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마교로 (1)
객잔에서 빈방을 잡아 투숙한 주석하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사천에 집결한 마교 주력부대를 섬멸하고도 마음이 개운치 않다. 그와 우설금이 마교칠왕을 모조리 살해했고 중원정벌에 나선 마교 주력부대 또한 절반을 해치운 셈이다.
평소라면 뿌듯한 기분이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모두 최근에 접한 우설금 소식 때문이다.
천마가 총애를 거두면 어떻게 되는지 그는 모른다. 다만 우설금에게 위기가 찾아왔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우설금이 마교로 들어간 목적을 그도 어렴풋하게 눈치챘다. 하지만 천마에게 어떻게 복수할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무리하진 않겠지.”
우설금이 천마와 대적하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이 사실을 그녀라고 모를 리 없다. 그나마 그가 돕는다면 더 나을 텐데. 그래서 그는 지금 급히 십만대산으로 간다.
우설금 걱정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던 주석하는 품에서 만리안석을 꺼냈다.
그동안 깜박 잊고 있었다. 그는 만리안석으로 우설금의 현재 상태를 확인할 수 있다.
만리안석은 푸른색의 영롱한 빛을 띠고 있었다.
만리안석에 내력을 불어넣었다. 하얗게 빛을 발하는 만리안석의 중앙에 우설금의 모습이 어리기 시작했다.
고즈넉한 내실에서 우설금이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녀는 평화로워 보였다.
“……다행이야.”
안심한 주석하는 긴 숨을 내쉬었다.
다소 야윈 듯한 그녀는 변함없는 미모를 뿌리고 있었다. 찻잔을 든 손가락마저도 예뻤다.
그가 도착할 때까지 우설금이 저렇게 평안하기를 하늘에 기원했다.
다음에도 만리안석을 또 사용해야 하기에 주석하는 도중에 멈췄다. 만리안석의 푸른빛이 절반으로 줄었다.
그나마 만리안석 덕분에 우설금을 볼 수 있어 안심했다.
아직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가 도착할 때까지 별일이 없어야 한다.
십만대산까지 남은 거리는…….
전생에서 이미 한 차례 가봤던 곳이기에 그에게는 초행이 아니었다. 가는 도중에 닥칠 위험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다. 십만대산에서 죽었던 처절했던 전생이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무엇보다 십만대산에 도착한 후가 문제였다. 마교 총단 부근은 곳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중원 무림인이 쳐들어오지 못하도록 자연 지형을 이용한 기관 진식으로 방어벽이 처져 있다.
“어떻게 뚫어야 하나?”
뇌군이 그에게 준 ‘천하무적 기관진법’ 비급서가 도움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그 책의 내용이 제갈세가 외에 마교에서도 효과적으로 작동하기를 바랄 뿐이다.
***
묵천마령은 천마각 안으로 들어섰다.
이곳은 그가 밥 먹듯이 드나들던 장소이지만, 홀로 천마를 독대하는 일은 대단히 드물었다. 대부분 다른 마교수호사령과 함께였다.
마교수호사령은 모두 넷이었으나 그 맡은 임무는 각기 달랐다.
수호사령의 맏형격이라 할 금천마령과 은천마령은 천마의 호법이 주된 임무였다. 그들은 있는 듯 없는 듯 천마의 주변을 맴돌면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그들의 무공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천마를 제외하고는 마교 최강이라고 짐작할 뿐이었다.
묵천마령은 총단 내의 일반 사무를 총괄했다. 그는 수많은 마교도가 불편 없이 무공을 수련하도록 조직을 움직이고 배치했다. 마교의 내부 움직임에 가장 정통한 사람이 바로 그였다.
단천마령은 천마의 손발 역할을 했다. 그녀는 천마의 총애를 바탕으로 마교 내의 문제를 단숨에 해결했고, 중원을 오가며 각종 정보를 수집하고 무림사에 개입했다.
천마를 가장 가까이에서 보필하고 마교를 지배하는 자가 바로 마교수호사령이었다. 마교의 주력부대를 직접 지휘하는 마교칠왕도 마교수호사령에게만은 한 수 접어줄 정도였다.
그렇게 임무가 나뉘어 있어도 묵천마령이 단독으로 천마를 만날 기회는 흔치 않았다. 그가 천마를 만날 때는 모두가 모인 회의 때가 대부분이었고 설령 독대라고 해도 금천마령이나 은천마령이 항상 근거리에서 호위하는 상태였다.
“왔나?”
