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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검천하-236화 (236/273)

236화 천마 (1)

무한회귀공을 쓰려면 최소한 일갑자의 내공이 필요하다. 다른 무공과 달리 그만큼의 내력을 실제로 완전히 소모해야 한다.

애초에 이갑자의 내공이 있는 자가 무한회귀공을 사용해서 회귀하면 그의 본신 내력은 일갑자로 줄어든다.

당연히 무공을 펼치려면 일갑자 이상의 내공이 있어야 한다.

방금 우설금에게서 기습을 받으면서 천마는 내상을 입었다.

그의 본신의 내력은 내상을 치유하면 원상회복 되겠지만, 지금 당장 무한회귀공을 일으키려면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한다.

천마는 주석하와 계속되는 전투가 좋은 선택이 아님을 직감했다. 내력을 끝까지 끌어올려 설사 주석하를 제거한다고 한들 그는 어떻게 되는가?

무한회귀공을 사용하려면 내상이 치유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게다가 지금 이 자리에서 주석하를 이긴다는 보장도 없다. 어떻게 된 게 저놈은 끝을 알 수 없으니까. 가능성이 완벽하지 않다면 굳이 모험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주석하가 우설금에게 몸을 날리는 순간 천마는 사태를 파악하고 결심을 굳혔다.

그에게 급한 것은 저 둘의 목숨이 아니다. 무한회귀공을 사용해서 회귀하는 것이 최우선이다. 빨리 십 년 전으로 회귀해야 한다.

“십년유심홍!”

아마 지금이라면 십년유심홍이 열매를 맺었을 것이다.

붉은색에서 검은색으로 약효가 최대로 올라갔을 시기다. 십년유심홍을 복용하면 일갑자의 내력이 상승하고, 그 상승한 내력을 무한회귀공에 투입할 수 있다. 그는 조금의 내력 손실 없이 십 년 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

지금까지 회귀하지 않고 버틴 이유도 주석하와 우설금의 행동이 흥미로워서이기도 했으나, 그 본질에는 십년유심홍이 존재했다. 일갑자의 내공이 아까웠던 것이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천마는 주석하와 우설금을 슬쩍 살핀 후 곧바로 대전을 뛰쳐나갔다. 이미 무너진 전각이기에 도망칠 길은 사방으로 뚫려있었다.

목적지는 천화원. 바로 십년유심홍이 자라는 화원이었다.

***

주석하는 우설금을 품에 안았다.

그녀의 입에서는 선혈이 쉴새없이 흘렀고 안색은 창백했다. 본신의 내력이 바닥난 그녀는 전혀 몸을 가누지 못했다. 사실상 죽음이 눈앞에 드리워져 있었다.

“설금!”

주석하는 그녀를 붙잡고 소리쳤다.

다행히 우설금은 아직 정신이 있었다. 그녀가 그를 알아보고 희미한 미소를 띠웠다.

“죽으면 안 돼!”

주석하는 그녀를 일깨웠다. 이대로 그녀를 보낼 수 없었다.

천천히 우설금이 고개를 저었다.

“어, 얼른 천마부터 잡아요. 천마를 잡지 않으면…….”

그 순간 현실이 주석하의 뇌리를 강타했다.

지금 우설금을 살리더라도 천마를 놓치면 모든 것이 원상복귀 된다.

무한회귀공으로 인해 그들은 십 년 전으로 돌아가게 되고, 두 사람은 다시 천마의 바둑돌이 될 것이다.

그것은 살아있으되 죽음보다도 못한 삶이 아닌가.

“얼른!”

우설금이 다시 그를 일깨웠다.

젠장! 우설금을 이대로 내버려 둘 수 없는데……. 그녀를 돌봐야 하는데…….

주석하는 십만대산에 오기 직전 죽어가는 유비연을 살리기 위해 의원을 찾아 시간을 보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 그가 유비연을 무시하고 바로 우설금을 찾아 십만대산으로 떠났더라면 지금과 같은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그는 유비연을 살렸기에 우설금을 죽이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비슷한 선택의 기로에 선 셈인가.

우설금이 죽고 천마를 죽인들 무슨 소용인가.

우설금을 살려봐야 천마가 살아있다면 무슨 소용인가. 어떤 선택을 한들 상황은 나아지지 않는다.

“으으, 설금…….”

주석하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였다.

우설금의 죽어가는 목소리가 다시 주석하를 흔들었다.

“천마부터…….”

차마 떠나지 못하는 주석하를 우설금이 다시 깨웠다. 그녀는 죽어가면서도 계속 천마만을 입에 올리고 있었다.

