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검천하-241화 (241/273)

241화 되찾은 삶 (1)

- 오라버니, 언제 와요?

삐뚤삐뚤한 글씨체가 명아의 것이었다. 많이 나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글씨가 예뻐지려면 시간이 훨씬 더 필요할 듯하다.

전서구가 어떻게 여기까지 날아왔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지만 명아의 수완이 좋다고 인정했다. 간절한 마음에 하늘이 감동했으려나.

주석하는 절로 맴도는 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명아를 떠올리면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았다. 우설금의 죽음 때문에 침울해 있는 기분을 달래주는 느낌이다.

오늘 도착한 서신으로 추정해보면 덕양에서 그가 보낸 답장을 받아본 게 확실했다.

이곳에서 사천까지 얼마나 먼 길인가. 떨어져 있으면서도 이렇게 소식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생각난 김에 주석하는 만리안석을 꺼냈다.

만리안석이 하얗게 빛났고 그 중간에 주소은과 명아가 보였다. 두 사람은 앞뜰에 주저앉아 비둘기 모이를 주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평화로운 광경이다.

그들이 보고 싶었다. 당장 사천의 흑검문으로 뛰어가고 싶었다. 그만큼 그의 정신 상태가 피로했다.

“오빠는…… 너희들에게 돌아갈 거야. 물론 이 세상에서는 아니고…… 과거로 시공간을 옮겨서…….”

그들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돌아가는 것만은 분명하다.

주석하는 한참 동안 만리안석을 통해 그리움을 삼켰다.

가족은 따뜻한 곳이다. 그를 믿어주고 위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세상은 살만하다.

일찌감치 가족을 잃어버렸던 전생에 비하면 이번 생은 얼마나 행복한가.

그에 비하면 명아는…… 가족을 잃었다. 그녀에게는 이제 그밖에 없으니 그녀에게 잘해줘야겠다.

그리고 우설금은…… 그녀도 가족을 잃었으니 다시 회귀하면 그녀를 가족으로 품어 절대 잃지 않을 것이다.

하염없이 보고 있자니 만리안석의 기운이 다한 듯 장면이 서서히 사라졌다. 만리안석은 완전히 투명하게 변했다.

주석하는 즐거운 마음으로 답장을 썼다. 무엇을 써야 할까.

- 금방 갈게. 잘 지내고 있어.

어쩌면 이 답장은 쓸모없을지도 모른다. 이 답장이 도착하기 전에 그가 무한회귀공으로 시공간을 틀어버릴지도 모르니까.

그래도 보내야 한다. 지금 이 순간에 그와 가족을 묶어주는 유일한 통로가 바로 전서구니까.

답장을 쓴 양피지를 돌돌 말아 연통에 넣었다.

전서구가 창문을 통해 힘차게 날아올랐다. 하늘 저 멀리 사라지는 전서구를 보면서 주석하는 미소를 머금었다.

“소은아, 명아야, 기다려. 곧 갈게.”

주석하는 다시 무한회귀공 비급을 꺼냈다.

무한회귀공 자체는 익히기 그리 어렵지 않다. 그의 성취가 십이성에 이르면 바로 시공간을 뛰어넘을 것이다.

우설금, 그녀를 만나기 위해.

***

하늘이 뚫린 듯 벼락이 치고 폭우가 쏟아졌다.

고산지대의 천둥 번개와 폭우는 평지와 달리 대단히 거칠었다. 하지만 쉴 새 없이 내리치는 벼락마저도 주석하를 방해하지 못했다.

주석하는 우설금의 처소 툇마루에 앉아 무한회귀공 수련에 몰두하고 있었다. 처소에는 아직도 우설금의 시신이 편안하게 누워있었다.

그동안 그녀를 그리워하며 주석하는 자신을 채찍질하고 무한회귀공에 매진했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깨달음이 그의 마지막 성취를 방해하고 있었다. 일갑자의 내력을 이용해서 시공간을 왜곡하는 비법이 최후의 난관이다.

그는 무려 하루 내내 정좌를 한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가 수련에 매진하는 동안 묵천마령과 악홍아가 들렀다가 방해하지 않고 돌아갔다. 당연히 그 두 사람은 주석하가 무슨 무공을 익히는지 전혀 몰랐다.

마교를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는 묵천마령은 주석하에게 관심을 주기 어려웠고, 주석하를 굶기지 않으려고 먹을 것을 가져왔던 악홍아는 실망해서 되돌아갔다.

