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화 마교로 (2)
비를 맞으며 주석하는 조용히 뒤를 따라갔다.
그는 일정 거리를 유지했고 그들에게 관심이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가끔 뒤를 돌아보면서 인상을 찌푸리던 녀석들도 그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빗속의 강행군이 고되었던 걸까.
“잠시 쉰다!”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이동하던 자들이 일제히 주저앉았다. 비는 쏟아지고 큰 나무는 없고 나지막한 덤불에 황무지라 쉴 곳이 마땅하지 않았다.
그들을 추월하려니 켕기는 점이 있어 주석하도 거리를 두고 풀이 깔린 땅에 주저앉았다.
사위는 평화로웠고 쏟아지는 빗소리는 요란했다.
그가 신경을 접고 십만대산까지 남은 거리를 고민할 때였다.
“잡아라!”
난데없는 고함과 함께 휴식 취하던 무리 쪽에서 소동이 일었다.
놀랍게도 포로처럼 보이던 녀석들 수 명이 사방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그들은 손에 묶인 밧줄을 풀고 사력을 다해 주변의 숲으로 뛰었다.
이들을 몰고 가던 녀석들은 불과 다섯뿐이었기에 도망치는 녀석들 전부를 잡으려니 수가 부족했다.
남은 녀석을 감시하는 한 명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도망치는 녀석들을 쫓아 사방으로 뛰었다.
“감히 이것들이 도망을 쳐?”
순식간에 눈앞에 활극이 재현됐다.
주석하는 무심하게 그 광경을 바라봤다. 그는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괜히 저런 일에 휘말리면 피곤해지니까.
그 순간 도망치던 한 명이 주석하에게로 달려왔다.
이왕이면 잡목이 무성한 지대로 도망칠 것이지 하필이면 방금 지나온 길을 따라 뒤쪽에서 쉬고 있는 그에게 달려오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악! 저, 저 좀 구해주세요!”
여인의 목소리였다.
주석하는 시선을 돌리고 자신의 바로 앞에서 도망치다 엎어져서 호소하는 인물을 살폈다.
“어?”
두 사람이 동시에 반응을 일으켰다. 쓰러진 여인이 주석하를 보고 아는 척했다.
주석하도 어디에선가 본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다만 어디에서 보았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저, 저 모르세요?”
“누, 누구?”
“아, 악홍아요! 운남 광천곡의…….”
바로 기억나지 않아 한참 고민한 끝에 주석하는 이 여인이 누구인지 기억해냈다.
독군을 만나고 돌아오던 길에 야밤에 만났던 광천곡 사람이다.
광천곡 소곡주라고 했던가? 그때 광천곡은 사마세가의 공격을 받아 거의 멸문 상태였는데 오늘 또 이런 꼴이 되어 나타나다니?
그녀가 고수는 아니었지만 어디 가서 이런 수모를 당할 무공 수준은 아닌데 무슨 일이 있었나?
“아! 기억납니다만.”
주석하가 기억해내자 악홍아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마치 구세주를 만난 표정이었다.
“흑흑, 나 좀 구해주세요! 제발요!”
그때도 구해줬던 것 같은데? 어째 지금 상황은 그때보다 더 나빠진 것 같았다. 매정하게 거절할 수는 없어 건성으로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저들이 산공독을 먹이고 잡아가는 거예요. 저기 잡힌 사람들 대부분이 중원 무림인이에요.”
어쩐지 행렬이 심상치 않아 보이더라니. 그래도 잘 이해되지 않았다.
“저들이 누군데요?”
“마, 마교……. 갑자기 쳐들어와서 멸문시키고 주요 인물을 잡아가고 있어요! 제발 구해주세요!”
악홍아가 눈물과 콧물이 범벅된 채 하소연했다.
마교의 주력부대가 휩쓴 지역에서 정파 사파를 불문하고 수많은 방파가 멸문당했다고 들었다.
그런데 단순히 멸문만은 아닌 모양이다. 멸문 후에 인질을 포로로 잡아 십만대산으로 끌고 가는 건가?
왜 끌고 가는지 알 수 없으나 이것은 새로운 문제였다. 사실 이런 행동이 중원 무림의 마교에 대한 반감을 더욱 키운다.
대충 상황 파악을 끝냈으나 주석하는 도울지 말지 고민했다. 십만대산으로 가는 상황에서 여기에서부터 마교와 싸워서 주목받으면 전략상 좋지 않다. 게다가 이들을 구해봐야 그에게 돌아올 이득은 전혀 없다.
사실 그가 마교를 싫어하긴 하지만, 이번 생에서 마교가 그에게 해를 끼친 일은 없다. 오히려 정파인들이 그를 더 괴롭혔다. 악홍아와 친한 것도 아니고 예전에 우연히 엮였을 뿐이다.
