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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검천하-225화 (225/273)

225화 우설금의 계획 (5)

한바탕 웃음이 지나간 후 주석하는 다시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주위에 수많은 마교인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마교칠왕의 죽음을 목격한 터라 겁에 질려 있었다. 그에게서 멀리 떨어진 채 무리를 지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장수를 잃은 병사가 아마 저런 꼴일 것이다.

상대가 적당히 강하면 적개심을 드러내고 저항하는 법이지만, 상대가 압도적이면 전의를 상실한다.

지금 마교인들이 그러했다. 주석하가 적임을 알면서도 덤비지 못했다. 그렇다고 도망치지도 못했다.

그들에게는 사실상 신과 같은 존재였던 마교칠왕의 죽음을 보았기에 어떻게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이들은 설사 오늘 목숨을 구하더라도 앞으로는 지금 같은 기세로 중원을 휩쓸기 어려울 것이다. 한번 꺾인 기세를 되살리지 못한다면.

평소라면 주석하는 이쯤에서 끝냈을 것이다. 그는 살상을 즐기지 않았다. 단천마령을 노렸던 마교칠왕을 단죄한 것으로 충분히 만족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이들 중 일부가 흑검문을 공격한다면 지금의 흑검문은 멸문하게 된다. 그런 위험을 내버려 둘 그가 아니었다.

그를 무자비하다고 비난하더라도 개의치 않을 것이다. 적어도 그의 가족이 걸린 일에는 온정을 베풀 그가 아니다.

주석하는 독군의 독공을 꺼냈다. 다수의 적을 살상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독이다.

운기를 시작하자 끈적끈적한 기운이 그의 몸에서 뿜어졌다. 밤이라 제대로 알아보기 힘든 검은 기운이 서서히 바닥에 깔리면서 장내에 가득 찼다.

혼이 빠진 마교인들은 독을 느끼지도 못했다.

“으으윽!”

그와 가까이 있던 녀석들이 갑자기 괴로운 신음을 토하며 쓰러졌다. 그제야 마교인들에게서 반응이 왔다.

“도, 독이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도망쳐봐야 이 장원을 벗어나기 전에 중독 증세로 쓰러질 것이다.

역시 바로 증명하는 인간들이 나타났다. 내공을 끌어올려 도망치려던 녀석들이 더 빨리 중독됐다.

“으악!”

여기저기에서 비명이 일었다.

장원을 벗어난다고 중독이 풀리지 않는다. 이미 내려진 사망선고에서 마교인들은 벗어날 수 없다.

평화로웠던 장원이 쑥대밭이 되고 내부에 있던 대부분이 죽기까지 불과 한 시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동안 주석하는 조금도 다치지 않았다. 그만큼 주석하의 무공은 내공을 융합한 후 압도적으로 변했다.

사천에 모였던 마교 주력부대가 사실상 끝났다.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결말이었다.

이로써 흑검문은 안전해졌다.

마교칠왕 일곱이 모두 고혼이 되어 사라졌다. 마교 최정예인 이들의 죽음은 마교의 중원정벌에 지대한 차질을 가져올 것이다.

주석하는 자신의 손에 죽은 정파십존, 흑도팔군, 마교칠왕을 헤아렸다. 그는 최근에 무림 정세의 한복판에 있었고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었다.

정파도, 사파도, 심지어 마교까지 그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의 행보는 끝나지 않았다.

주석하는 주먹을 불끈 쥐고 이빨을 으드득 갈았다.

“기다려라! 천마!”

아직 최후의 적, 천마가 남아 있다. 그와 우설금의 공통된 적이기도 하다. 물론 천마는 지금까지 만난 자들과 차원이 다른 수준임을 안다.

그렇다고 물러날 생각은 없다. 우설금을 위해서, 뇌군을 위해서, 아니 자신을 위해서 천마를 제거할 것이다.

안 되면 되게 한다. 그게 주석하의 방식이다.

***

흑검문 앞마당에 비둘기가 모여 모이를 쪼았다.

“하나, 둘, 셋…….”

명아는 열심히 비둘기 수를 셌다.

최근에 시험 삼아 주석하에게 서신을 전달한다고 비둘기를 몇 마리 날렸기에 평소보다 비둘기 수가 확 줄어들었다.

사실 비둘기 수를 세기도 쉽지 않다. 저놈의 망할 흑구 때문이다. 장난기 심한 흑구가 달려와서 쫓아내면 어느 비둘기인지 혼란스럽다.

오늘따라 놀랍게도 비둘기가 한 마리 늘어났다.

“또 새끼를 낳았나?”

명아가 다시 열심히 세려는 찰나 멀리서 흑구가 뛰어왔다.

왈왈-

“너! 저리로 안 가!”

