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화 우설금의 계획 (4)
우설금은 묵천마령을 찾았다.
지난 세월 동안 천마를 제외하면 마교에서 그녀와 가장 가깝고, 그녀를 이해한 사람이 바로 묵천마령이었다.
묵천마령은 그녀에게 무공을 가르친 사부이자 함께 수련한 동료였다.
마교수호사령이라는 직책을 맡은 후에도 우설금은 묵천마령의 도움을 가장 많이 받았다. 반면 금천마령과 은천마령은 그녀와 나이 차도 매우 컸고 어쩐지 대화하기에도 껄끄러웠다.
묵천마령의 처소는 대나무로 장식되어 고즈넉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는 비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면서 명상에 잠겨 있었다.
우설금이 안으로 들어가자 묵천마령이 그녀를 환대했다.
“돌아온 후 처음이오.”
“진작 찾아뵈려 했는데 여의치 않았어요.”
묵천마령이 그녀를 풍경이 보이는 탁자로 안내했다.
비에 젖은 십만대산은 색다른 운치를 풍겼다. 이곳저곳에서 피어오르는 안개가 신비로운 한 폭의 산수화를 그렸다. 물론 지금 우설금에게 저런 풍경이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바빴나 보오. 또 명령이 떨어진 게요?”
“그래요. 될 수 있는 한 빨리 중원으로 들어가라는 명령을 받았어요.”
“이번에는?”
“마교칠왕과 함께 흑검문을 치라는 명령이셨어요.”
“흑검문이라…….”
“그래서 당신과 같이하겠다고 했죠.”
묵천마령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흑검문에 대해 전혀 모르는 것 같기도 하고.
“흑검서생의 사문이에요.”
“아! 흑검서생!”
이제야 묵천마령도 아는 척했다. 천마가 마교칠왕 죽음의 배후에 흑검서생이 있으리라고 추정한 이후 적어도 마교수호사령이라면 그 이름을 기억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묵천마령이 안면을 찌푸렸다.
“흑검서생은 당신이 관리하지 않았소?”
“그래요. 그래서 저에게 하명하셨나 봐요. 그것도 빨리.”
“흐음.”
묵천마령이 나지막이 신음을 터트렸다. 그의 안색이 점차 어두워졌다.
우설금이 다시 입을 열기도 전에 묵천마령이 먼저 이야기를 시작했다.
“마교칠왕이 살해된 사건을 들었소?”
“알아요.”
“화산과 청산. 그 유력 용의자가 흑검서생이오.”
“그 또한 알고 있어요.”
“그 사건이 벌어질 당시 흑검서생이 부근에 있었다는 게 가장 큰 이유요. 그런데…… 천마는 지금 당신도 의심하고 있소. 당신 또한 근처에서 암약 중이었으니…… 더 큰 문제는 청산으로 가서 그들을 도우라는 첩지를 받고도 당신이 거부했다는 거요. 그 결과 천라요희와 초혼천왕이 죽었소.”우설금은 백귀를 통해 천마의 지시를 받았었다. 물론 그 지시를 주석하에게 보여준 후 정작 그녀는 청산이 아닌 이가장으로 떠났지만.
묵천마령이 우설금의 동요를 살폈다. 그녀의 생각을 읽으려는 듯했다.
“지금 교내에서 소문이 돌고 있소. 그동안 천마의 총애를 당신이 가장 많이 받았다는 사실을 부인하진 않을 거요. 그런데 최근 들어 천마가 당신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는 소문이 돌고 있소. 물론 신경 쓰지 않으리라 생각하오만…… 이는 보통 문제가 아니오. 향후 당신의 입지에…….”“전 마교수호사령이란 직책에 연연하지 않아요. 그런 것은 모두 무의미하죠. 강자존의 이 마교에서 실력 없이 천마의 총애로만 높은 직책에 올라갈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런 말이 아니잖소. 하여튼 당분간 조심할 필요가 있소. 천마께선 이번 임무를 통해 상황을 지켜볼 거요.”
우설금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천마를 죽여 원수를 갚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그녀가 준비하기도 전에 천마가 먼저 급습했다. 칠왕과 함께 흑검문을 멸문하고 주석하를 제거하라니.
‘천마는…… 내가 마교칠왕의 죽음에 관여했다고 생각하는 건가…….’
다시 숨이 막혔다. 천마를 떠올릴 때마다 이런 증상이 나타난다. 오랜 세월 천마에게 억눌린 그 위압감에 그녀의 정신마저 영향 받고 있었다.
