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우설금의 계획 (2)
천마가 장내가 떠나갈 듯 웃음을 터트렸다.
“으하하하! 왜? 문제가 있느냐?”
“그자가 마교칠왕을 죽인 범인이라 하기엔……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습니다. 더 조사해보심이…….”
“네 말도 일리는 있다. 마교칠왕이 죽은 화산과 청산에서 당시 그 부근에 머물렀던 고수는 흑검서생과 너뿐이다. 그렇다고 너를 의심할 수는 없지 않으냐?”우설금은 숨이 턱턱 막혔다. 예전이라면 천마는 그녀를 이런 식으로 몰아붙이지 않았다. 지금 이 말은 그녀를 의심한다는 의미와 다르지 않다.
“네가 흑검서생과 가까운 사이란 점은 안다. 무려 북해까지 동행했었는데, 한두 번 만난 사이가 아닌데 서로 정이 생겨나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상하겠지.”
“저는 오로지 교에 충성할 뿐입니다.”
“그래, 단천마령이라면 당연히 그래야지.”
천마의 날카로운 시선이 다시 우설금에게 박혔다.
과연 천마였다. 별달리 기운을 일으키지 않고 단지 그녀를 노려보는 것뿐인데도 우설금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압박을 느꼈다. 이런 천마를 상대로 복수가 과연 가능한 일일까.
우설금은 아득한 절망과 좌절에 더해 무기력감을 느꼈다.
“그가 정말 범인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과거와 달리 지금의 그는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 있으니까. 대계를 이루려면 변수는 적을수록 좋은 법! 내버려 둘 단계가 지났지. 어떻게 생각하나?”
“그, 그렇습니다.”
우설금은 반박할 수 없었다.
“그의 무공이 어느 정도지?”
“잘 모르겠습니다. 예전보다 더 강해졌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과거에는 흑도팔군 아래라 여겼는데 어느새 흑도팔군보다 위로 올라섰다. 최근에는 마교칠왕 수준이라 생각했는데 그 둘을 동시에 죽인 것을 보면 그것도 아닌 모양이지. 그렇다면 단천마령 너와 비교하면 어떤가?”정말 몰라서인지 아니면 그녀의 속셈을 떠보는 것인지 우설금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어떤 답이 최선일까.
그녀가 우물쭈물하자 천마가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 답을 아는 것 같구나. 직감대로라면 흑검서생의 무공이 너와 비교해서 밀리지 않는다고 봐야 한다. 그러니 임무를 주마.”
우설금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올 것이 왔다. 원수를 갚는 일과 상관없이 그녀가 가장 두려워하는 임무가.
“흑검서생을 죽여라! 마교칠왕이 사천에서 대기 중이다. 너 혼자서는 승리를 장담할 수 없으니 한 사람을 더 데려가라. 마교수호사령 가운데 누구라도 상관없다. 정 불안하면 금천마령도 괜찮고. 둘이 가서 흑검서생을 제거하라. 마교에 대항하면 어떻게 되는지 똑똑히 보여주거라.”흑검서생 척살 명령이 떨어졌다.
이곳으로 오는 동안 우설금은 어떻게 천마를 죽일지 고민했다.
천마의 약점을 찾을 수 없어 계획은 막연하게 맴돌았다. 어쩌면 복수를 달성하기까지 반야불존을 두고 칼을 갈았던 과거처럼 인고의 세월이 필요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명령이 떨어졌다. 어떻게 주석하를 그녀가 죽일 수 있단 말인가.
표정을 갈무리하지 못하는 우설금을 확인한 천마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하겠느냐? 아니면 못 하겠느냐?”
천마의 명을 거부할 수는 없다.
우설금의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하겠습니다.”
“좋아. 역시 내가 믿는 단천마령답구나. 그래, 누구와 함께 움직이겠느냐?”
어려운 질문이다. 금천마령이나 은천마령은 절대 함께할 수 없다.
상황에 따라 그녀는 주석하와 도망쳐야 할지도 모르니까. 일단은 그녀가 가장 믿는 사람과 작전을 벌일 수밖에 없다.
“묵천마령과 함께하겠습니다.”
“좋다. 그렇게 하라.”
천마의 승인이 떨어졌다.
우설금은 하얗게 질린 채 더듬거리면서 물었다.
“어, 언제 시작할까요?”
“빠를수록 좋다.”
여유를 주지 않을 심산이다. 천마가 이렇게 급히 서두른다는 의미는 그녀를 의심하고 있거나 아니면 주석하가 그만큼 위험인물이란 뜻이다.
그 어느 쪽도 그녀에게는 바람직하지 않았다.
“복수를 끝내고 방금 돌아왔기에…… 조금 마음을 다스릴 시간을 주십시오.”