물론 그때 악홍아가 보답할 시간이 없긴 했으나 당시 그녀는 고맙다는 말 한마디만 하고 떠났었다.
이런저런 일들이 그가 이 사건에 끼어들기를 망설이게 했다.
주석하의 시큰둥한 표정에 악홍아는 더욱 결사적으로 매달렸다.
그때 묵직한 고함이 들려왔다.
“이놈은 또 뭐야?”
포로를 끌고 가던 마교인이 씩씩대며 다가왔다. 죽립 아래로 보이는 덥수룩한 얼굴이 흉흉했다.
악홍아의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
“이년이! 기껏 여기까지 도망쳤어? 저 자식은 뭐냐? 기둥서방이냐?”
마교인이 악홍아의 팔을 끌었다. 악홍아는 저항하지 못하고 질질 끌려갔다. 악홍아가 다시 자지러질 듯한 비명을 터트리며 도움을 요청했다.
“대, 대협! 나, 날 구해줘요!”
마교인이 곧바로 주석하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네놈! 끼어들면 죽는다!”
주석하는 그들을 힐끔 보고는 바로 시선을 돌렸다. 신경 쓰지 않겠다는 의사표시다.
“흐흐, 주제를 아는군.”
“치사한 겁쟁이!”
악홍아의 비난이 날아들었으나 주석하는 무시했다.
마교인이 악홍아를 몇 대 두들겨 팬 다음 모여 있는 포로 무리에 던졌다.
마교인들이 숫자를 세고 인원을 점검했다.
“한 놈이 망가졌다. 죽기 직전이야.”
“놈이 경고를 무시하고 도망치더라고. 그래서 단검을 던졌더니…… 다리가 날아가 버렸네.”
“서른에서 한 놈이 부족하잖아. 어떡하지?”
“서른 명 아니면 우린 죽음이야.”
놈들이 모여서 쑥덕댔다.
인원을 딱 맞춰서 데려가기로 한 건가?
주석하는 내리는 비를 청승맞게 맞으며 상상의 나래를 폈다. 비가 오니 기분이 울적해졌다.
잠시 후 마교인 한 놈이 그에게 다가왔다.
“이봐! 어디 출신이지?”
“사천입니다만.”
“사천 놈이 여기에는 왜 와? 너 무림인이냐?”
마교인이 말을 거는 속셈이 의심스러웠다. 그가 검이 아닌 퉁소를 들고 있으니 무림인인지 아닌지 혼란스러운 모양이다. 주석하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만.”
“오호! 잘 됐다. 네놈도 같이 가줘야겠다!”
“방금 끼어들지 말라면서요?”
주석하는 억울하다는 항의를 표현했다. 여기까지는 참아줄 생각이다. 이런 일로 손에 피를 묻히고 마교의 주목을 받고 싶지는 않다.
그런데 세상사가 뜻대로 흘러갈까.
“한 놈이 더 필요해졌어! 네놈이 딱이야!”
마교인이 거칠게 그의 팔을 붙잡아 일으켰다.
휴식을 방해받게 된 주석하는 눈을 찌푸리며 물었다.
“당신들은 누굽니까?”
“흐흐! 나? 자는 아이도 울게 만든다는 마교 전사다! 난 이살(二殺)이라고 하지.”
“그럼 저기는?”
주석하는 포로를 다그치고 있는 장한들을 가리켰다.
“일살부터 오살까지다! 흐흐, 죽음의 사자라고 할까, 도망치는 놈 사지 절단이 우리 전문이야!”
이름이 특이했다. 어쩌면 부르기 편할지도.
죽립 아래로 시퍼런 눈을 부릅뜨고 이살이 막무가내로 주석하를 끌고 갔다.
“하아, 왜 이럽니까?”
“네놈은 지금부터 포로다! 반항하면 터진다.”
버티는 주석하를 이살이 발길질로 걷어찼다.
주석하는 슬쩍 몸을 비틀며 놈의 발길질을 피했다.
“어? 이 자식 봐라?”
주석하가 반항한다고 여긴 이살이 잡은 옷을 끌어당기며 주먹을 꽉 쥐었다.
“조용히 데려가려 했는데 매를 버는구나! 매를!”
이살이 대수롭지 않게 솥뚜껑만한 손을 휘두르며 그의 안면을 후려쳤다.
턱!
순식간에 주석하의 손이 이살의 손을 움켜쥐었다.
“어? 이 새끼 제법 하는데?”
그 순간 주석하는 녀석의 손을 확 꺾었다.
“아악!”
녀석이 비명을 터트리며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난데없는 난리에 다른 마교인들이 뛰어왔다.
“뭐야?”
“이놈 무림인이었어?”
“씨벌! 죽으려고 환장했구나!”
분노를 터트리며 마교인들이 포위했다. 다만 여전히 이살의 손이 주석하에게 잡혀 있어서 바로 공격하지 못하고 눈치를 봤다.