그녀가 살려면 흑검문과 주석하를 없애야 한다. 그 명령만은 절대 수행할 수 없다. 설사 그녀가 죽더라도 해서는 안 되는, 하기 싫은 일이 있다.
혼자서 천마를 죽여 원수를 갚을 수 있을까? 백번 양보하더라도 불가능하다. 애초에 그녀는 천마의 상대가 아니니까.
천마 한 사람도 버거운데 금천마령과 은천마령이 항상 옆에서 수호하고 있으니 방법은 전무했다.
천마를 죽이려다 그녀가 죽으면 어떻게 될까? 주석하는 무사할 수 있을까.
현재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천마는 사실상 주석하를 제거하려는 듯했다. 예전과는 분위기가 판이해졌다.
과거에 천마는 주석하를 흥미로운 인간 정도로 치부했었는데, 지금은 대업을 방해하는 결정적인 인물로 간주한다.
“하아!”
우설금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토해졌다.
묵천마령은 그녀의 복잡한 내심을 읽은 기분이었다.
“단천마령! 설마……”
“난 이번 임무를 절대 수행할 수 없어요.”
묵천마령이기에 우설금은 솔직히 말할 수 있었다.
“그건 반기를 드는 거요. 앞으로 당신의 앞길은 가시밭길이 될 거요. 알고 있소?”
우설금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수긍했다.
“그러지 마시오! 이건 당신뿐 아니라 교로 봐서도 큰 손실이오.”
묵천마령의 진심 어린 충고가 고마웠다. 우설금은 자신이 막다른 골목에 몰렸음을 시인해야 했다.
그를 몰아붙인 사람은 천마이고 그녀는 그 천마를 어떻게든 극복해야 한다.
“묵천마령, 부탁 하나만 들어줘요.”
“뭐요?”
“반드시 들어줘야 해요. 내 마지막 부탁이에요.”
묵천마령도 그녀처럼 한숨을 토해내고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내로 금천마령과 은천마령을 유인해서 붙잡아줘요. 나 혼자 천마를 만나겠어요.”
“당신…… 설마?”
묵천마령은 뒷말을 잇지 못했다. 단 한 번도 생각지 않았던 무시무시한 음모가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우설금도 입을 다물었다. 차마 꺼내지 못한 이야기가 무엇인지 두 사람만이 안다. 심지어 두 사람이 같은 생각이었는지 아닌지도 분명치 않았다.
“그렇게 알고 이만 물러갑니다.”
우설금은 종종걸음으로 몸을 돌렸다.
이곳에 오래 머무르면 위험하다. 천마의 의심을 무조건 줄여야 한다.
걸음을 옮기는 그녀는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비록 쫓겨서 시도하는 작전이라지만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다.
비록 성공보다 실패할 가능성이 더 크고 목숨을 잃을 확률이 사실상 전부라지만.
그래도 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성공해서 그를 지킬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녀가 죽은 후에 그도 천마의 손에 죽는다면 최악이지만 어떻게든 상황을 반전해 볼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와 손을 잡고 잠을 잤고 그에게 편지도 남겼으니. 그와 함께 한 몇 안 되는 달콤한 순간이었다. 그마저 없었다면 얼마나 억울했을까.
윤회를 거듭하다 보면 언젠가 그와 인연을 맺을 수 있게 되지 않을까.
***
서걱-
붕천마검의 한쪽 팔이 날아갔다.
생전 처음 실감한 검강의 예기에 붕천마검은 머릿속이 하얘졌다. 검강으로 찌르기는커녕 반대로 검강에 맞다니! 그것도 자신이 공격하다가.
“으아아!”
눈앞에 뵈는 것이 없어진 붕천마검이 잘린 팔을 지혈할 생각도 않고 주석하를 향해 달려들었다.
서걱-
이번에도 흑검소의 검강은 정확했다. 정확히 붕천마검의 다른 쪽 팔마저 잘라냈다. 검을 든 한쪽 팔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이제는 어이없단 표정을 한 붕천마검의 몸통만 남았다.
붕천마검과 잔백귀혼을 무력화한 주석하는 혼세섭왕에게 시선을 돌렸다.
“넌 뭐냐?”
“흐어억!”
혼세섭왕이 비명을 지르며 후다닥 뒤로 물러났다.
이놈은 어째 다른 놈에 비해 기개가 부족해 보인다. 겁에 질린 모습이 마교칠왕이라 하기엔 좀…….
“네놈도 가진 것 다 내놔봐. 몽땅 털어줄게.”
“으으으, 사, 살려줘.”