천마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맴돌았다.
천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다시 십년유심홍으로 옮겨졌다.
우설금은 입술을 깨물고 한참 동안 머리를 숙인 채 서 있었다.
***
주석하는 사천의 중심, 성도에 도착했다.
하남에서 마교가 위치한 십만대산으로 가는 길은 여러 갈래다. 굳이 그가 사천을 경유하는 길을 선택한 이유는 흑검문이 있는 고향이기 때문이다.
최근 마교의 정예부대가 대거 중원으로 입성하면서 사천성, 감숙성, 섬서성 일대가 끝장났다. 이 지역의 구대문파를 비롯하여 여러 무림세가, 중소문파에 이르기까지 사실상 멸문을 당한 문파가 한두 곳이 아니었다.
비록 우설금에게 흑검문이 안전하리라는 말을 듣긴 했으나, 그렇다고 걱정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비록 흑검문에 들르지는 못하더라도 분위기를 살펴보려고 사천을 지나게 됐다.
성도의 허름한 주막집에서 요기를 때우면서 주석하는 분위기를 살폈다.
야외에 탁자와 의자를 깔아놓고 영업하는 작은 주막이었다.
예전과 달라진 점이 일부 보이긴 했다. 과거와 비교하면 사람들의 행동이 불안정했다. 어딘지 모르게 암묵적으로 존재하던 질서가 사라진 느낌이다.
옆 탁자에서 두 장한이 술을 마시며 떠들고 있었다.
“마교인이 모인다는 소문이 있지?”
“요즘 그 문제 때문에 도망치느라 난리야. 목숨을 부지하겠다고 성도를 탈출하는 놈이 한둘이어야지.”
“그런다고 피할 재간 있나?”
두 장한은 무림을 떠도는 낭인으로 추정됐다. 소문을 듣기에는 저런 자들이 편리하다.
주석하는 술병을 들고 그들의 탁자로 갔다.
“합석해도 되겠습니까?”
“뭐요?”
“그냥 답답해서 세상 흘러가는 이야기나 들을까 합니다.”
“무림인이요?”
“낭인이죠.”
주석하를 쓱 훑어본 두 장한이 혀를 끌끌 찼다. 제대로 된 검도 없이 시커먼 퉁소를 들고 있는 모습이 영락없는 삼류무사로 보였다.
“젊을 때 일을 해야지…….”
충고하던 장한의 시선이 그가 든 술병에 머물렀다.
“술은 많소?”
“한 병 더 시킬까요?”
“흐흐, 소형제가 예의를 아네. 오늘 화끈하게 마셔보세.”
역시 공짜 술을 싫어할 사람은 없다. 주석하는 탁자에 앉아 대화에 끼어들었다.
“마교인이 모인다니 무슨 말입니까?”
“소형제는 어디에서 왔소?”
“전 운남성에서 왔습니다.”
“이런! 하필 이 험난한 곳으로 오다니. 지금 사천은 전쟁터요, 전쟁터!”
“운남도 비슷합니다.”
맞장구치며 주석하는 그들로부터 최신 사천 정세를 들을 수 있었다.
마교의 주력부대는 둘로 나뉘어 중원으로 진격했다.
섬서와 사천 일대를 함락한 마교는 중원의 중심인 하남으로 방향을 잡았다. 다음 목표가 하남의 소림사와 호광의 무당파로 예상하던 중에 변화가 일었다.
사천을 빠져나가던 마교인들이 사천의 중심인 성도로 모여든 것이다.
“그들의 목적이 뭐랍니까?”
“그건 아무도 모르지. 현재 사천에서 변변한 무림 방파는 모두 문을 닫았으니까. 남은 건 변두리의 작은 방파뿐이라고.”
“언제부터요?”
“열흘 정도 됐나? 변덕이 죽 끓는 듯 갑자기 바뀌었소. 하기야 마교가 뭘 하든 우리가 알 바 아니지만.”
주석하는 괜히 찜찜해졌다. 설마 청산에서 마교칠왕을 죽인 일과 연관된 걸까? 그렇게 생각하면 너무 과민하게 반응한 건가?
“어휴, 세상이 어찌 될는지…….”
“그들은 지금 어디에 모여 있습니까?”
“소문에 따르면 성도에서 덕양 가는 방향에서 진을 치고 있다던데?”
덕양이 나왔다. 심증이 더욱 굳어졌다.
이것은 나쁜 조짐이다. 우설금의 예상과 다르게 움직인다는 것은 그가 마교의 주의를 끌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우설금마저 마교의 핵심에서 배제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는 우설금에게 매우 위험한 징조다.
‘내가 갈 때까지 절대 무리하면 안 돼.’
