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화 죽음과 삶 (2)
달빛 아래 천마각은 고고한 자태를 드러냈다.
주석하는 그 장면을 바라보면서 섬뜩한 기분을 느꼈다.
마기가 그의 전신을 압박한다. 마치 전신을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순간순간 고통을 일으킨다.
“역시 천마인가…….”
이 기운은 천마각 내에 천마가 웅크리고 있음을 의미했다.
주석하는 자신이 왜 마기에 민감한 체질이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전생에서는 그렇지 않았었다. 그런데 회귀한 이후에는 마기에 민감해져서 마교도를 만나면 본능적으로 마교 사람임을 알아차릴 정도가 됐다.
처음 우설금을 만났을 때 느꼈던 공포도 바로 그 때문이다.
지금 그의 앞에는 천마만이 존재한다. 이제 마지막 단계까지 왔다. 이곳에 오려고 십만대산 입성 때부터 무리한 강행군을 펼쳤다.
천주문을 깨트리고 마교수호사령을 돌파했다. 가로막는 마교도를 처리했다.
시간이 충분했다면 금천마령, 은천마령, 묵천마령을 확실하게 제거했을 것이다.
당연히 시간이 부족했다. 그의 머릿속은 우설금에 대한 염려로 가득 차 있었다. 그에 못지않은 다른 문제는 천마였다.
천마는 무한회귀공을 익히고 있고 그가 회귀자임을 알고 있다.
무한회귀공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주석하는 알지 못한다. 단지 짐작만 할 뿐.
그런 상황에서 그가 이곳까지 침입했다는 사실을 천마가 알아서 좋을 리 없다. 물론 천마라면 이미 알리라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천마에게 많은 시간을 줘서는 안 된다. 천마가 무한회귀공을 사용해서 회귀해버리면 모든 일이 물거품이 되기에.
그가 삽만대산에 들어온 이후 천주문을 돌파하면서 무엇보다 신경 쓰는 문제였다. 일단 빠르게 천마를 몰아쳐야 한다.
천마가 정신 차릴 시간이 없도록. 그 때문에 금천마령과 은천마령을 무력화하고서도 끝장내지 못한 채로 여기까지 왔다.
문득 묵천마령이 떠올랐다. 왜 묵천마령은 그의 손속에서 벗어났지?
의도한 적은 없다. 단지 얼떨결에 그런 일이 벌어졌다.
이것은 순전히 묵천마령이 그를 강하게 막지 않았기 때문이다. 앞에서 걸리적거리지 않았기에 그도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쳤다.
“이상한 놈인데?”
뭔가 놓친 기분이 들었으나 이미 지나간 일이다. 지금은 천마에게 집중해야 한다.
저 멀리 하늘 높은 곳에 보름달이 보였다. 보름달 속에서 우설금이 그를 향해 웃고 있었다.
천마각 내부로 들어가는 거대한 문 앞에 섰다. 놀랍게도 조금 열려 있었다.
진입하기 전 주석하는 숨을 골랐다.
후욱!
조심스럽게 안을 엿보는 순간 주석하의 몸이 굳었다.
단상에 천마가 우뚝 서 있었다. 지금 이 순간 그의 눈을 꽉 채운 장면은 천마가 아니었다.
천마 앞에서 몸부림치고 있는 우설금이었다. 우설금이 허공에 뜬 채 고통으로 전신을 비틀고 있었다.
주석하도 초강고수이자 심후한 내공을 소유하고 있기에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금방 이해했다.
천마는 우설금을 제압해서 내력으로 허공에 띄운 후 압박하고 있었다. 아무나 가능한 일이 아니다.
우설금의 공력을 고려하면 더더욱 쉬운 일이 아니다. 천마의 내공이 얼마나 심후한지 짐작할 수 있는 장면이었다.
물론 이런 합리적인 결론이 가능할 만큼 주석하는 침착하지 않았다.
우설금을 보는 순간 눈이 뒤집힌 그는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우 소저!”
그의 목소리에 목이 졸린 우설금이 간신히 뒤를 돌아보며 쉰 목소리를 냈다.
“어, 얼른 도망쳐요!”
“잠시만 참아!”
주석하는 눈에 뵈는 게 없었다.
마교수호사령을 돌파할 때처럼 빛의 속도로 앞으로 질주했다. 그의 신형이 허공을 날아 우설금에게 달려들었다.
쾅!
마치 무형의 벽에 부딪힌 듯 주석하는 큰 충격을 받고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상대는 천마다. 지금까지 그가 상대했던 그 누구보다 더 강한 놈이다. 그런 자를 앞에 두고 아무런 대책 없이 무작정 뛰어들었다니.
“큭큭큭.”
