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화 무한회귀공 (1)
무한회귀의 굴레에서 벗어났다.
천마는 무한회귀공을 이용해서 회귀를 반복했고, 그동안 자신에게 최적인 국면을 만들었다.
배신자를 제거하고 적을 타도했으며 나아가 타인의 인생을 바둑판 위에 올렸다.
주석하와 우설금은 그런 천마의 바둑돌이었다. 천마가 다시 십 년 전으로 회귀했다면 두 사람은 어쩌면 영원히 그 쳇바퀴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천마가 죽으면서 무한회귀공을 익힌 자는 사라졌고 역사는 정상으로 흘렀다. 역천은 없다.
그 기쁨을 누릴 틈도 없이 주석하는 천마각으로 뛰어들었다.
이미 무너진 전각이었기에 거칠 것은 없었다. 내부로 들어가기도 전에 이미 그의 눈에는 내부의 상황이 훤히 보였다.
쓰러진 자는 모두 셋. 모두 그가 아는 자들이다.
흑귀와 백귀는 이미 오래전에 죽었고 그는 그들을 돌볼 여유가 없었다.
지금 그의 시야는 오직 한 사람만이 차지했다.
우설금. 그녀가 단상 위에 쓰러져 있었다.
주석하는 새처럼 날아 우설금 옆에 착지했다.
“설금!”
그는 그녀를 품에 안았다.
아직 살아있을까? 우설금의 몸에서 경련이 일었다. 그리고 그녀가 천천히 눈을 떴다.
“설금! 천마가 죽었어! 천마가 죽었다고!”
물론 그 뒤를 장황하게 설명할 시간은 없다.
천마가 죽었으니 우리는 이제 우리의 의지대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고. 당신이 원한다면 마교를 벗어나 함께 살 수 있게 되었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고, 고마워요…….”
우설금에게서 실낱같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그 순간 그녀의 고개가 툭 떨어졌다.
“서, 설금!”
당황한 주석하는 맥을 짚었다.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놀란 그는 우설금을 반듯하게 눕히고 기를 불어넣었다. 하지만 그녀에게선 조금의 반응도 전해지지 않았다. 완전히 목숨이 끊어진 것이다.
우설금은 일평생 반야불존을 원수로 알고 복수를 위해 전력을 다했다.
원수를 갚는 순간 진짜 원수가 드러났고 이번에는 천마를 죽이려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녀는 목숨을 잃었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죽기 직전 천마 또한 죽었다고 들었으니, 그것도 그녀가 사랑하던 남자가 복수해주었으니 어찌 보면 행복한 삶일지도 모른다.
죽어서도 절대 헤어날 수 없는 바둑돌 운명을 훌훌 벗어던지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이승을 떠나게 되었으니 행운이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죽고 나면 무슨 소용인가.
“으아아아! 살아있겠다고 했잖아! 살아나라고!”
주석하는 그녀를 안고 오열을 터트렸다.
아무리 내공이 강하고 고금제일의 고수인들 죽은 자를 다시 살릴 수는 없다. 삶과 죽음은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문제이고 하늘이 정한 운명이다.
내력을 주입해도 그녀의 생명은 돌아오지 않았다. 일말의 가능성을 품고 주석하는 반복해서 내력을 주입했다.
“우우우-”
점차 온기가 사라지고 우설금의 피부는 차가워졌다.
“이건 아닌데……, 이건 아닌데…….”
죽으면 무엇이 남는가. 설령 복수에 성공해도 죽으면 남는 게 무엇인가.
그녀를 구하려고, 살아있는 그녀를 만나려고 십만대산으로 달려왔다.
유비연을 치료하지 않았더라면, 고향인 덕양을 지나지 않았더라면, 중간에 마교에 포로로 잡힌 사람들을 구하지 않았더라면, 아니 밥 한 끼를 굶고 십만대산으로 강행군했더라면…….
어쩌면 우설금은 살았을지도 모른다. 작전을 결심한 그녀가 천마각에 들어가기 전에만 만났더라도 상황이 바뀌지 않았을까.
그 모든 노력이 그녀의 죽음으로 수포가 됐다.
우설금이 죽고 나서야 그는 자신이 우설금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알게 됐다. 그녀가 없는 이 세상은 무의미했다.
그녀의 옆에 주저앉아 그녀와 함께했던 시간을 떠올렸다.
그녀와 처음 만나고, 다시 만나고, 그녀와 동행하고, 그녀와 함께한 시간이 하나하나 스쳐 지나갔다.
“우리는 아직 아무것도 못 해봤는데…… 당신에게 사랑한다는 말은커녕 보고 싶다는 말도 못 해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와 무엇을 같이했는지 기억나는 게 없었다.