주석하는 우설금에게 뜻을 전하고 싶었으나 방법이 없었다.
두 장한에게 더 들을 정보가 없자 주석하는 술병을 내려놓고 자신의 탁자로 돌아왔다.
다시 선택의 기로에 섰다. 인생이란 수많은 선택으로 결정된다지만 최근에 벌어진 일은 운명의 장난이었다.
우설금을 빨리 쫓아가야 하는 시점에 유비연의 부상이 발목을 잡았고 이곳에서도 덕양 상황이 발목을 잡는다.
어떤 상황이건 흑검문만은 모른 척하고 뒤로 미룰 수 없다. 예전 하북팽가 원정 사건 때도 그가 조금만 지체했다면 자칫 돌이킬 수 없는 후회를 저지를 뻔했으니까.
이번에도 그의 선택은 확고했다. 흑검문의 위험을 모른 척할 수 없다. 흑검문에는 그의 가족이 있으니까. 구체화 된 위협이 아닐지라도 상황을 확인한 후에 사천을 떠나야 한다.
그가 결심을 굳혔을 때 머리 위에서 비둘기 한 마리가 맴돌았다.
무심코 잔을 들던 주석하는 술잔에 비친 비둘기를 발견했다.
“어?”
고개를 드는 순간 그를 확인한 비둘기가 아래로 내려왔다.
탁자에 앉은 비둘기는 마치 그와 술을 대작하려는 것처럼 먹다 남은 음식 조각을 쪼았다.
어디에서 많이 본 비둘기 같은데…….
그제야 그는 명아가 열심히 키우던 비둘기를 떠올렸다. 명아에게 붙잡혀서 가끔 모이를 던져주기도 했었는데 이놈이 그놈인가?
비둘기가 다 고만고만하게 생겼다며 실소를 머금던 주석하는 비둘기 발에 매달린 작은 연통을 발견했다. 정말 전서구였다.
전서구가 이런 식으로 날아올 수 있는지 의문이었다. 덕양이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으니 가능할 것 같기도 하고.
주석하는 발에 매달린 연통에서 돌돌 말린 작은 양피지를 꺼냈다.
- 오빠, 어디 있어? 무서워. 명아.
양피지를 읽은 주석하는 한동안 멍한 상태로 눈을 떼지 못했다. 정말 명아의 서신이었다.
명아를 떠올리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전서구를 길러 서신을 주고받고 싶어 하더니 정말 성공했다. 어린아이가 대단하다.
그는 주막에서 세필을 빌려 급히 서신을 쓴 다음 전서구의 발에 달린 연통에 집어넣었다.
탁자 위의 음식을 몇 번 쪼아 먹던 전서구가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거참, 언제 저렇게 훈련했지?”
그는 전서구가 그의 소식을 명아에게 전하리라고 굳게 믿었다.
이것으로 결심을 굳혔다. 적어도 흑검문이 위험하지 않도록 처리하고 마교로 떠날 생각이다. 마교인들이 사천으로 몰려든 이유가 그를 견제하여 흑검문을 치기 위해서라면 절대 좌시할 수 없었다.
***
칠흑처럼 어두운 밤.
덕양 외곽의 외딴 장원에 짙은 마기가 가득 채워졌다. 중원인들이 마교인이라 부르는 자들이 무려 이백여 명이나 모여 있었다.
다행히 장원은 그 인원을 수용할 만큼 매우 넓었다.
물론 주요 전각, 곁채, 행랑채 할 것 없이 건물이란 건물 모두에 뒤엉켜 잠을 자야 했지만. 노숙에 비하면 훨씬 안락한 밤이었다.
중앙 대청의 전각 지붕에 흑의를 입은 인영이 새처럼 내려앉았다. 주석하였다.
화판답공이 절정의 경지에 이른 그에게 이런 식의 잠입은 식은 죽 먹기나 마찬가지였다. 지붕에 엎어지듯 누운 채 그는 조심스럽게 기감으로 내부를 살폈다.
모두 셋. 가공할 마기를 뿜어내는 인물의 숫자다.
그는 조심해서 지붕의 기와 하나를 들어냈다. 예전에 도수에게서 배웠던 가락 덕분에 조금의 소음도 없이 성공적으로 처리했다.
대청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진한 마기를 뿜어내는 인물의 정체는 예상했던 대로였다. 물론 그들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감이 말해준다.
마교칠왕의 남은 세 사람.
주석하의 안면이 딱딱하게 굳었다. 지금 이 덕양에는, 아니 사천을 통틀어도 마교칠왕에 대적할만한 중원의 고수는 없다. 그런데 이들이 왜 이곳에 모여 있단 말인가.
내려다보고 있자니 그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