왈왈-

“올여름에 그냥 확!”

명아는 긴 나무 작대기를 들고 흑구를 쫓았다.

흑구는 그녀를 피해 요리조리 뛰어다니면서 비둘기를 훑어냈다. 비둘기를 흑구가 쫓고 흑구를 명아가 쫓는 사태가 벌어졌다.

지나가다 이 장면을 본 주소은이 흑구를 불렀다.

“흑구!”

왈왈-

흑구가 좋아서 주소은에게 달라붙었다.

“언니! 그 자식 좀 붙들어 매둬요!”

“얘도 심심해서 그래. 같이 놀자는 거지. 그런데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헉헉대며 숨을 고르던 명아가 비둘기를 가리켰다.

“비둘기가 한 마리 불었어요.”

“새끼 낳은 건 아니지?”

“그게 참 이상해요. 며칠 전에 오빠에게 서신을 보냈는데…….”

모이를 쪼는 비둘기를 유심히 살피던 명아의 눈에 발목에 연통이 붙은 비둘기가 발견됐다.

곧바로 작대기를 든 명아가 버럭 소리쳤다.

“저 자식이! 오빠 찾으러 가랬더니 여기서 게으름 피우면서 밥만 축내고 있어!”

명아가 작대기로 마당을 탕탕 치자 비둘기가 쪼르르 달려왔다.

“혹시 모르니 확인해봐. 이미 다녀온 것일 수도 있잖아?”

“아니에요! 게으른 녀석!”

물론 주소은도 그럴 리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주석하가 화산으로 간다고 했으니 비둘기가 절대로 벌써 돌아올 리가 없다. 단지 명아를 달래기 위해서다.

주석하가 떠난 후 친남매도 아니면서 서신에 집착하는 명아가 염려되었다.

솔직히 지금 상황에서는 주소은 또한 명아 못지않게 오빠가 그리웠다.

최근 덕양을 떠도는 소문에 그녀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마교인들이 흑검문을 치려고 집결하고 있다나.

하북팽가 사건이 떠올라 불안했다. 얼른 오빠가 와주었으면 좋겠는데, 오빠가 오면 그나마 안심할 텐데.

고개를 갸웃거리던 명아는 연통을 맨 비둘기를 붙잡았다.

“게으름 피운 놈은 굶겨야지!”

툴툴대며 연통 안에서 양피지를 꺼내던 명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왜?”

“답장이 왔어요!”

“에이, 그럴 리가.”

“진짠데.”

주소은은 누군가가 장난쳤다고 생각했다. 화산은 이곳에서 너무 멀고 명아가 어설프게 훈련한 비둘기가 주석하를 찾아갈 리도 없었다.

서신을 확인한 주소은은 깜짝 놀랐다.

양피지에 적힌 글씨. 영락없이 주석하의 악필이다. 워낙 못 썼기에 흉내 내기도 쉽지 않은 주석하의 글씨를 그녀가 모를 리 없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어? 오빠가 나쁜 놈을 알아서 처리하겠다는데요?”

“그러게…….”

주소은은 양피지를 들고 멍한 상태로 서 있었다.

과연 진짜일까. 필체로 보면 맞는 것 같긴 한데. 너무 오빠를 그리워하다 보니 헛것이 보이는 게 아닐까. 그녀와 명아의 간절한 소망을 하늘이 들어주신 건가?

하북팽가 때문에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했던 그때도 기적처럼 오라버니가 나타나 모든 일을 해결했었다. 이번에도 그런 걸까.

“명아야, 아무래도 진짜 같아.”

“그렇죠?”

“또 보내봐. 혹시…… 모르잖아?”

신이 난 명아가 붓과 양피지를 가지러 갔다.

멍한 상태로 서 있는 주소은의 옆으로 비둘기가 모여 모이를 쪼았다.

그 꼴을 두고 볼 수 없는 흑구가 달려와 비둘기를 내쫓았다.

푸드득-

비둘기 떼가 흑검문의 하늘을 날았다.

***

우설금 앞에 흑귀와 백귀가 부복했다.

두 사람의 앞에서 우설금은 만감이 교차했다.

흑귀와 백귀가 그녀의 휘하에 들어온 지 벌써 십 년이다. 그녀가 무공을 익히고 단천마령으로 내정되었을 때 천마가 그녀를 위해 붙였던 심복이다.

흑귀와 백귀의 무공은 일반 마교도에 비하면 평균 이상이지만, 그녀에 비하면 저 아래였다. 십 년간 항상 그녀를 따라다니면서 그녀의 명령을 수행했기에 이제는 정이 들었다.

“푹 쉬었니?”

“충분히 쉬었습니다. 다시 임무가 떨어졌다면서요?”

