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화 무한회귀공 (3)
콰아앙!
내공을 쏟아부은 일 권이 폭풍처럼 몰아쳤다.
우지직-
혼천십이권의 마지막 초식이 쇠금고를 강타하고, 쇠금고는 날아가서 서재 벽을 연타했다.
벽이 무너지고 천마의 서재가 반파됐다. 마치 태풍이 몰아친 것처럼 서재 전체가 내려앉았다.
묵천마령은 입을 쩍 벌렸다.
아무래도 이건 너무 무식한 방법 같은데?
물론 묵천마령도 전각 하나 정도는 어렵지 않게 박살 낼 수 있다. 그렇다고 만년한철로 만든 쇠금고를 부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무엇보다 묵천마령을 놀라게 한 점은 주석하의 과감한 돌파력이다. 일단 쇠금고를 열어보려고 별별 수를 먼저 써보는 게 정석 아닌가?
마교로 진입하면서 천주문을 아예 흔적도 없이 갈아 놓은 만행이 떠올랐다. 천주문 주변의 기관진식도 해법을 이용해 풀었다기보다 아예 힘으로 걸레를 만들어 놓았다.
묵천마령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예 상대하지 않는 게 속 편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저만치 날아간 쇠금고는 한쪽이 우그러져 파손되어 있었다. 정확히 주먹 몇 개가 들어갈 만큼 구멍이 뚫렸다.
묵천마령이 감탄하는 사이 주석하가 먼저 쇠금고 내부를 살폈다.
금고 안에서 기대하던 몇 가지 물건이 나왔다.
“여의신단이군.”
여의신단 세 알이 선지에 싸여 있었다.
주석하도 여의신단을 한 알 먹긴 했지만 천마에게 여의신단이 왜 필요한지 또 이처럼 신줏단지 모시듯 했는지 알지 못한다.
천마가 내공을 증진하려고 사용했으리란 추측만 했다.
안에서 두툼한 일기장이 나왔다.
겉장을 넘기고 적힌 내용을 보는 순간 주석하는 전신에서 경련을 일으켰다.
이 일기장에는 그동안 천마가 회귀하면서 벌였던 모든 사건이 기록되어 있었다. 아마 천마는 회귀를 거듭하면서 반복되는 많은 사건을 만나자 그 기억을 잊지 않기 위해 기록을 남겼을 것이다.
물론 이 일기장을 회귀할 때 가져갈 수는 없기에 그때마다 기억한 바를 다시 적어야 했다.
무엇보다 그를 분노케 한 것은 극마서생 우청엽 관련 내용이었다.
우청엽에서 우설금에 이르기까지 그 가족의 비극사가 낱낱이 적혀 있었다. 이미 반야불존에게 들었기에 일부분 알던 내용이지만 일을 벌인 당사자, 천마의 기록을 보고 있자니 분노를 억누를 수 없었다.
거기에 바로 전생에서 천마가 정파십존과 흑도팔군을 제거하고자 저지른 만행까지.
물론 그 기록에는 뇌군에게 무한회귀공을 넘겨 이번 생을 유도한 과정이 상세히 적혀 있었다. 바로 지금의 주석하 자신이 만들어진 과정이다.
이것으로 모든 의문이 풀렸다.
그와 우설금이 천마의 바둑돌이었음이 명확하게 입증됐다.
“뭐지요?”
주석하가 정신을 집중하며 읽고 있자니 묵천마령이 관심을 보였다.
그가 생각하기에 묵천마령은 아직 무한회귀공에 관해 알지 못한다. 무한회귀공을 타인이 알아서 좋을 게 없다. 굳이 모르는 사람에게 알려 경각심을 키울 이유도 없다.
“별거 아닙니다. 천마의 일기군요.”
그는 극양염천신공을 일으켰다. 천마의 일기장에 불이 붙고 그 기록은 영원히 사라졌다.
영원이라 하기에는 이른가? 누군가 회귀하면 여전히 남아 있을 테니.
주석하의 거절에 씁쓸해하면서도 묵천마령이 한 발짝 물러섰다. 내용이 궁금하지만 주석하의 선택을 반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추가로 두 권의 서적이 나왔다.
하나는 기대한 대로 무한회귀공. 바로 이 비급을 찾으려고 지금 이 짓을 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극마서생 우청엽의 진신절기. 우청엽의 무공이 왜 이곳에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주석하의 관심사는 아니다.
쇠금고가 부서졌기에 주석하는 우청엽의 비급을 서재에 놓아두고 무한회귀공을 품에 집어넣었다.
“그건 뭡니까?”
묵천마령이 경계심을 높였다.
“별거 아닙니다.”
주석하는 적당히 둘러댔다.
