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화 무한회귀공 (2)
“흠, 저도 처음 보는 거라 모르겠습니다.”
주석하는 십년유심홍을 돌려주려다가 손을 거두어들였다.
“악 낭자, 이 열매를 저에게 주시겠습니까?”
“저야 뭐…… 사실 필요 없어요.”
악홍아는 무엇이든 주석하를 도울 수 있다면, 아니 그와 인연을 맺을 수 있는 고리가 생긴다면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그렇다면 당분간 이것을 제가 보관하겠습니다. 나중에 필요하실 때 돌려드리거나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도움을 갚겠습니다.”
“아, 전 이미 공자께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그걸로 충분하지만…… 그래도 사양하지 않을게요.”
악홍아는 의외의 제안에 만족했다.
독인지 약인지도 모르는 열매를 주고 앞으로 만날 기회를 잡아서다. 이 남자는 무림 최강고수인 데다 어쩌면 더 좋은 관계로 발전할 가능성마저 있으니까.
주석하는 감사를 표하고 열매를 선지에 싸서 보관했다. 이 열매는 연구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
주석하는 우설금의 시신을 우설금의 처소에 두었다.
우설금의 처소는 예상대로 소박하게 꾸며져 있었다.
꾸미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그녀의 성품과 십만대산에서 손쉽게 장식품을 구하기 어려운 실정 때문에 거처 또한 매우 실용적이었다.
원래대로라면 그녀를 바로 땅에 묻는 게 당연했으나, 그는 그렇게 영영 이별을 고할 마음의 준비가 아직 되지 않았다.
그래서 일단 우설금이 평소 사용하던 침상에 그녀를 눕혀 두었다.
다행히 이곳은 고산지대라 빨리 시신이 부패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시간이 길어질 수 없음은 그도 알고 있었다.
마치 잠든 것처럼 편히 누운 그녀를 바라보면서 주석하는 평소 그녀가 사용하던 물건을 살펴보았다. 모두 그녀의 손때가 묻은 일용품이었다.
그녀의 주 무기인 홍철산은 침대 옆에 가지런히 두었다. 홍철산은 그녀가 무덤까지 가져갈 분신이다.
여염집 규방과는 다른 분위기의 방 내부를 살피던 그의 눈에 한쪽에 개어놓은 연노랑 궁장이 들어왔다.
하북팽가의 공격을 받았던 때 덕양에서 그가 골라주었던 바로 그 옷이다. 그리고 그 옷 위에는 녹색 바탕에 구름 문양을 수놓은 머리띠가 놓여있었다.
보은사의 노점에서 그가 사주었던 머리띠다.
연노랑 궁장과 녹색 머리띠를 보는 순간 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이렇게 죽으면 안 되는데…… 님은 가고 물건만 남았네…….”
가지런히 개어놓은 궁장과 머리띠는 그녀가 그 물건을 얼마나 아꼈는지 보여주었다. 아마 그녀는 이 옷을 어루만지며 그를 향한 그리움을 달랬을 것이다.
비록 우설금은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줄 몰랐지만, 이것을 보는 순간 주석하는 그녀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실감했다.
그도 그녀에게 사랑을 표현하지 않았고, 그녀도 그에게 사랑을 표현할 줄 몰랐다.
마교라는 환경에서 자란 그녀에게는 단지 옆에서 묵묵히 지켜보는 것이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이었다.
그녀가 북해까지 동행하면서 그와 함께하는 시간을 늘린 마음을 이해했다. 그녀는 그때도 그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단지 그만 제대로 몰랐을 뿐이다.
“그녀에게 더 잘해줬어야 했는데…….”
한 번만이라도 그녀를 따뜻하게 안아주었더라면, 그녀에게 그의 마음을 표현했었더라면 이렇게 후회하지 않을 텐데.
백번 후회해도 시간은 지나갔고, 그녀는 떠나버렸다. 죽은 이를 돌아오게 할 수는 없다.
하늘이 정한 운명은 바꿀 수 없으니까.
주석하는 주먹을 쥐고 조용히 울음을 삼켰다. 눈물이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하늘은 왜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는지…….”
자조 어린 신세 한탄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주석하는 침대 옆에 놓인 작은 서탁에 무심코 시선을 던졌다. 서탁 위에 작은 봉투가 놓여있었다. 마치 죽기 직전에 남긴 유서처럼.
긴 한숨을 내쉬면서 그는 봉투를 열었다. 안에서 우설금이 적은 서신이 나왔다. 물론 수신인은 적혀 있지 않았다.
서신의 내용은 익숙했다. 보은사에서 받았던 그녀의 편지 마지막 구절이 적혀 있었다.
- 이번 생의 인연은 여기까지이고
다음 생에도 만날 가능성이 없지만
다시 만날 때까지 윤회를 거듭하며
당신을 기다리며 살아가리니.
“하아아…….”