많은 시간을 같이했건만 정작 그녀와 사랑을 나눈 시간은 없었다. 손을 잡고 따스한 정감을 나눈 적이라도 있었던가. 대체 지금까지 무엇을 했단 말인가!
이렇게 보낼 줄 알았다면 그때 그녀를 붙잡을 것을. 절대 그녀 홀로 십만대산으로 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을.
후회가 넘쳤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천마각에 비치던 달빛이 점차 옅어졌다. 어두운 하늘이 서서히 밝아왔다.
주석하는 꼼짝도 하지 않고 우설금 옆에 주저앉아 있었다. 축 처진 어깨만이 가끔 들썩였다.
천마가 사라진 새로운 세상이 시작했다. 중원의 모든 사람에게 새로운 희망의 날이 열렸건만 정작 주석하에게 내린 짙은 어둠은 거두어지지 않았다.
***
무너진 천마각에 두 사람이 나타났다.
한 사람은 악홍아. 천마에게 목숨을 잃을 뻔했던 그녀는 유일하게 천마와 주석하의 결투를 모두 목격한 장본인이었다.
물론 그녀의 무공 수준으로는 두 사람의 경천동지할 싸움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사실 제대로 관전하기는커녕 몸을 숨기기 바빴다. 주위로 휘몰아치는 강기와 그 충격파는 자칫 그녀의 목을 베기에 충분했으니까.
주석하가 천마각으로 돌아간 순간 악홍아도 그를 따라 천마각으로 이동했다.
천마가 죽었기에 이제 목숨이 위험할 일은 없었다. 그곳에서 악홍아는 우설금을 끌어안고 절규하는 주석하를 발견했다.
악홍아는 우설금을 전혀 몰랐다.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죽은 우설금이 예전에 운중산에서 보았던, 주석하와 함께 있던 여인과는 다른 사람이라는 정도는 알아봤다.
그리고 지금 주석하가 얼마나 슬픔에 잠겨 있는지 눈치챘다.
그녀에게 주석하는 영웅이었다.
그는 운중산에서 무림맹주인 무극천존과 맞서 싸웠고 십만대산에서는 무려 마교의 교주 천마를 제거했다. 그는 중원인이자 사파의 태양이었다.
광천곡의 소곡주인 악홍아에게 주석하는 바라만 봐야 할 그런 멋진 존재였다.
‘……옆에 있던 여자가 사라졌어.’
똑똑한 그녀는 우설금의 죽음이 어떤 의미인지 간파했다.
가까이할 수 없는, 저 위에 있던 남자의 연인이 죽었다. 물론 그녀의 죽음은 슬프지만, 그녀도 애도하지만, 남자는 평생 죽은 여자에게 얽매이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는 새로운 삶, 새로운 여자를 찾을 테고 그때까지 옆에서 묵묵히 기다리면 그녀에게도 기회가 올 것이다.
지금 이곳 십만대산에서 그를 위로해줄 여자는 그녀밖에 없으니. 그녀의 계산은 빠르고 핵심을 놓치지 않았다.
계산을 끝낸 악홍아는 조심스럽게 주석하에게 다가갔다.
주석하는 그녀의 접근을 신경 쓰지 않고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악홍아는 그의 옆에 앉아 조용히 함께 눈물을 흘렸다. 함께 울어주는 것만으로도 그는 그녀를 기억하고 감동할 것이다.
악홍아가 주석하의 옆에서 슬퍼하는 동안 다른 한 사람, 묵천마령 또한 천마각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모든 사태를 완벽하게 파악했다. 절대자였던 천마가 죽었다는 것, 그리고 마교수호사령인 단천마령이 천마의 손에 죽었고, 지금 흑검서생이 오열하고 있다는 것까지.
지금 마교는 무주공산이다. 절대자 천마와 마교수호사령 가운데 그를 제외한 셋이 모두 죽었다. 거기에 마교칠왕까지.
최상위 직책 가운데 남은 사람은 오직 자신뿐이다.
묵천마령의 계산도 빨랐다.
그는 마교도들의 접근을 막았다. 일반 마교도에게 그의 존재는 천마에 버금가는 수준이었으니 어려울 것도 없었다.
특히 마교 내부의 대소사를 지금까지 그가 관장해왔기에 그의 조치는 손쉽게 마교의 안정을 가져왔다.
“주 공자…….”
묵천마령은 주석하에게 말을 걸었다.
여전히 주석하는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어쨌든 상관없었다.