묵천마령은 조금 이상한 느낌을 받긴 했지만, 그렇다고 주석하에게 따져 묻지는 않았다. 마교의 주요 무공은 모두 장서각에 있고 현재도 자신이 마교의 권력을 거머쥐기에 전혀 영향이 없기 때문이다.
주석하는 여의신단을 묵천마령에게 넘겼다. 그에게는 딱히 필요 없기에. 물론 이 행동이 묵천마령의 경계심을 누그러트릴 수 있으리란 기대를 하긴 했다.
“여의신단은 성질이 다른 무공을 익힐 수 있는 기반을 닦아줄 겁니다. 예를 들자면 금천마공을 익힌 상태에서 은천마공을 익힐 수 있도록 말입니다.”
“오오, 그래요?”
“필요하시면 가지시지요. 쓰기에 따라 도움이 될 겁니다.”
당장 쓸 데는 없더라도 공짜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묵천마령이 신이 나서 여의신단을 받았다.
“이만 가지요.”
“목적한 바를 이루셨습니까?”
“글쎄요, 다시 고민해봐야겠네요.”
주석하는 구체적인 대답을 회피했다.
무한회귀공을 넣었으니 일단 이 무공을 익히면서 고민할 일이다. 어쨌든 우설금을 살릴 수 있다면 짚을 지고 설사 불이라도 뛰어들 생각이다.
***
무한회귀공을 쭉 훑어본 주석하는 천마의 일기에 적힌 내용이 진실임을 확신했다.
무한회귀공의 대략적인 공능 또한 이해했다.
다만 이 무공의 원리는 이해하기를 포기했다.
시공간, 검은 구멍, 흰 구멍 어쩌고 하며 설명이 되어 있으나 뭔 소린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데다 당장 급한 내용이 아니어서 그냥 넘어갔다.
이 무공의 창시자는…… 아니시타인(阿尼時他人)이라는 배교인인데 비구니인지 아니면 타 종교인지 하여튼 이상한 이름이다. 하여튼 관심 없고…….
무한회귀공을 시전하면 시공간이 일그러지며 목표한 시간대로 회귀할 수 있다.
다만 그 시대는 시전자가 생존했던 때여야 한다. 존재하지 않았던 시간으로 회귀할 수는 없으니까.
회귀는 시전자가 직접 하거나 지정한 타인 한 사람을 대신 회귀시킬 수 있다.
회귀한 사람은 회귀 전 갖고 있던 모든 기억과 능력을 그대로 품고 회귀하게 된다.
또 무한회귀공을 익힌 자가 여러 사람이라면 한 사람이 이 신공을 펼쳐 회귀할 때 무한회귀공을 익힌 다른 사람도 시공간의 일그러짐을 알게 되고, 그 사람 또한 기억과 능력을 품고 옮겨가게 된다.
다만 본인이 아닌 타인을 회귀시키면 정작 본인은 회귀하지 않았기에 이전 시대에서는 기억과 능력이 소멸한다.
얼핏 복잡한 것 같지만…….
“뇌군이 왜 회귀 사실을 기억 못 하는지 알겠어.”
뇌군은 무한회귀공을 익혔지만 회귀자는 본인이 아닌 주석하였다.
그 덕분에 주석하의 회귀는 당사자인 주석하와 무한회귀공을 익힌 천마만 기억한다. 천마는 자신의 기억을 잃지 않기에 뇌군을 이용할 계획을 꾸몄을 것이다.
굳이 뇌군을 이용한 이유도 어렴풋하게 짐작했다.
무한회귀공을 시전하려면 이 신공을 십이성까지 통달해야 한다. 게다가 신공을 펼치려면 내공 일갑자가 소모된다.
단순히 필요한 내공이 아니라 말 그대로 소모되는 내공이다.
내공 일갑자인 사람이 무리해서 이 신공을 펼치면 회귀 후에는 내공이 없어진다. 그렇기에 함부로 이 신공을 사용할 수 없다.
“그렇다면 천마가 최후의 순간에 열매를 찾은 이유는…….”
의심할 여지없이 내공 때문이다. 무림인에게 일갑자의 내공이란 엄청나다.
비록 얼떨결에 십갑자를 넘는 내공을 소유하게 된 주석하에게는 일갑자가 아무것도 아닐 수 있지만 평범한 무림인에게는 일갑자 내공이란 평생 수련하여야만 얻을 수 있는 엄청난 양이다.
그 급한 순간에도 천마는 내공을 일갑자 손해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이 열매를 찾았으나 열매는 이미 악홍아가 가져간 후였다.
만일 악홍아가 아니었다면 천마는 주석하의 손에서 벗어나 멀리 도망친 후 무한회귀공을 사용해서 과거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렇다면 천마를 죽일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악홍아 때문이었다. 그녀가 의도치 않았더라도 악홍아야말로 그에게 최고의 도움을 준 사람이었다.