주석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알았어! 조금만 기다려! 절대 죽으면 안 돼! 내가 올 때까지 살아있어야 해!”

주석하는 우설금을 조심해서 내려놓았다.

바닥에 누운 우설금의 표정이 편안해졌다.

그는 주변을 돌아봤다. 완전히 무너진 전각, 폐허가 된 대전. 그 어느 곳에도 천마는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도망쳤는지 궁금하지 않았다.

마기를 피부로 느꼈으니까. 마기가 강해지는 그곳에 천마가 있을 것이다.

푸악-

빛보다 빠르게 주석하는 하늘로 치솟았다.

천마각 바로 위로 아득하게 오른 순간 그는 화판답공을 이용해서 허공에 멈췄다.

달빛에 어슴푸레 빛나는 십만대산과 마교 총단 전체가 눈에 들어왔다.

“천마는…….”

그는 눈을 한곳에 고정했다. 천마각에서 그리 멀지 않은 화원이었다. 그곳에서 진한 마기가 감지됐다.

“기다려라!”

주석하의 신형이 급격하게 방향을 틀었다.

번쩍!

마치 땅 위를 질주하는 것처럼 주석하의 신형이 허공을 박차고 그쪽으로 쏘아졌다. 절정의 천리비행공이었다. 가까운 거리임에도 순간의 시간을 아끼기 위해 가장 빠른 경공으로 폭주했다.

주석하의 그림자가 달빛 속에서 길게 호선을 그었다.

***

천화원에 도착한 천마는 얼이 빠졌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천화원은 단정하게 가꾸어져 있었다. 천마가 사랑하는 후원은 마교 최고의 정원사들이 심혈을 기울여 관리했다.

그곳에서 십년유심홍은 최고의 관리를 받았다.

마교의 그 누구도 천화원을 망가트릴 담력을 지닌 자는 없다. 하물며 십년유심홍을 건드릴 자는 더더욱 없다.

그런데…….

지금 천마의 눈앞에 십년유심홍이 완전히 걸레짝이 되어 있었다. 짓밟히고 꺾여 이름 없는 풀보다 못한 신세로 전락해 있었다.

“으아아! 대체 누구냐!”

천마는 분노를 폭발시켰다. 십 년마다 한 번씩 무려 일갑자의 내공을 증진시키는 약초가 이 꼴이 되었다니.

어떤 간덩이가 부은 놈이 이런 무자비한 일을 저질렀던 말인가.

가까스로 분노를 진정한 천마는 급히 십년유심홍의 열매를 찾았다. 분명히 붉은색의 열매가 달려있었으니 지금도 그 열매만 온전하게 남아 있다면…….

짓밟힌 십년유심홍을 뒤적이며 열매를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만큼 완벽하게 짓밟혀 있었다.

“어, 없다!”

십년유심홍의 열매가 사라졌다.

이 화초를 짓밟은 자의 소행인지 아니면 밟혀서 없어진 것인지 불분명했다.

“대체 누구냐!”

십년유심홍만 기다리며 오늘까지 무한회귀공을 자제했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그는 십년유심홍의 효능을 한 번도 발설한 적이 없었다.

그가 유달리 십년유심홍을 아끼는 이유를 아는 자도 없었다. 마교수호사령이라면 십년유심홍의 효능을 눈치챘을까?

“설마 우설금이?”

의심이 가는 자는 우설금이었다.

그를 해치려고 작정하고 천마각으로 들어왔던 그녀라면 천마각에 오기 전에 천화원에 들러 십년유심홍부터 짓밟았을 가능성이 있긴 했다.

하지만 우설금에게서는 십년유심홍 특유의 향기가 나지 않았었다.

으드득-

천마는 이빨을 악물면서 주변을 둘러봤다.

어디에선가 십년유심홍의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그의 발달한 기감은 금방 그 정체를 발견했다.

천화원 한쪽 구석 어두운 곳에 한 인영이 숨어 있었다. 향기로 보아 그자가 십년유심홍을 지닌 것이 확실했다.

“누구냐?”

천마는 몸을 틀어 그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허어억!”

구석에서 당황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완벽하게 숨었다고 자만하다가 천마가 그 존재를 알아차리자 놀란 것이 분명했다.

“쥐새끼 같은 놈!”

천마의 눈에 상대가 똑똑히 보였다.

젊은 여자였다. 마교도는 아니다. 저 여자가 왜 이곳에 숨어 있는지 그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무슨 상관인가. 저 여자를 때려죽이고 십년유심홍을 회수하면 충분한 것을.

