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화 마교 입성 (2)
밤이 이슥해질 무렵 우설금은 묵천마령의 통지를 받았다.
“지금 천마각에 가보시오.”
낮이 아닌 밤이라 다소 의외였다.
의문을 비치는 우설금에게 묵천마령이 설명을 추가했다.
“오늘 적의 습격을 대비한 방어 훈련을 한다고 하오. 그 때문에 금천마령과 은천마령이 천주문으로 향했소. 나도 곧 참가해야 하오.”
그런 방어 계획을 우설금은 들은 적이 없었다. 그녀도 마교수호사령이니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하는 사안이다.
그녀의 궁금증을 풀어주려는 듯 묵천마령이 재차 다그쳤다.
“아마 당신은 중원 원정 임무를 부여받아 제외했을 거요.”
우설금은 덕양으로 가서 마교칠왕과 합류하라던 천마의 명을 떠올렸다. 그 명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답답해진다.
“알았어요.”
우설금은 묵천마령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동안 천마가 홀로 있을 때를 기다려왔다.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묵천마령은 몇 번이고 금천마령과 은천마령을 불러 자리를 만들려고 했으나 그마저 실패했다고 했었다.
그러던 차에 기회가 갑작스럽게 찾아온 것이다.
조만간 중원으로 가야 하기에 우설금은 따질 겨를이 없었다. 어차피 단 한 번의 기습으로 결판난다.
그렇다면 긴 시간은 필요치 않다. 승패는 그녀가 천마에게 얼마나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느냐에 달렸을 뿐.
묵천마령이 우려를 표하고 사라졌다.
우설금은 홍철산을 챙기고 처소를 나왔다.
땅에 드리워진 그림자에 그녀는 시선을 들어 하늘을 쳐다봤다. 환한 보름달이 떠 있었다. 그녀는 그 속에서 주석하의 얼굴을 봤다.
‘그 사람도 지금 달을 보고 있으려나?’
함께 달을 보았던 그때를 떠올리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오늘 밤을 넘기면 그녀는 다시 그와 함께 달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그녀의 유일한 소망이다. 하지만 과연 이 밤을 살아서 넘길 수 있을까.
천마를 떠올리자 위압감에 숨이 턱턱 막혔다.
어느새 천마각에 도착했다.
우설금을 제지하는 자는 없었다.
익숙한 걸음으로 그녀는 대전 내부로 들어갔다.
그녀를 억누르는 마기가 스며든다. 천마가 그녀를 맞이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마치 그녀의 방문을 환영하는 느낌이다.
“단천마령입니다.”
단상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우설금은 허리를 숙였다.
그녀를 억압하던 마기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들어오라.”
예상외로 천마는 별다른 이유를 묻지 않고 그녀의 알현을 허락했다.
우설금은 단상 위를 쳐다봤다. 평소처럼 천마가 옥좌에 앉아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서 천하를 군림하는 제왕의 풍모가 엿보였다. 역시 천마는 평범한 인물이 아니었다.
떨리는 가슴을 다잡으면서 우설금은 한발씩 가까이 갔다.
단상 앞에 이르렀을 때 우설금은 기감을 이용해 대전 내부에 숨어 있을 호위들을 가늠했다.
묵천마령의 장담대로 금천마령과 은천마령의 기운이 사라졌다. 지금 천마는 혼자였다. 그녀가 그토록 바랐던 둘만의 독대였다.
“무슨 일인가?”
묵직한 천마의 질문이 떨어졌을 때 우설금은 간신히 제정신을 차렸다.
“드릴 말씀이…….”
“그래, 무엇이냐?”
천마의 목소리는 의외로 부드러웠다. 예전에 그녀가 어렸을 때 가끔 이처럼 자상한 천마를 접한 적이 있긴 했다.
그런 천마에게 그녀는 아버지 같은 정을 느끼곤 했었다. 물론 자상한 천마보다 엄격하고 존엄한 천마를 훨씬 자주 만났지만.
“……저에게 내린 명을 거두어주십시오.”
우설금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물론 딱히 할 말은 없다. 어차피 작전을 실행했고 오늘이 지나면 결과와 무관하게 모든 관계가 끊어지니 어떤 대화든 무슨 상관인가.
단지 지금 그녀가 천마에게 한 발짝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설 핑계라면 충분했다.
“마교도라면 천마의 명을 거부할 권리가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을 텐데?”
“그래서 아무도 없는 이 시각에 찾아왔습니다.”
“클클, 좋아! 합당한 이유가 있느냐?”