한동안 눈을 감고 운기하던 주석하가 마침내 눈을 번쩍 떴다. 그의 눈빛은 형형하게 빛났고 안색은 밝았다.

“드디어 성공했다!”

무한회귀공이 십이성에 도달했다.

이제는 그도 원하는 시대로 시공간을 옮겨갈 수 있게 됐다. 물론 그 대가로 일갑자의 내공을 내놓아야 한다.

무한회귀공을 완벽하게 성취한 지금은 천마의 지난 행적을, 뇌군과 자신에게 벌어졌던 인과 관계를 훨씬 자세하게 이해하게 됐다.

그리고 앞으로 그가 회귀했을 때 그와 천마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지게 되는지도.

천마가 무한회귀공을 익히지 않았다면, 이 세상에 무한회귀공을 익힌 사람이 오직 그뿐이라면 전혀 고민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그가 과거로 회귀했을 때 그 시대에는 천마가 살아있다. 그것도 무한회귀공을 익힌 천마가.

주석하가 가장 염려한 부분은 과거로 돌아간 직후 천마가 무한회귀공을 이용해서 더 과거로, 즉 십 년 전으로 돌아갈 때 발생할 현상이었다.

그는 정말 아무것도 없던, 열 살의 흑검문 소문주였고, 우설금 또한 아무것도 모른 채 천마에게 무공을 사사하던 그런 시절이 십 년 전이니까.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 십이성을 성취했을 때 주석하는 희미하게나마 그 해답을 찾았다.

한 사람이 무한회귀공을 사용하면 무한회귀공을 익힌 다른 사람도 시공간의 뒤틀림을 감지한다고 했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이 그 뒤틀림을 막는다면 회귀는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

뇌군이 무한회귀공을 사용하여 그를 오 년 전으로 보냈을 때 천마는 알면서도 내버려 두었기에 회귀가 성공했었다. 만일 그때 천마가 뇌군의 회귀를 방해했다면 회귀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무한회귀공을 일으킨 두 사람의 의지가 서로 상충하면 그때는 순수한 내공 싸움이 된다. 내공이 더 강한 자의 의지대로 회귀가 일어난다.

과연 그는 천마보다 내공이 더 강할까.

지금 무한회귀공을 사용하여 일갑자를 손해 보더라도 그 내공은 십년유심홍으로 얻은 것이기에 주석하의 내공 자체는 거의 변화가 없다.

천마는? 과거로 돌아간 천마 또한 이번에 그가 상대한 때와 큰 자이가 없을 것이다.

과연 그와 천마는 누가 더 내공이 심후할까.

주석하는 자신을 믿었다. 겉보기에는 천마와의 대결에서 그는 천마와 비등했고, 간신히 승리했다.

그때 그는 마교를 뚫고 들어오면서 많은 진기를 소모했다. 반면 천마는 우설금에게 일격을 맞아 정상이 아니었다.

“최소한 밀리지 않을 자신감은 있다.”

천마와 처음 만났었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측면이 있었다. 다시 만나면 그때보다 훨씬 쉽게 압도할 수 있다. 절대 근거 없는 자신감은 아니다.

비록 천마가 수번의 회귀를 반복하면서 막대한 내공을 쌓았겠지만 흑도팔군의 내공을 물려받은 그를 능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거기에다 마지막 남은 믿음이 하나 더 있다.

과연 천마는 이번 생에서 자신이 그에게 패해 죽었다는 사실을 기억할까?

무한회귀공을 익힌 사람은 전생을 기억한 채로 회귀한다. 하지만 전생에서 죽었더라면? 과연 그 죽음을 기억할까?

답은 모른다. 그런 일이 발생한 적이 없으니.

하지만 주석하는 어렴풋하게 감이 왔다. 천마는 그때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무한회귀공을 익힌 그가 내린 결론이었다.

미래의 정보를 완벽하게 아는 자신과 미래를 모르는 천마와의 싸움은 그가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그래서 주석하는 자신 있게 회귀를 결심했다. 물론 우설금을 살리기 위해서는 다른 선택이 없었겠지만.

좌선한 채 그는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았다.

뿌연 안개가 피어오르고 십만대산의 높은 봉우리가 빗줄기 속에 흐릿하게 다가왔다.

언제로 회귀할 것인가?

그에게는 다양한 선택이 가능하다.

그 최대치는 지금부터 이 년 반 전, 그가 뇌군에 의해 회귀했던 바로 그 시점이다. 그 이전으로 돌아가면 우설금을 만나기 전이 되니 그것은 안 될 일이다.

