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검천하-233화 (233/273)

233화 죽음과 삶 (1)

“저놈들이 은혜를 모르는군. 저놈들을 네게 붙여 준 게 본좌였지?”

천마의 시선이 다시 우설금을 향했다.

우설금은 흑귀와 백귀의 비참한 죽음에 참담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마교 내에서 그녀의 유일한 동료이자 같은 편인 두 사람이 사라졌다.

그들을 구하려고 발버둥쳤으나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녀는 여전히 허공에 매달려 몸부림치고 있었다.

“나에게 향해야 할 충성심이 너에게로 갔구나. 수완이 대단해.”

“자, 잔인한…….”

“회귀하면 저놈들부터 처리해 버릴 것이다. 단천마령! 후회해봐야 이미 늦었다. 다음 생에는 너는 나의 충실한 개로 돌아갈 것이니. 주석하 그놈은 어찌 되었을까? 세 마교수호사령을 뚫고 과연 여기까지 올 수 있을까?”금천마령, 은천마령, 묵천마령의 저지를 뚫을 수 있을까.

우설금은 절망에 사로잡혔다. 주석하가 강하지만 그들의 합공 또한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다.

마교수호사령의 강함은 그녀가 더 잘 아니까. 비록 그녀가 빠진 세 사람만의 합공이라 그 위력이 감소했겠지만.

주석하가 목숨만은 건지기를 그녀는 간절히 바랐다.

어차피 의미 없는 일인가. 그들의 저지를 뚫고 난 후, 주석하는 이곳으로 올 것이고 천마에게 비참한 죽음을 맞을 테니.

설사 그 모든 난관을 극복하더라도 천마가 무한회귀공으로 십 년 전으로 돌아가면 다시 천마의 개로 살아야 하나? 차라리 바로 죽는 게 더 행복한 삶일까.

끝이 보이지 않는 좌절감에 우설금은 힘이 쭉 빠졌다.

천마의 마기가 그녀를 억압했다. 숨이 막혀왔다. 희망이 사라진 그녀의 낯빛은 암울했다.

그때 그녀에게 천마각의 높은 창문이 보였다. 마침 그곳으로 달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보름달이다.

우설금은 주석하와 함께 봤던 그 보름달을 떠올렸다. 보름달 속에서 그가 웃고 있었는데…….

지금도 보름달 속에서 주석하의 얼굴이 떠올라 있었다.

- 힘내!

주석하가 그녀에게 외치고 있었다.

우설금은 왈칵 눈물을 쏟았다.

‘난 이제 끝날 것 같아……. 당신은 절대 이곳으로 오면 안 돼. 당신만의 세상을 찾아.’

달 속의 주석하 얼굴이 일렁였다. 눈물 때문이었다.

***

콰아앙!

마벽이 깨졌다.

금빛 은빛 묵빛의 마벽이 저돌적으로 돌진하는 주석하를 막지 못하고 산산이 조각났다.

“으으윽!”

마벽이 깨지면서 마기의 흐름에 이상이 생긴 세 마교수호사령은 피를 쏟았다. 내상의 징후가 발생하고 전신이 사시나무처럼 떨려왔다.

방금 발생한 충격파가 그들을 혼란과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마교에서 최정상을 달리던 그들이다. 중원 무림을 얕잡아봤었다. 그런데 불과 약관의 청년이 그들 셋의 합공을 버텼다.

심지어 그놈은 지금 그들이 연합한 최고 절기인 마벽을…….

“또 세워봐!”

흑검소를 앞세우며 주석하가 재 돌파 신호를 보냈다. 무지막지한 내공으로도, 젊다는 패기로도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저놈에게 있었다.

육중한 천주문이 깨진 믿을 수 없는 현상을 이제야 이해했다. 저놈은 인간이 아니었다.

“그래도 네놈은 이곳을 벗어날 수 없다!”

금천마령은 남은 내력 전부를 끌어올렸다. 저런 놈이 감히 천마각으로 진입하는 불충을 절대 저지를 수 없었다. 물론 위대하신 천마께서는 저놈이 천마각으로 진입하는 순간 갈가리 찢어버리시겠지만, 천마가 그런 수고를 할 여지를 남겨두어서는 안 된다.

금천마령은 금빛 마기를 끌어 올리며 주석하를 향해 마공을 쏟아부었다.

온 세상이 금빛으로 물든다. 마(魔)가 지배하는 세상이 도래한다.

주석하는 금천마령을 신경 쓰지 않고 전면으로 폭주했다. 흑검소에서 흑검육식이 펼쳐졌다. 흑검소에서 뻗어 나온 검강이 흑검육식의 네 번째, 다섯 번째 초식을 그렸다. 검강은 금천마령만이 아니라 은천마령과 묵천마령까지 휘감았다.