주석하는 곧바로 악홍아를 찾아갔다.
긴장이 풀어진 악홍아는 마교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녀는 주석하를 발견하자 바로 뛰어왔다.
“어쩐 일이에요?”
“악 소저, 일전에 나에게 줬던 그 검은색 열매 말입니다. 그거 나에게 파시죠.”
“이미 당신께 드렸잖아요.”
악홍아는 수줍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래도 그 열매가 무척 귀한 물건일 수도 있잖아요?”
“괜찮아요. 당신이 사용한다면 아깝지 않아요.”
악홍아는 나긋나긋한 태도로 부드럽게 속삭였다.
물론 주석하는 그녀의 이런 태도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원래 이런 쪽으로 무덤덤하기도 했고 지금은 오로지 무한회귀공에 모든 신경을 쏟고 있어서였다.
“그래도 그냥 얻기는 그렇고…… 필요한 것 있으면 말씀하세요. 웬만한 것은 전부 들어드릴게요.”
놀라운 제안에 악홍아는 주석하를 바라보며 눈을 깜박였다.
순간 그녀는 당황하고 있었다. 쓸데없어 버리려던 그 열매가 이런 행운을 가져다줄 줄은.
당연히 그녀가 생각하는 최고의 바람은……..
‘혼인해 달라고 하면 안 되겠지?’
사랑하는 연인을 잃은 지 이제 이틀 지난 남자다. 지금 요구하기에는 염치도 없고 괜히 잘 쌓아둔 호감을 완전히 망칠 것 같다.
한참 고민하던 악홍아는 좋은 방법을 생각해냈다.
“광천곡이 완전히 망했거든요……. 광천곡을 재건하고 싶어요.‘
주석하가 광천곡을 재건하려면 자주 그녀와 만나야 하니까 어떻게든 인연을 이어갈 수 있으리란 계산이 섰다.
주석하에게 악홍아는 무려 천마를 죽일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이다.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는 없다.
악홍아가 문파를 재건하도록 돕는 것은 그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마세가 때문에 망했다고 했으니 사마세가를 누를 정도로 문파를 성장시켜주면 간단하다.
“좋습니다. 제가 꼭 해드릴게요.”
“고맙습니다.”
악홍아는 뛸 듯한 기분을 억누르고 최대한 예의 바르게 감사를 표했다.
되돌아가는 주석하의 뒷모습을 보면서 악홍아는 혼자서 방방 뛰었다. 지금 그녀는 세상을 모두 가진 기분이었다.
***
처소로 돌아온 주석하는 십년유심홍 열매를 꺼냈다.
윤기 나던 열매의 검은빛이 그사이 확 죽어 있었다.
“어?”
처음 악홍아에게 넘겨받았을 때는 반들반들 생기가 감돌았는데 지금은 말라비틀어진 느낌이다. 아무래도 열매의 유효기간이 있어 보였다.
천마가 무한회귀공을 시전하기 전에 반드시 복용할 작정이었다면 적어도 일갑자의 내력을 증진해주는 효능이 있을 것이다.
아니어도 상관없고, 독약이어도 그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독군의 내력을 품은 그를 해칠 수 있는 독은 없으니까.
주석하는 십년유심홍 열매를 입안에 털어 넣고 운기에 들어갔다.
향기가 독특하다 했더니 맛도 특이했다. 딱히 맛있거나 쓴맛은 아닌데 대단히 자극적이었다. 혀를 톡톡 쏘는 맛이 다시 먹고 싶지 않다.
꿀꺽 삼키자마자 몸 내부에서 뜨거운 열기가 치솟았다. 역시 예상대로 내력을 증진하는 영약이었다.
주석하는 무려 한 시진 동안 운기한 후에야 일갑자의 내공을 완벽하게 얻을 수 있었다. 이 일갑자의 내공은 무한회귀공을 사용할 때 소모될 내공이었다.
결과적으로 주석하는 무한회귀공을 사용하더라도 본신의 내력을 전혀 소모하지 않아도 된다.
구구구-
눈을 떴을 때 창문을 쪼는 새 한 마리가 보였다.
창이 닫혀있어 들어오지는 못하고 창밖에서 열심히 창호지를 찢고 있었다.
“전서구?”
일전에 덕양에서 명아가 보낸 전서구를 우연히 만난 경험 때문에 주석하는 새를 쫓아버릴 수 없었다.
창문을 열어주자 비둘기가 날아 들어와 실내를 크게 선회하더니 그의 앞에 앉았다. 그를 쳐다보면서 탁자를 부리로 찧는 행동을 보니 먹이를 달라는 신호처럼 보였다.
“어?”
놀랍게도 비둘기 다리에는 작은 연통이 매여 있었다.
“천마에게 온 서신인가?”
주석하는 비둘기의 발에서 서신을 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