마교를 무너트리려고 주석하가 이곳에 온 것은 아닐 것이다. 그는 단지 단천마령을 구하려고 왔을 뿐이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묵천마령은 마교가 주석하 때문에 붕괴할 일은 없다고 안심했다.
그렇기에 굳이 주석하와 대립하여 마교의 존립을 걸고 싸울 이유가 없었다.
그를 내버려 두면 자연스럽게 자신의 손에 마교가 떨어질 것이다. 지금 가장 좋은 방법은 모른 척하는 것이다.
묵천마령의 눈에 악홍아가 들어왔다. 그에게 그녀의 속셈이 훤히 보였다. 그녀가 어떻게 행동하든 무관하기에 묵천마령은 신경 쓰지 않았다.
덕분에 별다른 사건 없이 시간이 흘러갔다. 주석하도, 묵천마령도, 악홍아도 서로를 간섭하지 않았다.
***
주석하가 우설금을 품에서 내려놓은 것은 하루가 지나서였다.
우설금을 떠나보내고 난 후에도 그는 무엇을 해야 할지 결정하지 못했다.
우설금을 구하려고 십만대산에 들어왔지만 따지고 보면 뇌군의 바람대로 행동한 것에 불과했다. 천마가 죽었기에 뇌군의 바람은 이루어졌다.
무량뇌옥에서 절치부심하며 주석하를 오 년 전으로 회귀시켰던 뇌군의 염원이 이루어진 것이다.
주석하는 그 과정에서 흑도마군의 다섯 기운을 얻었고 지금 그 기운을 완벽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모든 안배가 실현되었기에 주석하는 이제 할 일이 없었다.
그의 유일한 목표인 백화루주가 되는 꿈은 이미 달성했다. 굳이 더 하겠다면 백화루주 분점을 한두 곳 개점하는 일이지만 지금 당장 할 일은 아니다.
그는 무림 최강자였고, 고금제일인이기에 앞으로 그를 건드릴 자는 없을 것이다.
회귀하면서 남의 바둑돌이 되지 않고 자신의 의지대로 살겠다고 다짐했었는데 그 또한 이루어졌다.
남은 것이라면 백화루라는 이름에 걸맞게 백 명의 기녀를 쭉 세워놓고 도수처럼…….
“하아!”
모든 것을 이루었으나 마음은 공허했다. 아니 슬펐다.
우설금이 없는 세상은 예전처럼 살만하지 않았다. 차라리 백화루주가 아니어도 그녀가 옆에 있으면…….
우설금을 땅에 묻어야 하는데…….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주석하는 옆에서 악홍아가 함께 울어주고 있음을 알아챘다.
“고마워요.”
누군가가 슬픔을 덜어준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우설금도 저승길을 슬퍼해 주는 사람이 많을수록 외롭지 않을 것이다.
“뭘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요.”
악홍아가 죽지 않고 살았다는 사실에 주석하도 조금 놀랐다. 생각해 보니 그날 그녀는 천마의 위협을 받고 있었는데…….
천마가 중원의 이름 없는 소녀를 왜 신경 썼을까.
“그때 천마가 당신을 공격했었죠?”
천마가 악홍아를 신경 쓰는 바람에 주석하는 손쉽게 초반부터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아, 그게…….”
악홍아가 자신의 염낭을 뒤적였다. 그녀의 손에 기이한 냄새가 풍기는 검붉은 열매가 놓였다. 흡사 앵두처럼 작은 열매였다.
“실은…… 이것 때문에…….”
악홍아는 천화원에서 십년유심홍을 망가트리고 열매를 딴 행동을 설명했다.
주석하는 열매를 들고 한참 관찰했다. 색상과 향기가 독특하다는 점을 빼면 평범한 열매였다. 물론 그 정체를 주석하도 몰랐다.
“이게 천화원에 있었다는 거죠?”
“천마가 애지중지 키웠나 봐요. 전각에서 나오자마자 이것부터 찾더라니까요.”
“이걸 왜요?”
천마가 전각에서 도망쳤을 때 상황은 매우 급했다. 천마는 우설금에게 통렬한 한 방을 당해서 빨리 전장을 벗어나야 할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이 열매 때문에 미적거리다가 그에게 추격을 허용했다는 거다. 그 결과는 천마의 죽음으로 이어졌으니 이 열매와 목숨을 바꾼 셈이다.
“이게 뭐죠?”
“저도 몰라요. 시커먼 게 독이 든 것 같아서 먹을 수도 없고…….”
천마가 애지중지한 열매라면 절대 평범할 리 없다.
주석하는 십년유심홍을 들고 만지작거렸다. 천마가 죽음 직전에도 놓지 못한 이유가 뭘까. 뭔가 엄청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