물론 십 년 전으로 돌아가더라도 무한회귀공을 익힌 지금은 본신의 무공을 지닌 채 어린 시절로 돌아가겠지만 그렇게 되면 변수가 너무 많아진다.

그렇다면 언제가 좋을까?

우설금을 구하려면 그가 십만대산으로 달려오던 그때가 제일 좋긴 하다.

그가 조금만 더 빨리 십만대산에 도착했다면 우설금을 살릴 수 있지 않을까. 그날 보름달이 떴던 날 밤, 우설금이 천마각에 들어가기 전에 만난다면.

그게 가능할까?

주석하는 고민을 거듭했다.

불확실하다. 다음 생에도 천마가 그날 우설금을 처리한다고 믿기에는 불확실성이 너무 크다.

하필 천마가 그때까지 기다렸던 이유를 두 가지로 추정했다.

하나는 그가 그날 그 시각에 천주문을 깨트리며 마교 총단 입성을 시도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십년유심홍의 열매가 그때 숙성됐기 때문일 것이다.

지나고 보면 일갑자의 내공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회귀부터 시도한 후 손해 본 일갑자를 다른 방식으로 채워도 상관없었다.

죽음에 비하면 일갑자 내공은 그야말로 부질없는 것 아닌가. 적어도 훨씬 많은 내공을 품은 그나 천마에게는.

그렇기에 그가 조금 더 빨리 마교에 입성했더라도 우설금을 살릴 수 있다는 보장이 전혀 없었다.

마땅한 시기가 떠오르지 않았다.

“후우.”

어떤 시기로 돌아가든 그에게는 우설금을 설득해야 하는 문제 또한 남아 있다.

그러려면 최소한 우설금과 좋은 감정이 오가던 시기여야 한다. 그녀와 그가 아무런 감정이 없던 때로 돌아가면 서로 피곤할 것 아닌가.

물론 그때로 회귀하더라도 그는 우설금과 다시 인연을 맺을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 모든 사정을 고려했을 때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시기는 한정되어 있었다. 최소한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그녀를 살리고 천마를 처리할 수 있을 시기.

무한회귀공을 익힌 천마이기에 위험한 선택이 될 수 있지만, 우설금을 살리려면 다른 방법은 없다.

주석하는 눈을 감았다.

쏟아지는 빗소리가 귀를 때렸다.

그는 내력을 끌어올려 무한회귀공을 일으켰다.

조짐은 나쁘지 않다. 처음 시도하는 회귀지만 어쩐지 익숙하다. 과거에 회귀를 경험해보아서일까.

고오오오-

그의 주위로 내력이 뿜어나왔다.

그를 중심으로 천하의 기운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절대 방해받지 말아야 할 순간이 시작됐다. 그가 뿜은 기운이 천지와 조화를 이루면서 요동쳤다.

주위로 공간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물론 눈을 감은 주석하는 전혀 볼 수 없었다. 다만 마음의 눈으로 그 현상을 들여다볼 뿐이다.

고오오오-

가장 가까운 곳부터 시공간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투명한 공간이 어긋나면서 틀어지는 장면은 대단히 이질적이고 신비로웠다.

주석하는 꼼짝하지 않고 무한회귀공에 몰두했다. 눈을 감은 그의 얼굴은 매우 평온했다. 마치 이 세상의 질서를 관장하는 신이 된 듯했다.

세상의 흐름을 바꾸는 역천의 무공, 무한회귀공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비틀린 시공간 영역이 점차 확장했다. 그 비틀림은 주석하 주변에서 시작해서 먼 곳으로 서서히 뻗어 나갔다.

오직 이 세상에서 주석하만이 그 비틀림을 인지하고 있었다. 지금 이 세상에는 그를 제외하고는 무한회귀공을 익힌 사람이 아무도 없다.

고오오오-

점차 주석하의 모습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현상은 그를 중심으로 먼 곳으로 퍼져나갔다. 드디어 주석하는 사라지고 그가 있던 공간마저도 사라졌다. 그 범위가 점점 넓어지면서 이 세상을 삼켰다.

이 세상의 존재가 사라지고 주석하는 목표했던 그 시간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주석하의 이번 생은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회귀한 후 그는 다음 생을 살게 될 것이다.

물론 세상 만물 또한 그와 함께 그 시간대로 옮겨갔다. 시공간이 뒤틀렸다가 다시 제 위치를 찾고 이 세상은 새로운 시간과 공간에서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무한회귀공의 공능이다.

역천. 그녀를 살리기 위해 주석하가 하늘이 되어 시간을 되돌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