긴 한숨을 내쉬며 주석하는 절규했다. 그녀는 죽은 후에도 다음 생에서 그를 만나기만을 기다리고 있겠다는 뜻이 아닌가.
예전에는 별생각 없이 읽었었는데 막상 그녀가 죽은 후에 다시 읽으니 구구절절 그녀의 애틋한 사랑이 묻어 있었다.
“하늘이 운명을 정한다면 내가 바로 그 하늘이 되겠다! 운명을 바꾸어 그대가 천년만년 살도록 하겠다!”
주석하는 흐느끼며 소리 질렀다.
하늘이 점지한 숙명을 거스른다면 그것이 바로 역천이다.
“역천…….”
순간 주석하의 머릿속에 역천의 무공이 떠올랐다.
무한회귀공! 배교의 신물이라는 역천의 무공! 지금 이 순간 이 세계에서 오직 그만이 그 존재를 알고 있는 무공이다.
남들은 비웃을지 모르지만 그 자신이 회귀자이기에 그는 무한회귀공이 실제로 존재하는 무공임을 안다. 천마가 죽었으니 이제 그 무공도 영원히 사라졌겠지만…….
순간 떠오른 발상에 주석하의 몸이 경련을 일으켰다.
무한회귀공으로 시간을 되돌리면 어떻게 되지? 과거에 그가 오 년 전으로 회귀했던 것처럼 지금 그가 무한회귀공을 익혀 과거로 돌아간다면?
우설금도 다시 살아나지 않을까?
그는 우설금만 살릴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다.
그가 회귀한 이유는 복수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가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지금 우설금을 살리기 위해서였다!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다!
역천의 무공을 익혀 우설금을 살려야 한다. 물론 그녀를 살리면 천마도 다시 살아난다. 그때는 어떻게 되지? 다시 천마의 바둑돌이 되어야 하나?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는 무한회귀공을 제대로 모르기에 우설금의 회생이 어떤 파급효과를 일으킬지 짐작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를 살릴 방법이 있다면 그 무엇도 마다하지 않겠다! 하늘이 되어 그녀를 살리겠다는 판국에 무한회귀공 하나쯤 익히지 못할 게 뭔가.”
주석하는 뛸 뜻이 기뻤다. 드디어 방법을 찾았다!
그는 우설금의 손을 잡았다. 비록 차가운 손이었으나 그에게는 따뜻하게 느껴졌다.
“설금! 잠시만 기다려라!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어!”
주석하는 미친 듯이 포효를 터트렸다.
앞길이 정해졌다. 무한회귀공 비급을 찾아서 역천의 무공을 익혀야 한다. 운명을 거스르는 그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
“이곳이 바로 마교의 모든 무공이 보관된 곳입니다.”
“아무나 들어올 수 있나요?”
“여기까지는 일반 마교도도 가능하고요, 저 안쪽의 분실에는 천마를 비롯하여 마교수호사령과 마교칠왕만 가능합니다. 물론 천마가 허락한 일부 주요 인물도 출입이 가능했습니다.”묵천마령이 주석하를 마교의 장서각으로 안내했다.
보통 때라면 절대 보여주지 않았을 마교의 핵심부를 묵천마령이 어쩔 수 없이 공개했다.
이 모든 일은 주석하가 마교에 특별한 악의를 품지 않았다고 믿기에 가능했다.
또 현실적으로 주석하를 저지하기 쉽지 않고, 마교의 통제권을 확보한 묵천마령이 굳이 주석하와 척을 질 이유가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주석하가 마교의 무공을 가져가거나 없애겠다고 하면 어떻게 대응할지 묵천마령도 고민 중이었다.
주석하는 마교의 장서각을 둘러보며 감탄을 터트렸다.
그는 무림맹의 서고나 소림사의 장경각을 구경한 적이 없다. 그가 봤던 서고라면 흑검문의 변변치 않은 서고가 전부였고, 그 외에는 덕양 중심가에 있는 중고책방 정도였다.
예상보다 훨씬 많은 무림 비급이 꽂혀 있어서 그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가 장서각을 방문한 이유는 무한회귀공 비급을 찾기 위해서다. 대충 서고를 훑어본 그는 머리를 저었다.
“하긴 이런 곳에 두었을 리가 없지.”
“네?”
“아닙니다.”
주석하는 시치미를 떼고 분실로 들어갔다.
묵천마령에게서 불편한 기색이 엿보였으나 그는 마다하지 않았다.
서고 내부 분실에는 수십 권의 비급이 가지런하게 꽂혀 있었다. 이곳에 있는 무공이야말로 마교 무공의 정화다.
주석하는 한번 쓱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단천마공을 비롯하여 중요한 마공이 널려 있음을 발견했다. 그 가운데 천마가 마지막으로 사용했던 절대천마공마저 한쪽에 꽂혀 있었다.