주석하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러면 곤란한데?
“해보라니까? 섭혼술 잘한다며? 구경 좀 해보자.”
주석하가 한발 다가가자 혼비백산한 혼세섭왕이 뒤로 후다닥 물러났다.
“하지 않는다고 살려주진 않아…….”
그 순간 혼세섭왕의 두 눈이 시뻘겋게 변했다.
섭혼마공? 주석하가 대응할 틈도 없이 눈앞의 장면이 바뀌었다. 놀랍게도 혼세섭왕이 사라지고 단천마령 우설금이 그의 앞에 있었다.
주석하의 눈앞은 혼돈 그 자체였다. 단천마령 우설금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때마다 무자비한 살기가 그를 엄습했다. 간신히 보법으로 피하면 다시 우설금이 그의 옆을 치고 들어왔다. 우설금의 손에서 장력이 뿜어졌다. 그녀의 손에 홍철산이 없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우설금을 상대해야 하는 주석하의 손속이 그때마다 멈칫거리며 혼란을 일으켰다.
“정말 단천마령과 그렇고 그런 사이인가 본데? 내가 오늘 단천마령 대신에 너랑 놀아주랴?”
혼세섭왕이 낄낄대며 섭혼술에 박차를 가할 때 주석하의 안면이 서서히 굳었다. 섬뜩한 살기가 눈빛에 담겼다.
“그렇게 보이냐?”
야릇한 미소를 머금은 주석하의 몸에서 극양염천신공이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왔다.
콰아아앙-
거대한 충격파가 천지를 뒤흔들고 장원 전체가 쑥밭이 됐다. 곳곳에 세워진 전각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주위는 허허벌판처럼 바뀌었다. 누가 이곳에 멋들어진 장원이 존재했었다고 믿을까.
“크하하하!”
주석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광소를 터트렸다. 남들이 보면 미친놈이 따로 없었다. 그는 혼세섭왕을 상대하면서 내력을 이용하여 주변까지 날려버렸다.
“미, 미친놈…….”
혼세섭왕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자는 마교칠왕이 건드릴 수 없는 자였다. 과연 천마라면 이런 무력을 선보일 수 있을까?
예상을 훨씬 벗어난 무위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는 재빨리 눈을 굴리며 동료를 찾았다. 아쉽게도 그의 동료는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두 팔이 잘린 붕천마검은 방금 폭발한 충격파로 인해 전각 더미에 처박혔다. 허리가 부러진 듯 일어나지 못했다.
잔백귀혼도 상황은 비슷했다. 그는 주석하 바로 앞에 팬 구덩이에 머리가 박혀 몸부림치고 있었다. 상반신이 땅에 박히고 하반신을 허공에서 버둥거리는 모습이 실로 가관이었다.
혼세섭왕이 살길을 모색할 틈도 없이 주석하가 성큼 걸어왔다.
“으으으.”
혼세섭왕은 뒷걸음질 치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상대가 자신의 능력 밖임을 깨달은 그는 도망치기를 포기했다.
주석하가 괴기스러운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네놈들이 흑검문만 입에 올리지 않았어도, 단천마령만 입에 올리지 않았어도 살아날 구석이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그 둘을 입에 올린 이상 목숨을 부지할 방법이 없다.”
“그, 그건 붕천마검이…….”
“네놈도 호응했잖아?”
“그, 그건 어쩔 수 없이…….”
“그럼 입만 찢어줄게.”
쉬익-
흑검소에서 검강이 쭉 뻗었다.
얼굴로 다가오는 검강을 보면서도 혼세섭왕은 피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이미 그는 두려움에 완전히 굴복하여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깨진 섭혼마공을 다시 일으킬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스으윽-
검강이 그의 입으로 들어와 옆으로 쭉 옮겨갔다.
“으으으.”
평소와 달리 신음이 새어나간다. 피범벅이 된 얼굴이 뭔가 이상한 느낌인데 어떻게 된 것인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다. 말을 하려 하지만 발음이 되지 않는다.
혼세섭왕은 말 대신에 두 손을 저었다.
하지만 검강이 다시 그의 얼굴로 다가왔다. 물러날 곳도 없고 피할 방법도 없었다.
푹!
검강이 입을 찌르고 이번에는 위로 쭉 움직였다.
비명도 없이 혼세섭왕의 얼굴이 두 쪽으로 쪼개졌다.
“으하하하!”
주석하는 하늘을 향해 광소를 터트렸다. 어두운 하늘을 타고 그의 웃음소리가 멀리 뻗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