금빛 마기와 은빛 마기가 검강과 대립하면서 상승작용을 일으켰다.

콰아앙!

재차 충격파가 터지고 깨진 검강의 파편이 사방에 박혔다.

지금 이 순간 금천마령과 은천마령의 어떤 마공도 주석하를 막을 수 없었다. 주석하의 강력한 위력에 힘을 쓰지 못하고 깨져나갔다.

“어떻게 이런…….”

경악한 금천마령과 은천마령이 혀를 내두르는 순간 주석하의 신형이 허공을 밟으며 그들을 뛰어넘었다.

마교수호사령의 저지선이 뚫린 것이다.

“이놈이!”

다급해진 금천마령이 주석하의 등으로 금빛 마기를 쏟아냈다. 금천마공이 만들어낸 환영이 마치 독수리처럼 주석하를 공격했다.

쐐애액-

은천마공 역시 포악한 호랑이처럼 주석하를 위협했다.

그 순간 주석하는 몸을 틀었다. 빛보다 더 빠른 절정의 암천살검이 뿌려졌다.

번쩍!

푸아아악-

금빛과 은빛 휘장을 걷어내는 것처럼 하얀빛이 장막을 찢어발겼다.

지금까지 한 번도 격파당한 적 없는 금천마공과 은천마공이 순식간에 붕괴했다. 두 사람의 누적된 내상과 암천살검의 위력 때문이었다.

대체 주석하의 내공이 얼마나 되는지 어떻게 샘물처럼 계속 용솟음치는지 그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세상에는 그들이 가늠할 수 없는 괴물이 존재했다.

그를 저지하려던 마지막 공격마저 실패로 돌아가자 금천마령과 은천마령은 기세가 꺾였다.

암천살검의 위력에 두 마령이 몸을 비틀거리는 순간 암천살검의 다음 초식이 재차 살기를 뿜었다.

서걱-

부상이 심한 마교수호사령은 마교칠왕과 차이가 없었다. 드디어 주석하의 공격이 손쉽게 먹혔다.

암천살검의 속도에 금천마령과 은천마령의 한쪽 팔이 속절없이 떨어졌다. 물론 그것으로 멈출 주석하가 아니었다. 암천살검의 다음 초식이 다시 그들을 공황으로 몰아넣었다.

서걱-

다른 팔마저 불에 덴 듯 충격이 일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금천마령과 은천마령은 금방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다시 하얀빛이 눈앞을 번뜩이며 목으로 들어왔을 때 그들은 자신이 죽음의 문턱에 서 있음을 깨달았다. 마교수호사령도 인간이었고 천하에는 그들보다 더 강한 자가 존재한다는 진리를 이제야 확인했다.

“크악!”

뜨거운 기운이 목을 그었다.

“처, 천마시여…….”

금천마령과 은천마령은 천마각을 바라보면서 절규했다.

그곳을 향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가는 주석하가 보였다. 이곳 마교 총단을 마교도가 아닌 다른 사람이 누비는 치욕이 도래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몸이 무너져 내리면서 전신에 힘이 빠졌다.

그나마 다행인가. 주석하가 단천마령을 구하겠다는 마음이 급해서 그들을 내버려 두고 천마각으로 질풍처럼 날아가고 있으니.

죽음의 문턱을 넘으려다 다시 되돌아온 기분이었다.

그 순간 금천마령과 은천마령은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묵천마령은 대체 어디로 간 거지?

***

묵천마령은 멀어지는 주석하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최근 들어 그의 정신 상태는 혼란스러웠다.

이날이 오기 전까지 그는 천마와 단천마령을 구분하지 않았다.

단천마령은 언제나 천마에게서 가장 총애받는 사람이었고 천마의 복심이었으니까. 단천마령이 자라는 시간을 함께했던 그는 항상 그녀를 응원했고, 그녀의 성장에 박수를 보냈었다.

그런 그녀가 천마에 반기를 들었다.

이해는 했다. 이곳 마교는 평범한 인간이 냉철한 눈으로 판단하면 정말 이상한 동네이니까. 특히 이제 막 사랑에 눈을 뜬 여인이라면, 사랑에 목숨을 건 여인이라면 이상할 행동은 아니다.

다만 상대가 천마이기에 놀랐다. 마교도에게 천마는 그 무엇보다 높은 절대자여서 그녀의 행동이 황당했다.

묵천마령도 천마를 숭배했다. 천마의 권위와 권능을 단 한 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도 그는 단천마령을 응원했다. 그만큼 그녀는 소중했다.

