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화 되찾은 삶 (2)
주석하는 눈을 떴다.
주위는 어두웠다. 그는 누운 채 몸 내부에서 몰아치는 흥분을 억눌렀다. 새근새근 잠자는 소리가 들려왔고 세상은 평화로웠다. 시공간이 틀어지고 새로운 생이 시작되었다는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돌아온 건가…….”
주석하는 몸 상태를 점검했다. 외상도 내상도 전혀 없었다. 그가 품고 있던 공전절후의 내공까지 그대로였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방 한쪽 구석에서 잠이 들었었다. 그리고 방의 다른 쪽 구석에는 고른 숨을 내쉬며 잠이 든 두 사부가 있었다.
악군과 화존이다.
이곳은 악군의 거처인 청산의 모옥이다.
이곳에서 그는 몇 시진 전에 마교칠왕인 초혼천왕과 천라요희를 제거했다. 그리고 악군과 화존의 절기를 더 배우려고 이 방에서 잠이 들었다.
“후우.”
꿈같은 시간이었다.
회귀 전에는 청산에서 사흘 머물다가 돌아갔던 그는 보은사에서 무극천존과 구파 장문인을 만났고, 덕양에서 마교칠왕 셋을 죽이고 마교의 주력부대를 격파했으며, 마교로 들어가 우설금의 죽음을 목격했다.
그리고 천마의 죽음까지…….
회귀 지점을 고민해보니 유일하게 그가 일정을 바꿀 시기가 존재했다.
바로 청산에서 악군과 화존의 절기를 배웠던 삼 일. 이미 전생에서 화존과 악군의 절기를 추가로 배웠던 그는 이번 생에서 또 배울 필요는 없다.
지금쯤 우설금은 이가장에 있을 것이다.
그때 그녀는 보은사로 돌아와 그에게 마지막 편지를 남기고 마교로 달려갔다. 그녀가 마교로 떠나기 전에 그가 보은사에 도착한다면 전생의 비극을 바꿀 수 있다.
그가 이 시점으로 회귀한 이유였다.
주석하는 앉은 채 방 안을 두리번거렸다.
나란히 누워 잠이 든 화존과 악군을 보고 있자니 절로 따뜻한 기분이 스며들었다. 오늘의 그를 만들어 준 두 사람에게 그는 조용히 머리를 숙였다.
“약속을 못 지키고 먼저 갑니다. 두 분의 절기는 전생에서 배웠습니다. 감사드립니다. 두 분의 은혜는 절대 잊지 못할 겁니다. 세상이 안정되면 다시 찾아오겠습니다.”비록 악군과 화존은 그의 다짐을 듣지 못하겠지만 주석하는 나지막이 대화하듯 작별을 고했다.
인사를 끝낸 그는 백화령을 찾았다.
“어?”
방 저쪽에 누워있어야 할 그녀의 이부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 자고 있을 줄 알았는데 어디로 간 걸까.
주석하는 조심스럽게 일어나서 짐을 챙기고 모옥 밖으로 나왔다.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이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는 봉담소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백화령을 발견했다.
자다가 나온 그녀는 가벼운 옷차림 위에 장옷으로 전신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녀는 봉담소 폭포를 바라보며 명상에 잠긴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야밤에 폭포를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이 어쩐지 처량해 보였다.
전생에서는 그는 계속 방에서 잠을 잤기에 백화령이 야밤에 이곳에 나와 있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가까이 접근해도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주석하는 그녀의 어깨를 툭 쳤다.
“뭐해요?”
“아!”
뒤를 돌아본 백화령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백화령은 그와 수 시진 만에 다시 만나지만 주석하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였다. 그래서 더욱 반가웠다. 그녀를 보니 다시 과거로 돌아왔다는 실감이 나기도 하고.
“안 자고 뭐 해요?”
“그러는 사제는…….”
“사형이라니까요.”
“사제라니까요.”
이렇게 쓸데없는 말다툼도 정겨웠다.
차가운 새벽 기운에 장옷을 여미면서 주석하의 차림새를 확인하던 백화령이 실망한 기색을 내비쳤다.
“가게요?”
“바쁜 일이 있어서…….”
낙담한 그녀를 보자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사부의 절기를 배운답시고 며칠 머문다고 했을 때 그녀가 무척 좋아했었는데.
한참 말을 아끼며 주석하를 바라보던 백화령이 가라앉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녀가 염려되나 보네요?”
백화령이 언급한 그녀는 우설금이다.
주석하는 대답 대신 미소로 긍정을 표했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백화령이 감정을 갈무리했다.