단상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천마를 확인한 묵천마령은 손을 모으고 허리를 굽혔다.
“묵천마령입니다.”
“어서 오라.”
묵천마령은 조심스럽게 천마의 이 장 앞까지 걸음을 옮겼다.
힐끔 둘러본 대전 내부에는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천마 주변 공간에서 금천마령이나 은천마령의 기운마저 느껴지지 않았다.
평소와 다른 분위기가 묵천마령을 오히려 긴장되게 했다. 이처럼 긴장이 증폭되는 이유는 단천마령의 의도를 짐작했기 때문이다.
“앉지.”
천마가 머무는 단상 아래 넓은 좌석 하나가 놓여있었다. 천마와의 대화가 길어질 때를 대비해 준비해둔 좌석이다.
다만 이 자리에 묵천마령은 지금껏 앉아 본 기억이 없었다. 아니, 다른 누가 앉은 것을 본 적도 없었다. 그만큼 천마가 주재한 회의나 대화는 금방 끝났다. 천마의 일방적인 명령이 전달되는 자리이니 시간이 걸릴 일이 없다.
그런데 자리에 앉으라니? 묵천마령은 내심 불안감이 증폭했다.
소소한 교의 문제점이 오간 후 천마가 껄끄러운 핵심을 건드렸다.
“요즘 단천마령은 무엇을 하고 있나?”
“처소에서 휴식 중입니다.”
예전에도 천마는 단천마령과의 사이가 가까운지 물었었다. 그때와 비슷하게 다시 단천마령 관련 질문이 들어왔기에 묵천마령은 극도로 긴장했다.
“여전히 중원으로 나갈 생각은 없고?”
“아닙니다. 수하 둘을 먼저 내보낸 것으로 압니다. 그러니 조만간 움직임이 있겠지요.”
“흐음, 그래?”
천마의 예리한 시선이 묵천마령을 훑었다.
묵천마령은 간이 오그라드는 느낌에 자신도 모르게 경련을 일으켰다.
“단천마령이 자네에게 부탁한 일이 있나?”
얼핏 단조롭고 평상적인 질문이었으나 묵천마령은 머릿속이 하얘졌다. 천마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일었다.
천마를 모신지 벌써 스무 해가 넘었건만 여전히 천마는 오리무중의 인물이었다.
무공 수준이 어느 정도일지 예측할 수 없고 교의 배신자를 어떻게 걸러내는지조차 비밀에 싸여 있었다.
신기하게도 지금의 천마는 어릴 때 최정상 자리인 천마에 올라 지금까지 아무런 말썽 없이 무난하게 직위를 수행했다.
교 내부에서만 그렇다면 이상할 것 없지만, 중원 무림과의 관계에서도 정말 무난하게 이끌어왔다. 마치 수십 년 천마를 역임한 사람이 다시 천마직을 수행하는 것처럼.
일반적인 인간과는 다른 천마이기에 묵천마령은 경외심을 감출 수 없었다.
“별다른 부탁은 없었습니다. 단지 소소한…….”
“소소한?”
천마의 입가에 기분 나쁜 미소가 걸렸다.
묵천마령은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그는 천마의 눈치를 살폈다. 천마 앞에서 감히 본색을 유지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를 노려보던 천마가 천천히 손을 허공으로 뻗었다.
순간 알 수 없는 힘이 묵천마령의 목을 졸랐다.
콱!
“크억!”
묵천마령은 목을 죄는 힘을 어떻게 해보려 했으나 몸 전제를 꼼짝할 수 없었다. 심지어 양손마저 묶인 듯 움직일 수 없었다.
“단천마령과 무슨 작당을 했지?”
“크억! 자, 작당은 없…… 크억!”
숨이 막힌 묵천마령은 의자에 앉은 채 버둥거렸다. 자신의 내력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무지막지한 압박이 전신에 가해졌다. 온몸이 짜부라드는 고통 속에 묵천마령은 천마를 향해 눈빛으로 호소했다.
천마가 허공에 뻗은 손가락을 천천히 거머쥐었다.
묵천마령의 고통이 한층 증가했다. 이제 묵천마령은 아무런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천마는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대단했다. 무공 격차도 엄청나서 감히 그가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그는 단천마령을 떠올렸다.
단천마령이 기습하면 천마를 해치울 수 있을까. 예전에는 어쩌면 운이 좋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천마의 무공을 확인한 순간 그는 생각을 바꿨다. 운이 아무리 좋아도 절대 천마를 이길 수 없다. 단천마령은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결과가 나온 순간 묵천마령의 의지는 약해졌다. 단천마령을 도우면 죽음뿐이다. 절대 이길 수 없는 승부에 목숨을 걸 바보는 없다.