어이없는 실소를 머금으며 주석하는 몸을 일으켰다.
대략 십여 장 앞에서 천마가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젠장!”
뜬금없이 욕설을 내뱉는 그를 향해 천마가 묵직한 일성을 발했다.
“왔느냐? 마교수호사령은?”
“마교수호사령? 천주문 옆에 엎어져 있더군. 큭큭.”
주석하는 한바탕 웃음을 터트렸다.
허공에 매달린 우설금을 보면 피가 솟구친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라도 도발해야 속이 풀렸다.
“그들은 살아있나?”
“약해빠진 녀석들에게 관심을 둘 만큼 한가하지 않아.”
“대단하군.”
천마가 빈정거리는 감탄사를 터트렸다.
주석하의 머릿속은 점점 차가워졌다. 가슴이 찢어지는 기분 속에 한편으로는 안심했다. 아직 우설금이 살아있으니까.
그녀가 살아있기만 바라면서 이곳까지 뛰어오지 않았던가.
“우 소저를 내려놓고 나랑 싸워보는 게 어때?”
천마의 비웃음이 짙어지고 우설금이 비명을 터트렸다. 천마가 뻗은 한 손을 비틀자 그녀의 요동과 경련이 심해졌다.
“내가 네놈 말을 들어줄 이유가 있느냐?”
“쪽팔리게 옹졸한 놈.”
“뚫린 입이라고 막말을 해도 좋다는 건 아니다!”
순간 주석하에게 무시무시한 압박이 가해졌다.
주석하는 그 압력을 신경 쓰지 않고 다시 앞으로 질주했다.
쾅!
무형의 벽이 처져 있었던 걸까. 그의 몸에 강한 충격이 재차 가해졌다. 두 번 당할 그는 아니었다.
이번에는 그도 작정하고 내력을 한껏 끌어올려 돌파를 시도했다.
콰지지직-
무형의 마벽에 균열이 일었다. 하지만 부서지진 않았다. 지금 주석하 앞에 있는 마벽은 금천마령, 은천마령, 묵천마령이 연합해서 둘러쳤던 마기의 벽보다 훨씬 강했다.
주석하는 뚫지 못하고 튕겨 나온 신형을 간신히 바로 세웠다. 역시 천마는 함부로 상대할 자가 아니었다.
“과연! 뇌군이 제대로 키웠구나!”
뇌군이라는 말에 주석하는 머리를 관통하는 섬칫함을 느꼈다. 역시 천마는 알고 있었다. 천마가 아는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표정을 갈무리하면서 주석하는 버럭 소리 질렀다.
“그렇다면 뇌군이 나에게 무슨 부탁을 했는지도 알겠군.”
“원수를 갚아달라고 했겠지.”
정확한 천마의 대답에 주석하는 할 말이 사라졌다. 빈정거리는 천마의 표정이 눈에 뚜렷하게 들어왔다.
주석하가 반박하려는 순간 천마가 먼저 입을 열었다.
“크하하, 그게 가능하리라 생각하나?”
“네놈이 신이 아닌 다음에야 칼로 쑤시면 죽는 법이다.”
“흐흐, 과연 그럴까?”
천마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주석하를 훑었다. 가소롭게 여기는 티가 역력했다.
“이제 네놈은 알 텐데? 내가 비록 신은 아니지만 신과 같은 능력을 지녔다는 사실을 말이다.”
“……무한회귀공?”
“흐흐, 그래. 아는구나! 나는 무한회귀공으로 수차례 회귀를 거듭하면서 무공을 익혔다. 덕분에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누구보다 강해졌다.”
강하다는 말에 주석하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천마는 그에 대해 얼마나 아는 걸까?
천마는 그가 흑도팔군 다섯 사람의 내공을 물려받았다는 사실을 알까? 예전에 뇌군과 함께 심도 있게 고민한 결과는 ‘모른다’였었다.
내공이라면 절대 밀리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주석하다.
죽음이 임박한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귀를 거슬리게 하는 천마의 도발이다.
지금 당장이라도 천마와 내공을 겨루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으나, 일단은 마지막 패로 남겨두어야 한다.
“설사 네놈이 나보다 무공이 강하다고 해도 나를 이길 수 없다. 네놈이 나를 이기는 순간 나는 회귀해서 과거로 돌아가면 되니까. 네놈이 강해지기 전 과거로 돌아가면 네놈은 몰락할 뿐이다. 그게 네놈이 절대 빠져나올 수 없는 함정이지.”
우드득-
주석하는 분노로 주먹을 거머쥐었다. 과연 무한회귀공에는 약점이 없는 걸까. 어떻게든 약점을 찾아내어 천마의 저 음모를 격파해야 한다.