“잘 다녀오세요. 아, 오지 않으려나? 우리는 언제 다시 만나게 될까요?”
다소 활기가 죽은 음성이었으나 평소의 그녀처럼 밝은 미소를 지었다. 백화령은 우설금과는 여러모로 성격과 분위기가 대조되는 여인이다.
항상 밝은 분위기로 기운을 북돋아 주는 그녀에게 주석하는 마음속으로 감사를 표했다.
그래서 다소 길게 대답했다.
“지금 가면…… 조금 큰일을 치를 것 같아요. 어쩌면 목숨을 걸게 될지도 모르고요. 비록 그 끝은 모르지만 지금까지 해왔듯이 잘 헤쳐 나가려 합니다. 일이 끝나면…… 흑검문으로 돌아갈 거예요. 아마 반년이면 끝나겠죠?”
“뜻한 바 이루세요. 전 반년 동안 열심히 수련하고 있을게요. 당신과 같은 사문이라는 게 부끄럽지 않도록…….”
백화령은 무공이 미흡해서 아쉬운 모양이다.
주석하도 인사치레로 그녀를 응원했다.
“열심히 배워서 다음에 만나면 가르쳐 주세요. 오늘은 못 배우고 먼저 가니까요. 두 분 사부께도 잘 말씀드려주세요. 급한 일 때문에 먼저 간다고…….”
“거봐요, 당신이 사제라니까요.”
백화령이 까르르 소리 내어 웃었다.
인사를 마친 주석하는 그녀에게 포권을 취한 다음 몸을 돌렸다.
봉담소로 떨어지는 폭포 소리가 귀를 울렸다. 그가 봉담소를 떠날 때까지 기척이 감지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백화령은 봉담소를 떠나지 않은 듯했다.
주석하의 시선은 청산을 넘어 저 멀리 우설금이 있는 보은사로 향해 있었다.
과연 그녀는 살아있을까.
이제 새로운 생의 시작이다.
***
천마는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째 잠자리가 뒤숭숭했다. 기분이 묘했다.
그는 창문을 통해 밖을 쳐다봤다. 아직 해가 뜨기 전이고 세상은 잠에 빠져 고요했다.
“무슨 일이지…….”
이런 기분은 태어나서 처음이다.
아니, 몇 차례 있긴 했다. 지금 그가 존재하는 이 시간과 공간에서 자신만 유리된 기분……. 회귀하고 나면 순간적으로 느끼는 감정이다.
회귀가 일어났나? 그럴 리가 없지 않나? 지금 이 세상에서 무한회귀공을 익힌 자는 오직 그 혼자뿐이니까.
천마는 침실을 서성이며 이 이상한 기분을 세세히 살폈다. 그의 몸에서 마기가 용트림하고 전신 혈맥이 잠에서 깨어났다. 몸에는 전혀 이상이 없었다.
“그럴 리가 없지…….”
그런데 어딘지 모르게 찝찝하다.
머릿속에서 알 수 없는 흐릿한 장면들이 맴돈다. 경험한 듯 경험하지 않은 듯, 도무지 알 수 없는 기이한 잔상이다.
무한회귀공의 부작용일까? 이 세상에 완벽한 무공은 없으니 그가 알지 못하는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마치 꿈을 꾼 듯 흐릿하게 머릿속을 떠도는 이 잔상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머릿속의 장면들은 다소 특이했다. 단천마령이 그에게 반발해서 허공에 매달려 있고 그는 단천마령을 옥죄면서 단죄하고 있었다.
“단천마령이 나를 배반할 리가 없잖아?”
회귀를 거듭하면서 누구보다 심혈을 기울여 키워낸 역작이 단천마령이다.
그녀는 무공, 외모, 배경, 모두가 만족스러운 여인이다. 나이 차 때문에 아내로 맞이할 수는 없지만, 그가 만들어낸 가장 완벽한 여인이기도 하다.
그런 그녀가 배신할 리는 없다. 그런데 마치 꿈을 꾸는 듯 희미하게 느껴지는 이 장면은 대체 뭘까.
최근 들어 단천마령의 움직임이 이상하긴 했다. 그 때문일까.
물론 그녀의 행동을 꿰뚫고 있는 그는 그녀의 속마음을 눈치챘다.
그 나이 때의 여인이라면 사랑에 빠지기 나름이니 단천마령은 어느 순간부터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주석하와 사랑에 빠졌을 것이다.