“크억! 처, 천마시여…….”
“말하라.”
“제, 제발…… 요, 용서를……. 크아악!”
묵천마령은 온몸을 짓누르는 고통에 비명을 터트렸다. 천마의 분노가 그의 몸을 갈기갈기 찢을 듯했다.
묵천마령의 고통은 거의 일각이 지나서야 완화됐다. 그동안 그는 지옥을 몇 번이나 오갔다.
솜처럼 축 늘어진 그는 간신히 단천마령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리며 천마에게 대답했다.
“흠, 그래, 단천마령이 나와 독대하고 싶어 했단 말이지?”
“그, 그게 불충은 아니고…… 사정을 설명하려고…….”
“물론 안다. 그렇겠지. 단천마령이 감히 나에게 반기를 들 리 있겠느냐?”
천마의 안면에 분노가 드리워졌다.
혼비백산한 묵천마령이 덜덜 떨면서 시선을 내리깔았다. 구속하던 천마의 기운은 풀렸으나 묵천마령은 감히 몸을 세울 수 없었다.
“좋아, 넌 모른 척하고 단천마령이 원하는 대로 해주거라. 단천마령이 무슨 짓을 하고자 하는지 내가 친히 확인해보겠다.”
천마의 얼굴에 사이한 미소가 감돌았다.
묵천마령은 간신히 몸을 일으켜 허리를 숙였다.
“명을 받듭니다.”
묵천마령은 눈앞이 캄캄했다. 단천마령을 도와주려다가 오히려 최악으로 빠졌다. 천마가 눈치챈 이상 단천마령이 목적을 달성할 가능성은 더욱 암담해졌다.
그녀는 어떻게 될까. 천마는 그녀를 어떻게 처리할까.
지금까지 마교에서 마교수호사령이 반기를 든 적은 없었다. 그렇기에 단천마령에게 무슨 일이 발생할지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묵천마령은 다가올 처절한 현실에 기분이 가라앉았다. 어쨌거나 단천마령은 그와 가까이 지내며 돌봐주던 사이였으니까.
***
쏴아아아-
폭우가 쏟아졌다.
더운 날씨를 한풀 꺾이게 만드는 시원한 소나기였다.
야산을 가로지르는 산길에서 비를 만난 주석하는 주위를 둘러보며 비를 피할 곳을 찾았다.
이곳은 땅이 척박한 고산지대라 울창한 나무마저 드물었다. 황량한 불모지를 연상케 하는 험준한 산속에서 비를 피할 마땅한 곳이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군. 그냥 맞아야지. 이참에 옷도 빨고 좋구나!”
주석하는 태연하게 비를 맞았다. 머리에서 떨어지는 빗물 때문에 눈을 뜨기 쉽지 않았다.
어쨌든 비를 맞고 있으니 속이 시원했다.
비가 내리자 우설금이 더욱 그리워졌다. 그녀와 함께 다닐 때는 홍철산을 펴고 그 아래에서 함께 비를 피했었는데.
비를 핑계로 딱 들러붙어 다니면 그녀의 향기를 맡을 수 있었고 마음도 설렜다.
이제는 꿈도 꿀 수 없는 아련한 추억에 그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내가 갈 때까지 무사히 살아있어야 해.’
지금 그가 바라는 오직 하나의 소원이었다.
중간중간에 천리비행공을 이용해서 걸음을 재촉했으나 십만대산까지 가는 길은 너무 멀었다. 아직도 며칠을 더 가야 한다. 그나마 주변 경치를 보면 슬슬 목적지가 다가오는 것 같아 한결 마음이 놓였다.
비를 맞으며 터벅터벅 걷자니 산길 저 앞에서 걸어가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 역시 비를 맞으며 걷고 있었다.
비가 오는데도 강행군을 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호기심이 동한 그는 빠른 걸음으로 그 무리를 따라잡았다.
대략 서른 명가량 되는 사람들이 줄을 지어 이동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들 대부분은 손에 밧줄이 감겨 있었고 죽립을 쓴 험한 인상의 다섯 명이 몰아붙이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채찍이 들려 있어 뒤처지는 자를 후려치며 재촉했다.
흡사 전쟁포로가 이동하는 모습처럼 보였다.
이런 외딴곳에 전쟁이 있었을 리 만무하고 옷차림으로 보아 관병도 아니었다. 주석하는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