주석하는 싸늘하게 그들을 노려보며 말했다.
“이것들아! 오늘 이 형님이 좀 피곤하거든! 그러니까 좋은 말로 할 때 그만 가라. 우리 안 본 거로 하자, 응?”
“크으으윽!”
주석하가 손에 힘을 가하자 손목이 꺾인 이살이 신음을 고래고래 질렀다.
주석하는 피식 웃으며 이살의 손을 놓아주었다. 이살은 균형을 잡지 못하고 바닥에 나뒹굴었다.
주석하는 신경 쓰기 싫다는 듯 한가롭게 몸을 돌렸다. 물론 이것은 마교인들을 시험하는 덫이었다.
수치심이 가득한 이살과 그 옆에 있던 일살, 삼살이 바로 반응했다.
“죽어!”
주석하의 등으로 세 자루의 검이 날아왔다.
주석하가 대처하지 않는다면 세 개의 검이 그의 목과 등과 허리를 찌를 것이다. 당연히 목숨을 끊을 치명적인 수다.
주석하가 꼼짝도 하지 않자 정작 검을 날린 마교인들이 주춤했다.
상대가 초절정 하수라 뒤에서 검이 날아드는 것조차 모르고 있는 건가? 물론 그렇다고 검을 거둘 녀석들은 아니었다.
깡!
놀랍게도 등을 후려친 검에서 금속음이 터졌다.
마교인들의 입이 쩍 벌어졌다. 마치 쇳덩이를 친 것처럼 그들이 휘두른 검은 주석하의 몸에 생채기조차 내지 못했다.
“허억! 이게 뭔 일이야?”
“젠장! 이빨이 빠졌나?”
“그, 금강불괴?”
그 순간 주석하가 몸을 돌렸다. 그는 세 놈을 노려보며 싸늘한 음성을 내뱉었다.
“딱 거기까지다! 그만 가거라.”
“이 빌어먹을 놈이!”
당연히 마교에서는 약자를 보호하거나 한 수 접어주는 법이 없다. 마교의 강자는 항상 무자비했고 상대를 피하는 자는 실력이 부족해서다.
그런 분위기에서 자란 마교인들은 주석하가 그들을 두려워하여 몸을 움츠린다고 생각했다. 방금 초식 실패는 운이 나빴던 때문이라고 치부했다.
휘이익-
재차 검이 날았다.
주석하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호의를 호의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들이 많다. 약자를 괴롭히는 행동을 당연한 권리라 여기는 자도 많다.
그렇다면 대가를 치러야 한다.
주석하는 여유롭게 손을 들어 몰려오는 검을 향해 사선으로 그었다.
서걱-
뚝!
세 자루의 검이 마치 대나무가 부러지듯 토막 났다.
“헉!”
“이, 이거 뭐냐?”
놀란 녀석들이 눈을 부릅떴다. 방금 주석하가 선보인 신위는 화존에게서 배운 백옥수였다.
“불쌍한 것들.”
주석하는 나지막이 중얼거리면서 다시 손을 쓱 그었다.
투툭-
녀석들이 쓴 죽립이 쪼개졌다. 쏟아지는 비가 녀석들의 얼굴에 그대로 들이쳤다.
“고, 고수다…….”
그제야 일살, 이살, 삼살은 사람을 잘못 건드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상대는 감히 그들이 넘볼 수 없는 자였다. 최근에 중원을 활보하면서 만난 적이 없는 초강고수였다.
“네놈들은 살 기회를 떠나보냈다.”
“시, 실수다! 그게 아니야!”
주석하는 그들의 반응을 무시했다. 이들은 주어진 기회를 발로 차 버린 대가를 치러야 한다.
두려움에 질린 녀석들이 도망치려 했다. 그들의 등에 주석하의 백옥수가 꽂혔다. 무방비 상태였기에 전혀 방해받지 않고 수강이 몸을 관통했다.
“크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세 마교인이 꼬꾸라졌다. 범 무서운 줄 모르고 설치던 하룻강아지의 비참한 죽음이었다.
포로를 감시하던 사살과 오살이 무심코 시선을 돌리다가 이 장면을 목격했다. 도망치던 세 동료가 꼬꾸라지고 피를 토하며 쓰러지고 있었다.
사살과 오살은 순간 판단력이 빨랐다.
적의 무위는 그들이 상대할 수준을 훨씬 넘어섰다. 그렇기에 두 사람은 앞뒤를 가리지 않고 바로 몸을 날렸다.
당연히 주석하가 있는 방향이 아니라 도망치는 방향이었다.
“미친놈들.”
주석하는 실소를 머금으며 녀석들을 추격하려 했다. 어쨌든 이곳은 마교 주변이고 그의 접근이 알려지면 골치 아프다.
도망치는 사살과 오살 앞에 희고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허억!”
“우리 편?”
두 마교인이 반색하며 환호성을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