무슨 대답을 해야 할까. 말이 안 되더라도 변명거리를 지어내야 하는데…… 머리를 굴릴 시간이 없다. 천마가 눈치채면 대참사가 발생하리라.
“……저는 주 공자를 해치지 못합니다.”
이미 짐작했다는 듯 천마가 무뚝뚝한 어조로 다시 물었다.
“왜 그렇지? 그는 우리의 원수인 중원 무림인이다.”
“……그는 저를 따뜻하게 대했습니다.”
“흠, 정이 생겼구나.”
대수롭지 않다는 듯 천마가 잔잔한 미소를 떠올렸다.
우설금은 한발 앞으로 다가가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를 척살 대상에서 빼주세요.”
“그가 마교칠왕을 죽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겠지?”
“……그를 책임지고 교로 끌어들이겠습니다. 그러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우설금의 목소리에 울음이 맺혔다.
천마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우설금은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다만 아직 천마는 그녀의 계획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이제 손을 써야 한다. 대화를 더 진행하면 자칫 음모를 들킬 위험이 커진다.
우설금은 암암리에 내력을 끌어올렸다. 그녀의 몸에서 자연스럽게 마기가 뿜어졌다.
다만 지금 그녀는 북받치는 울음을 참고 있기에, 천마는 감정의 동요 때문이라 생각해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것이다.
“힘든가 보구나.”
“…….”
“올라와 보거라.”
천마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뜻하지 않은 기회가 발생하자 우설금은 내심 놀랐다.
단상을 어떻게 올라가서 접근할지 고민하던 차였다. 그런데 천마가 자애로운 분위기 속에서 먼저 손을 내밀다니.
우설금의 가슴이 널뛰었다. 이제 단상으로 올라가 자연스럽게 접근하며 천마에게 일격을 가할 것이다.
천마에게 의심받기 전에 최대로 공력을 끌어올리고 전력을 다해 공격해야 한다.
공격이 성공하면 그녀는 살고 실패하면 죽는다.
우설금은 모사재인(謀事在人) 성사재천(成事在天)을 되뇌었다. 성공 여부는 하늘에 달려있다.
성공 가능성이 극히 적다는 사실을 그녀도 안다.
설사 성공하더라도 그녀는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다. 천마의 뒤에는 금천마령과 은천마령이 있으니까.
점점 그녀의 마음이 차가워지고 냉정해졌다.
우설금은 가녀린 척 연기하면서 조심스럽게 단상을 올라갔다.
“이리 오거라.”
천마는 내민 손을 거두지 않았다.
천마 앞에서 우설금은 가져온 홍철산을 옆으로 두려는 듯 만지작거렸다. 그녀의 내력이 홍철산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 순간 갑자기 가슴이 턱 막혔다.
“으윽!”
천마가 천천히 손을 위로 들었다.
우설금의 몸이 마치 줄에 엮인 듯 허공으로 떠올랐다.
작전이 실패했다!
강한 고통이 밀려들었다. 우설금은 허공에 매달린 채 발버둥 쳤다. 그녀는 내력을 모두 끌어올려 천마의 힘에 대항했다.
콰지지직-
그녀와 천마가 발산하는 마기가 뒤엉키면서 대전 안에 폭풍이 몰아쳤다. 충격파가 대전 벽을 때리고 내부에 설치된 조각상을 파괴했다.
“감히 네년이 나를 배반해!”
천마의 호통이 우설금의 전신을 압박했다.
“으으윽, 어, 어떻게…….”
“흐흐, 묵천마령이 이미 너의 배신을 나에게 고했다. 오늘 이 자리는 내가 마련한 자리다. 묵천마령이 마련한 자리가 아니라.”
우설금은 눈앞이 캄캄했다. 자신의 편이라고 여겼던 묵천마령마저 천마의 손을 들어줬다니.
그렇다면 애초부터 이 작전은 성공 가능성이 없었던 걸까.
낙담한 우설금은 고통에 일그러진 눈빛으로 천마를 노려보았다.
지금까지 막연하게 천마가 강하리라고 추측했었다. 그런데 막상 겨루어본 소감은 확연히 달랐다.
역시 천마는 그녀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경지에 닿아 있었다. 이런 천마를 죽이겠다고 계획했으니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가!
“네가 주석하와 놀아날 때 본좌는 이런 결과를 예상했었다. 난 너를 정에 얽매이지 않는 철의 여인으로 키웠는데 넌 아니었던 모양이구나. 넌 나의 기대를 완전히 저버렸다.”
“으으윽! 원수!”
우설금은 허공에 매달린 채 발버둥 쳤다.