“내놔라!”

천마가 손을 내밀었다.

무려 십여 장이나 떨어진 곳에 숨어 있던 악홍아가 벌벌 떨면서 몸을 일으켰다. 천마의 기운은 그녀가 감히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다.

겁에 질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는 악홍아에게 천마가 무서운 어조로 다시 윽박질렀다.

“십년유심홍을 내놓아라.”

물론 악홍아는 십년유심홍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녀는 너무 겁에 질려 머릿속이 하얗게 된 상태라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천마가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생각할 수 없었다. 백치가 된 것처럼 머리가 텅 비었다.

천마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이년이…….”

그 순간.

쐐액!

무시무시한 검강이 천마의 등을 노리고 날아왔다.

절정의 암천살검!

천마라 해도 쉽게 피할 수 없고 무시할 수 없는 위력이었다.

어쩔 수 없이 천마는 몸을 틀면서 눈앞을 채운 검강을 향해 일장을 후려쳤다.

콰아앙!

내상을 입은 상황이라 이번의 충격이 다시 천마를 뒤흔들었다. 천마에게도 현재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주석하가 이곳까지 따라와서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허공에 둥둥 뜬 채 흑검소를 든 주석하가 천마를 노려보고 있었다.

짜증 난 천마가 전의를 가다듬을 때 주석하가 먼저 달려들었다.

“천마! 오늘 끝장을 보자!”

녀석이 사생결단을 노리고 덤벼들고 있으니 천마도 무시할 수 없다.

한가롭게 무한회귀공을 펼칠 여유가 사라졌다. 무한회귀공을 시전하려면 최소한 한 시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

지금처럼 주석하가 덤비는 상황에서는 해결 난망이다.

처음으로 천마는 진심으로 후회했다. 우설금의 배신을 알았을 때 십년유심홍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회귀를 결정했어야 했다.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이다.

천마가 한 줌 남은 내력을 끌어올리며 경계하는 사이 주석하가 흑검소를 입에 물었다.

주석하가 허공에서 가부좌를 튼 채 음률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천무태평악? 겨우 악군의 절기로 나를 상대하려는가?”

음공은 장점과 단점이 명확한 무공이다. 넓은 영역에 퍼진 많은 사람을 상대하기 유리하지만 단 한 사람에게 그 위력을 집중하기에는 여의치 않다.

천마 같은 초강고수에게는 효과를 보기 쉽지 않다.

상대보다 내력이 압도적이라면 가능성이 없지 않지만, 과연 지금 주석하가 천마에 비해 내공이 월등하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천마는 주석하의 선택을 비웃었다. 차라리 암군의 암천살검이나 아니면 극양염천신공이 더 효과적일 것이다.

삘리리리-

천무태평악의 구슬픈 음조가 적막을 깼다.

흑검소의 음률이 형상화되면서 예리한 강기의 파편이 생겨났다. 파편들이 주석하의 주위를 빙 둘러싸고 구를 형성했다.

천마도 천무태평악을 당연히 알고 있었다.

이번 생에서 천마는 악군을 만난 적이 없으나 전생에서는 수차례 부딪쳤었다.

그때마다 천마는 악군의 천무태평악을 격파했다. 천마에게 천무태평악은 그리 위협이 되지 못했었다.

천마는 당연히 이번에도 같은 결과로 귀결되리라 예상했다.

다만 현재 주석하의 내공이 악군에 비해 압도적이기에 그 위력은 천차만별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음공은 음공일 뿐이고 천무태평악은 천무태평악일 뿐이다.

경계했던 마음이 한층 누그러졌다. 천마는 당대 제일이며 그 누구도 천마를 능가할 수 없다.

다시 자만심이 뭉클 피어올랐다.

삘리리리-

천무태평악이 고조되면서 강편의 흐름에 변화가 생겼다.

지금 강편은 음공이 아닌 검공처럼 움직임을 보였다. 마치 수천, 수만 개의 검강이 자유롭게 휘몰아치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왔다.

“으음? 이상한데?”

천마도 수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그 순간 주석하는 흑검육식의 마지막 육식을 시전하고 있었다. 검으로는 도저히 구현할 수 없는 최강의 검초를, 도수가 보완한 그 검초를 그는 천무태평악으로 구현하고 있었다.

검으로 만들어진 검강에 비해 음공으로 만든 강편이 훨씬 자유롭게 움직인다. 그렇기에 이 강편은 흑검육식의 마지막 초식을 창조자의 의도대로 재현할 수 있었다.

무적의 흑검육식이 세상에 완벽한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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