. 물론 총애 받는 단천마령께서 염려할 일은 아니라 생각하오만.”
“알겠습니다.”
우설금은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대전으로 들어갔다. 어차피 마교수호사령 간에 서열은 무의미하다. 그들은 상하 관계가 아니라 수평적 관계일 뿐이니까. 서로 명령을 내리는 사이도 아니다.
우설금의 뒷모습을 보면서 은천마령이 혀를 끌끌 찼다.
대전은 텅 비어 있었다.
보통 때라면 단상의 옥좌에 앉아 그녀를 맞이했을 천마가 지금은 보이지 않았다.
천마를 찾아 두리번거리고 있자니 뒤에서 강한 마기가 느껴졌다. 이 마기의 주인은 금천마령이다. 마교에서 천마 다음의 이인자로 알려진 인물이다.
“천마를 찾으시오?”
“그렇습니다만 어디에 계신가요?”
우설금은 몸을 돌려 정중하게 인사했다.
“단천마령께선 중원에 다녀올 때마다 강해지는 것 같소.”
“그렇습니까?”
“가셨던 일은 잘 되었다고 들었는데…….”
“운 좋게도 반야불존을 처리하여 원수를 갚았습니다.”
“그대의 실력이라면 충분히 가능하리라 생각했소.”
금천마령이 사람 좋은 웃음을 터트렸다.
주름진 노안이 인자하게 웃고 있으나 그 속에는 이유 모를 섬뜩함이 자리해 있었다. 그 때문에 우설금은 어릴 때부터 금천마령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그녀가 반야불존을 향해 칼을 갈았다는 사실은 마교수호사령 누구나 알고 있다.
그녀가 원수를 갚으려고 떠나던 날 모두가 성공을 기원했었다. 훌륭하게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왔으니 금천마령의 축하는 당연했다.
다만 우설금은 예전과 다르게 금천마령의 덕담에서 껄끄러움을 느꼈다.
천마가 원수임이 밝혀진 상황에서 이제는 금천마령의 이런 태도가 진심이 아님을 그녀도 알게 되었으니까.
전대 천마를 섬겼던 금천마령은 그녀의 부친이 누구인지 알고 있을 것이다. 당시의 모든 사건을 직접 목격했고 어쩌면 주도한 당사자일지도 모른다.
복잡한 생각에 그녀가 머뭇거리고 있자니 금천마령이 대전 너머를 가리켰다.
“천마께서는 지금 천화원에 계시오.”
“고맙습니다.”
우설금은 평소처럼 싸늘한 기운을 흘리며 대전 옆문으로 방향을 틀었다.
***
여느 때처럼 천마는 천화원의 작은 화초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우설금은 그 화초가 무엇인지 몰랐다. 다만 천마가 무엇보다 애지중지하는 화초란 것만 안다.
십 년마다 한 번씩 열매가 열린다고 했었는데, 최근 들어 열매의 붉은 색상이 더욱 짙어졌으니 이제 열매가 익을 때가 되었다고 추측했다.
“돌아왔습니다.”
천마의 시선이 그녀에게 닿았을 때 감히 그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우설금은 깊이 머리를 숙였다. 평소와 다름없는 행동이다.
“이번에는 어땠느냐? 중원 최강고수의 무공을 직접 확인해본 평가는?”
“예상대로였습니다. 다만 소림의 저력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렇겠지. 중원 무림의 본산이라 할 천년 소림 아니더냐.”
“반야불존뿐만 아니라 소림 오각 각주들의 무공도 대단했습니다.”
“홀로 소림에 잠입했으니 쉽지 않았겠지. 원수를 갚은 소감은 어떠한가?”
우설금은 주저 없이 대답했다.
“시원섭섭합니다. 평생 할 일이 사라져버렸다고 할까요? 조금 무기력해진 기분입니다. 이제는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흐흐, 누구나 목표를 달성하고 나면 그런 기분에 잠기는 법이다. 그래, 불존이 다른 말을 하진 않더냐? 죽으면서 유언이라도?”
천마의 시선이 예리하게 그녀를 찔렀다.