예상치 못했던 일은 아니었다. 단천마령이 일을 벌이기도 전에 천마에게 발각됐다. 그리고 그는 천마에게 질책을 받았다.

아무리 단천마령을 응원한다고 해도 천마를 거역할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천마의 명을 수행했다. 위험에 빠트린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에게 천마가 혼자 있음을 알렸다.

물론 주석하의 침입을 용인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애초에 주석하에게 기대를 걸지 않았고 단천마령에 대한 호감과 주석하의 침입은 별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석하를 맞닥트린 순간부터 그는 혼란에 빠졌다.

마교수호사령을 아득히 넘어서는 새로운 절대자를 맞이한 기분이다. 천마와 비견할 만한, 어쩌면 천마를 넘어설지도 모르는, 인간이 아닌 괴물이었다.

그때부터 묵천마령은 혼란에 빠졌다.

주석하가 이곳을 돌파하면 단천마령을 구할 수도 있지 않을까.

묵천마령은 천마에 반기를 들 담력은 없었으나, 고착화된 체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위를 막고 있는 금천마령과 은천마령을 그는 절대로 넘을 수 없었다. 그동안 금천마령과 은천마령은 천마의 최측근이면서도 마교의 일을 거의 하지 않았다.

마교 내부를 통솔하는 일은 그와 마교칠왕의 임무였고, 대외적인 일은 단천마령이 고생했다.

그런 금천마령과 은천마령을 묵천마령은 좋아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가 아무리 노력해도 그들 위치로 올라갈 수 없다는 정신적 박탈감 때문일지도 몰랐다.

이런 기대와 불만이 주석하를 대적하는 연합 전선에서 미세한 균열을 일으켰다.

의도적은 아니었으나 결과적으로 묵천마령은 전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가 세운 마벽은 평소보다 약했고 최후의 반격조차 그는 시도하지 않았다.

그 덕에 그는 목숨을 살렸다. 주석하가 그를 뛰어넘고 천마각으로 돌진하는 것을 눈을 뜨고 지켜봤다.

예전이라면 있을 수 없는 행동임에도 그는 스스로 납득했다. 주석하가 단천마령을 구해주기를, 조금의 희망을 품었다.

주석하가 사라진 곳을 잠시 쳐다보던 묵천마령이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에 금천마령과 은천마령이 들어왔다. 두 사람은 피투성이가 된 채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주석하의 암천살검에 내상과 외상을 입은 상태였다. 마교의 이인자라는 마교수호사령이 이런 꼴이 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무, 묵천마령! 놈을 막지 않고 대체 무엇을 한 거냐?”

금천마령의 질책이 떨어졌다.

은천마령 또한 비난의 화살을 퍼부었다.

이 둘은 직감적으로 묵천마령이 최선을 다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하아! 그게 말입니다…….”

묵천마령은 긴 숨을 내쉬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심각한 부상을 얻은 두 사람은 그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놈의 대단함은 두 분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제 목숨이 아까워서는 아닙니다.”

“무, 무슨 소리냐?”

금천마령은 이상한 직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째 묵천마령의 대답이 평소와 달랐다.

그 순간 묵천마령에게서 강력한 마기가 발산했다.

“컥!”

금천마령과 은천마령은 엄청난 압박감에 숨을 쉴 수 없었다.

“이, 이놈이 감히 반, 반역을…….”

“반역이라뇨?”

“처, 천마께서 네놈을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묵천마령이 비웃음을 떠올렸다.

“천마께서 이 사실을 아실까요?”

분노를 참지 못한 금천마령과 은천마령이 울컥 선혈을 쏟아냈다.

묵천마령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두 사람에게 죽음을 내리는 지옥사자의 손짓이었다.

“네, 네놈이…….”

“천마께서 마교수호사령 두 자리를 비워두실까요? 앞으로 당신의 지위가 제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만일 단천마령이 목숨을 건지면 그 또한 나에게는 좋은 일이 될 겁니다.”담담한 어투로 대답하면서 묵천마령은 마기를 폭사시켰다. 저항하지 못하는 두 사람의 목이 잘렸다. 주석하가 그었던 검강의 흔적이 더 뚜렷해졌다.

금천마령과 은천마령의 목숨이 끊어졌다.

묵천마령은 굳은 표정으로 천마각을 바라봤다.

최후의 승자가 누가 되든 그는 전혀 부담이 없었다. 천마든, 주석하든, 단천마령이든, 어느 쪽이든 그는 자신의 편으로 만들 자신이 있었다.

이미 씨를 뿌렸으니 이제는 결과를 기다릴 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