“이번 회귀에서 나를 가장 즐겁게 해준 것이 바로 네놈이었다. 네놈과 우설금은 나의 훌륭한 바둑돌이었지. 나는 중원 무림을 향해 복수하는 우설금을 키우면서 재미를 느꼈고 뇌군에 의해 회귀한 네놈이 정파에 들이댄 검을 응원하며 호기심을 채웠다. 오늘 이 순간까지 너희들은 나를 즐겁게 해주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흐흐, 믿지 못하나? 뇌군이 너를 어떻게 회귀시켰는지 알려줄까? 바로 너도 경험했던 이전 전생에서 정파십존과 흑도팔군이 얼마나 비참한 일생을 살았는지 알려줄까?”천마가 자랑하듯 모든 것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주석하의 분노가 점점 커졌다.
***
악홍아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주석하가 도망치라는 소리에 그녀는 아무 생각 없이 앞으로 달렸다. 그녀와 함께 있던 흑귀와 백귀는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 천마각으로 달려갔다.
당연히 처음에는 악홍아도 그들을 뒤쫓았다.
오래지 않아 악홍아는 천마각이 위험한 곳임을 본능적으로 자각했다. 저곳에 발을 디디면 절대 무사할 수 없다.
저 전각에는 그녀가 본 적이 없는 무시무시한 괴물이 살고 있을 것이다.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그녀는 주석하가 있을 천주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미 마교수호사령과 주석하의 공전절후의 접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더는 자신을 돌봐줄 사람이 없다는 생각에 그녀는 막막해졌다. 이 무서운 마교 총단 안에서 그녀는 홀로 버려졌다.
어쨌든 살아야 했다.
그녀는 어둠을 타고 마교 안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망할! 하필이면 보름달이라니!”
밝은 달빛이 길 곳곳을 비추고 있었다. 그 빛 덕분에 낯선 이곳을 손쉽게 파악할 수 있었으나 도망치는 그녀의 행적도 훨씬 쉽게 노출됐다.
아무래도 입구 부근이 더 위험하다고 판단한 그녀는 더 깊이 들어가기로 했다.
악홍아는 천마각을 훌쩍 지나 후원으로 향했다.
무성한 화초와 우거진 나무, 여기저기 기이한 꽃이 피어 있는 잘 가꿔진 화원이었다. 나무가 울창하니 숨어 있기도 안성맞춤이다.
“이곳에 숨어 추이를 살펴보자.”
그녀는 주석하가 승리하기를 빌면서 몸을 숨겼다.
어디에선가 향긋한 냄새가 났다. 평범한 꽃이나 과일에서 나는 향기가 아닌 뭔가 독특한 기운이었다.
악홍아는 홀린 듯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게 뭐야?”
달빛을 받아 어슴푸레 빛나는 화원 한쪽에 붉은 열매가 달린 이상한 화초가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그녀는 광천곡에 있을 때 기화요초를 가꾸는 취미가 있었다.
덕분에 그녀는 화초와 약초에 해박했다. 그런 그녀인데도 지금 눈앞의 기이한 열매가 달린 화초는 본 적이 없었다.
“향기가 무척 좋아…….”
그녀는 홀린 듯 십년유심홍을 살폈다. 보면 볼수록 신기했다.
이곳이 마교 총단이란 점을 깨닫자 이 화초 또한 평범할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마가 평범한 화초를 정성 들여 키울 리가 없겠지.
이곳까지 오는 동안 마교도에게 받았던 수모가 떠올랐다. 사마세가가 쳐들어와 광천곡이 망한 후 그녀는 갖은 고생을 거듭했다. 그러다가 마교에 붙잡혀 이곳까지 흘러왔다. 어찌 보면 그녀의 인생이 완전히 망가진 셈이었다.
분노가 치민 그녀는 천마가 아끼는 이 화원을 망가트리고 싶었다. 그녀의 소소한 복수였다.
십년유심홍을 뿌리째 뽑으려는데 갑자기 변화가 일어났다.
붉은 열매의 색상이 더욱 진해지더니 순식간에 검은색으로 변했다. 검은 열매는 기괴했다. 그녀는 이 세상에 검은 열매가 있다고 들어본 기억이 없었다.
“정말 이상한데?”
색상은 검었으나 여전히 좋은 향기가 진동했다.
악홍아는 열매를 땄다. 이 열매가 무려 내공을 일갑자나 올려준다는 사실을 모르는 그녀는 십년유심홍을 쓱 살펴본 후 주머니에 넣었다.
그다음 그녀는 발로 십년유심홍 화초를 마구 짓밟았다. 천고의 보물이 악홍아의 손에 들어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