이미 예상한 질문이기에 우설금은 당황하지 않았다.
“십팔나한진을 깨트리고 바로 반야불존을 처단했습니다. 그의 죽음이 순식간이었기에 그는 유언을 남길 틈이 없었지요. 어차피 저에게 유언을 남길 일도 없지 않습니까?”
“흐흐, 그렇겠군.”
천마는 아무런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대화에 부담을 느낀 우설금은 화제를 전환했다.
“열매가 잘 맺혔네요?”
“이제 열흘도 채 남지 않았다. 무려 십 년을 기다렸으니. 자, 보거라.”
우설금은 천마 옆에 서서 십년유심홍을 유심히 관찰했다. 특유의 진한 향이 코를 자극했다.
“옅은 홍색이었던 열매의 색상이 진한 붉은색으로 바뀌었다. 며칠 후면 검은색으로 변할 거다. 검은색으로 변하면 다 익은 거야. 이 열매는 검은색 상태로 불과 사흘을 유지한다. 그 사흘이 지나면 떨어지고 그때부터는 약효가 사라지지.”
“어떤 효능이 있습니까?”
“내공을 증진해준다. 욕심나느냐?”
“제가 어찌…….”
우설금의 태도를 관찰하며 천마가 담담한 미소를 머금었다.
천마가 이 화초를 얼마나 애지중지하는지 그녀도 알기에 절대 욕심을 낼 수 없었다. 이것은 그녀만이 아니라 다른 모두에게도 해당했다.
물론 우설금은 천마가 이 열매를 학수고대하는 진짜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녀의 반응을 쓱 살펴본 천마가 다시 입을 열었다.
“최근 교의 소식을 들었느냐?”
“중간중간에 대충 들었습니다.”
“그럼 알고 있겠구나. 이번 중원정벌은 예상과 달리 손해가 크다. 마교칠왕 가운데 무려 넷이 사라졌어. 이는 전혀 예상치 못한 사건이지. 아느냐?”우설금은 대답 대신 고개를 숙였다.
마교로 오는 동안 청산에서 벌어진 싸움의 결과를 접했다.
주석하가 관련되어 있기에 그녀 또한 관심을 집중하던 사안이었다. 예상대로 주석하는 마교칠왕 둘을 처리했다. 그 상세한 상황은 아직 듣지 못했다.
천마가 청산 전투를 단순히 화존, 악군과의 전투로 여기는지 아니면 주석하가 개입한 사실을 아는지 그녀는 알지 못했다.
“마교칠왕의 무공은 정파십존이나 흑도팔군보다 우위다. 하물며 구대문파 장문인과는 수준 차이가 꽤 되지. 그런데 이들이 예기치 않게 죽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천마의 시선이 한결 예리해지자 우설금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럴수록 더 침착해야 한다. 조금의 실수가 그녀의 목숨을 앗아갈지도 모르니까.
“그들의 죽음을 조사하다 보니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했다.”
심상치 않은 목소리에 우설금은 숨이 막혔다.
천마가 십년유심홍의 뿌리 주변을 흙을 덮으면서 천천히 말했다.
“마교칠왕이 죽을 때 흑검서생이 부근에 있었더구나. 너도 잘 알겠지. 그동안 그를 감시하고 있었으니.”
“저는 다른 임무를 수행하느라…….”
“알고 있다. 항상 옆에 붙을 수 없다는 정도는. 흑검서생은 그들의 죽음과 전혀 상관이 없느냐?”
“저는 모르겠습니다.”
우설금의 대답에 천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에서 어떤 실마리를 찾겠다는 집요함이 엿보였다.
“그래, 어차피 중요하지 않겠지. 흑검서생이 무슨 짓을 하더라도 우리의 대업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니까. 하지만 내버려 둘 수 없지 않으냐? 우리에게 막대한 손해를 끼쳤으니.”우설금은 대답할 수 없었다. 지금 천마는 매우 두루뭉술하고 완화한 화법으로 언급하고 있다. 천마는 진실을 아는 걸까.
“그래서 말인데…… 대업에 방해되는 자를 살려둘 이유는 없겠지.”
쿵!
우설금의 가슴이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