천마가 억누르는 무지막지한 기운이 그녀를 꼼짝 못 하게 했다.
지금 그녀가 전력을 다한 내력은 정파십존의 두 배를 훌쩍 넘어서는 엄청난 힘이었으나 천마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천마는 마기로 그녀의 목을 조르고 그녀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제한했다.
그녀는 강하게 저항했으나 판세를 바꿀 수 없었다. 마치 온몸이 결박된 듯 무기력했다. 그녀가 내력을 끌어올릴수록 고통이 가중됐다.
“하아! 하아!”
그녀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새어 나왔다.
천마가 비릿한 미소를 띠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터트렸다.
“으하하! 원수라? 불존에게 모든 사실을 들었구나?”
“그, 그렇다!”
“그럼 부모가 누군지도 알겠군? 그때 무슨 일이 벌어졌었는지 아느냐?”
“으으으!”
우설금은 발버둥 치면서 천마를 노려봤다. 부모 이야기가 나오자 그녀는 한없는 좌절에 빠졌다.
천마가 천천히 옥좌에서 일어났다. 그는 허공에 매달린 우설금 주위를 천천히 돌면서 이야기를 풀었다.
“알다시피 너의 아버지는 우경천, 그는 구주사은이라 불렸던 우청엽의 아들이다. 너의 어머니는 이가흔, 하남의 무림세가인 이가장의 후손이지. 우청엽은 멸마를 외쳤던 자로 당시 마교 최고의 원수였다. 선대 천마와 여러모로 얽혔던 성가신 인물이었지.”천마가 구주사은을 설명했다.
우설금이 주석하에게 들었던 내용과 거의 동일했다.
“구주사은과 싸운 이유는 배교의 신물 때문이었다. 무한회귀공, 만리안석, 여의신단이 바로 중요한 배교 신물이다.”
이미 우설금은 만리안석과 여의신단을 접한 바 있다. 하지만 그녀는 무한회귀공의 공능을 알지 못했다.
“처음 우청엽을 중심으로 특수대를 조직해서 마교를 공격했을 때 그들은 거의 성공할 뻔했지. 그때 선대 천마는 간신히 신물을 지켜냈다. 그리고 당시 어렸던 나는 선대 천마의 안배에 따라 무한회귀공을 익히게 됐다. 무한회귀공이 뭔지 아느냐?”우설금이 알 리 없었다. 그녀는 전신에 경련을 일으키며 천마를 노려봤다. 금방 죽을 것 같은 고통이 엄습했으나 죽음은 아직 저만치 멀리 있었다.
“무한회귀공은 역천의 무공이다. 이 무공을 익히면 시간을 되돌리고 회귀자가 될 수 있다. 어렸던 나는 그때부터 시간을 되돌려 우청엽을 막아냈다. 그리고 나는 무한회귀공의 공능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시간을 되돌려 회귀할 때마다 나는 점점 강해졌다. 반복해서 희귀 영약을 섭취했고 무공 수련 또한 반복했다. 시간 부족으로 성취가 힘든 무공도 나에게는 장애가 될 수 없었다. 무한회귀공이 나에게 무한의 시간을 제공했으니까.”우설금은 처음에 천마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무한회귀공의 신비한 공능에 두려움이 일었다. 천마가 강한 이유가 명확하게 밝혀졌다.
“우청엽이 마지막으로 쳐들어왔을 때는 대략 이십 년 전이었다. 그때 나는 우청엽과의 질긴 악연을 끝낼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이 마교를 습격했을 때 우청엽, 우경천, 이가흔을 죽였다. 즉, 네 조부, 부친, 모친을 내가 죽였단 말이다.”
“으으으.”
천마는 원수였다!
이미 짐작했던 사실이지만 천마의 입으로 직접 듣게 되자 우설금은 절망에 사로잡혔다. 원수에게 복수하지 못하고 그녀마저 원수의 손에 떨어지다니.
“정확하게는 죽기 직전에 이가흔이 너를 회임하고 있음을 털어놓았다. 나는 그녀를 죽이려던 계획을 바꾸었다. 중원 영웅의 자손이 마교의 앞잡이가 되어 중원을 침략하는 흥미로운 계략이 떠올랐기 때문이지.”천마는 뜻을 실행에 옮겼다.
우설금은 천마의 배려로 이 세상에 태어났고, 그녀의 부모와 조부는 그 직후 천마의 손에 죽었다. 그리고 그녀는 철저하게 천마의 의도에 맞추어 길러졌다.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더라면. 이 순간만큼은 부모가 원망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