주석하는 우설금이 익혔던 단천마공 비급을 손으로 쓱 훑으면서 그리움에 잠겼다. 이 비급에는 그녀의 손때가 묻어 있을 것이다.
대충 훑어봐도 이곳 역시 무한회귀공이 없었다. 천마는 그 누구도 무한회귀공을 익히기를 원하지 않았을 테니 비급을 공개된 서고에 두었을 리 만무했다.
“돌아가죠.”
예상외로 주석하가 서고를 쓱 훑어보고 떠난다고 하자 묵천마령은 한시름 놓았다. 걱정거리가 사라졌다.
걸음을 옮기면서 주석하는 다시 물었다.
“천마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던 게 대체 뭐죠?”
“글쎄요, 특별한 거라고는…….”
고개를 젓던 묵천마령이 생각난 듯 대답했다.
“가장 중요하게 다뤘던 것은 천화원에 있던 화초입니다.”
“화초요?”
“그게…… 십 년에 한 번 열매를 맺는 화초인데…… 최근에 열매를 맺었거든요. 그 화초에는 아무도 얼씬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열매요?”
갑자기 악홍아가 그에게 주었던 검은색 열매가 생각났다.
“붉은색 열매이고 향기가 독특했는데…… 최근에 열매가 열리자 천마께서 무척 좋아하셨습니다.”
“붉은색이요?”
“네. 아주 빨갛더군요.”
악홍아가 준 열매는 검은색이었다. 잘못 짚은 건가.
“그 화초는 어디에 있죠?”
“그게…… 그날 천마각이 파손되면서 영향을 받았는지 화초가 다 망가졌던데요? 열매도 없어지고…….”
나중에 악홍아에게 다시 확인해야 할 듯했다.
“그것 말고 소중한 물건을 넣어놓은 금고 같은 것은 없습니까? 부잣집에서 흔히 보이는, 쇠로 만든 덩치 큰 상자 같은 것 있잖습니까?”
“아! 천마가 쓰던 서재에 커다란 쇠금고가 하나 있긴 합니다. 하지만 여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뭔가 찾은 느낌이 왔다. 주석하는 묵천마령을 앞세우고 천마의 서재로 발길을 돌렸다.
***
천마가 사용하던 서재는 평범했다.
하긴 이 황량한 십만대산에서 화려하게 장식할 필요가 있을까 싶긴 하지만. 그나마 화려하고 웅장했던 천마각 대전에 비하면 소탈한 수준이다.
다만 서재에 들어서는 순간 주석하는 상당한 위압감을 받았다.
서재 한쪽 벽에 걸린 커다란 초상화가 눈에 띄었다.
“누구죠?”
“전대 천마입니다.”
묵직하게 생긴 중년인이었다.
턱수염을 멋지게 길러서 나름 고아한 풍모가 엿보였다.
초상화를 요리조리 살피는 주석하에게 묵천마령이 설명했다.
“쓰러져가는 마교의 기틀을 세운 분이죠.”
“어떻게요?”
“흠, 당대 천마를 길러낸 공이 가장 크지요.”
“아!”
묵천마령과 그의 숨은 의미가 같은지는 모르겠지만 주석하가 평가할 때 전대 천마는 배교의 신물을 얻은 자이다.
가장 중요한 신물은 무한회귀공이었을 테고 그 역천의 무공을 당대 천마에게 전수했으니 당대 천마를 기른 공이 크다고 봐야 하나.
왜 선대 천마가 아닌 후대 천마가 무한회귀공을 익혔는지 의문이긴 하지만. 아마도 사정이 있었겠지.
대충 천마의 서재를 둘러보았으나 특별한 물건은 발견되지 않았다.
남은 곳은 묵천마령이 지적했던 쇠금고. 방 한쪽 구석에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육중한 부피에 볼품없이 생겼다.
쇠금고를 살펴보니 음각된 손바닥 자국이 보였다.
“이건…….”
“오직 천마 본인만 열 수 있습니다. 그 장인에 손을 대고 절대천마공을 운용하면 열 수 있다고 하지요.”
“젠장!”
마교 특유의 기술을 이용해서 쇠금고를 만들었다. 다른 사람은 절대 열 수 없도록. 점점 안에 든 내용물이 궁금해졌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쇠처럼 보이지만 실은 만년한철로 만든 겁니다. 절대 깨지지 않아요.”
묵천마령이 시험 삼아 손으로 금고를 툭툭 쳤다.
탕탕!
내공을 담은 주먹질이라 맑은 금속성이 울렸다. 웬만한 검이나 도끼로는 절대 부술 수 없다.
주석하도 내력을 끌어올려 일장을 후려쳤다.
쾅!
역시 끄떡도 하지 않는다.
“그렇게는 힘들 겁니다. 이거 부수려면 애들을 동원해서 며칠…….”
“큭큭, 내가 이런 거 깨는 전문이야.”
묵천마령의 눈이 휘둥그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