두 사람 모두 그의 바둑돌에 불과하기에 신경 쓰지 않았다. 잘못 풀리면 회귀해서 바로잡으면 된다. 십년유심홍에 열매가 맺힐 때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다만 최근의 상황은 매우 우려스러웠다. 화산에서 있었던 두 마교칠왕의 죽음 뒤에 우설금과 주석하가 있었다면 이는 완전히 재앙이나 마찬가지였다.
거기에다 꿈처럼 흐릿하게 보이는 다른 장면!
천마인 그에게 누군가가 덤벼들고 있었다. 검은 퉁소를 휘두르는 놈은 주석하인 듯한데…….
한낱 바둑돌에 불과한 주석하가 그를? 가능한 상황일까? 천마는 비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장면에서 그는 주석하의 퉁소를 막아내지 못했다.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장면이 눈에 보였다.
단순한 심리적 불안으로 치부하기엔 너무 이상했다. 무한회귀공을 알고 있기에 의문은 더욱 심각했다.
“대체 무슨 일인가…….”
이해할 수 없는 장면에 천마는 창을 열었다.
시원한 새벽바람이 방으로 들어왔다. 깨질 듯 어지러웠던 머리가 맑아졌다. 하지만 여전히 방금 본 장면이 잔상처럼 강렬하게 남았다. 꿈인지 아니면 실제 경험한 사건인지 도무지 구분할 수 없었다.
천마는 예전의 회귀를 떠올렸다. 그때는 이렇지 않았다. 전생의 모든 경험이, 심지어 전생 이전의 전생까지도 분명하게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었다.
“후욱!”
깊은숨을 내뱉은 천마는 마음을 안정했다.
무시할 현상은 아니라는 경고가 머릿속에 들어왔다. 무한회귀공에 문제가 생긴 것이 분명했다. 다만 그 문제가 무엇인지 도무지 짐작되지 않지만.
지금 마교의 주력부대가 두 갈래로 나뉘어 중원으로 들어갔다.
한쪽은 섬서를 지나 하남으로 진격하고 있고 한쪽은 사천과 운남을 휩쓸고 호북을 향해 움직일 준비를 하고 있다.
오래지 않아 중원 무림은 그의 손에 떨어질 것이다.
대체 무엇이 걱정이란 말인가.
마교칠왕은 둘이 죽었으나 남은 둘은 청산으로 보냈고, 남은 셋은 지금 막 중원에 입성했다. 그들은 사천에서 주력부대와 합류할 것이다.
단천마령은…… 아마 명을 받고 이쪽으로 복귀 중이겠지.
어쨌든 예상대로 돌아가고 있다. 마교칠왕 둘의 희생만 제외한다면.
“일단 지켜보기로 하지.”
천마는 오늘 느낀 기이한 감정을 덮어두기로 했다. 만일 무한회귀공에 발생한 문제라면 오래지 않아 다시 조짐이 드러날 테니까.
***
보은사에서 동자승에게 서신을 전한 우설금은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이제 중원과 이별을 고할 시점이다.
그녀는 한쪽에 개어둔 옷을 꺼냈다. 적색궁장에 붉은 머리띠, 바로 단천마령의 상징이다.
단천마령으로 돌아가서 그녀는 천마를 죽이는 복수를 행할 것이다. 성공 여부는 오직 하늘에 달려있다.
번민을 털어버리고 우설금은 얼음장 같은 본래의 분위기를 회복했다. 마음의 결정을 내렸으니 최선을 다한다. 하늘이 그녀를 버리지 않는다면 성공하리라.
어차피 그녀의 목숨은 중요하지 않았다. 천마의 목숨을 빼앗는 것만이 중요했다.
우설금은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누군가가 그녀의 발길을 붙잡는 듯했다. 그 정체가 마음속의 미련임을 그녀도 안다.
“안녕…….”
우설금은 객방을 향해 조용히 인사하고는 몸을 돌렸다. 앞으로 다시 중원에 돌아올 일은 없다.
걸음을 옮기는 순간 그녀는 누군가와 부딪쳤다.
고수인 그녀가 주변에 누가 있는지 모르고 부딪힐 일은 없다.
놀란 그녀는 재빨리 물러서며 내력을 끌어올리려 했다.
그 순간 상대방이 그녀를 꽉 껴안았다. 그녀가 경악할 틈도 없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설금!”
지금까지 그녀를 설금이라 부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가장 가까웠던 주석하마저도 그녀를 우 소저라 불렀었는데…….
하지만 그 목소리의 주인을 인지한 그녀는 꼼짝할 수 없었다.
그였다. 주석하였다.
그를 포기한 순간 그가 돌아왔다.