질문하는 백귀의 표정에 긴장이 어렸다.

두 사람도 소문을 모를 리 없다. 천마가 총애를 거두었다는 그런 소문…….

예전이라면 우설금은 그런 소문에 신경 쓰지 않았고 백귀와 흑귀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이번에는 과거와 다르다고 흑귀와 백귀도 직감했다.

“그래, 임무가 내려왔다. 조금 급하게.”

우설금이 다소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우설금에게 흑귀와 백귀는 가장 믿는 인물이다. 형식적으로는 부하이지만 그 이상의 역할을 해주는 사람들이다.

어릴 때 천마가 붙여주었지만 지금은 천마가 아닌 그녀의 수족이다. 이들은 마교도이면서도 마교보다 그녀에게 더 충성하는 자들이기도 했다. 사실 지금까지는 마교와 그녀는 다르지 않았었다. 어쨌든 그녀도 그들의 충심만은 의심하지 않았다.

“정말 흑검문 관련 일입니까?”

“그래.”

흑귀와 백귀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이들도 안다. 우설금이 주석하와 얼마나 가까운 사이인지.

“아가씨, 어떻게 하시렵니까? 흑검문을 치시려고요?”

“모르겠어.”

“천마의 명을 거부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거부하진 않아. 다만 마지막으로 청해볼 생각이야.”

의미가 없으리란 것 정도는 우설금만이 아니라 흑귀와 백귀도 안다. 천마가 그녀의 간청 때문에 뜻을 꺾을 사람이던가.

우설금이 생각하는 그 마지막 독대는 다른 의미였다. 그녀는 그때 마지막 승부를 걸 생각이니까. 이길 수 없는, 하지만 반드시 해야 하는 승부였다.

“그래서 말인데 너희는 먼저 강호에 나가 있어.”

흑귀와 백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과거에도 이런 일이 없진 않았지만 지금 상황에선 다소 뜬금없었다.

“사천에 나가면 마교칠왕을 비롯하여 주력부대가 집결해 있을 거야. 너희는 합류하지 말고 그들의 동정을 살피고 있어.”

우설금의 지시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두 사람도 눈치챘다.

“아가씨!”

“걱정하지 마. 나는 이곳에서 일을 끝내고 바로 합류할 테니까. 그때까지 사천에서 대기해.”

우설금이 담담한 음성으로 지시를 내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지금 사생결단의 기로에 서 있다. 그 위험을 흑귀, 백귀와 함께할 생각은 없다.

잘못된 주인을 만났기에 그들이 인생을 빨리 끝내서는 안 된다. 자신은 죽더라도 그들을 살리고 싶었다.

“아가씨!”

그녀의 심정을 눈치챈 것일까. 흑귀와 백귀가 무릎을 꿇었다. 두 사람은 머리를 조아리며 고개를 들지 못했다.

“괜찮아. 난 잘 해나갈 거야.”

우설금은 조용히 그들을 달랬다.

이것으로 대충 준비가 끝났을까. 이제는 묵천마령이 천마에게서 금천마령과 은천마령을 떼어낼 시기만 기다리면 된다.

천마와 단둘이 있을 때 천마를 기습할 것이다. 그녀가 익힌 가장 강한 무공으로. 어쩌면, 정말 운이 좋으면 목적을 달성할지도 모른다.

그녀가 살고 주석하도 살고, 두 사람이 함께 살 가능성은 크지 않지만 그녀가 동귀어진이라도 한다면 주석하만은 살릴 수 있을지 모른다. 주석하의 무공이라면 마교칠왕의 손에 죽지는 않을 테니까.

주석하가 금천마령이나 은천마령을 상대할 수 있을지 그녀도 확신할 수 없었다. 어쨌든 천마만 아니라면 그는 살 가능성이 커진다.

그렇기에 지금 열쇠는 천마가 쥐고 있다. 천마를 반드시 죽여야 한다.

“그만 가봐. 빠를수록 좋아. 이번에는 시간이 많지 않거든.”

흑귀와 백귀는 오늘따라 우설금의 목소리가 매우 다정하다고 느꼈다. 과거에는 이렇지 않았다. 그녀는 얼음이었다.

종종걸음으로 뒷걸음질하면서 흑귀와 백귀는 물러났다.

앞으로 다시 볼 수 없으리란 생각에 두 사람은 우설금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마저도 눈물 때문에 흐릿하게 보였다.

생각이 복잡했다. 그녀를 위해 두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 너무 애통했다. 거대한 마교 내에서 그들은 한 줌의 모래와 같은 처지니까.

두 사람이 부복했던 자리에 눈물 자국이 남아 있었다.

하늘이시여! 아가씨를 보우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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